헤겔 레스토랑 Less Than Nothing 시리즈 1
슬라보예 지젝 지음, 조형준 옮김 / 새물결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댓글을 주고받다 일 년 사이에 쓴 글 목록들을 훑어보았다. 머나먼 양자역학부터 푸코 말할 것도 없고 스탈린까지. 어, 내 독서 목록 왜 이래? 몰랐어? 내가 그랬네. 내가 이랬어. 어쩐지 친구들이 이제 그만 지상에 발 딛으라는 잔소리를… 대화할 때 나도 모르게 버벅대고 사과하고….  그러니까, 그러고 보니 계속 어려운 책만 읽었구나. 나. 왜 그랬지?

1. 앎의 쾌락 

2. 열등감 (조급증)

3. 허세

(4. 기타 : 딱히 밖에 나갈 일이 없었음)

셋 다 조금씩 있긴 한데…  근래엔 2번보다는 1번이 더 컸다. 3번 허세는… 독서에는 원래 허세가 필요하다 하하하하하핫! 난 명품으로 있어 보이고 싶지만… 돈이 없으니까!!! 책은 비싸봤자!!!가 아니라. 제 허세에 귀여움을 살짝 타서 흐린 눈을 하면 좀 호기 있어 보이지 않나요? 😜 (애써 귀여운 척) 허세호기호기허세호기. 


그 허기로. 가끔 읽다 보면 읽어지는 것 자체가 신기해서 스스로 놀랄 때가 있다. 맹탕 모를 때는 아예 허리가 휘었고. 알듯 말 듯 모를 때 알 것 같은데… 😖 아악, 여기서 더 가? 말아? 하는 생각과 *너 내가 읽어 버린다* 약간의 호승심과 *이 부분은 그래도 좀 이해가 가는 구나* 하는 나 스스로가 느끼는 성장, 그런 걸 느끼는 그 재미를 알아버렸달까. 2024년 봄, 보름 정도 그 재미를 준 사람은 (돼지감자) 지젝이었다. 땡큐!   


지젝이라고 방심했다가 한방 맞았다. 철학의 경우 입문서와 원전의 갭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아는데… <how to read 라캉>이 넘 재미났기 때문에. 지젝과 함께라면 즐겁지 않을까? 🙅🏻‍♀️아니오. <헤겔 레스토랑>과 <라캉 카페>는 영화나 시사로 지적인 수다를 떠는 책이 아니라. 본격. 철학 책었지 말임돠. 어쩌면 지젝 특유의 그 잡스러움이 내 이해를 더 힘들게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다 읽고 나니 그런 생각이. 

도합 세 번의 고비가 오는데… den, 피히테, 칸트 공격… “야. 그만해. 알았어. 그만 하라고 이 돼지감자야!!😱” 라고 외치면서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라는 걸 알 것 같긴 했는데, 사실은 몇 줄로 간단히 쉽게 정리된 것을 보고 그걸로 덮어버리고 싶은 욕망은 아직도 내게 있다. 

페미니즘 책은 터져 오르는 폭풍 눈물 땜에 고생하게 된다면(정말로 몸으로 읽는 다구욧!!) 철학 책 읽는 일은 정신적으로 매우 지치는 일인 것 같다. 이걸 왜 읽지라는 충동적 질문을 꾸욱 눌러 참으며 (인내) 국경까지 초월해서 모르는 개념들을 거칠게라도 이해해야 하며(횡단). 이게 중요한데 (얼마없는) ‘알던 것들’도 다시 다 분해해서 복잡한 현실에 맞게 재조립하는 게. 그렇게 해보자고 하는 게. 21세기 이후의 철학(혹은 정치철학)인 듯. 그래서 그런 이런 책들을 읽을 때 나의 팁은. 


잔다. 많이.

 

졸리면 바로 자고 눈 뜨면 깨자마자 바로 읽음. 이번에 <헤겔 레스토랑>의 경우 특별히  100번 정도 잠들었고… 영원히 잠들지 않고 100번을 다시 깨어난 것을 보면 나에게 쳐주자. 박수 짝짝. 짹짹. 지젝. 지젝. 자, 이런 나의 독서가 얼마나 헤겔적 이었던지에 대한 엿보기 만 해도 지치는 문장을 가져오도록 하겠다.  

“(368) 철학적 용어로 바꾸자면, 여기서 헤겔의 요지는 외적 장애물(또는 적)에 대한 ‘자기모순’의 우위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유한하거나 자기 정합적이지 않은 것은 우리의 행동이 항상 외적 장애물에 의해 좌절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외적 장애물에 의해 좌절되는 것은 우리가 유한하고 비정합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투쟁에 몰두하고 있는 주체가 적으로, 극복해야 할 외적 장애물로 지각하는 것은 주체의 내재적 비정합성이 물질화된 것이다. *투쟁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은 정합적이라는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적의 형상을 필요로 하며, 그의 정체성 자체가 적에 맞서 있는 것에 달려 있다.* 그의 (궁극적) 승리가 결국 자신의 패배나 해체에 이를 정도로 말이다. 헤겔이 좋아하는 대로 표현하자면, *외부의 적과 싸우면서 (부지불식중에) 우리는 자신의 본질과 싸우게 된다.* 따라서 격렬한 투쟁을 찬양하기는커녕 헤겔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오히려 교전 중인 모든 입장, 모든 편들기는 필연적 환상(일단 적이 제거되면 나의 존재의 완전한 실현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헤겔의 고유한 이데올로기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네 입장의 내속적인 구성요소인 것의) 가능성의 조건을 불가능성(너의 완전한 실현을 막는 장애물)의 조건으로 오인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자신의 정체성 전체가 본인이 자신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지각하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중략) 유대인에 대한 반유대주의적 형상, 즉 사회질서의 조화를 교란하고 타락시키는 낯선 침입자라는 형상은 궁극적으로 사회 질서 자체의 ‘비정합성’을 가리기 위한, 사회의 불안정성의 동역학을 낳는 내재적 적대성(‘계급투쟁’)을 가리기 위한 물신적 대상화, 대리물이다. (중략) 주체는 투쟁에 뛰어들며, (일반적으로 승리 자체 속에서) 패배하며, 그리고 이 패배가 그에게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나: 아. 데모크리토스 den 이걸 왜 알아야 하나. 이해가 전혀 안된다. 정말 화 난다. 서양철학 그것은 태생 자체가 유산계급의 것. 야, 이놈들아 그딴 걸로 고민하지 마. 기운이 남으면 냇가에 가서 빨래를 해! 다 찢어, 불태워!! 저것들 배불러서 정신을 못 차린 것 같으니 좀 굶겨랏!! 굶겨서 노동교화형에 처해야 이딴 책을 안 쓰지!! 스탈린에 빙의했다가ㅋㅋㅋ 지젝의 혹독한 스탈린 비판에 한번 혼꾸녕 나고 (참고 링크) 그 다음… 독일관념론 공격에서ㅋㅋㅋ 지젝 님하… 이 레스토랑 그만 먹을래요 흑흑 ㅠㅠㅠ 이토록 맛 더럽게 없는 인생에서 불필요한 지식을 내가 왜 돈 내고 시간 내고 알아야 하는가(😡) 다 현대에서는 써먹지도 못할 쓸... 모.. 없는 관..념들 일 뿐…응? 하다가 여기서 설득됐다. 


“(457) 따라서 (자본은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수단이라는) 주관적 경험과 (착취라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 사이의 단순한 대립에 필연적인 세 번째 수준이 추가되어야 한다. 즉 ‘객관적 기만’, (자본의 신비로운 자기 생성적 순환운동을) 부인하는 ‘무의식적’ 판타지가 그것으로, 그것이 자본주의적 과정의 (현실은 아니지만) 진실[진리]이다
(458) 빌 게이츠와 함께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라는 개념은 무의미해졌는데, 적어도 표준적인 의미에서는 그렇다. 여기서는 아이러니를 놓치기가 쉽다. 즉 자본의 논리를 정식화하기 위해 마르크스에게 헤겔이 필요했던 사실(마르크스의 작업에서 핵심적인 돌파는 1848년 혁명의 실패 후 다시 헤겔의 <논리 과학>을 읽기 시작한 1850년대 중반에 일어났다)은 헤겔이 볼 수 없었던 것은 어떤 헤겔 이후의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헤겔적 측면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역설적으로 헤겔은 충분히 관념론적이지 않았는데,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본래 투기적인 내용, 금융 자본이 ‘현실의 사람들’을 가공하는 순전히 가상적인 개념으로 기능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왜 설득됐냐면…에… 아무도 안 궁금해할 테니까. 암튼 나는 설득됐다. 위에 저 문장이 라캉 처돌이 지젝이 굳이 멀리 헤겔씨의 궁극의 관념론 다시 데려와서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걸 내가 눈치채 버림. 아님말고. 여하튼 900페이지 다 읽고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건 저깁니다. 이거 읽는 여러분(있을까?) 믿어주십셔… 이렇게 구구절절 썼지만 이번 독서의 헤겔적 (패배의 진리) 교훈은 ‘이해 못 해도 읽어두길 나쁠 건 없다’이다. 

그리고. 읽어두고 사유해온 고로. 나는 이제 ‘이데올로기적 주체’가 뭔지 안다. 개념과 직관이 아니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규범. 규범을 보는 눈. 이데올로기. 이데올로기를 감각하는 몸. 너무 당연해서 공기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보이는 것. 그걸 보려고 한 독서. 그래서 내가.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게 되는 부분. 나의 환상은 찢어지고 나는 패배했지만. 또 다시 패배하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모두가 믿고 있다. 언어 속에 사는 모두는. 믿지 않을 수 없으니까.    


"(228) 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의 원인으로 나타나는 것 말이지요. *이데올로기적 주체*는 장치의 작동의 흔적을 지우고, 이타성의 흔적을 지우고, 자기에게 강제된 동일성을 기원으로 투사함으로써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야기한 자유로운 원인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처음 읽는 프랑스 현대철학>

비슷한 맥락일지는 모르겠지만, 지젝이 읽어내는 헤겔 중에 내게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요 부분. 


(373) 이처럼 아직 아닌 것으로부터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의 갑작스러운 소급적 전도(우리는 결코 직접적으로 목표를 실현할 수 없다. —우리는 목표를 실현하려고 애쓰는 것에서 갑자기 그것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 것으로 나아간다.)가 바로 헤겔의 관념적 화해는 현실(실제의 아픔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남겨두기 때문에 충분치 않으며, 철저한 사회 변혁을 통한 현실적 화해가 필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통상적인 비판적 힐난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역사주의적 수사 어구들로부터 헤겔을 구분시켜주고 있다. 헤겔에게서 기만적인 것은 끈질기게 지속되는 분열들을 무시하는 강요된 ‘거짓 화해’의 기만이 아니다. 진짜 기만은 우리에게는 생성의 카오스처럼 보이는 것 속에서 무한한 목표가 이미 실현되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유한한 질서 내에서 우리는 목표가 진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보지 못한다. 무한한 목표의 달성은 오직 이 목표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는 기만을 극복하는 데 있다.’ 간단히 말해, 궁극적 기만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을 이미 갖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중략) 최종적 화해에서 변하는 것이라고는 주체의 관점뿐이다. —주체는 패배를 인정하며, 그것을 승리로 재기입한다. 따라서 화해는 적대성의 극복이라는 통상적인 이념 이상인 동시에 이하이다. 이하인 것은 아무것도 ‘실제로는 변하지 않기’ 때문이며, 이상인 것은 이 과정의 주체가 (특수한) 실체 자체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니까. 이런 책을 읽는 사람이. 나도 모르게 되어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원래는 힘들어서 어떤 답을 알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답은 점점 더 모르겠고. 계속해서 모르겠는 책들을 읽는 사람으로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애초에 나를 괴롭힌 어디를 가라고 뭐가 되라고 무엇을 하라고. 많은 말들. 그걸 사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고 하는 많은 말들. 이 나를 괴롭히지 않는 것은 덤. 어디로 갈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다만 자주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며 오늘 가야 할 곳은 안다.

책에 붙은 말미잘 플래그 다 뜯어내고 책 반납하러 가야겠다. ㅋㅋㅋㅋ

으쌰. 

먹을 수 있는 재료를 깔짝 대다 안 먹어본 것까지 먹느라 배 너무 불렀던 레스토랑. 

좀 지쳤으니까. (라캉) 카페는. 다음에. 


bgm은 god의 길로 해 보자.


덧, 덧붙이는 아래의 문장들은 주로 지젝의 성격을 추측해 보게 되는 문장들. 이 사람 사람 참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글을 좋아하는구나. 하게 되는 지점 + 현시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질문들.


나를 슬프게 한 것은 심지어 나의 일부 친구와 동료들조차 요점을 놓치고 만 것이었다. (중략) 심지어는 어떤 주체가 특정한 믿음(신앙)을 조롱할 때조차도 그것은 결코 그러한 믿음의 상징적 효력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믿음은 종종 계속해서 주체의 행동을 규정한다. 우리가 어떤 태도를 비웃을 때 진리는 종종 그러한 태도에 있지 그것에 대해 취하는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그것이 나의 행동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그것을 비웃는 것이다*. 어떤 여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조롱하는 사람은 말하자면 종종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그토록 심하게 매달리는 자신에 대해 불편한 심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P173

본래적인 믿음은 믿는다고 가정된 또 다른 주체에의 의존(또는 참조)과는 정반대된다. 본래적인 믿음의 행위에서는 나 자신이 나의 신앙을 온전히 떠맡으며, 따라서 그러한 믿음을 보장해 줄 어떤 타자의 형상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캉의 말을 빌리자면, 본래적인 신앙은 오직 자기 자신에 의해서 밖에는 권한을 부여받지 않는다. 바로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본래적인 믿음은 어떠한 큰 타자도 전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큰 타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큰 타자의 결여, 큰 타자의 비존재의 완전한 수용을 전제한다. 참된 무신론자가 종교의 정신적 진리를 ‘외적인’ 교리적·제도적 맥락에서 구하려는 사람들과 정반대 쪽 끝에 있는 것 또한 이 때문이다. 신앙심이 돈독한 한 친구가 언젠가 ‘기독교의 도착적 핵심’이라는 내 책의 부제에 대해 한마디 한 적이 있다. - P228

"나도 완전동의! 나도 신을 믿지만 희생과 굴욕을 주는 것, 고통을 통한 구원, 인간들이 자기 아들을 죽이도록 일을 꾸미는 신을 찬양하는 등 온갖 곡해된 행위들은 얼마나 역겹고 충격적인가 말일세. 이러한 도착적 핵심 없는 기독교는 어디 없을까?" *하지만 차마 친구에게 이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바로 내 책의 요지일세. 즉 고통을 통한 구원, 신의 죽음 등 저 모든 도착적인 곡해들이 바로 내가 원하는 거지. 단, 신 없이 말이지."
따라서 앞서 말한 대로 신은 두 번, 즉 한번은 실재적인 것으로 그리고 두 번째는 상징적인 것으로, 두 번 죽어야 한다. - P228

당연히 모든 욕망의 대상은 환상적 미끼이다. 물론 근친상간의 완전한 주이상스는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는 여전히 옹호되어야 한다. 비록 욕망의 대상은 환상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이 환상 속에는 실재적인 것이 있다. 욕망의 대상은 긍정적 내용에서는 헛되지만 그것이 차지하는 자리, 실재의 자리는 그렇지 않다. 이것저것 애써보았자 모두 헛되다는 체념적 통찰보다는 욕망에 무조건 충실한 것 속에 더 많은 진리가 들어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254

변증법적 접근법은 통상 분석되어야 할 현상—이것은 풍부한 역사적 맥락 속에 끼워 넣어져 있다—을 그것이 속한 총체성 속에 위치시키려는 것으로, 그리하여 물신화시키는 추상화의 주문을 깨뜨리려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가장 위험한 덫이다.
헤겔에게서 진짜 문제는 그와 정반대 것이다. 즉 어떤 사물을 관찰할 때우리가 거기서 너무나 많은 것을 보며, 사물의 핵심을 형성하는 개념적 규정을 명확하게 지각하지 못하게 하는 풍부한 경험적 세부사항의 주문에 걸리는 것이 그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풍부한 규정들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가 아니라 정확히 그것을 어떻게 추상할 것인가,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제한할 것인가, 그리고 오직 개념적 규정만 파악하는 것을 배울까 하는 것이다. - P712

하지만 20세기의 역사적 경험 또한 마르크스의 혁명관을 문제적인 것으로 드러내지 않았는가? 후쿠야마 이후의 세계에 사는 오늘날 우리는 정확히 후기 헤겔의 상황 속에 있지 않은가? 우리는 1990년대의 후쿠아먀식의 유토피아적 순간에는 ‘역사의 종언’으로, 마침내 발견된 가능한 최고의 정치 경제 형태로 보일 수도 있었을 자유민주주의적 복지국가의 ‘미완의 어떤 것, 건축물 내부에서 이미 부서지고 있는 어떤 것’을 보고 있다. 따라서 아마 우리는 여기서 비동시대성의 또 다른 경우를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어떤 의미에서 헤겔이 마르크스보다 표적에 더 가까웠으며, 공민권을 박탈당한 대중의 분노를 사회적 적대성을 해결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의 의지로 지양하는 것을 실천하기 위한 20세기의 시도들은 궁극적으로 실패했으며, *‘시대가 완전히 다른’ 헤겔이 마르크스보다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 P782

라캉적 용어로 이를 표현해 보자면 결혼은 대상(배우자)으로부터 "그/그녀 안에 있는 그/그녀 이상의 것"을 소문자 대상 a, 욕망의 대상을 공제한다. 대상을 일상적 대상으로 축소시킨다. 낭만적 결혼을 따르는 결혼의 교훈은 이렇다. 즉 그 사람과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그렇다면 결혼하라. 그러면 천박한 경련, 옹졸한 쩨쩨한 짓, 더러운 속옷, 코 고는 소리 등 일상생활 속에서의 그/그녀의 본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아래와 같은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즉 결혼은 성을 통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성으로부터 모든 진정한 열정을 제거하고, 그것을 지루한 의무로 바꾸는 것을 기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는 이 점에 관해 헤겔을 정정해야 한다 - P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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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4-12 2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건 모르겠고, 여기 인용된 문장, 내가 다 읽었음이요.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나는 읽었습니다.
번역의 문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챕터 읽은 사람) 이 책의 번역이 어떠하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구요. 설마요, 저는 그걸 알아챌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언어의 한계요. 철학은 언어로 하는 거니깐요. 잘 아는 사람의 번역이라도, 언어가 가진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걸, 쟝님은 알고 있겠죠. 그래서, 나는 많이 실망하지 않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어차피 모르겠는걸 ㅋㅋㅋㅋㅋㅋㅋㅋ

저도 이 노래 좋아합니다. 비긴 어게인에서 가수들이 같이 이 노래 부르는 동영상을 좋아하죠.
나는 무엇을 꿈꾸는가. 그건 누굴 위한 꿈인가....

공쟝쟝 2024-04-12 20:19   좋아요 1 | URL
그치만… 저는 느낀다고 생각해요. 번역을 포함한 개념의 도저함을 넘어서는 언어의 한계를 가로지르는 부르는 사람의 간절함(?)을요. 그게 많은 사람의 몸과 머리를 잡아채는 까닭은. 간절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종교적 경전은 사람들을 죽이고 살렸고. 무산 계급은 공산당 선언에 몸을 떨고 확신을 갖고 삶을 바치기도 했고… 성의 변증법이 지금도 우리 여성들을 덜컥 잡아채는 것 처럼. 어쩌면 나는 들은 것 같거든요. 이건 나한테 하는 말이다. 어떤 문장들은 나를 분명 불렀고…. 거기에 감히 답할 의무를 느낍니다! 그래서… 으음….(긁적)
그런데 또 착각… 같고 ㅋㅋㅋㅋㅋ 착각은 자유니깐요 ㅋㅋㅋ 나를 불렀다 ㅋㅋ 생각하고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