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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 - 큰딸로 태어난 여자들의 성장과 치유의 심리학
리세터 스하위테마커르.비스 엔트호번 지음, 이상원 옮김 / 갈매나무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쟝님 지금 아프잖아. 쟝님, 쟝님 먼저 챙겨요.”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안다(아주 조금) 나는 조력자 증후군을 앓고 있고, 내 인생의 7할은 그놈의 동정심(연민) 때문에 개고생을 한 삶이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보다 악독한 평강공주 증후군이라고 세상에는 그런 걸 겪는 여자들이 있다. 부족한 자기애의 충족을 타인을 도우려는 성향으로 방어하다가, 결국에는 자기를 해치는 선택을 반복하는 사람.
나는 내가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걸 안다. 그래서 나를 돌보는 일, 내 욕구와 감정을 먼저 살피는 일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래도 뭐든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돌보는 것은 나의 기본 값이라… 어쩔 수 없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꾸 다 맞춰주고 싶어했다. 그러니 내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나의 연민/미안함을 자극하는 상황인데, 최근 내 신변에 어떤 이슈가 있어서 나의 첫째 딸이지만 줏대있는 ENFP와 ESFP 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둘 다 “아니야, 너 아직 아파!”라고 했고, 비행기 위급 상황에서 산소 호흡기는 무조건 보호자가 먼저 써야 하는 거야! 애한테 먼저 씌우면 둘다 죽어. 절대, 아픈 사람이 더 아픈 사람에게 오지랖 부리는 것 안돼!라고 예시까지 들어가며 내 그릇된 연민에 대못을 딱딱 박아주었다. 난 내가 좀 괜찮아진 상태라고 생각 했는데, 그 생각이 안 괜찮다는 거라고. 하아. 나는 수긍했고, 어떤 인연은 아주 없던 일처럼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기로 했다.
그것과는 또 다른 측면이긴 하지만 괜히 나를 잡아 채는 것 같은 상황에서 느끼는 짜증스러움과 불편함들… 그것이 내가 나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것도 알았다. 드디어 나는 불편해진 것이다!!! 넌 또 ‘괜히 그래야 할 것 같은 상황’의 덫에 빠진 거야! 그러니까 자꾸 찜찜해지는 거라고. 그렇다면 드디어 나에게도 나를 보호하는 촉이 생긴건가? 안도의 내적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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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 줏대 곧은 나의 EXFP 여자 친구들은 이걸 어떻게 아는 걸까. 나는 꼬치꼬치 캐물었는 데, mbti 말고도 여러가지 공통점이 발견되어 너무 신기했다. 이들은 사람과 여행, 소설 읽기를 좋아하고, 세상은 너무 재밌고 흥분되는 일들로 가득한 것 같기 때문에 영원히 살고 싶고, 그래서 인류가 멸망하면 안된다고 말한다. 그래도 함께 살아가야 하잖아요!라고 진짜로(!) 눈 반짝이면서 말하는 이들은 지구는 좀 걱정하는 데 남 걱정은 안 한다. 그리고 살다 보니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고 했다. 아, 난 진짜 그거 없는데.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언니, 그걸 왜 몰라? 보면 알아. 아, 처음엔 모르지. 그런데 지내다 보면 쎄-해! 쎄! 촉이야, 촉. 촉은 과학이라니까.
사람에만 촉이 있는 게 아니다. 상황도 잘 알아 맞춘다. 대충 딱 듣더니 각을 재고 그거 아니야? 한다. 맞아요, 맞아! 그건 뭐죠? 나도 모르겠는 데, 이런 걸 신기가 있다고 하는 거야. 훗!
아. 나는 앞으로의 생에서 발달 시켜야 하는 식스센스가 있나보다. 아직…. 덜 된 인간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나는 nt라서 그른가… 식스센스가 아니라 그 식스센스의 형성 조건이 넘나뤼 궁금해져 벌인 것이다. 이. 끝을 모르는 지독한 호기심… 또 물음표 살인마가 되어 그걸 어떻게 알아? 넌 언제부터 그랬어? 어떻게 그런게 된 거야? 바로 아픈 사람이 보여? 안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치고. 사람이 아프다고 하는 데, 어떻게 지나가? 그래도 좀 도와주고 싶은 마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해주고 싶다는 마음은 안생겨?라고 10초에 한 번씩 캐물었더니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여…😌”라고 깨달은 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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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 빠진 놈을 구해 놨더니 보따리를 내 놓으래 (겪어 보셨나요?)
호의가 계속 되면 권리 인줄 알아 (알고 계신가요?)
라는 말의 이면.
그러니까. 나의 호의와 도움 주려는 마음 이면에는 부족한 자기애를 보충하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그걸 꿰뚫는 경고의 말로 스스로에게 돌려줘야 하는 속담은 아닌지. 난, 좀 그런 생각을 했다. 도움을 주고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싶었던 맘이 없다고는 말을 못하겠는 것도, 그건 일종의 습관처럼 굳어있는 삶의 방식이라는 것도 보였다. 좀 소름 끼쳤고, 이건 계속 경계해야 하는 거구나, 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상황을 일반화 할 필요는 없다. 이건 내 특수한 심리 구조다. *나의 경우로만 한정*해서 말하자면, 누군가를 돕거나 돌보고 싶어하는 이면 뒤에는 일종의 구원자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타인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를 치유하는 일, 그들이 성장하는 일을 막는 나쁜 행위라는 것도 이번에 좀 깨지면서 알았다. 겪었다. 물론, 책을 읽으면서 영화를 보면서 계속 그런 것들을 예의주시 했었다. (자신의 취약점을 글로 배워 아는 사람은 바로 나) 그래서 그런 작품들을 에이 별로다 별로~ 라고 해놓고… 현실에서는 또 그러려고 했…지만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마음을 잘 돌보고 추스릴 수 있었던 것 같다. 아, 하나 더 써 놔야지. 그리고 내가 이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라고 해서 타인의 호의에 비뚤어진 나를 투사해서 오지랖으로 받아들여서도 안된다. 이것도 까먹지 말아야겠다.(처절하다 처절해 촉 없는 자의 사회화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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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그러니까 어느 순간에 정말로 나를 회복 시키는 것은 나 자신이 될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랬다. 가장 아팠을 때의 나는 가깝고 쉬운 주위의 도움이 아니라 전문가를 찾아갔다. 어쩌면 스스로를 돕기 위해, 자기애적 도움들을 거부하기 위해, 이토록 나를 고립시켜야 했던 건 아닐까. 과정이야 지난 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를 회복 시킨 것은 나다, 나를 치유한 것도 나고, 나를 돌본 것도 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 난 오늘 아침 이런 것들에 대해 생각했고, 아직은 내가 아픈 상태란 것도 직시했다.
사실 이 모든 것은 책에 나와 있었다. 난 그걸 다 읽었고.
이제는 겪어야 한다. 안해 본 것들을 하고, 안 살아본 삶도 살아봐야 한다. 그것은 모험이고, 아마 혼자하는 모험은 아닐 것이다. 나에겐 좋은 친구들과 가족들이 있으니까.
로맨스를 싫어하는 나는 성장 서사를 좋아하고, 내가 성장하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내가 좋아하는 성장 서사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데, 다시 생각해보니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건강함이 건강함을 알아본 것 같다. 살려고. 잘 살고 싶어서. 살기 위해서 스스로를 도운 것이다. 내 직관에 의하면 이것은 어떤 원칙이다.
여전히 관계에 서툴다. (먹고 살기 위한 사회생활을 예외로 하자. 그건 잘함. 살려고ㅋㅋㅋㅋ) 그런 나에게 내가 묻지 않으면 절대 조언을 하지 않는 나의 친구들(ㅋㅋㅋ 이것이 어른인 것 같다. 내 주변엔 나보다 나이 어린 어른들이 참 많다…ㅋ),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단아한 반짝임을 나는 사랑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돕고 싶어서 다가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고 내가 좋아해서 곁에 남겨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움은 오래 전의 과거에 내가 맺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그걸 느낄 수 있어서 조금 행복해졌다. 나는 내가 읽었던 책들이 시키는 대로 내 고통을 먼저 바라본다. 나의 이 훌륭한 공감 능력을 내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쓰기로 한다. 천천히 세상과 만날 것이다. 인류애를 회복하고 (과연…) 나도 영원히 살고 싶어지고 싶다. 요즘 <아티스트 웨이>를 읽다가 꽂혀서 모닝 페이지(아침에 쓰는 일기)를 쓰고 있는데, 기분이 참 좋다. 문제는 쓰다 보면 오전을 다 쓰고 ㅋㅋㅋㅋ 오후와 저녁 늦게 까지 일을 하게 된다는 건데. 그냥 제일 좋아하는 것을 하루의 시작에 제일 먼저 하니까 이것도 좋다. 아침에 운동가기 싫어하면서 겨우 일어 났는데, 모닝 페이지 쓰고 싶어서 일찍 일어나게 된다. 아침에 글을 쓰면 조금 더 긍정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이제 아침에 쓰는 인간이 되어볼까?
맏딸들은 이끄는 사람 혹은 돌보는 사람으로 종종 분류된다. 이끄는 사람은 책임을 즐긴다. 돌보는 사람은 늘 남들을 행복하게 하려고 애쓴다. 실제 사례들을 보면 맏딸들이 동시에 두 가지 역할을 맡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상의 고통에 책임감을 느끼는 리더가 되어 돌보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것이다. 🥲 동시에 두 가지 역할 하다가 번 아웃 올때 까지 무리 햇던 삶… 나다. - P64
돌봐주는 사람으로서 당신은 분위기는 깨는 사람이 되기 싫은 마음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떠맡고 만다. 당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좋은 먹이가 되는 셈이다. 이 유형의 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돌봐야할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깨달음이다. 🥲글로는 깨달았는 데 살면서 좀 더 다져야 할 것 같습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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