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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매일 실패해도 함께 갈게 - 우울증을 이해하고 견디기 위한 엄마와 딸의 혈투
최지숙.김서현 지음 / 끌레마 / 2020년 10월
평점 :
너무 먼 것은 너무 멀어서, 너무 가까운 것은 너무 가까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면 때로는 멀리 그리고 때로는 가까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상 어떤 엄마를 데려다줘도 내 엄마와는 바꿀 수 없을 만큼 (대다수의 딸이 그러겠지만) 엄마를 사랑한다. 엄마가 되어봐야 엄마의 마음을 안다지만 당분간은 엄마가 될 리 없을 것 같으니, 엄마의 마음이 아닌 딸의 마음이 가질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내가 가진 마음의 용량이 가능한 만큼 사랑한다. 때로는 멀리, 때로는 가까이를 넘나들며 엄마를 잘 보려고 노력한다.
법이 정하는 성인이 되고도 10년이 지나서야, 엄마를 개성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공평하고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냥 얻어진 것은 아니었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엄마는 모르겠지만(아마 알겠지만), 나는 그랬다. 내 마음속에서 엄마와 정말 많이 싸우기를 거진 5년, 지난한 악전고투 끝에 (역시 내 마음속에서) 화해했다. 그리고 엄마를 다시 사귀기 시작했다. 엄마로부터 독립해서 / 엄마와 대등한 존재로서 / 엄마와 다시 사귀는 것 / 은 곧 내 삶을 사는 것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엄마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비겁한 욕망과 이별하는 것이었다. 더 거칠게 말하면 엄마한테 사과받기를 포기하는 것이었고,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을 중단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귀듯이 엄마를 사귀는 중이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궁금히 여긴다. 가깝게 보고 멀리 본다. 장점을 보고 단점을 본다. 공정하게 생각하고 배려한다. 내가 어떻게 보일까? 내 행동을 점검해본다. 안 해본 대화들을 나눠본다. 궁금한 것들을 물어본다. 엄마에게 주목한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알아가고 있는 엄마는 참 좋은 사람이다. 엄마가 내 엄마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딱 보편적인 엄마들 만큼의 잔소리(시집가 공격)와 걱정을 놓아서는 안 되는 엄마의 건강 상태까지 포함하더라도 지금의 엄마에 매우 만족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고 점점 더 그래 진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조금 부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이 있긴 있다. 그건 책 읽는 엄마다. 조금 더 욕심내면 글 쓰는 엄마. 어릴 때 잠들기 전까지 동화책을 읽어주는 엄마 말고, 책을 읽는 엄마를 본 기억이 없다. 사춘기 시절 공부 잔소리(별로 심하지도 않았다)에 “그러는 엄마는 왜 책 안보냐”고 따졌을 때, 엄마는 “나는 노안이 와버렸어!”로 응수했다. 그 대답이 어찌나 충격이었던지 뇌리에 생생히 박혀서, 이십 대 후반부터 내 쓸데없는 걱정 중 하나는 노안이다.
종종 책 추천을 해주는 모녀 관계를 보면 놀랍다. 아, 모녀 관계에 읽기와 쓰기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신기하다. 나라고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는 거부의 제스쳐였다.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엄마가 책 읽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텔레비전 만이 아닌 다른 노후의 여흥 거리가 있길 바라는 거다. 할 수 있는 것을 해드린다. 시골집에 넷플릭스를 설치해드리고, 유튜브를 알려드린다. 당연히 엄마는 엄마의 방식이 있었다. 유튜브로 다육이를 검색한다. 몸고생을 많이 시키지 않는 식물들을 키우면서 예뻐 죽겠다고 한다. 딸들은 자식을 넷을 키우고도 키울게 남았냐, 그쯤 하면 양육 중독 아니냐고 놀리고 엄마는 중독 맞으니 손주를 내놓아라 한다. (아이고)
***
이 책이 이미 성인인 딸의 우울증에 엄마의 책임이 있었다는 식으로 흐를까봐 내심 걱정했다. 다행히 그렇지도 또 아주 그렇지 않지도 않았다. 깊은 사랑을 가진 - 조력자로서의 자세, 딱 그만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한 이야기. 함께 가기를 포기할 수 없으므로 사랑의 방식을 서로 조율하는 이야기.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종류의 에세이는 아니었다.
읽으면서는 엄마의 마음에 이입을 할 것인지 딸의 마음에 이입할 것인지 입장을 딱히 정하지 못해서 곤란했다. 굳이 정하고 읽을 필요는 없지만 남의 이야기처럼 읽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지. 주되는 글쓴이가 엄마라서 엄마의 마음으로 책을 읽을 때는 속을 몰라주는 것 같은 서현 씨에게 서운함을 느꼈다.
그러나
“(P.107) 서현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겁니다. 피아노 레슨을 받는 아이들이 연주회장을 빌려 작은 음악회를 갖기로 했었지요. 서현이는 선생님과 곡목을 정해 오랫동안 진지하게 연습했습니다. 공연 일주일 전쯤으로 기억하는데요. 중간에 곡목을 한 번 바꿨던 서현이에게 제가 지나가는 말로 “엄마는 원래 치려고 했던 곡이 더 좋더라”라고 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서현이는 공연 당일, 생각보다 넓고 관객이 많던 무대 위에서 오른손으로는 ‘연습했던 곡’을, 왼손으로는 ‘원래 치려 했던 곡’의 반주를 연주했습니다. 선생님이 무대에 올라 저지할 때까지, 본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말입니다. 나중에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서야 저도 서현이가 연주한 불협화음의 실체를 알았고요.
때로 궁금합니다. 제가 서현이를 양육한 방식과 딸의 우울증에는 얼마만큼의 상관관계가 있을까요? 양쪽의 인과관계가 생각보다 더 촘촘한 듯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서현이가 먼저 자리를 뜬 놀이터 그네 위에서, 아무리 애써도 답을 낼 길 없는 문제 때문에 저는 조금 많이 울었던 것도 같습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나도 울었다) 딸 서현씨의 마음을 너무 알 것 같았다. 한 손으로는 엄마의 곡을 다른 손으로는 내가 쳐야 하는 곡을 연주하는 사랑. 결과적인 불협화음. 아직 자라고 있는 중인 아이의 마음은 저처럼 연약하다. 그런데 우리는, 또 나는 대체 어떻게 저 시절을 거치고 통과해서 나의 곡을 연주하는 진짜 어른이 되게 된 걸까. 진짜 지금 연주하는 곡이 내 곡이긴 한가? 그렇다고 치면, 그러니까 대체 어떻게, 왜, 언제, 나를 나 자신으로 인식하고 나의 삶을 살기로 마음먹는 걸까. 그게 물 흐르듯 저절로 되는 사람들도 있나. 아니 세상이 그게 ‘자연스럽게’ 되도록 구축이 되어있단 말인가? 나만 어려운 것도 아닌 것 같은 데, 왜 다들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 같지? 어떻게, 정말인지 어떻게.
모두들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깨우치게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모두들은 깨우치지 못했을 거다). 엄마가 돼봐야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고 세상은 쉽게 말하지만, 엄마가 되기 전에 엄마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 이것은 배운 적이 없다. 덧붙여, 엄마 역시 배운 적이 없을 테다. 자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 ― 말이다.
“(P.37) 자신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너는 딸을 믿고 지지해준 엄마였니?’ 하고 말이지요. 머릿속에 핑곗거리만 가득한 걸 보니, 답은 ‘그렇지 않다’ 인가 봅니다. 애써 감춘 민낯을 들킬까 봐 두려워 선생님 앞에서 그처럼 경직되고 울컥했나 봅니다. 지금 딸이 겪는 고초가 행여 엄마의 모자람 때문은 아닌지, 저는 불현듯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맙니다.”
딸의 우울증에 엄마의 양육 방식이라는 몫이 차지하는 지분이 얼마일지는 모르겠지만, 기실 주양육자와의 관계 문제가 한 인간의 인격이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저자가 느끼는 죄책감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느낀다. 그 죄책감의 아주 많은 지분을 적어도 90% 이상의 지분을 사회가 나눠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10프로 미만의 적은 지분 안에서 아빠 역시 엄마와 같은 무게와 농도로 죄책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수치화할 수도 없고, 계산을 할 수 없는 영역임은 안다. 그러나 이렇게라도 계량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한 사람의 탓(주로 엄마)을 할 수 있게 되어버리는 거다. 그게 너무 답답하고 슬프다.
하지만 지금의 조건에서 결국 서현 씨가 삶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가장 현실적인 조력에 엄마인 저자의 몫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 사회가 만든 상처(학교폭력, 외모차별, 성차별 등등)의 치유에까지도 엄마의 몫이 있다고 하는 거 진짜 너무 엄마한테 가혹한 거 아닌가 싶다. 보호자에 양육자에 가장에 교사에 보디가드에 치유자에 상담자에 친구까지… 왜 다 엄마가 해야 하는 건지, 심지어 엄마들은 그렇게 자식에게 묶여 있으면서도 자아의탁까지 자식한테 안 하고 선 긋는 것도 저들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다. 사회 이딴 식으로 거지같이 구성할 거면 엄마 자격증제 도입해야 한다. 스펙 쌓듯 뭐 몇 점 연수 몇 번 하고 난 뒤에 훌륭해짐 인증받은 다음에 엄마 해야지, 이게 뭐냐고. 왜 엄마들만 못살게 구냐고, 암 것도 모르고 엄마를 사랑하며 자라나는 애들은 또 무슨 잘못이냐고…
“(P.72) 엄마가 나를 도와준 만큼 잘 자라지 못한 것 같아서 미안하고, 두렵다.
그렇지만, 나는 새벽 2시에 내 방문을 여는 엄마가 싫었다.
내 실패와 성공을 엄마의 것으로 생각하는 그 부적절한 마음이 싫었다.
엄마와 내게 부족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알맞은 선을 긋는 일이었다.
어디까지가 엄마이고 어디까지가 나인지 모른 채 함께 녹아내리는 대신 우리는 선을 그어야 했다.
서로의 삶을 더 존중하기 위해서.”
견고한 가부장제와 엉망인 사회 속에서 마음속의 단단한 선을 긋는 것. 혹은 내가 치고 싶은 곡과 엄마가 치고 싶은 곡을 정확히 갈라보고 단호하게 내 곡을 쳐가는 것. 당장은 가능한 개인들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고, 말이 쉽지 나는 5년 넘게 걸린 것 같다. 절연을 (혼자) 각오하고 만나지 않은 적도 있었고, 중간에 엄마가 아프시면서 미칠 것 같은 날들도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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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는 엄마를 새롭게 사귀는 중이고, 내가 알지 못했던 엄마는 자꾸자꾸 등장한다. 너무 심한 사투리, 구시대적인데도 이상하게 진보적인 데가 있는 엄마의 말들, 일상에서 엄마만의 작은 도전들과 끝없이 바지런하고 자연친화적(?)인 행동들이 매력적이라 동생들과 때 아닌 엄마 덕질(-_-;;)을 하게 되었다. 무릇 덕질이란 함께하면 행복이 열 배 이나니. 차마 하지 못하는 애교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뿍담뿍 보내는 동생들에게 배우기도 한다. 사랑하는 법, 사랑받는 법. 표현하면서 더 많이 행복해지는 법, 등등등.
“(P.231) 아니, 난, 가끔 옛날이야기하면서 그때 엄마는 왜 그랬는지, 나는 어떤 마음이었는지 물어보고 대답 듣는 거로 괜찮은 거 같은데?”
지은 지 33년이 되어가는 우리 집은 아빠의 은퇴와 동시에 대대적인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오늘은 20년 넘게 묵혀있던 묵혀있던 다락을 치웠던 모양이다. 아침에는 엄마에게서 느닷없는 카톡을 받았다. 2000년 여름에 엄마가 쓴 일기였다.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책을 읽는 엄마도 본 적이 없지만 글을 쓰는 엄마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에엥? 엄마가 일기를? 알고 보니 가계부였다. 정말 속상할 때 가계부 뒷장에 쓴 엄마의 일기 두 편. 엄마 팬들은 더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딱 두 편만 있다고 했다. 하나는 나에 대해 엄마가 엄청 화나서 쓴 일기였는데 사실 오해였고, ‘기억난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그건 좀 억울해!’라고 했더니, 엄마가 ‘큰딸 그래 미안해. 사과할게’라고 해서 나는 아침부터 울었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사건에 대해 엄마가 사과할 거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그것도 20년 지나서. 생각해보니까 엄마는 사과를 할 줄 아는 분이셨다. 언제부턴가 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지만, 엄마가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게, 그게 기억나서 울었다.
그리고 두 번째 메모는.... 이거는 그냥 너무 엄마 같아서 올려놓겠습니다. (허락 없이 무단 전재)
“날씨 탓도 있지만 아빠가 너무 힘들어한다. 식구들은 용돈이나 맛있는 음식이나, 어른이든 애들이든 똑같다. 내가 조금이나마 돈벌이를 해야 할 텐데 마음뿐이고 한다고 해도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고 집안 일만 해도 힘들고 피로하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점심 차리는 것은 헛일 같아 짜증도 난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 일을 하고픈 심정이다. 가을에는 아빠에게 약이나 좀 해줘야 할 텐데.”
아... 네 명의 자식들 밥보다(자식들은 급식 먹음) 시부모님 밥을 더 많이 차린 우리 엄마.... 그리고 아빠에 대한 그냥 찐 사랑.... + 가난... (잠깐만요, 코 좀 풀고 올게요...)근데 울 엄마 글 너무 잘 씀. 놀라버림. 아... 이건 진심으로 몰랐던 엄마다. 대반전. 나는 글 쓰는 엄마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힘들 때마다 일기를 썼던 것은 바로 엄마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렇게 짧은 문장에 페미니즘적 요소가 가득하다니..(기승전페미니즘...)!!쓰다보니 독후감이라기보다는 최근에 입덕 한 엄마에 대한 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슬퍼서 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어제까지 내가 써보려고 메모해 둔 독후감의 첫 문장이 ‘엄마와 함께 글을 쓰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였기 때문이다. 내게 ‘엄마’와 ‘글’ 이란 둘 다 너무 사랑하는 존재이지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케이크와 함께 먹는 김치만큼의 조화랄까? 엄마가 책을 읽고 글을 썼다면 엄마한테는 좋았겠지만 나한테도 좋았을까? 막 진짜 말도 안되는 이런 글을 쓰게 돼버릴까 봐 쓰기도 전에 벌써 슬퍼서 계속 걱정했는데. 땡!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고, 아무리 가까워도 사람을 함부로 안다고 하면 안 되는 거고, 나에게 읽고 쓰는 게 중요하다고 엄마한테도 중요 할리 없으며, 엄마를 생각하면 슬펐던 감정은 조금 습관성 슬픔인 것.... 물론 찡하고 짠함은 있긴 한 데, 결론만 놓고 보면 울 엄마 아빠 요즘 가장 행복하신 듯. 꿈꾸면서도 웃으시더라?? 그럼요, 나도 행복하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지금 당장 많이 함께 행복해하는 걸로. 일상의 소소한 이벤트를 꾸려가면서 친하게 지내는 걸로. 우리들은 그걸 누릴 자격이 있고, 그래도 된다. 아무튼, 자매들 카톡방에서 맨날 하는 말인데.. 꽃길만 걷자. 울 엄마 짱임. 엄마 짱! 그리고 역시 케이크엔 김치죠. “(P.194) 서로를 아끼고 지지하고 사랑하는 데는 여러 갈래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느슨한 듯, 너무 멀지 않은 거리가 우리 가족에게 어울리는 ‘사랑의 모양’이라 생각했습니다.”너무도 지당하신 말씀. 지숙씨와 서현씨도 고유한 사랑의 모양을 잘 찾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응원한다.
덧, 마지막 사진은 버섯처럼 솟아난(?) 산책 중인 엄마를 파파라치함 (요즘엔 이런 용어 안쓰나?)ㅋㅋ 덕질은 역시 엄마 덕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