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돌바람 > 사람들이 침묵할 때 돌들이 일어나 스스로 소리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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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다하르
모흐센 마흐말바프 지음, 정해경 엮고 옮김 / 삼인 / 2002년 3월
평점 :
한 소년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한 몸의 일부라고 믿고 있는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아프간 협곡에서 양과 함께 자랐다. 양은 소년의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소년은 열심히 양귀비밭을 일구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면 소년은 그것을 거두어 어깨에 이고 맨발로 협곡에서 벗어나 자신만이 아는 지름길로 걸었다. 길은 몇개의 산을 오르고 내리며 이어졌고,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갔다. 오래 걸을수록 어깨에 이고 있는 양귀비는 점점 가벼워졌다. 드디어 이란 국경 지대에 도착했을 때 소년의 발은 살갗이 다 벗겨져 더이상 걸을 수 없었다. 소년은 이란 밀수업자들을 만나 절반으로 줄어든 양귀비포대를 주고 얼마간 굶주림을 대신해줄 빵을 얻었다. 소년은 거기서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발이 짓이겨진 한때의 사람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양귀비포대도 없이 자신과 똑같은 빵을 얻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얼른 긴 줄의 꽁무니에 몸을 밀어넣었다. 드디어 소년의 차례가 되고 소년은 빵을 살 수 있는 20달러가 찰랑 손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트럭에 실려 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곳에 버려졌다. 함께 타고 있던 사람들은 얼른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루가 가고 또 하루가 갔다. 소년은 그저 앞사람을 따라 걸었다. 걷다 지친 사람이 쓰러지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그를 발가벗긴다는 것을 소년은 똑똑히 보았다. 눈만 껌뻑이며 살려달라는 목소리조차 내뱉지 못하는 그저 죽어가는 사람들이 내일의 자신임을 소년은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얼마 전 도착했던 그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소년에게 그때와 똑같이 20달러를 주며 말했다. "이제 너희 나라로 돌아가!"
이 책은 소년이 돌아가야 할 그 나라가 인류의 무관심 속에 파괴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처절한 내부비판서이자(아프간이 이란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것은 250여 년 전이다) 치욕을 못 이기고 스스로 무너져버린 불상의 한 조각 돌멩이다. 그 나라는 2천만 명의 굶주린 국민이 있고, 그 중 30퍼센트는 파키스탄과 이란으로 떠나는 난민이 되었으며, 전국민의 10퍼센트는 이미 굶어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60퍼센트에게 희망은 있는가?
한 소년이 있다. 모든 인간은 한 몸의 일부라고 믿고 싶었던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이제 아프간 협곡으로 돌아간다. 소년의 손바닥에는 그 나라로 돌아가는 댓가로 UN으로부터 받은 20달러가 있다. 이 돈은 소년이 돌아가야 할 나라의 일년 아편수익 5억 달러와 북부의 가스수출로 얻은 3억 달러를 합한 8억을 굶어죽어가는 2천만 인구로 나눈 1인당 연간 소득 40달러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이다. 마약을 팔았으므로 마약밀매상이 되어버린 소년은 자신이 돌아가야 할 나라가 전세계 마약의 절반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그 절반의 수출액 5억이 년간 전세계 마약 거래액 10억이 아니라 무려 160배에 해당하는 800억 달러라는 것을 모른다. 이 돈이 세계 정치에 관여하고 마피아에게 들어감으로써 다시 200배로 가격이 오른다는 것을 모른다. 많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비밀 예산을 이 마약 밀매로 충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왜 자신이 마약이 아닌 밀을 재배할 수 없는지 소년은 모른다. 소년은 다만 20달러를 손에 쥐고 자신의 협곡으로 돌아가는 아프간의 남아 있는 희망, 걸을 힘조차 없으므로 난민 대열에 합류할 수도 없는 그 60퍼센트의 한 명일 뿐이다. 소년이 돌아가는 길에는 평화의 이름으로, 반테러 전쟁으로 쏘아올린 영리한 폭탄이 알 카에다로 가는 길을 잃고 소년이 살았던 협곡으로 떨어진다. 이미 폐허가 된 그곳으로 소년은 돌아간다. 평화의 이름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의족을 줍기 위해 지뢰밭으로 뛰어가는 다리가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이 뛰어가는 중간엔 이런 팻말이 서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24시간마다 7명이 지뢰를 밟습니다. 오늘 혹은 내일 그들 중 하나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희망의 60퍼센트가 온전히 두 다리로 서 있으려면 이후 50년 동안 무리를 지어 지뢰를 밟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소년은 다행히 그 7명에 속하지 않는 채 한 시간에 14명이 기아와 전쟁으로 죽어가고 다른 60명은 난민이 되어 오로지 걷고 있는 이 나라의 폐허가 된 협곡으로 20달러를 들고 돌아가는 중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말한다.
"오늘 당신이 아프가니스탄에 간다면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사람들을 볼 것이다. 누구 하나 움직일 힘이 없으며 싸울 무기도 없다. 잔혹한 형벌이 두려워 범죄도 저지르지 않는다. 유일한 구제책은 인류의 무관심 속에 죽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사디의 '모든 인간은 한 몸의 일부' 시대가 아니다. 아직 심장이 돌로 변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은 바미얀의 석불이었다. 자신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거대한 비극이 주는 굴욕감에 무너지고 말았다. 빵을 구하는 국민 앞에서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했던 부처는 치욕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부처는 이 모든 빈곤, 무지, 억압과 죽음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그러나 무관심한 인류가 들은 것은 단지 불상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전부였다."
바미얀에 있는 세계 최대의 불상 파괴 사건은 전세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곧 전세계 예술가와 문화인들이 불상을 지키기 위해 나섰다. 언론은 절대로 공정하지 않다. 일방적으로, 때론 교묘히 사실을 은폐한다는 것은 이번 황우석 사건으로 살길을 잃은 농민들의 분노를 덮어놓고 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불상 파괴 사건을 통해 분노를 표출했던 전세계 예술가들은 "왜 아사에 직면한 백만 명의 아프간인들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가? 그들이 죽어가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가? 왜 모두들 불상이 파괴된 것에 대해서는 소리내어 슬퍼하면서도 기아로 죽어가는 아프간인들을 구하는 일에 대해서는 침묵하는가?"라고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묻는다. 정확한 통계조차 나오지 않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수가 너무 엄청나서 차마 언론은 그들의 현실에 대해 언급조차도 못하고 있는가보다. 어제 또 한 명의 농민이 한달여간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셨다. 이번엔 소년이 아니라 노인이다. 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되어 외면당하고 있는 아프간이 아니라 자랑스런 대한민국, 세계화의 휼륭한 충복 노무현정부가 저지른 일이다. 얼마나 더 죽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침묵할 때 돌들이 일어나 스스로 소리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