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히피드림~ >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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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다니구치 지로 지음, 신준용 옮김 / 애니북스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학생시절, 나는 도어즈를 무척 사랑했다. (물론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이지만) 그들의 음악을 듣고, 올리버 스톤이 만든 영화도 보고, 드러머 존 덴스모어가 쓴 그들 밴드의 일대기이자 그 자신에 대한 자서전이기도 한, [Riders on the Storm]도 열심히 읽었다. 짐 모리슨은 1945년 생인데, 스물 일곱 되던 해인 1971년에 죽었다. 그러니 나의 기억 속에서 그는 언제까지나 스물 일곱일 것이다. 그는 히피 세대 뿐 아니라 우리 세대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내 마음 속의 진정한 시인이자, 영원한 젊음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짐 모리슨이 살아있었다면, 그래서 흐르는 시간 속에 나이를 먹어 현재에 이르렀다면, 그와 나의 아버지가 동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 이 십대 초반이던 나에게 그것은 왠지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기이한 일처럼 여겨졌다. 늘 말이 없고, 자신을 표현하는데 서투르며, 그래서 더욱 권위적이고, 모든 일에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아버지가, 처음부터 그저 나의 아버지였을 것만 같던 아버지가 진정한 시인이자, 록커였던 짐 모리슨과 같은 세대의 사람이라니, 그것도 동갑이라니...
이제 나는 아버지가 어린 나이에 전쟁을 겪고, 갓 태어난 동생을 잃고, 다음 순간 어머니마저 잃고, 인색하고 사랑표현에 서툰 아버지 밑에서 컸으며, 나이 열 살에 겨우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늘 애쓰고, 열 여섯에 서울로 가서 자기 힘으로 벌며, 겨우 야간 중, 고등학교를 마쳤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에게도 한때 젊음이 존재했다는 것, 희망과 야심이 있었다는 것,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강박적으로 책을 읽고, 영어를 잘 해보려고 무던히도 애썼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아버지는 소위 말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 되었다. 형제들은 물론, 가까운 친척들도 모두 아버지를 자랑스러워 했다. 예컨대, 아버지에게도 젊음이 있었고, 다정다감한 면이 있었으며, 청년다운 야심이 있었지만, 오랜 세월, 다양한 곤란과 고난을 겪으며, 인생의 어느 시점, 어디에선가 그것들을 거의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젊은이에게 남은 것은 이제 가족을 부양해야하는 벗어버릴 수 없는 무거운 짐과, 구부정한 어깨, 깊은 주름살과 흰 머리칼 그리고 세상에 대한 불신과 닳고 닳은 처세뿐이었다.
나는 우리 세대의 아버지들이 결국 내 아버지의 이와 같은 모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투르고, 결국은 그것이 깊은 오해로까지 발전한다. 젊을때는 아내와 자식들 앞에서 소리도 좀 지르고, 센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 나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 속의 아버지는 조심스럽고, 소심하며 기가 죽어있다. 아버지도 늙은 것이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그렇지 않으셨는데 말이다.
다니구치 지로도 그런 우리세대 아버지의 자화상을 이 책, <아버지> 속에서 그렸다. 자식을 무척 사랑했고 그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지만,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른다. 그는 가족을 거부하고 멀리떠나 버린다. 아버지는 떠나버린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고향을 떠나 먼 도시로 가버린 자식은 그렇게 자기 생활을 하느라 아버지따윈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예 아버지를 보지 않으리라는 결심까지 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어떤가,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어땠을까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사실 나는 만화라는 장르를 잘 몰랐는데, 다니구치 지로를 통해 만화에도 작가주의라는 칭호를 붙일만한 예술만화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이 책, <아버지>와 <열 네살>외엔 그의 작품 중 읽어본 것이 없지만, 마치 한편의 소설을 대하는 듯, 잔잔하고 격조있는 그의 이야기 세계에 푹 빠져버리고 말았다. 책을 다 읽고 덮고나니, 마치 한 편의 단막극을 본 듯한 느낌도 들었다. 다만 구성이 좀 상투적이고 뻔하다는 생각이 약간 들기도 했지만, 단 한권의 만화책 분량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렇듯 성실하게 잘 구현되었다는 것에 더 높은 의의를 둬야하지 않을까 싶다.
로저 달트리던가 ㅡ "서른이 넘은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 하던 히피세대의 록커가. 그는 오래전에 서른을 넘겼고 이제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서른 전에 꼭 죽을 것처럼 굴던 이가 손주의 재롱에 즐거워하는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 짐 모리슨이 계속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도 별 수 없었을 것이다. 모리슨도 나의 아버지처럼 되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