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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평점 :
얼마 전 일요일 밤에 하는 텔레비전 모 시사 프로를 보다가 불끈불끈 치솟는 울화를 참기가 힘들었다. 고급 민영 아파트와 바로 이웃한 임대아파트 주민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다루었는데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 자기 아파트 앞을 지나지 못하도록 민영 아파트 주민들이 돈을 모아 담을 막아버린 것이다. 갑자기 가장 가까운 단거리 통학 코스를 잃어버린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바쁜 통학 시간 어찌어찌 뚫린 개구멍인가를 통하여 뛰어넘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그 아파트 앞을 통과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막 화가 치솟았다.
가난도 보면 상대적인 가난이 있고 절대적인 가난이 있다. 인간의 고통도 마찬가지다. 조금 엉뚱한 예지만 마이 도러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 부부는 키작은 우리 아이가 1,2,3,4번 말고 제발 5번 정도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는 2번이라고 자랑을 했는데 알고봤더니 1번은 왜소증 아이였다. 그 사실을 알고나서 우리 부부는 아이의 키가 작아서 큰일이라느니 하는 말은 되도록이면 입에 올리지 않는다.
가난도 그런 것이 아닐까? 가끔 신문이나 뉴스를 통해 끔찍한 사고로 드러나는 어떤 참혹한 가난 앞에서 평소 쓸 돈이 없다고 징징대던 우리들은 할 말을 잃는다. 오늘 읽은 공선옥의 연작소설 <<유랑가족>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이 작가는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가난한 사람들 혹은 밑바닥 인생에 대한 일관된 관심과 천착으로, 여배우를 능가하는 세련된 화장과 차림으로 문화의 세례를 흠뻑 받으며 고독이니 허무니 사랑이니 입만 열면 나불대는 몇몇 여성작가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는 작품세계를 가지고 있다.
'겨울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 바다 푸른 나라' '먼 바다'의 다섯 편의 연작소설들은 모자이크식 구성으로 등장인물들을 스치게 하고 엇갈리게 하고 또 결정적으로 만나게 한다. 프리랜서 사진작가 '한'이 그 모자이크 속의 중심인물로 그가 어느 사보에 실을 사진을 찍으러 간 시골에서 만난 아이들과 주민들이 주인공이다. 그 시골 마을로 시집 온 조선족 여인의 꾐에 빠져 서울로 도망간 여인, 아내를 찾아 상경, 공사판을 떠도는 남자, 그 조선족 여인의 기구한 사연, 쫓고 쫓기는 그들이 떠도는 가리봉동 노래방과 여인숙과 싸구려 식당 풍경......'가리베가스'라는 웃기는 이름의 초라한 환락가.
특별한 개성을 부여받지 못한 인물들의 인생은 하나같이 엉망으로 꼬여 있고 남자건 여자건 늙었건 젊었건 그들이 툭하면 내뱉는 말은 낮이고 밤이고 "에이, 술이나 한잔하자!"이다. 조금 더 예쁘고 조금 더 착하고 조금 더 성실하다고 해서 달라질 인생이 아니다. 그것만큼 사람을 절망하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용을 써봤자 뛰어봤자 벼룩인 인생이라니! 이 세상에서 가족이나 친구가 가장 소중하다는 이데올로기도 이들 앞에서는 무색할 수밖에 없다. 당장 내가 죽겠는걸.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느냐의 문제로......
왜 인생은 밑바닥을 힘겹게 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우려했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일까? 그런데 어쩌면 소설뿐만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나?
"어디서들 오셨습니까?"
"천지사방 헤매는 자들이올시다."
"지금은 어디로 가시는데요?"
"천지사방 헤매어봐도 우리가 살 땅 한 뼘을 찾지 못했소이다. 카아, 허면 바다는 우리를 받아줄까 하여 지금 그 바다가 있는 쪽으로 가고 있던 참인데 차가 멈춰버리네여, 껄껄."(250쪽)
<유랑가족>의 마지막 장면은 그래도 이렇게 꽤나 서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하나같이 거칠고 신산스럽기 짝이 없는 주인공들의 삶의 풍경보다 '한 '의 예전 직장(잡지사) 동료로서 지금은 신문사 기자로 대학 강단에도 서고 한다는 '정'이라는 인간이 보여주는 꼬락서니가 제일 인상깊었다. 할머니마저 죽어 고아가 돼버린 소녀 영주의 친척을 찾아주기 위해 나선 길, 하룻밤 신세를 지려고 찾아갔더니 우국지사연하면서 온갖 똥폼 다 잡고 술을 마시는데......한의 눈에 들어온 고급가죽소파랑, 골프채 가방이랑, 조기유학 보낸 자식 사진......
모두가 그런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임대아파트 아이들이 못 지나다니게 담을 막아버린 민영아파트 주민들 중에도 분명 그런 놈과, 또 백화점 문화센터에 나가 수필 강좌를 듣는 것이 자부심이라 '쓰레기 소각장' 문제로 한자리에 모인 이웃 주민들을 눈아래로 내려보며 떠들지만 사실 쓰레기도 분리하지 않고 몰래 내놓는 샘밭아파트 605호 여인 같은 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작가의 말을 소개한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은 죄인처럼 살아간다. (...) 나는 가난한 작가일 뿐. 가난하여 이 땅 어디에도 삶의 터전을 마련하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민처럼 나 또한 가난한 유랑작가일 뿐.(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