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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도 버스를 기다릴 수 있다”
장애인이동권연대 박경석 공동대표
2001년 7월 23일 ‘제1차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를 시작으로 매달 반복된 장애인이동권연대의 버스타기 투쟁이 1월 26일 41번째 행사를 마지막으로 마감됐다.

4년여에 걸친 투쟁을 통해 이동권을 명시하고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하는 ‘교통약자의 이동편의증진법’을 제정하는 데 성공하고 이제 버스타기를 마감하며 새로운 차별철폐 투쟁을 모색하고 있는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의 박경석 대표를 26일 행사 전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 인터뷰가 끝난 후 박경석 대표는 마지막 버스타기 행사를 진행했다.
ⓒ 프로메테우스 양희석
장애인도 버스를 탈 수 있다?

4년여 동안 41차례에 걸쳐 계속된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박경석 대표는 2001년 1월 22일 오이도역 장애인리프트 추락참사로 기억의 시계바늘을 돌렸다.

“오이도역에서 2001년 1월 22일 장애인이 추락하고 오이도역 대책위가 만들어져 지하철로를 점거하고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장애인의 이동 문제가 철로를 한번 점거하는 것이 아니라 일회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생긴 것이지요. 이런 문제의식으로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인 4월 20일, 장애인이동권연대가 출범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활동해야 할까 방향을 이야기하다가 시민들에게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문제의식을 알려야 한다는 차원에서 ‘100만인 서명운동’이 있었고, 강력한 투쟁을 위해서 ‘시청 앞 천막투쟁’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가 장애인이 버스를 타지 못하니까 그 모습을 보여주자고 한 것이죠. 장애인 버스타기는 장애인이 버스를 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장애인들이 스스로 느끼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으로 좋았던 것이죠. 장애인이 왜 버스를 타지 못할까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렇다면 오이도역 사건 이전에는 이러한 일이 없었던 것일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존재했다. 장애인이 버스를 타면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가 언론을 통해 알려졌을 뿐이지 그 전에도 계속 있었다는 것.

“99년 노들장애인야간학교 이규식 학생(현 장애인이동권연대 연대투쟁국장)이 혜화역 장애인 리프트에 떨어져서 다쳤어요. 전치 3주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서울지하철공사는 개인의 잘못이라면서 보상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언론에서도 그 문제에 대해 관심도 없었죠. 결국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했고, 2년 동안 재판과정을 통해 서울지하철공사에게 500만원 보상을 받았습니다. 천호역에서 또 다른 학생이 리프트에서 떨어졌고 다치지 않았지만 이에 항의하며 싸우기도 했었죠.

당시에는 사건에 맞춰서만 싸웠습니다. 사고에 대한 대응으로만 끝났던 것이죠. 조직체도 구성하지 못했구요.”

장애인 이동권 보장이라는 문제가 사회화 된 것은 장애인이 거리로 나서면서부터다.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장애인이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장애인들은 자신들이 장애를 가졌기 때문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비장애인들은 장애를 가지기 않았기 때문에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버스에 11시간동안 갇혀있기도 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고 주장하기 시작한지 어느덧 4년. 박경석 대표는 버스타기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2001년 7월 23일 시청 앞 천막 농성을 할 때, 처음 버스를 탔습니다.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탄 게 아니라 좀 불규칙했어요. 천막농성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그러다가 서울역에서 광화문으로 3차 버스타기를 하는데, 경찰이 원천봉쇄를 했어요. 서울역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경찰들에 의해 천막을 철거당한 것이죠.

8월 말에 이에 대한 대응으로 4차 버스타기를 했는데, 혜화동에서 광화문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버스를 점거했습니다. 언론에 가장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죠.

그 다음 번 버스타기가 9월에 있었는데, 이번에도 혜화동에서 광화문으로 가는 것이었죠. 근데 이번에는 경찰들이 내리지를 못하게 했어요. 버스 4대에 나눠 타고 왔는데 3대는 먼 곳에서 겨우 내릴 수 있었고 남은 1대는 광화문 앞에 있었는데, 10시간동안 버스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배가 고프니까 버스 안에서 자장면도 시켜서 먹고, 용변도 보고. 1시에 버스를 탔는데, 11시에 내렸어요. 지금도 궁금한데, 경찰이 왜 못 내리게 했는지 궁금합니다. 버스점거를 또 할까봐 그런 것 같기는 하지만, 장애인들이 버스를 타고 시위를 한 것이 처음이니까 경찰들도 대응방식을 몰랐던 것 같기도 하고.(웃음)”

장애인은 20년 늦지만, 비장애인은 20분 늦을 뿐이다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면서 수차례 연행됐다. 그만큼 강하게 투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박 대표는 2001년 오이도역에서 철로를 점거하면서 처음 연행된 이유로 숱하게 연행된 것 같다고 한다.

“철로를 점거해서 연행되고, 시청역 천막 농성하면서 연행되고, 서울역 앞에서 천막농성하면서 연행되고, 버스 점거해서 연행되고, 한 번은 버스를 탔는데 경찰이 시내버스를 통째로 경찰서 앞까지 끌고 가서 연행되고, 15~20번은 되었나보네요.”

철로를 점거하는 이야기가 나오니, 장애인 이동권 투쟁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철로 점거’였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장애인이동권연대는 철로에 내려간 장애인의 휠체어와 사다리를 쇠사슬로 묶어 자물쇠로 잠근 뒤 풀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철로를 점거해왔다.

ⓒ 프로메테우스 양희석
2001년 여름 기자는 장애인이동권연대 회원들이 철로를 점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경찰은 사방에서 묶인 쇠사슬을 자르고, 장애인을 들어 짐짝처럼 연행했다. 그런데 정작 철로에 내려간 장애인들은 무섭지 않았을까? 지하철 운전사가 그들을 발견하지 못해서 치여 죽었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처음에 철로를 내려갈 때 많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지하철이 우리를 못보고 들어오지 않을까. 철로에 내려가면 전기가 흐르지 않을까. 어떻게 내려가면 잘 내려갈까.

철로를 점거하기 며칠 전 지하철에서 1시간동안 앉아서 고민했죠. 지하철이 3~4분 만에 오는 것을 확인하고, 지하철이 서는 지점의 바로 앞에 있으면 사람은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하철이 서는 지점에서 바로 앞 쪽 철로를 점거하고, 지하철이 서 있는 것을 확인하면 다른 사람들도 내려가자고 한 것이죠.

당시 철로를 점거하고자 했던 이유는 ‘장애인들이 지하철을 타다 다쳐 죽는데, 비장애인들만 안전하게 타면 안된다. 장애인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해야 한다. 장애인 이동권을 배제한 지하철은 멈춰야 한다’는 것이었죠.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못해 20년, 30년씩 외출을 하지 못합니다. 장애여성을 다룬 영화 ‘거북이 시스터즈’를 보면 첫 화면에 보면 ‘첫 외출, 25년’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25살이면 첫 키스를 하고 남았을 시절인데, 중증 장애인들은 그때서야 첫 외출을 하는 것이죠.  집구석에서, 시설에서 그렇게 갇혀 사는 것을 생각하면 비장애인들이 타는 지하철을 20분, 30분 멈추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박 대표는 이야기를 하다가 기자에게 질문했다. “장애인들이 갇혀 지냈던 삶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하나요?” 국가가, 사회가 보상하지 못한다면 장애인들에게 그런 삶을 살게 강요할 수 없다는 문제다.

문득 박경석 대표가 저상버스는 자주 타봤는지, 저상버스를 타고나서 평가는 어땠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박 대표는 “아직 시범적으로 몇 대 움직이는 것을 가지고 평가하기는 이르다”고 말한다.

“장애인들이 일상적으로 타기에는 저상버스가 너무 적습니다. 장애인들이 저상버스를 경험하기가 어렵죠. 일상적으로 탈 수 있었을 때 일어나는 미세한 문제들이 많을 수는 있습니다.

운전사가 바쁘기 때문에 장애인을 안태우고 갈 수도 있고, 장애인이 타는데 걸리는 시간들을 비장애인들이 참아줄 수 있을까 생각도 들고, 정류장 위치 문제도 있을 수 있죠. 그런데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저상버스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타는 부분들에 대한 갈등을 경험하지도 못하지 않았나요?”

△ 사무실에서 만난 박경석 대표
ⓒ 프로메테우스 강서희
앞으로의 핵심은 ‘차별철폐’다

법제정을 통해 저상버스 도입을 의무화했고, 다사다난했던 버스타기가 끝났다. 앞으로 투쟁하는 장애인들은 거리에서 사라질까?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장애인 차별 철폐 중 한 부분이었는데 말이다.

“이동의 문제와 더불어 여성, 교육, 노동 등 장애인의 일상의 문제에 있어서 차별이 심각합니다.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라고 했을 때 나타나는 한정되는 의미를 벗어나 4년의 투쟁을 평가하고 정리하고, 그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성과를 모아 투쟁 방향을 전환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앞으로 장애인 차별의 전반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기 위해 ‘장애인 차별철폐 대행진’이나 ‘장애인 차별철폐 행동의 날’ 등의 형식을 통해 투쟁을 새롭게 하려고 합니다. 버스타기처럼 한 달에 한 번씩 진행하고요. 핵심은 ‘차별철폐’입니다.”

그런데 법이 제정되어도 저상버스가 도입되지 않은 지역이 상당히 많다. 서울지역은 50여대의 저상버스가 다니기는 하지만, 저상버스를 아예 볼 수 없는 곳도 있다.

“서울에서 버스타기를 계속한다고 지방에 버스타기를 계속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서 버스타기를 멈춘다고 지방 버스타기가 멈추는 것도 아니고요. 지방은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행사가 불규칙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충북이나 광주가 버스타기를 하고 있었죠.

지역은 정기적으로 한 달의 한 번이라도 만나서 공동의 행동을 만들면 됩니다. 그 속에서 이동권 문제를 풀어내면 되죠.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장애인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차별받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박경석 대표는 “장애인들이 누려야 되는 권리와 비장애인들이 누리고 있는 가장 기본적으로 받는 권리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며 “그 권리들이 다른 것이 아닌데, 장애인은 권리를 누리는데 있어 소외됐다. 비장애인들도 장애인들이 얼마나 소외되고, 차단되어 있는지 알아야 하고 더 이상 장애인을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한다.

△ 마지막 버스타기에서 박경석 대표가 사회당 신석준 대표와 이야기 나누고 있다.
ⓒ 프로메테우스 강서희
‘장애인도 버스를 타자’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박경석 대표는 “저상버스를 탔다”며 기자에게 전화를 해왔다.

“‘장애인도 버스를 탑시다’ 행사를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들려서 버스를 타는 것하고는 특별히 불편한 것은 없었어요. 그런데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보고, 사람들이 서로 보면서 이야기하는 모습, 거리를 보면서 달리는 기분이 좋았어요. 특히 환승하기 위해 버스카드를 찍는 모습은 재미났죠.

그런데 이렇게 탈 수 있는 버스를 얻기 위해 우리는 처절하게 투쟁했습니다. 아마 버스를 타고 있는 시민들은 저상버스가 어떻게 도입되게 되었는지 모를 거예요. 피눈물 나는 투쟁으로 그런데 막상 타고나니 이렇게 탈 수 있는데 가슴이 벅차오르죠.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이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는 것, 이제 사회생활을 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겨우 시작되었을 뿐인데, 눈물 나죠. 정말…”

4년여 동안 41차례에 걸쳐 계속된 버스타기는 단지 장애인도 버스를 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이 사회에 존재하는 장애인 차별 철폐를 위한 첫걸음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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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19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울보 2005-04-19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예저도 한번 확인해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