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아영엄마 >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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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의 전설
미하엘 엔데 지음, 비네테 슈뢰더 그림, 김경연 옮김 / 보림 / 2005년 3월
평점 :
절판
이 그림책은 옮긴이의 말에 나오듯이 "그림책을 아이들이나 읽는 책으로 생각한다면, 이 책은 그림책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삶에 대한 성찰을 이끌어내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또한 뒤늦음이라는 탄식이 붙지 않아도 좋을 책으로 은자와 도둑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삶, 아집, 편견, 집착, 고정관념 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고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결혼식을 하루 앞둔 신부가 다른 사내와 도망친 것으로 인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린 한 남자가 세상은 허위로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고 성서연구에 몰두한다.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는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야 할 이 세상의 기반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일이다. 그것도 평생을 함께 하기로 약속한 이의 배신은 한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앗아버리기에 충분한 것이다. 세상을 등진 젊은이는 학문에 심취하지만 이 길에서 또 한번의 절망을 겪는다. 방대한 저서를 남긴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년의 깨달음이란 것이 자신의 모든 책이 속이 빈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는다니, 이 얼마나 허망한 노릇이란 말이다. 결국 이 남자는 물이 나오지 않은 땅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안식을 찾게 된 것은 어느 동굴 안에서 잠을 청했다가 그 곳에 머물라는 목소리를 듣고부터이다. 이후로 동굴에 머물며 '영원'을 향한 구도의 길에 들어선 남자는 명상에 잠기고, 그의 깊은 영혼의 평화는 숲의 동물들에게까지 감응된다. 세월의 흐름을 잊어버린 듯한 평온한 모습의 노인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붉은 열매가 달린 나무-뒤편의 다른 나무들과는 달리- 한그루를 보고 있자니 생로병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고뇌하다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보리수나무 아래에 앉아 수도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이 떠오른다.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애쓴 것처럼 은자는 어느 날 숲에 찾아 든 도둑을 회개의 길로 이끌며 그를 위해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던 은자가 어느 날인가부터 변한다. 은자는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자신을 찾아오는 존재의 말을 믿었으며 수행을 많이 한 오직 자신만이 그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도둑에게도 관찰능력과 하나의 깨달음이 있었으니, 그것을 통해 눈앞에 보이는 것의 외양을 곧이곧대로 믿지 아니하고 과감히 화살을 쏜 것이다. 톨스토이 원작의 <구두장이 마틴>을 보면 마틴은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 오시겠노라는 목소리를 듣고 하루 종일 그 분이 오시길 기다린다. 그 하루 동안 마틴은 추위에 떨고, 헐벗고,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집 안으로 불러들여 자기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행을 베푼다. 그리하여 밤이 늦도록 마틴이 기다렸던 예수님은 분명히 그 날 마틴에게 다녀가셨으되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천사를 거느린 휘황찬란한 모습이 아닌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마틴에게 대접을 받으셨던 것이다.
"나더러 대천사를 속이라는 말이냐? 그분이 너에게 나타나려 했다면 너를 찾았을게다! 게다가 나는 네가 그분이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기나 할지 의심스럽다. 그만큼 너는 눈뜬장님이다. 그래. 나는 제가 그런 성스런 현상을 보기에는 눈이 멀었다고 확신한다. 그러니 아들아, 네 불경스런 소망은 잊도록 해라."
은자는 지나친 자만과 대천사의 겉모습에 눈이 멀어 주위를 살필 여유도, 사물의 본질을 파악할 혜안도 잃어버렸으나 도둑의 대답을 통해 꿈에서 들은 약속이 이미 실현되었음을 깨닫는다. 무엇이든 지나치게 연연하고 그것에 집착하게 되면 진실을 보아야 할 우리의 눈에는 이를 가리는 한 꺼풀의 장막이 드리워져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고 비켜나갈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삶의 진리나 깨달음이 멀리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높디높은 곳에서만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팔십 노인도 세 살 먹은 아이한테 배울 것이 있다"라는 우리나라 속담처럼 어린 아이에게서도 배울 것이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나를 낮추고 겸허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성자가 아니더라도 깨달음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면서<끝없는 이야기>로 나를 매료시켰던 미하엘 엔데의 또 다른 작품을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웠고, <개구리 왕자>에서 섬세한 묘사와 그림 곳곳에 비현실적인 것들을 내포한 독특한 화풍이 인상에 남는 비네테 슈뢰더가 그림을 그렸다기에 기대감을 가지고 보았는데, 인물들의 변화에 따른 색채 대응도 차별화되어 있으며 세밀하게 그려진 그림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인 공간을 들여다보는 듯한 몽환적인 느낌이 드는 것이 그의 화풍이 잘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