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바람구두 > 죽어라 열심히 사는 꿈
거창한 꿈
장 자끄 상뻬 지음, 윤정임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4월
평점 :
절판


"괴물처럼 연기를 내뿜는 쇳덩이를 보고 도망치는 사람들 모습이 어지러운 속도로 달리는 차 창을 통해 눈앞에 펼쳐지고 있소. 나를 실은 기차는 소리유를 향하고 있소. 그곳에서 부치게 될 이 편지는 닷새 후면 당신에게 도착할 거요.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되지 않소. 하지만 지난 3월 당신의 손에 입을 맞출 수 있게 된 이래, 내 가슴은 성급함으로 요동치고 있다오. 언젠가 우리의 약혼을 기념하게 될 날을 기대해도 좋다고 대답해주오. (내가 일주일 내에 도착하게 될 -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 마드리드에서 그 대답을 해주시오.) 지금이 7월이오. 그러니 깊이 생각해보시오. 그리고 내년 초까지 대답해주시오. 기한이 촉박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소. 그리고 엘리자벳, 당신을 몰아붙이고 싶지 않소. 하지만 이제 우린 속도의 시대로 들어섰고 나 역시 이 시대 사람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오." <본문 55쪽>

펼친 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철도 레일과 그 위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 농촌을 건너가는 증기기관차. 양떼가 증기기관차의 서슬에 놀라 한쪽으로 도망가고, 가을걷이가 한창인 마을 사람들, 베어낸 밀을 가득 실은 말이 놀라 짐이 떨어지고, 아이들은 집 안으로 줄행랑을 친다. 멀리 미루나무가 높이 솟은 운하로 짚단을 실은 화물선이 양안으로 이끄는 말의 힘에 이끌려 흘러간다. 저 쪽 구석에서 개가 놀라 짖는다.

장 자끄 상뻬의 그림책 "거창한 꿈"에 실려 있는 그림 가운데 하나다. 상뻬는 의뭉스럽다. 의뭉스럽게 이런 그림에 저런 글을 적어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안 되었고, 그대 손에(입술도 아니고) 키스 한 건 지난 3월(지금이 7월인데 말이다)인데 결혼해달라고 급하게 말해서 미안하단다. 그것도 속도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불과 1-200년전 이야기인데도 우리는 얼마나 빠른 시대에 살고 있는지. 장 자끄 상뻬는 이제 확실히 늙었다. 하기사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늙어 있었다. 그가 작품 속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게으름의 철학, 느림의 미학이 아니던가.

어떤 점에서 이 책 "거창한 꿈"이 실제 발표된 연도와 상관없이 국내에서는 지난 2001년 "어설픈 경쟁"과 함께 출간된 건 의미가 있어 보인다. "어설픈 꿈"은 지난 지난 85년작이고, "거창한 꿈"은 97년작임에도 두 작품은 마치 하나로 연결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하기사 상뻬의 모든 작품들이 또한 그렇다. 앞의 책에서 "세자르 라베르뉴"란 화가 이야기를 했는데, 거대한 자연 앞에서 스스로 무슨무슨 전람회에서 어떤 상을 받았노라고 떠드는 인물 이야기를 했다면, 이 책에선 그 자연 한 가운데 여인 한 명을 배치하고, 다시 전작의 화가인듯한 인물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여인이 외친다.

"나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러고보니 화가와 여인 사이가 제법 멀다. 자연 속에 파묻힌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왜소한가?

"지난주, 그러니까 내 퇴직을 삼 개월 앞둔 날이었지. 인사과 비서실의 콜레트 부인이 나한테 그러더군. (프로시냐르 씨, 상부에서 <프로시냐르 이후> 문제를 아주 조심스럽게 거론하고 있는 거 아세요?) 라고. 그래서 내가 생각했다네. (<프로시냐르 이후> 를 말하는 것 보니 <프로시냐르라는 존재>가 있긴 있구나) 라고 말일세. 고백컨대, 그 얘길 듣고나서 썩 만족스러웠다네." <본문 17쪽>

문득, 나란 존재가 과연 세상 어디에 그 흔적을 남길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사람들은 죽어라 제 이름으로 된 묘비명을 남기고, 죽어라 제 이름으로 된 욕망의 흔적들을 쌓아 올린다. 죽어라 돈을 벌어서 죽어라죽어라... 그리고 결국 죽는다. 한 세월도 가기 전에 모두 잊혀질 일들을 하기 위해... 인간은 죽어라 일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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