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아직 일제강점기...창지개명(創地改名) 그대로'
녹색연합, 석달간 백두대간 조사결과 22곳이 일제 강점기 하 지명이라고 밝혀
미디어다음 / 김준진 기자
광복 60돌을 맞는 올해, 일제 강점기 때의 창씨개명한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 국토의 지명에는 일제 강점기 하 ‘창지개명(創地改名)’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는 가운데 이를 바로잡아 일제 잔재를 없애고 민족정신을 곧추세우려는 움직임이 시작됐다.

고문헌(사진왼쪽)에 있는 속리산 천왕봉 표기와 현재 천황봉에 있는 표식주의 모습. [사진=녹색연합]
녹색연합은 28일 기자회견을 열고 백두대간에 남아있는 일제 강점기에 창지개명으로 왜곡된 지명들을 바로 잡는 ‘백두대간 우리 이름 바로 찾기 운동’에 돌입했다. 녹색연합이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2월까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백두대간에 일제 잔재가 남아 있는 지명은 모두 22곳에 이른다.

이번 조사는 백두대간이 걸쳐 있는 32개 시·군의 산과 봉우리, 마을 이름 등 자연지명을 대상으로 각 지자체와 문화원, 지역주민 현장방문조사와 함께 고문헌과 고지도를 일제 강점기 이후 만들어진 지도와 비교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깎아 내리고 부정하기 위해 행한 대표적인 사례는 지명을 한자 동음이의어나 비슷한 말로 바꾼 것이다. 일제는 주로 원래 왕()이었던 것을 왕()이나 황()으로 변경했다. 속리산 천왕봉(天峰)을 천황봉(天峰)으로, 가리왕산(加理山)을 가리왕산(加理山)으로, 설악산 토왕성폭포(土城)를 토왕성폭포(土城) 등으로 왜곡한 것이다.

여기서 왕(王)과 왕(旺), 황(皇)의 차이는 뚜렷하다. 왕은 임금 또는 군주, 여럿 중에 으뜸을 의미한다. 그러나 황은 천황의 황으로 일본의 천황을 일컬으며, 왕은 일()에 왕()을 더한 것으로 일본 왕을 상징한다.

일제 강점기에 왜곡 된 백두대간 우리 땅 이름 [자료=녹색연합]

이 밖에도 일제는 창지개명에 앞서 1914년 행정구역개편을 통해 지명을 마음대로 바꾸기도 했다. 거북 구()자를 아홉 구()자로, 닭 계()자를 시내 계()자로, 풍성할 풍()자를 바람 풍()자 등 쉬운 한자로 지명을 바꾼 것이다. 충북 보은군 산외면 구치리와 전북 장수군 장수읍 송천리 용계마을, 경북 달성군 현풍면 등이 이 같은 사례다. 용계(龍)마을의 경우, 고려 말 장군이었던 이성계가 잠이 들었다가 닭 울음소리에 깨어나 왜적을 무찌른 곳이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그 유래도 없는 용계(龍)마을로 바뀌어 버렸다.

심지어 서울에 있는 북한산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원래 삼각산(三角山)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렸다. 현재의 북한산은 고문서인 팔도군현지도와 해동지도, 광여도에 모두 삼각산으로 적혀있다. 이는 병자호란 때 문신 김상헌의 시조에도 삼각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또 녹색연합은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자원수탈과 식민통치의 편의를 위해 우리나라 행정구역을 개편했던 것이 지금 환경분쟁을 일으키거나 실생활에 불편을 주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일제 때 금광이었던 금정광산이 있는 경북 봉화군 춘양면의 우구치리는 캐낸 금을 봉화로 실어 내오면서 강원도 영월이 아닌 봉화로 편입됐다. 이후 금광은 폐광이 됐고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폐광 침출수로 남한강 수계인 강원도 영월군 지역이 피해를 입고 있다. 이 때문에 봉화군과 영월군간 지역간 환경 분쟁이 일고 있다는 것.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과 산서면도 원래 남원 땅이었다. 하지만 행정구역 개편 당시 남원의 면적이 크고 장수가 좁자 일본은 이 지역을 장수군으로 편입시켰다. 이 때문에 지역주민들은 남원에서 열리는 장 등 남원 생활권을 누리고 있는데도 호남정맥이라는 큰 산줄기 너머에 있는 장수읍에 적을 두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왜곡 된 행정구역 [자료=녹색연합]

이번 조사는 전국 140개 시·군 가운데 백두대간이 지나는 32곳만을 대상으로 한 것. 따라서 이 같은 사례는 전국적으로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처럼 일제 잔재의 지명이 많이 남아있는 이유에 대해 녹색연합은 “자연지명을 담당하는 시·군·구 지명위원회가 유명무실했기 때문이다”라며 “조사대상이었던 32곳 가운데 지명위원회를 구성한 곳이 15개소(47%)였고 이 중 회의를 한 번이라도 한 곳은 6개소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지명위원회를 아예 구성하지 않았던 곳은 17개소(53%).

또 녹색연합은 “지명 담당 업무가 자연지명은 국토지리정보원이, 행정지명은 행정자치부가, 하천과 도로명은 건설교통부가 맡고 있어 일관성도 없고 체계적이지도 못한 게 현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녹색연합은 “지난 광복 50주년에 인왕산(仁旺山)을 인왕산(仁王山)으로 바꾼 것처럼 아직까지 왜곡된 채 남아있는 지명을 바로잡아야 한다”라며 “전문가 조사를 통한 매뉴얼 작업 등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정부의 예산과 인력 지원도 필수적이라는 것. 최근 경기도 의왕(儀旺)시도 의왕(義王)시로 한자표기를 변경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녹색연합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국토지리정보원을 방문해 이번 조사결과를 토대로 자연지명을 바로잡아줄 것을 요청하면서 백두대간도 지도에 표기해 줄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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