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다. [국가]의 초반에 해당되는 1-2권의 내용은 과연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쟁이다. (이 책의 저자인 박종현 교수는 '정의'를 '올바름'으로 번역하고 있다.) 플라톤의 제자들은 플라톤에게 결과나 이익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 정의가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플라톤은 '정의로움', 즉 '올바름'의 상태(플라톤은 이것을 '덕', 또는 '덕스러움'이라고 말한다.) 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개인보다 살펴보기 쉬운 '국가'라는 대상을 살펴본다. 정의로운 국가란 무엇일까? 국가의 올바른 상태란 무엇일까? 이것이 국가의 3-4권의 논쟁의 주제이다.

3권에서 플라톤은 올바른 국가에서의 '수호자'의 역할과 교육을 강조한다. 국가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이 필요하고, 그런 수호자를 위해서는 바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3권에서 수호자는 최소한의 의식주의 혜택만 누리고, 오로지 국가의 안정과 정의를 위해서 희생하며 국가와 구성원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4권에서는 이런 수호자의 역할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수호자는 자신은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희생만 한다면 수호자가 누리는 이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플라톤은 수호자 개인이 아닌, 국가라는 커다란 공동체를 보는 시각에서 이야기를 한다. 수호자의 목표는 국가의 행복이고, 국가가 행복하게 하는 것이 곧 수호자의 정의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전체주의적인 발상과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사람들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행복을 더 추구하고, 그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플라톤은 국가에 있어서 정의란 통치자의 지혜와 수호자의 용기, 그리고 상인의 절제라는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것을 다시 개인의 정의에 적용시키며, 개인의 혼 안에 이런 지혜와 용기, 절제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때 그것이 개인의 정의, 올바름이 된다고 말을 한다. 그리고 이런 혼의 세 가지 성향을 다스리고 조율하는 것이 바로 이성(로고스)이다.

플라톤은 인간 안에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부분(감정적인 부분, 헬라어 Pathemata)과 그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저자는 '헤아림'으로 번역함, 헬라어 logismos)이 충돌하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욕구를 다스리는 부분을 '이성'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정의로운 상태란 바로 이성이 자신 안의 욕구를 바르게 다스리고 통치하는 경우를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이것들을 두 가지 서로 다른 것들로 보고서, 그것으로써 혼이 헤아리게(추론하게) 되는 부분(면)을 혼의 헤아리는 부분(추론적, 이성적 : Iogistikon)이라고 부르는 반면, 그것으로써 혼이 사랑하고 배고파하며 목 말라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욕구들과 관련해서 흥분 상태에 있게 되는 부분은, 어떤 만족이나 쾌락들과 한편인 것으로서, 비이성적(헤아릴 줄 모르는 : alogiston)이며 욕구적인(epithymetikon) 부분이라 부른다 해도, 결코 불합리하지 않을 걸세 - [국가] P 300

사실 '올바름'이 그런 어떤 것이긴 한 것 같으이, 하지만 그것은 외적인 자기 일의 수행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내적인 자기 일의 수행, 즉 참된 자기 자신 그리고 참된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일세. 자기 안에 있는 각각의 것이 남의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또한 혼의 각 부류가 서로들 참견하는 일도 없도록 하는 반면, 참된 의미에서 자신의 것인 것들을 잘 조절하고 스스로 자신을 지배하며 통솔하고 또한 자기 자신과 화목함으로써, 이들 세 부분을 마치 영락없는 음계의 세 음정, 즉 최고음과 최저음, 그리고 중간음처럼, 전체적으로 조화시키네 또한 이들 사이의 것들로서 다른 어떤 것들이 있게라도 되면, 이들마저도 모두 함께 결합시켜서는, 여럿인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하나인 절제 잇고 조화된 사람으로 되네 - [국가] P308


이로써 플라톤은 제자들에게 정의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짝 언급한다. 정의에 대한 물질적인 이익에 대한 논의조차 필요 없이 이미 이런 조화가 무너진 상태의 사람에게 이익이 무슨 상관이 있냐는 것이다. 결국 정의로운 것, 그 자체가 이익이라는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정의란 국가 안에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개인의 혼 안에서도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화를 이룬 상태가 정의, 올바름의 상태이고, 이 조화가 무너진 상태가 올바르지 않은 상태이다.

여기서 조화란 단순히 지배하는 자가 각자의 일을 맡기고, 지배받는 자가 이를 복종하는 조화가 아니다. 지배자와 지배받는 자 사이에 교감, 합의가 이루어져 각자의 일에 충실하는 것, 그것이 바로 플라톤이 말하는 국가의 정의이다. 지배받는 자도 지배하는 자의 통치에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누가 나라를 다스려야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스리는 자들과 다스림을 받는 자들 간에 '같은 판단(의견)'이 이루어져 있는 나라가 과연 있다면, 그 또한 이 나라에서 이루어져 있을 걸세. - [국가] P283


우리가 사는 국가는 과연 정의로운 국가일까? 국가 안의 여러 계층이 자신의 일을 하며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을까?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만족함이 서로에게 있을까?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가 그런 통치에 다같은 합의를 이루고 있을까?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국가의 정의, 그리고 개인의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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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로 유명한 E.H.카는 '사실의 기록하는 역사'보다 '해석의 역사'를 중요시한다. 그는 역사란 과거의 사실을 객관적으로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라는 기존의 생각이 사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의 수많은 사건이 모두 역사가 될 수 없기에, 역사가는 그중 현시대에 의미 있는 몇 가지 사실을 끄집어 내어 역사에 기록한다. 이 과정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가의 시각이나 관점이 배제될 수 없다. 그렇다면 역사란 역사가의 주관적인 생각을 담고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역사가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과거의 역사의 해석의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질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또 현재도 과거에 비추어질 때에만 완전히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이 과거의 사회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회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을 증대시키는 것, 이것이 역사의 이중적인 기능이다." - [역사란 무엇인가], 까지, P 79


 


 

이런 E.H.카의 주장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역사에 관련된 서적이 최근 출간된 일본인 학자 사토 마사루의 [흐름을 꿰뚫는 세계사 독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아날로지적 사고'를 강조한다. 아날로지적 사고란 현재 상황과 비슷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조금 더 지혜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결국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실패를 통해서는 현재에 그런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과거의 성공을 통해서는 그런 성공을 이어가기 위해서 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500년도 더 넘은 사건인 '임진왜란'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이 전쟁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현재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징비록]이 위대한 이유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런 사실을 바탕으로 앞으로 이와 같은 재난이 발생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징비록은 단순히 임진왜란의 역사를 기술하는 것에 뛰어넘어 그 전쟁을 판단하고 평가하고, 해석하고 있다.

사실 임진왜란이라는 개관적인 역사적 사실을 바라보는 중국과 일본과 한국의 시각은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교감 해설 징비록]은 기존에 출간된 다른 징비록들과 차이가 있다. 책 제목에서 보듯이 징비록을 단순히 번역하는 것에서 넘어 그 징비록의 내용을 해석하고 다른 문헌과 비교하고 있다. 저자인 김시덕 교수는 여러 자료, 특히 중국과 일본의 자료들과 징비록의 자료들을 대조하며 같은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삼국의 시각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임진왜란에서 자신들의 승전 부분만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백제 관전 투나 칠천량 해전, 울산성 전투 등을 강조한다. 백제관 전투는 평양성을 함락한 명나라 장군 이여송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쫓다가 백제관에서 패한 전투이다. 칠천량 해전은 이순신 대신 삼군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패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해전 중 우리나라가 유일하게 패한 전투이기도 하다. 울산성 전투는 이여송의 뒤를 이은 명나라 제독 양호가 울산에 쌓은 일본 왜성을 공격한 전투이다. 명나라 군대가 거의 승리를 거두었지만, 어리석은 판단으로 후에 일본군이 기사회생한 전투이다. 일본이 이런 전투들을 강조하는 것은 이 전투가 일본이 크게 승리한 전투이기도 하지만, 칠천량해전 외의 두 전투에서는 모두 명나라 군대와 맞붙어 승리했다는 것에 이유가 있다. 그러기에 일본은 백제관전투를 1000년 만에 중군과 싸운 전투로 본다.

"임진왜란 당시 일어난 수많은 전투 가운데 어떤 것이 중요한 전투였는지에 대해 조선, 명나라, 일본은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일본에서 중요하게 생각한 전투는 백제관 전투, 울산성 전투, 사천 전투 등 자신이 명군에 승리한 전투였다. 그중에서도 백제관전투에 대해 일본인들은 임진왜란의 국면을 결정한 중요한 전투임과 동시에, 고대 일본의 백제 구원군이 당군과 백촌강에서 맞붙은 이래 거의 천 년 만에 다시 중국군과 일본군이 정면으로 충돌한 전투라고 이해했다." [교감 해설 징비록], 아카넷, P 392-3

반면 일본이 크게 대패한 행주산성 전투 같은 경우는 단순히 권율 장군이나 조선군에게 패한 것으로 보지 않고, 행주성에 명나라 군대가 있었다는 왜곡된 기록을 한다. 자신들이 얕보는 조선에 대패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록은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은 임진왜란에서 중요한 시기인 1592년의 기록은 거의 없고, 다음 해 자신들이 참여해 평양성을 함락시킨 전투부터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들이 전쟁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전쟁의 승리 역시 자신들의 역할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을까? 방대한 징비록에 나와 있는 사관을 모두 분석하기 힘들지만, 류성룡이 전쟁을 바라보고 있는 시각은 조선의 수군, 특히 이순신이 전쟁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일본군이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점령한 후에 일본군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를 못 했다. 그들이 이렇게 파죽지세로 진군한 이유는 선조를 잡기 위해서인데 선조가 있는 의주를 놔두고 평양에 머문 것이다. 징비록에서는 그 이유를 이순신의 옥포해전과 한산도해전의 승리로 본다. 육지와 바다에서 진군하던 일본군이, 바다에서 길이 막혀 버린 것이다. 특히 일본 수군들은 식량을 비롯한 보급품을 수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평양까지 진군한 일본군에게 보급품이 끊겨 버린 것이다. 그들은 지원군도 보급품도 없이 평양에서 고립된 것이다. 이를 통해 전쟁의 승기가 잡히고, 의병들과 관군들의 반군으로 전쟁이 승리한 것으로 보는 것이 [징비록]의 시각이다.

징비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잘못된 판단들과 정책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돼어 있다. 이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동시에 임진왜란에서의 승리가 명군의 도움이 아닌 이순신을 비롯한 많은 군사와 백성들이 목숨을 버리고 싸워서 얻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외세에 의존하지 않는 자주적인 역사관으로 전쟁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을 모두 류성룡과 같은 시각으로 본 것은 아니다. 의주까지 도망간 선조는 전쟁의 승리가 이순신과 같은 장군들이나 백성들이 협력해서 얻는 것이 되면 자신의 입지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기에 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전쟁의 승리를 자신이 명군을 데려와서 승리한 것으로 해석한다. 결국 승리의 주역이 명나라 군대였고, 그 명나라 군대를 데려온 자신이 전쟁 승리의 일등공신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왜란에 적을 평정한 것은 오직 명나라 군대의 힘이었다. 우리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패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제 힘으론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도 함락하지 못 했다. - [역사 저널 그날 4], 민음사, P309

만약 징비록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는 지금도 임진왜란을 명나라와 일본의 전쟁으로, 명나라의 도움으로 우리가 승리한 전쟁으로 알고 있지 않을까? 징비록이 기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선조와 같은 몇 명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치부를 덮기 위해 왜곡한 잘못된 역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징비록을 읽으며 역사를 단순히 사실로 기록하는 것보다 그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는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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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혼란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순식간에 국가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일본군이 부산진 앞바다에 상륙한 날짜는 1952년 4월 13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한양을 점령한 것이 같은 해 5월 2일이었다. 일본군은 상륙한지 20일 만에 한양까지 진격해서 점령한 것이었다. 당시의 조선의 왕부터 신하까지 모두 혼란에 빠졌고, 대응체계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산진과 동례성은 쉽게 함락 당하고, 이일과 신립 장군은 패배하고, 한양을 도우러 왔던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의 3도 연합군 5만 명은 우왕좌왕하다가 전투다운 전투도 못하고 패배해서 도망쳤다.

이런 총체적인 혼란 상황에서 리더십의 문제가 발생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도망하고, 백성들은 그런 선조와 조정에 대한 원망으로 경북궁을 불태운다. 평양으로 피난 가서도 마찬가지이다. 일본군이 임진강 가까이 다가오자 백성들이 산으로 도망을 가기 시작한다. 그러자 선조는 신하들을 시켜 자신은 끝까지 평양에 남아있을 테니 함께 평양을 지키자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산속에 숨어 있던 백성들이 평양성으로 모여든다. 그러자 며칠 후 선조는 평양성을 버리고 도망간다. 이러니 어떤 백성이 리더의 말을 따르겠는가? 징비록에는 그 당시의 혼란 상황을 몇 가지 기록한다.

임금이 도망가다가 수라상을 차리니 군사들이 그 수라상을 먹어버리고 도망을 간다. 임금이 평양성을 버리려 하니 백성들이 모여들어 도망갈 거면 굳이 왜 숨어있는 우리를 평양성으로 불러들여 몰살시키려 하느냐며 임금이 있는 처소로 몰려간다. 각 고을마다 곡식창고에 약탈이 일어나고 방화가 일어난다. 군인들은 모두 뿔뿔이 도망가고 싸우려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리더십을 세울 수 있겠는가? 당시 조선의 관리들이 리더십을 세우기 위한 방법은 딱 한 가지뿐이었다. 무조건 목을 베는 것이다. 법이 세워지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공포로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일 먼저 일본군을 맞으러 간 이익 장군은 적이 온다고 소식을 전하는 백성의 목을 친다. 군사를 동요시켰다는 죄목이다. 신립 역시 청주에서 적이 온다고 보고하는 병사의 목을 친다. 평양에서는 동요하는 백성들 중에서 노약자나 부녀자를 잡아다 목을 치고 메단다. 약탈을 하는 사람들도 목을 친다. 징비록에 반복되는 말들은 바로 '목을 친다'는 말이다. 리더의 말이 안 먹히는 상황에서 공포로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다. 결국 애꿎은 백성들만 일본군에게 죽어나가거나 자기 나라 관리들에게 죽어나가는 상황이었다.

 

징비록에는 유성룡이 당시 이런 난국을 수습했던 과정이 나온다. 먼저는 임금에게 군사의 배치를 이야기한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장군들을 보내어 급한 부분부터 막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와 협상을 해서 원군을 이끌어 낸다. 더 나아가 도망가는 군사들과 백성들을 다독거린다. 무조건 목을 치기보다는 이 난국을 잘 수습하면 후에 공을 인정해 주겠다며 그들에게 비전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저녁 소곶역에 도착하지 아전과 병사들은 모두 달아나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기에, 군관을 시켜서는 마을에 가서 수색케 하니 그들이 몇 사람을 데려왔다. 나는 "나라가 평소에 너희들을 기른 것은 이런 날을 위해서인데 어찌 차마 달아날 수 있는가? 바야흐로 명나라 군대가 도착하야 나랏일이 참으로 급하니, 지금이 바로 너희들이 노력하여 공을 세울 때이다"하고 힘껏 타이르고는, 빈 책자 한 권을 꺼내 먼저 온 자들의 성명을 적고는 그것을 보여 주면서 "나중에 이것으로 공로를 평가하여 상을 내릴 것을 논하자고 임금께 아뢸 것이다. 이 기록에 실리지 않은 자는 난리가 끝난 뒤에 일일이 조사하여 처벌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 중략- 나의 이 명령을 들은 자들은 앞다투어 나와 땔감을 나르고 집을 짓고 솥과 가마를 설치하니, 며칠 사이에 모둔 일이 조금씩 갖추어졌다. 나는 나리를 만난 백성들을 채근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여, 오로지 지성으로 깨닫도록 타일르 뿐 한 사람도 매질을 하지 않았다. (P302-3)


 


 

그는 또 굶주림에 죽어가는 백성들로 인해 함께 마음 아파하며 군량미 중 일부를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때 적이 한양을 점거한 지 벌써 2년이 되었으므로 전쟁의 참화 때문에 천리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농사지을 종자도 얻지 못하여 태반이 굶어 죽었다. 성안의 살아남은 백성들은 내가 동파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와 이고 지고 하며 수없이 동파에 이르렀다. 총병 사대수는 경기도 파주의 마산으로 가는 길에 아기가 엉금엉금 기면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모습을 보고는 슬퍼하며 아기를 거두어 군대에서 기르게 하였다. 그리고 내게 "왜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아 인민들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찌하겠습니까!"라고 말을 하고 또 "하늘이 근심하고 땅이 슬퍼합니다"하며 한탄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P413-4)

결국 이런 백성을 향한 긍휼의 마음이 백성들을 움직이게 한다. 그리고 함께 싸우게 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서 헬조선이란 말이 유행이다. 한국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다는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정치권이나 정치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이 심하고, 인터넷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막말까지 이어진다. 이런 반응에 대해 장년층이나 노년층은 "우리 세대는 얼마나 힘들었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은 고생을 안 해 봐서 그래..."라는 말을 한다. 아마 정치 지도자들도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지만 같은 의미일 것이다. 그러기에 젊은 세대를 어루만지는 정책보다는 강압적인 정책을 더 많이 쓰는 것 같다. 과연 이 시대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더십이란 어떤 리더십일까? 목을 치는 리더십일까? 백성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는 리더십일까? 징비록을 읽으며 다시금 이 시대의 리더십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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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재난 영화를 좋아해서 자주 보는 편이다. 그런데 재난 영화에는 비교적 일관된 패턴이 있다. 먼저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재앙이 기다리고 있다. 이를 먼저 눈치챈 주인공이 -주로 과학자나 기자 등이 주인공의 역할로 나온다- 정부 관료나 책임자를 찾아가 사태의 심각성을 알린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재난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이들은 그런 경고를 무시한다. 대부분 영화에서는 관료적인 안일함에 빠져있는 책임자들이 이를 무시하고 비웃는다. 그리고 재난이 닥친다. 그때부터 대혼란이 다가온다. 경고를 무시하던 지도층들은 제일 먼저 탈출하고, 지휘계통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한다. 결국 주인공을 비롯한 일반 시민들이 나서서 재난과 싸운다는 것이 보통 재난 영화의 스토리이다. 오래된 영화이지만 [투모로우]나 우리나라 영화 [해운대]가 이런 재난 영화의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징비록]을 읽으면서 왜 이런 재난 영화가 떠오를까? 임진왜란 전에 많은 경고가 있었지만, 선조와 신하들은 이를 모두 무시한다. 당시 조선은 여러 차례 북방의 여진족과 남쪽의 왜의 침략을 받았지만, 모두 지역전이 전투였다. 20만이 넘는 대군이 바다를 건너온다는 것은 그들의 생각 밖의 일이었다. 그러기에 조선은 전쟁에 대비를 하지도 않고, 만약 전쟁이 일어나도 거뜬히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징비록]의 번역자인 김시덕 교수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물론 미래에서 과거를 보자면 결과적으로는 이러한 자신감이 화를 초래했지만, 16세기 말 일본이 20여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한다거나, 17세기 전기에 누루하지가 여진을 통일해서 몽골, 조선, 명, 티베트, 위구르를 정복한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민에게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면에서 류성룡은 임진왜란의 최대 패인을, 조선이 일본의 정세 변화를 세밀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기존의 대 왜구 전략을 고수하거나 북방에서의 성공을 과신한 데에서 찾는 것이다." - [징비록] P145


 

이렇게 전혀 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은 일순간에 마비가 되고, 군사들과 백성들은 모두 혼란에 처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라는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과정은 사건별로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질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부산과 동래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이 점령당하는 단계이다. 최근에 읽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이병주 작가의 [천명]이란 소설에서는 당시 적이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을 때, 조정에 올리는 보고들을 언급하고 있다. 경상 우수사 원균은 적선 90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했다가, 후에 150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그 후 경상감사 김수는 왜선 4백 척이 나타났다고 보고한다. 배 한 척마다 몇 십 명이 타고 있으니 병력은 만 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모든 재난상황에서 초기 파악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최근의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에서도 알 수 있다. 임진 왜란 초기의 상황인식이 이처럼 안일했다. 그리고 그 결과 파죽지세도 부산포, 동래성, 양산 등이 점령 당한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다운 전쟁 한 번 못해보고, 약삭빠른 지휘관들을 재빨리 달아나기에 급급했다.

두 번째 단계는 상주에서 이일 장군이 패하는 과정이다. 징비록에서는 당시 조선의 방어 체계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임을 이야기한다. 제승방략은 전쟁이 나면 일대의 군대가 한 한 곳으로 모여서 대기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을 파견하는 제도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각 지역별로 방어를 하는 진관제도가 중앙권력을 분산시키고, 토호세력을 양산할 수 있기에 이런 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런데 일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런 시스템은 순식간에 허점을 드러낸다. 조정에서는 전쟁의 소식을 듣고, 이일에게 군사를 데리고 가서 막게 한다. 이일은 한양에서 정예병 3백 명을 데리고 지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군대와 합류하려 한다. 그러나 한양에서 3백 명은 모이지 않고, 과거용 시험지를 들고 있던 유생 몇 명과 대신 끌려 나온 양반집 하인들 몇 명만 모여 있을 뿐이었다. 결국 너무나 소중한 사흘이란 시간을 기다리던 이일은 군대도 모으지 못하고 혼자 몸으로 내려간다. 대구에서 중앙 지휘관을 기다리고 있던 병사들은 시일이 지나도 지휘관은 오지 않고, 적은 가까이 오자 대부분 달아나고, 이일이 상주에 모였을 때 모인 군사는 수백 명뿐이었다. 그나마 도망가던 백성들을 잡아서 모아온 것이 전부였다. 더군다나 적이 온다는 것을 알리는 백성을 헛소문을 낸다며 처형시킨다. 그리고 불시에 적이 몰려오자 이일은 살겠다고 혼자 알몸으로 도망을 간다.

세 번째 단계는 신립이 충주에서 패하는 과정이다. 조정에서는 이일로서는 부족한 줄 알고 신립이 뒤에 보낸다. 그리고 신립은 충주에 도착해서 군사를 모은다. 징비록에서는 언급되지 않지만, 역사가들은 신립이 주변의 권고도 무시하고, 천혜의 요새인 문경새재를 버리고 탄금대 앞에서 배수진을 치고 전쟁에 임한 것을 패인의 원인으로 본다. 당시 신립은 여진족과 싸워 명성을 떨친 이름난 명장이었지만, 유성룡은 신립이 매우 교만하고 자만심이 넘치는 인물로 묘사한다. 그 결과 그는 독단적인 결정을 하게 되고, 그 결과 많은 군사들이 떼죽음을 당하게 된다.

마지막 과정은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는 과정이다. 신립이 패전했다는 소식을 듣자 임금과 신하들은 달아날 준비를 하고, 한양은 일대 혼란에 빠진다. 경북궁이 불타고, 한양을 구하러 올라오던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의 삼도의 병사 5만 명은 싸움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패하여 뿔뿔이 흩어진다. 이런 와중에서도 신각이란 장수가 첫승을 거두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참수를 시켜 버린다. 마지막으로 임진강에서 방어를 하기 위해 한응인과 김명원을 보내지만 지휘권의 혼란으로 패하고 만다. 총체적인 혼란과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는 상황이다.

이 과정을 보니 얼마 전 발생한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를 보는 것 같다. 자신만만하다가 위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고, 대응 시스템이 무너져 우왕좌왕하는 꼴을 보는 것 같다. 이것이 단순한 침몰사고나 전염병 사태가 아닌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나 국가적인 재난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결국 국가가 전쟁이나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면 지도자의 명철한 판단력과 함께 이에 대비한 체계적인 시스템이 필요하다. 아무리 뛰어난 인재들이 있어도 지도자가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시스템이 엉망이면, 아무런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를 않기를 바라며 징비록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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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최근에 몇 가지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 등으로 나라가 시끄럽고, 국가 시스템의 총체적 문제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런 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국가적인 위기다!' '재난 매뉴얼이 없다!'라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때뿐이고 금세 잊힌다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게 된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로 이런 같은 위기가 반복되는 가장 큰 이유는 위기를 통해 배우려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적인 위기 상황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큰 피해를 당하면, 위기에 대응하면서 느꼈던 부족함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자료나 책으로 출간하여 이를 보완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는 이런 노력들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비슷한 역사적 위기가 계속해서 반복되어 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임진왜란이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는 일본을 '왜'라고 부르며 얕보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사신으로 중 황윤길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고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다."라고 보고를 했지만, 선조를 비롯한 조정은 이 보고를 무시한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발생해 7년 동안 국토가 유린당한다. 이런 뼈아픈 경험을 당했으면 다시금 전쟁을 대비해야겠지만, 얼마 후 병자호란이 발생했을 때는 임진왜란보다 더 순식간에 국토가 유린당한다. 7년 동안의 국가비상사태를 통해 배우고 준비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허술한 역사인식이 한일합방의 슬픈 역사까지 이어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7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징비록]은 우리에게 매우 가치 있는 책이다. 이번에 아카넷에서 출간된 [징비록] 완역판을 읽으며 그 가치를 더욱더 소중히 느낀다.

사실 징비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까지 알려진 당시의 베스트셀러였다. 이 책의 번역하고 해석한 김시덕 교수는 이 책의 해제에서 임진왜란 후 징비록이 일본에 흘러간 경위를 설명한다. 당시 임진왜란은 명나라와 조선, 일본이 격돌하는 국제전이었고, 징비록은 이 전쟁을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기록하고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징비록을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해서 알 수 있었고, 다시 한 번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이 책을 오랫동안 연구했다는 것이다. 뼈아픈 전쟁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쓴 징비록이 한국에서는 외면당하고, 일본에서는 연구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그로 인해 같은 위기를 반복적으로 당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국가적 위기의 반복은 또한 리더십의 부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징비록]의 초반부에는 임진왜란 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의 보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황윤길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보고했지만, 김성일은 그렇지 않다고 보고했다. 역사적인 해석은 둘이 당파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보고를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징비록에 유성룡은 이런 보고를 한 김성일을 변호한다.

내가 김성일에게 "그대의 말이 정사 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으니,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어찌할 것입니까?"라고 물으니, 그는 "저라고 어찌 왜인들이 끝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경향 각지가 놀라고 미혹될 것이기에 이를 풀고자 할 따름입니다"라고 말하였다. (P116)

징비록은 전쟁 후의 기록이고, 유성룡의 사견이 들어갔기에 이런 말이 전부 인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또한 전쟁 전의 안이한 태도를 김성일 개인에게만 지울 순 없다고 생각한다. 책임을 묻자면 김성일의 보고를 그대로 받은 당시의 왕인 선조에 있다고 생각한다.

 

징비록을 읽으며 당시의 역사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위해 민음사에서 출간한 [역사 저널 그날 시리즈]를 같이 읽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일본으로 간 사신이 황윤길과 김성일뿐만 아니라, 허성이라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황윤길은 서인이고, 김성일과 허성은 동인이었다. 그럼에도 허성은 자신의 당파가 아닌, 황윤길의 의견에 따라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결국 사신들의 주된 의견은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보고였다. 그럼에도 선조는 자신이 듣고 싶은 보고만을 하는 김성일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이것이 제왕적 리더십의 한계이다. 제왕적 리더십은 무능한 리더가 위에 있으면, 전 조직이 무능해지는 것이다. 아무리 옳은 의견을 내놓아도 리더가 거부하면 소용이 없다. 그리고 참모진들도 리더가 싫어하는 의견을 내놓지 않는다. 리더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놓는 사람을 자신에 대항하는 사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옳은 소리를 하면 찍힌다는 이야기다. 현대사회에서 리더에게 찍히면 퇴사 정도가 전부이지만, 왕이 다스리던 시대에는 유배를 가거나 사약을 마셔야 했고, 심지어는 반역으로 몰려 삼족이 멸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일본의 침략을 뻔히 알면서도 왕의 결정에 아무도 반대하지 못 했을 가능성이 있다.



징비록을 읽으며, 역사적 위기의 반복이 단지 조선시대만으로 그치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움을 느낀다. 위기를 당해도, 그 위기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검증할 시스템도 존재하지 않고, 그것을 현명하게 극복할 리더십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인 것 같아 씁쓸하게 이 책을 읽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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