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다시 역사소설의 부흥이라고 한두 역사소설들이 많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한때는 참 많은 역사소설들이 출간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역사소설을 읽었습니다. 저도 역사소설을 좋아해서 어릴 적 집에 꽂혀 있던 월탄 박종화의 [자고가는 저구름아]부터 시작해서, 박경리의 [토지],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 조정래의 [태백산맥]같은 대작들을 읽었습니다.

[태백산맥] 이후 한동안 10권짜리 역사소설이 대세를 이루었죠. [아리랑]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대작 행진 속에, 민족의 아픈 역사를 관통하는 소설들이 계속 출간되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역사소설이 거의 가뭄에 콩 나듯이 한두 편 출간되었습니다. 그나마 한 권짜리 역사소설이 주로 방송매체와 결합된 퓨전식으로 인기를 끄는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다시금 역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역사소설들이 출간되고 있습니다. 너무 반가운 일입니다.  제가 요즘 읽었거나 읽고 있는 역사소설들을 잠깐 모아봤습니다.



 

 

첫 작품은 한때 [토지]를 출간한 적도 있는 솔출판사에서 최근에 출간한 [금강]이란 역사소설입니다. 소설의 큰 줄기는 중종 때부터 임진왜란까지 당쟁이 한창인 때에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충암 김정으로부터 시작된 동계라는 조직과 그 조직을 돕는 세 연인의 삶입니다. 연향, 미금, 부용이라는 세 여인의 삶을 통해 당시의 민초들이 겪는 아픔과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자가 중종 이후부터의 조선 역사를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고, 특히 당시 당파싸움의 정황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국어교사라는 저자의 이력을 알지 못했다면, 역사교사로 착각했을 정도의 방대한 역사적 지식들일 보이는 책입니다. 특히 충 정도의 구수한 사투리가 매우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책은 책의 저자를 보고 제 눈을 의심케 했던 이병주 작가의 [천명]입니다. 오래전에 타계를 해서 이제는 거의 작품이 출간되지 않고 있는 작가입니다. 하지만 역사소설에서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가입니다. 제가 젊은 날에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어제 받아서 아직 읽지를 못하고 있지만, 이병주 작가의 소설이니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병주 작가는 [지리산]과 [소설 남로당]으로 잘 알려진 우리나라 대표적인 역사소설 작가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행복의 사전]과 [바람과 구름과 비]라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모두 오래전 드라마로 방영된 이후 관심을 가지고 책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바람과 구름과 비]는 구한말 최천중이라는 인물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기 위해 인재를 모으는 내용입니다.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줄기 속에, 작가가 창조한 최천충이란 인물이 임오군란, 갑신정변과 같은 굵진한 역사적 사건을 뒤에서 조정했다는 허구사실을 넣어해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고 있습니다. 작가 특유의 방대한 스케일과 역사의식이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천명]이란 작품은 임진왜란의 영웅 홍계남이란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는 작품인데,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작가 특유의 스케일과 역사의식을 기대해 봅니다.



 

 

세 번째 책 역시 최근에 출간한 한수산 작가의 [군함도]입니다. [부초]라는 작품을 시작으로 한때 많은 책을 출간한 작가인데, 한동안 신작 발표가 없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번에 일제시대 때 군함도로 징용을 간 우리 부모님들의 이야기를 통해 아픈 세대를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히 주인공 지상이란 인물이 아내의 임신을 소식을 듣고 징용에 끌려가는 부분은 너무나 가슴이 아프게 읽었습니다. 군함도에서 처절한 삶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작가의 방대한 조사를 통해 군함도의 역사와 징용의 과정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 책은 최근 맨부커상 수상으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도 역사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역사소설에 포함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1980년 광주의 아픔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강 작가는 [검은사슴]으로 처음 만났는데, 그 특유의 섬뜩하고도 예리한 필치가 읽는 이의 마음을 졸이게 합니다. 이런 작가의 표현력으로 아직도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로 남아있는 광주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1980년 광주보다 그 후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을 그리고 있는 소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읽다가 너무 마음이 아프고 섬뜩해서 읽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던 소설입니다.

대부분 모두 조선시대부터, 일제시대를 거쳐, 1980년 광주까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를 그리고 있는 소설들입니다. 특히 잊지 말아야 할 우리 역사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소설들이 다시 출간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많은 독자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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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전 텍스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춘향전]이라는 고전 판소리 소설일 것이다. 이 [춘향전]은 판소리를 통해 널리 알려지다가 현대에 이르러서는 여러 번 영화화 되었다. 20세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춘향전 영화에서는 춘향의 정절이 주제였다. 고전적인 이런 춘향전의 해석을 크게 바꾼 영화가 2000년에 제작된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이란 영화다. 이 영화는 이몽룡과 춘향의 만남에 성적인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그래서 춘향을 너무 성적인 인물로 묘사했다는 거센 비난과 현대적 해석이란 찬사를 받기도 했다. 이 보다 더 파격적인 영화가 최근에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이란 영화이다. 이 영화는 춘향전을 방자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춘향 역시 정절의 여인이 아니라, 출세와 허영에 물든 여인으로 나오고, 몽룡 역시 성공을 위해 춘향을 이용하는 인물로 나온다.

 

 

서양에서 춘향전과 비슷한 텍스트는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일 것이다. 대표적인 영화가 올리비아 핫세가 줄리엣 역으로 나온 1968년작이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의 스토리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배경을 현대적으로 바꾼 영화가 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인 바주 루어만 감독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이 감독은 당시로서는 CF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감각적으로 만들기로 유명해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배경을 낭만적인 분위기에서 현대적이고 세련된 배경으로 바꾸었다. 역시 찬반이 많았던 영화이다.



 

 

한국의 고전 텍스트인 [춘향전]과 서양의 고전 텍스트인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처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많은 해석 중에서 어떤 해석이 정답일까?

하이데거 이후의 새로운 해석학의 경향이 존재해석학은 정답을 찾지 않는다. 기존의 해석학은 여러 해석 중에 가장 정확한 해석, 정답인 해석을 찾았다. 그러나 존재해석학은 텍스트 그 자체보다,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과정을 중요시 여긴다.

해석학은 해석하는 순간의 의미 생성과 관련된다. 의미 생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순간마다 이해에 따른 것이다. 어느 바다 한가운데 숨겨진 보물섬은 지도를 통해 찾아갈 수 있지만 해석학의 철학은 어떤 경우에도 그러한 보물찾기와 같은 과정이 아니다. 감추어진 보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보물섬을 찾아 떠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체험이 더 값지듯이, 해석학은 텍스트 안에 숨겨진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을 찾는 존재론적 경험에 따른 생성의 철학이다. 그래서 비로소 깨닫게 된다. 보물은 숨겨진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찾는 과정에서의 의미체험이었다는 사실을. - [해석학] P209

 

존재해석학은 존재와 존재가 속한 세계를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해석하는 주체를 인간인 '현존재'로 본다. 현존재가 존재와 세계를 해석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이다. 그런데 이 현재는 단순한 지금의 현재가 아니라 그동안의 과거,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와 연결된 현재이다. 결국 하나의 텍스트는 단순히 과거의 텍스트일뿐만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석한 모든 과거의 여정과 앞으로 새롭게 해석될 미래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지평'이라고 말한다.

다시 춘향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돌아가보자! 이제 춘향전이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해석할 때 중점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춘향전과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고전 텍스트일까? 아니면 이 텍스트를 해석해 왔던 모든 과정과 현재의 해석, 그리고 미래의 해석까지일까? 존재해석학은 이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을 해석으로 본다.


이런 존재해석학이 이제 '해체주의'와 만난다. 해체주의란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와 들뢰즈를 통해 시작된 문화비평적 성향이 강한 철학이다. 기존의 철학은 의미를 언어 속에 가두는 경향이 강했다. 다시 춘향전의 예를 들어보면 춘향전하면 떠 오르는 것은 춘향의 정절이다. 그러나 춘향전 속에는 다양하고 많은 의미들을 담고 있다. 춘향의 신분상승 욕구, 방자의 주인에 대한 도전 의식, 향단의 질투... 이 모든 의미들이 춘향전이란 이름이나 정절이란 의미 속에 감추어져, 다른 의미들은 모두 무의미가 되게 된다. 그래서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철학을 인용해 언어는 사물의 가장 특징적인 한 가지를 지칭하는 것이고, 이렇게 사물을 언어로 부르게 되면 다른 특징들이 모두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예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를 들어 어떤 그림을 보고 추상적이다라고 말하면, 그 추상적이란 말로 인해 그림의 다른 다양한 의미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해체주의란 사물의 언어와 의미 속에 숨겨져 있는 다양한 의미를 드러내고, 더 나아가 사물밖의 존재들과 연관성에서까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허물고, 언어의 틀을 해체하는 것이다.

이런 해체주의가 해석학과 만남으로서 기존의 '이성'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던 과학적이고 경험적인 획일화된 해석이 아닌, 다양하고 풍성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해체주의는 전통 형이상학의 이원론적 구조를 거부한다. 인간과 사물을 본질과 실존 도식으로 설명하는 체계 역시 거부한다. 이원론적 구조는 결국 일원성의 철학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인간을 본질과 실존으로 설명하는 체계 역시 인간의 현존재적 실존을 본질에 귀속된, 잠정적이며 극복되어야 할 것으로 설정한다. 해석학의 철학은 해체론의 작업을 통해 새로운 사유로 도약할 것이며, 해체주의의 내용 없음 역시 해석학을 통해 의미론과 진리 이해의 체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석학] P245



결국 이제 해석은 단순한 텍스트의 해석이 아닌, 그 텍스트라는 언어나 의미 속에 감추어진 풍부한 해석이 드러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칮 너무 다양한 해석으로 인해 길을 잃고 허무주의로 빠져갈 수 있다. 이것을 잡아 주는 것이 다시금 존재에 대한 물음이다. 과연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속한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그리고 나와 세계를 근거로 해석하는 텍스트는 어떤 다양한 의미를 품고 있는가? 존재해석학에 대한 많은 글을 읽을 수록 '나', '세계', 그리고 '텍스트'라는 세 단어로 좁혀짐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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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종영한 [육룡이 나르샤]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보았다. 개인적으로 이 드라마에서 가장 관심 있게 본 부분은 정몽주와 정도전의 관계였다. 우리가 흔히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정도전을 새 왕조를 세운 혁명가로 알고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정몽주를 고려라는 무너져 가는 구습을 지키려는 수구세력으로, 정도전을 친구의 죽음을 온몸으로 감당하고서라도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선구자로 보고 있다. 그러나 드라마의 말미에서 정도전은 암살을 당하고, 후에 역사가 정도전을 역적으로 볼 것을 시사한다. 실재로도 조선시대에 정몽주의 제자들인 사림이 등용되면서 정도전은 조선을 세운 인물이지만, 오랜 기간 역적으로 평가되었다. 최근에서는 다시 정도전의 결단과 개혁을 평가하고 있는 책과 드라마가 인기를 얻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역적이고 누가 충신인가? 시대마다 이들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지 않을까? 현시대에는 정도전의 새로운 개혁이 평가되고 있지만, 후세에는 정몽주처럼 충절이 다시 평가되지 않을까? 결국 역사란 현세대의 해석에 의해 새롭게 쓰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대화로 유명한 EH 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저자는 역사가를 마치 시장에서 생선을 사는 사람에 비유한다. 생선을 사는 사람은 자판에 널려 있는 여러 가지 생선 중에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생선을 사서,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역사 역시 사람에 의해 수집되고 재편된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는 자기 마음대로 역사를 조작할 수 있는가? 아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수집하고 재편하는 것은 바로 그 역사가가 속한 현재의 시대의 눈을 통해서이다. 그러기에 과거는 현재에 의해 해석되고, 현재는 과거에 의해 해석됨으로써,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EH 카의 역사이론 역시 철학의 영향을 받고 있다면 어떨까? [해석학]이란 책을 읽으며, 특히 가다머에 대한 글을 읽으며, 왜 자꾸 EH 카의 글들이 떠오르는 걸까?

역사학자들 입장에서는 조금 기분이 나쁜 이야기 일 테지만, 철학자들은 철학을 모든 학문의 근본으로 본다. [철학 이야기]로 유명한 월 듀란트는 철학의 전쟁터의 최전방 학문으로 보았다. 미지의 영역의 개척에 가장 앞장을 서다가 그것이 학문의 영역으로 돌아오면 후방의 개별 학문에게 넘겨준다는 것이다. 현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설은 대상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대상과 의식의 연결 관계를 연구함으로써 철학의 모든 학문의 기초학문으로 삼고자 하는 원대한 포부를 가졌다. 후설의 제자이자,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존재 해석학을 시작한 하이데거는 개별 학문의 대상인 존재자의 기초에 있는 존재의 의미를 밝히려 하였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지금까지의 철학은 존재자와 존재를 동일시하는 학문이었고, 존재자를 연구하지만 존재자의 근원인 존재의 연구는 등한시했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존재의 해석을 통해 모든 학문의 근거를 철학이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해석은 오직 인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존재는 항상 시간 속에서 존재하기에 시간을 통해 해석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런 현존재의 실존적 상황을 '세계-내-존재'로 보았다.

 


이런 존재에 대한 하이데거의 탐구는 과거의 텍스트를 해석하던 해석학을 존재를 해석하는 존재해석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 존재는 항상 시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시간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결국 과거와 현재, 미래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밝혀지는 것이다. 이것을 하이데거는 '해석학적 지평'이라고 부른다. 마치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듯이 텍스트는 존재라는 터전 위에 떠 있다. 그리고 그 존재라는 터전은 과거와 현재의 흐름 속에 있다. 결국 텍스트나 존재가 해석하기 위해서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이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석학]이란 책에서는 해석학적 지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텍스트는 그것이 자리한 문맥 위에 놓인다. 컨텍스트를 떠나 텍스트는 이해되지 않는다. 지평이란 일차적으로 해석학적 작업이 수해되는 전체적인 컨텍스트를 가리킨다. 나아가 해석학적 지평은 해석학적 순환 구조나 앞선 이해, 이해의 존재론적 터전을 지칭하는 모든 해석학적 터전을 의미한다.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떠 있듯이 하나의 텍스트가 자리한 터전이다. 바다에 떠 있는 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다라는 지평을 바라봐야 하듯이 텍스트는 해석학적 지평을 떠나 올바르게 이해되지 않는다. - [해석학] P125


 

 


이런 하이데거의 존재해석학을 이어받은 사람이 '한스 게오르그 가다머'이다. 가다머는 현재의 존재는 과거의 흐름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기존의 해석을 선입관으로 부르는 개몽주의사상을 배척하고, 선입관 역시 해석의 재료가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것을 '존재해석학적 영향사', 또는 '영향사의 원리' 등으로 부른다. 결국 현재는 과거에 의해 해석되고, 과거는 또한 현재에 의해 해석되는 것이다.

가다머의 영향사적 원리는 사실적 역사를 넘어 역사를 해석하는 역사학적 작용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그 작용을 코레트는 '역사 내에서 영향을 미치고, 그곳에서 해석되며 역사적 전승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해석학은 이해의 과정에서 역사의 현실성을 벗어나 있지 않다. 이렇게 요구된 것이 가다머의 영향사에 담긴 의미이기에 그는 영향사를 전승과 역사의 상호영향, 상호작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해는 자신의 본질에 따라서 하나의 영향사적 과정으로 규정된다. 현재라는 지평은 과거 없이 형성되지 못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의미지평에 대한 해석의 토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 [해석학] P165



결국 가다머에 의하면 하나의 텍스트는 어떠한 시점에서 완전히 해석되어 결론내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해석되어 가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텍스트는 언제나 해석학적 차원에서 이해되며, 완결되어 있지 않다. 텍스트는 완결된 대상이 아니라 이해 과정에 놓여 있는 하나의 단계이다. 해석학은 늘 과정에 있다. 그것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향한 길이며, 완성이 아니라 과정 중에 있는 것이다. 해석하는 인간의 존재는 길 위에 있는 존재다. - [해석학] P168-9



이제 다시 앞에 정몽주와 정도전의 사건으로 올라가 보자. 결국 누가 충신이고 누가 역적인지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해석되어질 것이고, 이런 해석은 열려져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은 지금의 현시점의 해석을 절대화해서 그것으로 모든 텍스트나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편협함의 위험을 또한 지적하는 것은 아닐까?

끝으로 가다머의 이론을 읽으며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떠올렸지만 실제로 EH 카가 하이데거나 가다머의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 했다. 어떤 글에서는 둘의 사상을 대립되는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기도 했다. 결국 가다머와 EH 카의 관계성은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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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의 초반 내용은 '정의'에 대한 논쟁이다. 플라톤은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여러 인물들과 대화를 하게 한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정의란 존재하는가?'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절대적 정의가 있는가?' '정의의 본질과 기원은 무엇인가?' '사람은 보상 없이도 그 자체로 정의를 행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들 하게 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대해 대답하기 위해 개인보다 덩치가 큰 '국가'를 예로 들어 설명을 한다. 그러나 사실 플라톤의 의도는 국가를 통해 개인의 정의를 설명하기보다는 정의로운 국가, 그가 말하고 싶어 하는 이상 국가의 통치를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플라톤에게는 정치적 야망이란 것이 존재했던 것 같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국가]란 책은 자신에게 통치를 맡겨 달라고 호소하는 '선거공약'과 같은 면이 있다. '내가 국가를 맡으면 이렇게 통치하겠다!' '이것이 바로 이상 국가의 모습이다!' 이런 의도가 담겨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국가 3권에서 플라톤이 가장 중점을 두고 이야기하는 것은 국가의 핵심 계급이라고 하는 수호자(전사) 계급의 교육이다. 앞서서 플라톤은 수호자 계급의 교육을 위해 거짓되고 음란된 신들의 이야기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플라톤의 적수인 '호메로스'와 그의 시들인 '일리야드'와 '오딧세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이런 시들에 나오는 거짓과 음란을 조장하는 내용을 수호자가 되기 위해 교육받는 젊은이들에게 들려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단순히 시뿐 만 아니라, 그 시에 맞추어서 불리는 리듬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는 광적이고 음란하고 폭력적인 음악을 들려줘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혼을 병들게 한다고 말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체육과 음식, 미술 등을 이야기하며, 이런 것들로 인해 나쁜 영향을 받지 않는 수호자 계급을 교육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들이 오로지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전사로 교육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오직 시인들에 대해서만 감시하며, 그들로 하여금 좋은 성격의 상을 자신들의 시 속에 새겨 넣도록 강요하거나, 아니면 우리 곁에서 시를 짓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 또 다른 장인들에 대해서도 감시하며, 동물들의 상이나 건물에도, 그리고 그 밖의 어떤 제작물에도 이 나쁜 성경을, 무절제하고 비굴하며 꼴사나움을 새겨 넣지 못하도록 막거나, 아니면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우리 곁에서 제작 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야만 하는가? 그래서 우리의 수호자들이, 마치 나쁜 풀밭에서 그렇게 하듯, 나쁨의 상들 속에서 양육됨으로써, 매일같이 조금씩 여러 군데에서 뜻어 먹다 보니 결국엔 많은 것을 뜯어 먹게 되어, 자신들의 혼(마음) 안에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큰 나쁜 것을 형성하는 일이 없도록 말일세. 오히려 우리는 아름답고 우아한 것의 성질을 천부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그런 장인들을 찾아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젊은이들이, 마치 건강에 좋은 곳에서 거주함으로써 그렇게 되듯, 모든 것에서 적을 보게 되고, 이로 인해서 아름다운 작품들에서 뭔가가, 마치 좋은 곳에서 건강을 실어다 주는 산들바람처럼, 그들의 시각과 청각에 부딪쳐 오게 되어, 어릴 적부터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아름다운 말과 닮음과 친근함 그리고 조화로 이끌릴 걸세."(P219-20)



플라톤의 교육론은 자라는 세대에게 단순한 지식뿐만 아니라 좋은 마음, 다시 말하면 정의로운 마음의 기초를 심어주자는 것이다. 이런 플라톤의 교육론은 매우 타당한 면이 있지만, 점점 엘리트 교육 쪽으로 이야기가 변해 간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통치자의 기질과 수호자의 기질과 일반인의 기질이 나누어져 있음을 이야기한다.

"이 나라에 있는 여러분은 실은 모두가 형제들입니다. 그러나 신은 여러분들을 만들면서, 여러분은 중에서도 능히 다스릴 수 있는 이들에겐 탄생시에 황금을 섞었는데, 이들이 가장 존경받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반면에 보조자들에겐 은을 섞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들이나 다른 장인들에게는 쇠와 청동(구리)을 섞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모두가 동족이기에, 대개는 자손이, 그리고 은의 자손에게서는 황금의 자손이, 그리고 그 밖의 모든 자손이 이처럼 서로의 자손에게서 탄생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통치자들에게 인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지시하기를, 통치자들은 그들의 자손들의 혼에 그것들 중의 무슨 성분이 혼합되어 있는지부터 지켜보는 것에 있어서 훌륭한 수호자가 될 것이며, 또한 무엇보다 이를 예의 주시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그들의 자손이 청동 성분이나 쇠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 태어나면, 어떤 식으로도 결코 동정하지 말고, 그 성향에 적합한 지위를 주어서 장인들이나 농부들 사이로 밀어 넣을 것이로되, 반대로 이들 중에서 누군가가 황금이나 은의 성분이 혼합된 상태로 태어난다면, 그런 사람을 예우하여, 수호의 지위나 보조의 지위로 상승시킬 것입니다. 이는 쇠나 청동의 성분을 지닌 수호자가 나라를 지키게 될 경우에는, 나라가 멸망하리라는 신탁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P415-6)



플라톤의 이야기를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 개인적으로 젊은 세대에게 좋은 마음과 이미지를 심어 주는 교육의 중요성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요즘처럼 폭력적이고 성적인 영상에 노출되는 세대에는 더욱더 그렇다. 지도층의 양육을 위해 어릴 때부터 이들을 교육하는 것에는 반절 정도 동의한다. 장점과 단점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도층의 교육에 있어서 혈연보다는 그 재능을 보고 선택하는 것도 동의한다. 다만 플라톤의 교육은 너무나 금욕적이고, 억압적인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언가를 계속 금지시키면 그것을 더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고, 그 욕망을 누르면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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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콘서트]나 [역사콘서트]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황광우에 의해 쓰여진 [철학의 신전]이란 책에서는 플라톤의 철학을 호메로스의 신화에 대립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 저자는 플라톤을 이상주의적 정치적 야심가로 보는 반면, 호메로스는 인간적인 현실주의자로 보았다. 그러기에 호메로스는 인간적이고 변덕스러우며, 정욕적인 신들을 노래한다. 반면 플라톤은 이런 호메로스적인 신화가 그리스 문화와 청년을 병들게 한다고 본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당시 그리스 사회에 현실적인 생각인 생각들이 매우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1권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한 소피스트의 괴팍한 주장이 아니었다. 오히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은 고대 아테네인의 상식을 반영한 주장이었다. 역사가 투기디테스는 기록했다. "약육강식의 원칙을 존중하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투항하십시오. 강자에 대한 약자의 증오는 강자의 폭력을 유발할 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보다 약한 나라이며, 여러분이 독립할 수 없다면 굴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신의 법칙입니다." - [철학의 신전] P49

 

플라톤의 국가 2권에서의 대화에서는 이런 당시의 그리스 사회에 만연한 정의에 대한 회의감을 여실히 볼 수 있다. 2권에서 대화자는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 소크라테스 세 명이다. 제일 먼저는 플라톤의 형으로 알려져 있는 동시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글라우콘이 먼저 대화에 나선다. 그는 앞선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이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더 밀어붙인다. 이것은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을 동의해서가 아니라, 소크라테스가 당시에 만연하던 이런 주장들을 더 명확히 논박해 주기를 바라서이다. 글라우콘의 주장은 어찌 보면 홉스의 [사회계약론]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분명히 이렇게들 말하고 있으니까요. 본디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는 것이 좋은 것이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당한 것은 나쁜 것이지만, 그걸 당함으로써 입는 나쁨이 그걸 저지름으로써 얻는 좋음보다 월등하게 커서, 결국 사람들이 서로를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고 또 당하기도 하며, 그 양쪽 다를 겪어 보게 되었을 때, 한쪽은 피하되 다른 한쪽을 취하기가 불가능한 사람들로서는 서로 간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거나 당하지 않도록 약정하는 것이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씀입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연유가 되어,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률과 약정을 제장하기 시작했으며, 이 법에 의한 지시를 합법적이며 올바르다고 한 것이다. 그러니까 실로 올바름의 기원이며 본질이라는 거죠, 그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최선의 경우와 그걸 당하고도 그 보복을 할 수  없는 최악의 경우, 이 두 경우의 중간에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P126-7)

 

글라오콘은 이런 주장을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 '기게스의 반지'이야기를 한다. 기게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반지를 얻고, 그 반지를 통해 왕비와 부정을 저지르고, 왕을 살해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불의를 알 수 없다면 결국의 불의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폴 버호벤 감독의 [투명인간]이란 영화가 생각나는 대화이다. 결국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정의는 남의 이목이나 보복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두 번째 대화자로 나선 아데이만토스는 동생 글라우콘의 주장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사람들이 정의를 행하는 이유는 타인의 평판이나 죽은 후의 보상 같은 결과적인 것 때문이고, 이런 것이 없이도 정의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사람들은 모두 불의를 저지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저지를 용기가 없거나, 그 뒷감당을 할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다만 용기 부족이나 노령 때문에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무력함 때문에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수가 없어서, 그런 짓을 저지르는 걸 비난한다는 것을 말씀입니다. 사실 이러하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누구든지 맨 먼저 그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면, 맨 먼저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를 사람이 그 일 것이며, 그것도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그럴 것이기 때문입니다. (P141)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의 주장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한 생각들과 너무 닮아있다. 정의를 지키는 사람은 손해를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결국 이익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불의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만, 자신들이 권력이나 부를 가지게 되면 면 똑같은 불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은 사람들이 절대적인 정의를 믿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당시의 이런 생각들에 동의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의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함으로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가 이에 대한 확실한 반론을 펴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개인에게 있어서 정의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가에서의 정의를 이야기한다.

이 문제의 탐구를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이 내겐 생각되네. 이를테면, 그다지 시력이 좋지 못한 사람들더러 작은 글씨들을 먼 거리에서 읽도록 지시했을 경우에, 어떤 사람이 이런 생각을, 즉 똑같은 글씨들이 어디엔가 더 큰 곳에 더 큰 글씨로 적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서, 먼저 이것들을 읽고 난 다음에, 한결 작은 글씨들이 이것들과 혹시 같은 것들인지를 살피게 된다면, 이는 천행으로 여겨질 거라고 나는 생각하네.(P145)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먼저 국가의 정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국가에 널리 퍼져있는 잘못된 신화를 이야기한다. 신화에서 신들은 다른 사람으로 변신을 해 간통이나 부정을 저지른다. 그러나 플라톤은 신은 정의롭고 완전한 존재이지, 그런 부정을 저지르는 존재는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지어낸 거짓 신화가 국가에서 각자의 정의에 맡게 교육받는 젊은 세대에게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플라톤은 글라우콘과 아데이만토스가 대신 주장하는 사람들이 평판을 염두해 두거나 피해를 당하기 싫어서 정의를 행할 뿐, 능력만 있다면 앞장서서 불의를 행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을 옳다는 생각들은 당시에 그들이 어려서부터 배우는 잘못된 신화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 시대의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까? 어떤 잘못된 성공신화를 배울까? 법을 어겨서라도 성공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정의라고 믿지는 않을까? 플라톤이 맞서서 싸우려 했던 것은 일개 소피스트가 아니라, 그 당시에 만연했던 정의에 대한 회의적이고도 상대적인 생각들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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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5-19 23: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에 관한 장문의 글이네요.
책의 내용부터 현대의 학생들에 관한 물음까지 멋집니다.

가을벚꽃 2016-05-19 23:27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읽었던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을 다시 읽으며 한 챕터씩 정리하고 있는 중이예요. 2천년도 훨씬 전에 쓰여딘 글이 이 시대의 상황과 너무 비슷해서 나름 쓸 내용이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