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에 나는 근대와 현대의 서양철학을 신의 존재를 배제한 도덕을 세우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생각했다. 신의 존재를 믿으면 도덕에 대한 논의는 매우 간단하다.


"신이 존재한다. 그리고 신의 뜻대로 사는 자에게는 죽은 후에 보상을 받는다. 따라서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의 뜻대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 존재를 빼면 그동안 쌓았던 도덕의 틀은 다 무너지고 만다. 그리고 나타나는 것은 혼돈과 공황상태이다. 19세기말 유럽은 이런 정신적인 혼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네형제들]의 이반의 말처럼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생각이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의 생각이었다. 결국 철학자들은 이런 혼돈에서 도덕을 세워야 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칸트와 헤겔이다.(이 책에서는 베르그송까지 같은 범주에 넣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아직 베르그송의 책은 접해보지 못했다.) 그들은 신의 존재 대신 절대이성이나, 선의지같은 개념을 통해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했다.


젊은 시절 나는 이들의 사상에 매료되었다. 특히 칸트의 사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인간 감성과 오성 너머에 있는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대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의지를 통한 도덕적인 삶을 추구하는 그의 사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이 책에서 역자가 쓴 '독서카드'라고 이름 붙은 서문에는 칸트가 계몽(이성)과 종교 간에 선 긋기를 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순수이성의 명령이다. '말해서는 안 되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실천이성의 명령이다. 칸트의 계몽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정식이 부여한 한계 안에서만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계몽의 이러한 한계가 궁극적으로 칸트가 옹오화고자 했던 한계로서의, 한계 긋기로서의 계몽이 아니겠는가? - [데리다의 오늘, 오늘의 데리다] 중에서 P25


그러나 칸트의 사상은 마치 출구를 찾지 못하는 고성과 같았다. 일단 멋지게 보여서 한 번 들어가면 너무나 복잡한 내부의 구조때문에 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복잡한 고성에서 출구를 찾는 것을 포기했다. 아니면 어렴풋이 먼 곳에서 출구를 보고, 그 출구가 내가 생각했던 화려한 출구가 아닌 너무나 초라한 출구여서 무시햇는지도 모르겠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은 1994년 이스라엘의 헤브론시의 사원에서 이스라엘 극우 단체 소속의 의사가 팔레스카인 40명을 학살하는 '헤브론 사건' 이후 자크 데리다와 잔니 바티모가 카프리 섬에서 공동 주관한 세미나를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그는 극단적인 종교의 대립에서 출구를 찾고자 세 권의 고전을 해석한다. 헤겔의 [신앙과 지식], 칸트의 [순전한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다. 데리다는 이 세 명의 철학자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저서에서 어떤 답을 찾았을까? 이제부터 읽을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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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리나라에 '질 들뢰즤'의 철학이 한참 유행하던 때가 있었다. 들뢰즈이 [천개의 고원]이 출간되고, 그 후 한국 학자가 들뢰즤의 책을 해석한 [노마디즘]이란 책이 출간되었다. 철학책을 완독하기보다는 소장하기를 더 좋아하는 개인적 성향으로 인해 얼른 이 책들을 구입했었고, 여러 차례 읽기를 시도했지만 끝내 포기했다. 내용도 어렵거니와 방대한 분량, 그리고 마침 그 시기에 밀어닥치는 일들로 인해 집중해서 읽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이 책들은 내 책꽃이 맨 위에 꽃인 채로 나의 오래된 숙제가 되었다.


[니체를 읽는다]라는 책의 부제는 '막스 셸러에서 들뢰즈까지'이다. 니체에 대한 여러 해석자의 사상을 제시하며 '들뢰즈'의 사상을 맨 마지막에 놓고 있다. 들뢰즈의 이름을 발견하는 순간부터 니체의 사상이 여러 철학가들에게 해석되고, 들뢰즈까지 이르는 과정이 매우 기대가 되었다. 그러나 들뢰즈에 이르는 순간, 역시 들뢰즈의 사상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시금 들뢰즈에 대한 숙제가 생각나게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책에서는 니체에 대한 들뢰즈의 해석을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부분에 초점을 두고 설명하고 있다. 들뢰즈는 힘을 '능동적인 힘'과 '수동적인 힘'으로 나눈다. 능동적인 힘은 스스로 가치를 만들어 가고 세워가는 힘이라면, 수동적인 힘은 타인의 힘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로 인해 능동적인 힘이 생의 다양성을 긍정한다면, 수동적인 힘은 이것을 부정한다.


능동적인 힘과 반동적인 힘의 차이는 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이며 유형론적인 차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생과 세계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른 태도를 취하는 힘에의 의지에 입각한다. 능동적인 힘은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반면에, 반동적인 힘은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당야서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긍정하는 힘에의 의지는 건강하고 진정한 것임에 반해서, 생의 고통과 즐거움 그리고 다양성을 부정하는 힘에의 의지는 병약하고 왜곡된 것이다. - [니체를 읽는다] 중에서 P272-3


영원회귀 역시 마찬가지이다. 들뢰즈가 해석한 니체의 영원회귀는 똑같은 삶의 반복이 아니다. 들뢰즈에게 있어서 영원회귀는 매 순간 다른 삶이며, 능동적인 힘을 가진 사람은 매 순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그에게 세상은 다양성과 우연성들로 넘쳐나며, 우주는 목적성이 없다. 그에게 삶이란 게임이며, 세상이란 놀이터이다.


이에 대해 우주가 아무런 목적도 없다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우주 안에서 잘 놀기 위해서 필요한 확실성이다. 모든 놀이는 그때그때 주어지는 사건을 우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과 동시에 예측할 수 없고 소망되는 것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으로 보면서 긍정하고 사랑할 때 진정으로 행해질 수 있다. 우연적인 것들은 필연적인 것으로서 모두 서로 연결되 있다. 따라서 진정한 놀이꾼은 개연적이 아니라 숙명적이고 필연적인 수를 긍정하기 위하여 바로 우연의 전체를 긍정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안다. - [니체를 읽는다] 중에서 P284-5


사실 이 책에 나온 들뢰즈의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한 분량은 16페이지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짧은 분량으로는 들뢰즈가 니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불가능하고, 들뢰즈의 사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더군다나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들뢰즈를 비롯한 많은 현대학자들이 니체의 철학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접하면서 니체를 바라보는 다양성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철학을 접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과 경험으로 그 철학을 해석한다. 그러기에 일단 철학은 개인의 영역으로 들어가 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치면 왜곡되고 뒤틀릴 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런 왜곡되고 뒤틀리는 과정을 최소화하는 것은 다른 사상가들의 글들을 접하면서 다양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니체를 읽는다]라는 작은 책을 통해 니체를 향한 나의 생각이 넓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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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니체의 사상을 세 가지로 요약할 때 '초인사상', '힘에의 의지'(예전에 많은 책들에서는 '권력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햇었는데, 이 책은 '힘에의 의지'라는 단어로 번역한다.), '영원회귀'로 이야기 한다. 이 세 가지 사상 중 가장 논란이 많은 사상이 바로 '영원회귀'이다.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그 반복되는 삶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없이 그대로 반복되는 삶인가, 아니면 자유의지에 의해 매 번 바뀔 수 있는 삶인가? 단지 이것은 니체의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삶인가? 그렇다면 이런 삶을 생각함으로서 우리가 얻는 심리적 효과는 무엇인가? 영원회귀는 이런 끊임없는 질문들을 이끌어 낸다.


 

이런 영원회귀의 사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인 학자가 우리에게는 정치철학자로 잘 알려진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하이데거의 제자이자 연인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 사상을 조화를 시켜서 해석한다. 많은 학자들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비판한다. 왜냐하면 힘을 가진 사람이 영원히 반복되는 삶에 갇힌다면, 그는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진정으로 힘에 의지를 가진 사람만이 반복되는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가 탄생에서부터 지금에 이르는 과거 전체를 긍정할 때는 특정한 이유나 원인도 없이 현재의 순간을 긍정할 때이다. 이러한 대긍정의 순간은 강렬한 기쁨을 수반한다. 그때 우리는 이러한 기쁨이 존재하기 위해새서 과거에 경험했던 모든 고통과 고난이 반드시 필요했다고 느끼며, 나아가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원했다고 느낀다. 이 경우 우리는 자신의 힘이 최고도로 증대되었고 의지가 자유롭다고 느낀다. 최고의 힘 감정은 과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그렇게 의욕했던 것'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주어진다. 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니체가 말하는 과거에 대한 원한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 [니체를 읽는다] P120-1


그러나 이렇게 한나 아렌트처럼 영원회귀를 해석하면 결국 영원회귀는 심리적인 것이 되게 된다. 그래서 '알렉산더 네이하마스'는 이런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한다.


니체에게 우리의 삶이 정당화되는 때는 우리가 현재를 긍정하면서 또한 모든 과거도 긍정하는 순간이다. 그때 우리는 비록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일이 당시에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고, 이제는 그 당시에 일어났던 것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헥 과거를 긍정하는 자는 과거건 미래건, 우연적이건 의도적이건, 선이건 악이건, 세계의 모든 것의 영원회귀를 원한다. - [니체를 읽는다]P237


더 나아가 '아이반 솔'은 영원회귀가 역사적으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심리적인 효과도 없다고 말한다. 솔은 똑같은 사건을 겪는다고 해도, 똑같은 사건을 알고 겪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똑같은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똑같은 사건이 반복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영원회귀가 실제로 존재한다 해도 당사자는 그 반복된 삶을 기억하지 못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심리적으로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접할 때마다 나는 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소설의 첫 부분이 생각난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찬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중에서


밀란 쿤데라는 니체의 영원회귀를 이야기 하지만 그것을 믿지는 않는다. 대신 그 영원회귀를 통해 실제 우리가 사는 삶을 대비시킨다. 밀란 쿤데라에게 영원회귀의 삶은 무거운 삶이고, 일회적인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삶은 가벼운 삶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가벼운 삶에서 무거운 삶을 추구한다. 밀란 쿤데라는 그의 소설에서 가벼움이 옳은지, 무거움이 옳은지를 결론을 내지는 않는다. 다만 토마시라는 인간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 속에 갈등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줄 뿐이다.



나는 니체 역시 토마시처럼 매 순간을 괴로워하고 갈등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초인이 되고 싶어하고, 힘에의 의지를 추구하는 니체에게 일회적인 삶이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삶이 일회적이고, 모두 죽음을 향해 가고, 죽음 후에 철저한 무(無)의 세계로 떨어진다면, 삶은 가볍다 못해 존재 가치가 없을테니까... 개인적으로 니체에게 영원회귀란 사상은 초인이 살아갈 수 있는 세계관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일회적인 삶이라면 초인도 영원회귀의 삶도 모두 허무한 것이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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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철학의 해석에서 가장 권위있는 현대 철학자를 이야기 한다면 당연히 '마르틴 하이데거'를 언급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이데거 철학은 어렵기로 소문이 나 있다. 젊은 시절에 개인적으로 존경하던 노교수님이 계셨다. 독일까지 가서 학위를 받으신 분이였는데도 하이데거를 이야기 하면서 자신은 아직도 [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하셨다. 당시에는 참 겸손하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하이데거의 책을 접해 본 후 그 말이 이해될 정도였다.


그럼에도 니체의 해석에서 있어서 하이데거는 들뢰즈와 함께 독보적인 인물로 꼽힌다. 오래 전에 읽은 프랑스학자 앨런 슈프리트가 쓴 [니체와 해석의 문제]에서는 주로 하이데거와 데리다의 니체 해석에 대해 언급하는데, 두 학자의 상반된 니체에 대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저작들에서 하나의 '총체성'을 발견해서 니체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그 총체성이 니체를 해석하지 못하게 하는 병폐라고 이야기 한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니체의 저작들에서 나타나는 총체성이란 기존의 형이상학적 세계를 부정하고, 니힐리즘의 세계를 긍정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말 역시 인격적인 신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세계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니체를 읽는다]에서는 하이데거는 니체철학이 기존의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거부하고 '힘에의 의지'에 의해 니힐리즘적인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니체의 철학이 '힘에의 의지'를 통해 지배하는 철학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광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대인은 자신을 힘에의 의지의 주체로 간주하지만, 사실은 힘에의 의지의 수단에 불과하다. 현대 기술사회에서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자들만이 인간을 위한 에너지를 내놓도록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마저도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발휘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존재자들에 대한 지배를 위해서 자신의 심신을 혹사한다. - 니체를 읽는다 P192


이 글을 읽으면서 아무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자부하던 니체와 그가 창조한 '차라투스트라'가 사실은 그 안에 있는 힘의 의지, 다른 말로 하면 '광기'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니체 자체의 사상이 아닌, 파시즘 사상가인 '윙거'의 해석에 영향을 받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주로 니체의 '초인사상'과 '권력의 의지'에 관심을 가졌다면, 칼뢰비트는 니체 사상의 '영원회귀'에 관심을 가졌다.(칼 뢰비트의 책도 민음사에서 출간된 책으로 읽었는지만, 그 방대함과 난해함 속에서 길을 잃었다.) 그는 고대에 기독교적 신관과 그리스적 자연관이 대립했었는데, 니체에 의해 후자가 다시 부활한 것으로 본다. 그는 니체의 '영원회귀'사상은 세계의 근거를 신의 존재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게서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뢰비트는 니체의 사상이 공개적인면과 비교적인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한편으로는 니체가 김나지움 학생이었을 때부터 가졌던 "인간의 우연적 존재를 구원하는 것은 세계(자연)인가 인격적 하느님(비자연)인가"라는 고민, 혹은 자유의지와 필연성의 종합에 관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상이다. 그러나 고민에 대한 답변으로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윤리적이면서도 형이상학적인 명법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반그리스도교적 복음으로서 이교주의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새로운 종교의 창립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인 성격을 갖는다. 다시 말해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은 단순히 윤리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죽음'이 후 우연한 운명만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인간을 구원하는 새로운 종교를 건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니첼를 읽는다] P203-4



얼마 전 읽은 아지트 바르키의 [부정본능]이란 책에서는 인간이 동물과 다르게 진화할 수 있는 이유를 현실에서 죽음과 소멸을 부정하고, 현실 이후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이 말은 결국 인간의 존재와 문명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과 그 존재의 근거가 되는 본질에 대한 사유가 인간을 살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이란 존재자체는 자신이 서 있을 수 있는 세계관, 다른 말로 하면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세계와 세계 밖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생을 이어갈 수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망치의 철학자'라는 별명처럼 모든 것을 부순 니체는 그 텅빈 공간에 혼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어쩌면 그의 '영원회귀'사상이라는 것은 모든 것을 부수고 난 뒤에 찾아오는 그 허무함과 고독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세계관이 아니었을까? 비록 니체의 직접적인 생각은 들을 수 없지만, 니체의 해석자들을 통한 니체의 사상을 알아가는 과정 속에서 니체의 저작을 읽는 것과는 다른 또 다른 매력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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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소설을 좋아하기에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 시기에 지어진 소설들을 많이 읽는다. 그런데 이런 소설들을 읽으면서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한다. 이 소설들에게 니체의 '초인'들을 발견한다. 도스트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나폴레옹같'이 세상의 선을 위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라스콜리노코프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반 표도로비치,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영원회귀를 고민하는 토마시, 그리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까지... 많은 인물들이 니체의 초인을 향한 몸부림을 담고 있다. 이렇게 보면 20세기의 문화는 니체에 대한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니체를 읽다] 3부에서는 막스셸러로부터 시작해서 질 들뢰즈까지 이름 난 철학자들이 니체를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모두들 이름은 한 번씩 들어 본 철학자이지만 그들의 저서를 직접 읽어 본 철학자는 '하이데거'와 들뢰즈'가 전부이다. 둘 다 자신의 사상을 어렵게 표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하는 사람들이기에 읽어도 대부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러기에 이 부분을 깊이 있게 읽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부분을 통해 니체의 철학이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고, 이에 대한 해석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닫게 된다.


 


 

첫 번째 주자는 '막스 셸러'이다. 막스 셸러는 예전에 현상학에 관심을 가지고 읽던 책에서 잠시 스처간 기억밖에는 없다. 셸러는 주로 니체의 비판자에 해당된다. 특히 그의 그리스도교 해석에 대해 비판한다. 니체에게 초인이란 강자이다. 그리고 니체의 초인은 약자를 향한 연민을 증오한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서 죽은 그리스도는 약자의 표상이다. 그는 강자가 될 수 없고, 그러기에 본받아야 할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랑을 펼친다는 것은 위선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셸러는 약자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강자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셸러에게 이러한 용서와 사랑은 니체가 말하는 것처럼 복수를 행할 수 없는 무능력을 기만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타인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것을 거부하는 심오한 정신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행위가 적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면 그것은 우리를 적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정신은 모든 반작용적 행동, 즉 세간적인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 (P160)


두 번째 주자는 '지오르그 짐멜'이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보면 소크라테스가 소피스틀과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 그 때 트라시마코스라는 소피스트는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즉 강자는 스스로 정의를 만들고, 그것이 곧 모든 사람의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이야기 하며 초인은 남이 만든 도덕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도덕을 만들어 가는 존재임을 이야기 한다. 이 때문에 니체가 주관적 도덕론자인 소피스트와 비슷하다는 오해를 받는다. 이에 대해 짐멜은 니체의 도덕이나 이를 통해 나타나는 인간상을 주관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니체의 초인이 진화과정에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객관적이고 이상적인 인간으로 본다. 즉 니체는 인간이 고귀해지려는 감정을 인간의 객관적 가치로 보았던 것이다.


니체는 플라톤과 스피노자, 칸트, 쇼펜하우어와 달리, 이른바 초월적인 차원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지 않고 자연의 진화과엊에서 도덕의 근거를 찾으려 한다. 니체가 표방하는 고귀함의 이상은 진화과정을 은밀하게 추동하는 동인임과 동시에 그것이 도달하게 되는 최종점이다. 따라서 고귀함의 이상은 생물학적 특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귀한 인간은 실제로 역사상 나타내려는 육성의 산물이다. 도덕의 토대를 초감각적인 초월적 차원에서 찾으려는 전통 형이상학에 반해서 니체는 도덕의 토대를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고귀함의 이상은 생의 자연적,역사적 과정에서 단지 진화와 선별 그리고 인위적인 육성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P173)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래 전에 읽었던 은희경 작가의 [아내의 상자]라나 소설이 생각났다. 그 소설에서 아내는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고통 당한다. 자신이 연약함이 주변 사람과 자신에게 피해만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옆집의 병든 강아지를 본다. 그리고 남편에게 그 강아지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분노를 표현한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음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이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 [아내의 상자] 중에서 -


어쩌면 이 소설 속의 아내는 병든 개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보았기에 그 연약함을 증오했을 것이다. 니체는 왜 연약함을 증오하고, 강함은 숭배하는 것일까? 그 역시 자신 안의 역약함을 보았고, 그것을 경멸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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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6-03-03 1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요즘 니체의 책에 푹 빠져 읽고 있어서 말이지요. 그런데, 가을남자 님께서도 지적하셨듯이, 니체의 약자에 대한 증오는 좀 유별난 데가 있는 듯합니다. 어떤 대목에서는 심지어 `웃음`을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기도 하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그 대목을 읽고 니체를 비웃었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어쨌든 너무 심하다는 생각은 좀 들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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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을 위한 도덕. ㅡ 병자는 사회의 기생충이다.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꼴사나운 일이다. 삶의 의미와 살 권리가 상실되어버린 후에 의사들과 의사들의 처방에 비겁하게 의존하여 계속 근근이 살아가는 것은 사회에서는 심한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의사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런 경멸을 전달하는 자여야만 한다 ㅡ 처방전이 아니라, 매일매일 새로운 구역질을 한 움큼씩 자기들의 환자에게 전달해야 한다 ······
- 니체, 『우상의 황혼』, <어느 반시대적 인간의 편력> 중에서

가을벚꽃 2016-03-03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공감이 가네요. 그래서 저는 니체의 책들을 읽다보면 가끔 니체의 삶이 궁금해져요. 니체의 몸부림이 느껴져서 안타깝기도 하구요. 이런 시각때문에 젊은 날엔 니체의 추종자 중인 친구와 심한 논쟁을 하기도 했죠.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엔 상처 없는 인간은 없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으로 몸부림 친다는 생각이... 어쩌면 니체도 상처입은 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위대한 사상가를 너무 심리적으로 접근했다는 생각도 들고요... 니체에 대한 좋은 답글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