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 시작했다. 1권을 읽으며 몇 해전 읽었던 마이클 샌덜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생각났다. 이 책은 국내에서도 인기를 얻으며 인문학 열풍을 일으켰었다. 이 책에서는 저자는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묻는다. 대부분의 상황은 도덕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애매한 상황들이고,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든 상황들이다. 저자는 이런 질문을 통해 과연 '정의'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상황마다 적용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당시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서평 등을 읽어 보았는데. 대부분이 이 책을 통해 다시금 인문학과 철학, 그 중에서도 윤리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며 긍정적인 글들이었다. 반면 어떤  서평 중에는 복잡한 논리에 머리 아파하며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론뿐인 '정의'라고 폄하하는 글도 보았다. 어쩌면 후자의 반응도 이해가 되는 것이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것들이 그냥 말장난처럼 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의'에 대한 논의를 이미 서양에서는 2천년도 넘는 시기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정의'에 대한 대표적인 논의를 다룬 책이 플라톤의 [국가]이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책은 플라톤이 자신의 스승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여러 사람들과 논쟁하는 내용이다.(플라톤의 작품의 대부분 '소크라테스'가 등장하고,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자신의 사상을 이야기한다.) 10권까지 방대한 논쟁이 전개되는데,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인 '산파술'이 사용된다. 산파술이란 상대가 주장하는 것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함으로서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1권에서는 주로 정의가 무엇인지를 묻고, 그에 대한 대답에 대한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짐으로서 그들이 잘못 가지고 있던 '정의'에 대한 개념을 변화시키고 있다.

1권의 시작은 소크라테스와 그의 일행들이 아테네의 인심 좋은 부호인 '케팔로스'의 초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소크라테스가 케팔로스에게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자, 케팔로스는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 친구에게는 선으로, 적에게는 악으로 갚는 것을 정의라고 말한다. 이 주장은 그리스의 시인 시모니데스의 말을 케팔로스가 인용한 것이다. 후에 케팔로스의 아들 플레마르코스가 이 주장을 이어서 소크라테스와 논의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플레마르코스의 논의를 계속해서 질문해 가며, 그의 주장의 허점을 지적한다. 소크라테스의 논지는 정의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을 잘 하는 것이 정의이며, 그런 의미에서 정치인은 정치를, 의사는 의술을, 선장은 항해술을 잘 베푸는 것이 정의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의를 베푸는 사람은 결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가 아니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이런 논의를 듣고 있던 트라시마코스가 분노하며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을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 있게 정의란 '더 강한 자의 편익'이라고 주장한다. (예전에 읽었던 책은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번역이 더 부드럽고 이해하기 쉬웠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주장도 아테네 함대사령관이 Kallikese의 말로서 실제로 역사상 인물이자 소피스트로 알려진 트라시마코스가 인용하고 있는 주장이다.(박종현 교수의 [국가]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은 없고, 예전의 읽었던 다른 번역서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그는 참주정치등을 예로 들면 정치가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법을 만들고, 일반인들은 그것을 따름으로 정의가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결국 정의란 강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정치인이 정치를 맡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못한 사람에게 다스림을 받는 모욕을 견디기 싫어서라고 말하며, 진정한 정의는 자신의 통치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자신의 이익만 추구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은 불의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코스는 소피스트답게 괴변을 말한다. 그는 작은 불의는 불의로 판단되지만 아예 커다란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은 오히려 정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건 참주 정치인데. 이는 남의 것을, 그것이 신성한 것이건 세속의 것이건 간에 또는 개인의 것이건 공공의 것이건 간에, 몰래 그리고 강제로 빼앗기를 조금씩 조금씩 하는 게 아니라, 단번에 깡그리 하죠. 이런 올바르지 못한 행위들 중의 일부를 어떤 사람이 몰래 해내지 못할 때, 그는 처벌을 받고 최대의 비난을 받습니다. 신전 절도범이나 납치범, 가택 침입 강도나 사기꾼, 또는 도둑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못된 짓들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시민의 재물에 더하여 그들 자신마저 납치하여 노예로 만들게 될 땐, 이들 부끄러운 호칭 대신에 행복한 사람이라거나 축복받은 사람이라 불리지요. 비단 제 나라의 시민들한테서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전면적인 불의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다른 모든 사람한테서도 말씀입니다. 올바르지 못한(불의)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막상 그걸 비난하는 것은 스스로 올바르지 못한 짓을 행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피해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니까요. 소크라테스 선생, 이처럼 올바르지 못한 짓이 큰 규모로 저질러지는 경우에는 그것이 올바름보다도 더 강하고 자유로우며 전횡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듯, 올바른 것은 더 강한 자의 편익이지만, 올바르지 못한 것은 자신을 위한 이득이며 편익입니다."(P95-6)


예전에 이 부분을 읽을 때 어린 마음에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심정적인 동의를 했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도 구테타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통치를 했었고, 그들의 통치가 곧 정의인 시대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죄를 저지르면 불의지만, 큰 죄를 저지르면 그 사람이 행동이 곧 정의가 된다는 생각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사람의 의식은 쉽게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우가 있음에 씁쓸한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통치자란 자신이 다스리는 대상에게 덕을 베풀게 하는 것이고, 위에서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면, 결국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통치는 무너지게 되고, 그의 통치는 정의도 아니고, 자신과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트라시마코스가 눈에 보이는 순간을 이야기 한다면, 소크라테스는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역사를 보고, 정의를 이야기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오랫 만에 다시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면서, 예전과 같이 논리적인 논쟁을 따라가기에 뇌가 버거워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1권의 소크라테스의 질문들은 마치 고장난 정교한 기계를 다루듯이, 주장의 잘못된 부분을 사소한 것부터 점검하고 고쳐가는 과정이여서 이런 논의를 따라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동안 베스트셀러 위주로 책을 읽느라 고전에 아직 뇌가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에도 다시금 그리스 고전들을 읽는 과정을 계속해 나가려고 한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정의'라는 단어를 '올바름'이라는 단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래 저자의 각주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장점은 헬라어 원전을 저자의 박식함으로 해석하고 있는 점이다. '정의'라는 단어와 '덕'이라는 단어와 같은 헬라어 단어와 그리스 문화에 대한 주석들은 이 책을 더 깊게 이해하는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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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의 인생에서 부모님과 가장 많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있다면 군대에 있을 때이다.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는 편지로 집안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내 상황과 안부를 물어왔다. 나 역시 내 군대에서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집 안의 상황을 물었다. 당시 나는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직접 보지 못하는 집 안의 상황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이미 편지의 글을 통해 전달된 집안의 상황은 내가 읽는 순간 백 퍼센트 똑같이 전달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 집안의 상황은 편지라는 글을 통해 내게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렇다면 내가 읽은 그때의 편지의 내용은 내가 잘못 해석한 것이었을까? 결국 해석이라는 것은 본래의 의미와 다르게 해석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 아닐까? 이것을 철학적인 용어로 좋게 포장하자면 '다르게 해석된다 말보다 '새롭게 해석된다 말일 것이다. 결국 해석 된다는 것은 기존의 텍스트를 해석자의 주어진 상황을 고려해서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근대적인 해석학은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시작되었다. 슐라이어마허는 종전의 단순한 고전 해석을 철학적 해석으로 발전시킨 사람이다. 기존의 해석의 텍스트의 본래 의미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그러나 철학적 해석은 본래의 의미를 밝히는 것과 함께 해석자의 상황을 고려한다.

그와 함께 해석학이 문제 삼는 것은 독자의 삶의 자리다. 텍스트의 의미가 드러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독자가 텍스트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텍스트를 읽는 의도는 무엇인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자의 삶의 자리는 텍스트의 의미가 드러나는 중요한 터전이 된다. - [해석학] P79


이런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기존의 텍스트에 대한 문법이나 문맥적 해석적 방법과 함께 새롭게 심리적 해석을 제시한다. 텍스트의 저자가 글을 작성했을 당시의 심리적 의도까지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해석 방법은 텍스트를 다층적으로 이해하는 방법이기는 하지만, 또한 해석자의 주관적인 심리에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해석학은 딜타이에 의해 계승 발전된다. 딜타이는 단순한 심리적 해석에서 뛰어넘어 정신 학문을 강조한다. 정신 학문은 당시 유행하던 자연과학과 대립되는 의미로 단순한 심리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삶 전반을 포함하고 있다. 결국 딜타이의 해석학은 단순한 텍스트의 이해를 넘어, 텍스트를 인간의 삶 전반을 통해 이해하려 했다. 이것을 '해석학적 순환의 원리'라고 한다, 이 해석학적 순환의 원리는 후에 하이데거의 해석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정신의 학문이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정신의 학문은 '이해의 심리학'이다. 자연과학은 그에 비해 인과적 설명의 심리학이다. 정신 학문의 이해를 위해 그는 삶의 통일성과 전체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해석학적 순환의 원리가 나타난다고 말해도 좋은 것이다. "전체적인 것과 연관에서 개별적인 것을 이해한다. 또한 개별적인 것은 전체를 결정하다.."  -[해석학] P94


하이데거에 이르러 존재 해석학의 성립된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의 의미를 밝힌다. 하이데거는 기존의 철학이 존재와 존재자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보고, 존재를 존재자에게서 불리한 것을 제시한다. 그에게 있어서 존재란 존재자가 존재자일 수 있게 하는 기초이며 근거이다. 존재란 '있음'이며, 그 '있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이 존재 해석학이다. 그러나 이 존재를 의미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고, 그런 의미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라는 의미는 주어진 지금의 상황 속에서 존재하는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현존재의 상황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라고 부른다. 결국 현존재가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현존재가 주어진 세계, 특히 시간의 관계성 속에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포함한 세계를 해석해야 하고, 세계를 해석함을 통해 다시 존재를 해석하게 된다. 앞의 딜타이의 '해석학적 순환'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인간의 실존적 현재는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는 터전이기에 존재의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런한 현재를 해명해야 한다. 이는 존재론을 위한 기초작업이기에 그는 이것을 기초 존재론이라 불렀으며, 그에 따라 인간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것이 이른바 실존적 분석이다.
기초 존재론적 분석의 대상은 세계 안에 던져져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현재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실존적 상황을 "인간은 세계-내-존재 말로 표현한다. 인간은 세계 안으로 던져져 있으며, 매 순간 그때마다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던져져 있음을 넘어 스스로를 기획 투사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언제나 각기 그때마다 특정한 현재에 자리한다. 그 현재는 지금이라는 시간과 여기라는 공간,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현재이다. 그 현재 안에서 인간은 구체적인 사실로 살아간다. 이러한 현재적 사실과 그에 관계되는 총체적 상황을 그는 현사실성이라 부른다. 현사실성은 현존재의 성격을 표현한 것이며, 그 자체로 그렇게 있는 존재의 성격을 일컫는 말이다. 이해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현사실적인 삶을 해명하는 작업, 이를 통해 현존재에 드러나는 존재 의미를 밝히는 작업이 현사실성의 해석학이다. - [해석학] P117-8


결국 존재 해석학이란 현재에 삶에서 존재하는 현존재의 의미를 해석하는 작업일 것이다. 결국 하이데거에게 있어서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세계를 해석해야 하고,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존재를 해석해야 한다. 결국 존재는 그가 속한 세계와 동떨어져 해석될 수 없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해석학이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직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완독하지 않은 나에게는 아직 이 정로 밖에 '존재해석학'을 이해하지 못 했다. 하이데거에 대해 더 알아갈수록 '존재해석학'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지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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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드웨인 존슨이 주연한 할리우드 영화 [허큘리스]가 개봉한 적이 있다. 이 영화에서는 신화적인 헤라클레스를 인간적인 헤라클레스로 해석한다. 헤라클레스를 한 용병으로 설정하고, 헤라클레스의 몸값을 높이고 상대에게 겁을 주기 위해 그를 찬양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를 만드는 이야기 꾼 동료를 등장시킨다. 이 영화에서 헤라클레스가 펼치는 싸움이 이 이야기꾼에 의해서 신화화되고, 우리는 그런 신화화된 헤라클레스를 알고 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기본 모티브이다.


 

 

[허큘리스]와 비슷한 관점에서 그리스 신화를 바라보는 영화가 조금 더 오래전에 개봉한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트로이]라는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의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천부적인 솜씨를 가지고 있는 전사이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신적인 존재로 본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전투 중에 발목(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후 최후를 맞게 된다. 불사의 존재인 아킬레스를 인간 아킬레스로 해석한 영화이다.


 

 

 

이와는 조금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매트리스]란 영화 역시 해석과 관련된 영화이다.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상징들로 똘똘 뭉쳐있는 이 영화는 주인공 네오가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관점을 두고 있다. 그는 예전에는 매트리스 안의 가상세계가 실재 존재하는 세계로 생각했으나, 모피어스를 만난 후 실재의 세계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가상의 세계 대신 실재 세계를 선택한다. 결국 네오의 삶은 그가 세계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바뀌게 된다.


지금까지 소개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해석학과 관련되어있다. 해석학이란 원래 그리스에서 신탁을 해석하던 것에서 시작되어, 성서를 해석하면서 발전하였다. 앞의 두 영화 [허큘리스]와 [트로이]는 근대적인 해석학의 경향을 설명해 주는 좋은 소재이다. 근대 이후부터 이성적인 사고와 진화론적인 사고가 중심이 되면서, 고전을 해석할 때도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이성의 틀안에서 해석하려는 시도가 지배적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신학자인 불트만이다. 그의 사상을 '탈신화화'라고 한다. 그는 성서를 해석할 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적인 모습을 제거하거나, 성서의 신화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인간 예수를 찾아내려고 했다. 현대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모습을 제거하고 인간 예수를 이야기하는 다큐멘터리나 책들은 대부분 이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대부분의 해석학들의 책은 이런 해석이 성서를 바로 해석하는 것으로 보고 현대신학자들 중 많은 학자들이 이런 해석에 동조하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탈신화화의 해석의 전제는 이성적인 틀 안에서 신의 존재를 배제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전제를 가진 해석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성서를 해석하기를 강요하는 것도, 이성을 수단으로 하는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근대의 해석학이 고전에 대한 해석학이었다면, 하이데거 이후 해석학은 단순히 고전을 해석하는 범위에서 넘어서 존재자와 세계를 해석하게 된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인간, 즉 인식하는 인간에 초점을 두었다. 하이데거는 이런 데카르트의 근대철학이 인간의 존재, 존재자에 대한 초점을 놓치고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해 하이데거는 이에 인간을 '현존재', 또는 '세계-내-존재'로 해석한다. 즉 인간의 존재를 자신이 존재하는 세계나 그 세계 속에 존재하는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를 해석하는 것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시간'이다. 결국 인간이란 존재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고, 그럼에도 그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존재의 상태를 비본래성(inauthenticity)이라고 부른다. 영화 [매트리스]에서 네오가 마치 거짓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는 현실을 외면하는 네오의 동료 사이퍼스의 삶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런 시간적인 존재와 죽음의 존재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삶을 본래성(authenticity)이라고 부른다.

 

이번에 아카넷 출판사에서 나온 신승환 교수의 [해석학]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더 중점을 두어 해석학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작해서 저자는 이 책의 목적을 해석학적 철학을 제시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본래 철학은 삶과 존재를 해석하는 것이기에 해석학적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철학자들이 펴쳐간 생각의 체계와 이론에 관계되는 좁은 의미의 학문적 철학이 아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이해하고 해석함으로서만이 존재할 수 있고 또 그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인간의 근원적 행위를 넓은 의미에서 철학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기보다 삶과 존재로서의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본질적으로 해석학적일 수밖에 없기에 해석학적 철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 책에서는 성서해석학, 철학적 해석학, 존재 해석학, 해체론적 해석학 등 여러 가지 해석학을 다루지만 가장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분야기 바로 존재 해석학이다.

 

 

 

해석학에 관심이 많아 '폴 리쾨르'의 [해석의 갈등]이라는 책을 비롯한 여러 책들을 구입하여 읽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외국 학자들에 의한 해석학 개론서가 많고, 폴 리쾨르의 저작은 너무나 방대하고 난해하여 아직까지 완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던 참에 한국 학자의 연구에 의해 집필된 해석학 책이 출간되어, 이 책을 통해 더 쉽게 해석학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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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와 용서]라는 대담집에서 자크 데리다는 용서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안켈레비치의 [공소시효 없음]이나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서 말하는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할 수 없다거나, 용서에는 먼저 가해자의 참회가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배제한 '순수한 용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리다가 무조건적인 용서를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다. 데리다가 이야기하는 '순수한 용서'는 가해자의 참회나 제 삼자의 개입 등이 먼저 고려되지 않는다. 피해자 당사자가 진정으로 용서할 마음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이다. 그리고 그때만이 그 용서가 '순수한 용서'라고 말한다.

프랑스 역시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나치의 비시정부가 몰락하고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비시 정부에 협력한 사람들을 모두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강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대항해야 하는 시대적 상황에 의해서 정부는 극단적인 가담자 외에 대부분을 사면하게 된다. 데리다는 이런 용서가 주권에 의한 용서, 제 삼자의 용서로서 '순수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잔혹한 살인과 고문이 있었지만 사회의 안정과 화합을 위해 백인 가해자들에게 사면권을 주게 된다. 이때 한 자신의 남편이 고문되고 살해당한 한 흑인 여성이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위원회 또는 정부가 용서를 할 수는 없다. 나만이 어쩌면, 그것을 할 수 있다. 나는 용서할 혹은 용서하기 위한 준비가 안 되어 있다.(P238) "

어쩌면 이렇게 용서를 매게로 한 정치적 타협은 역사와 시대의 변화에도 바뀌지 않는 것일까? 얼마 전 우리나라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두고 박근혜 정부와 아베 총리의 내각 간에 협정이 있었다. 모든 것을 용서하고 다음부터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그 협상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국제적인 관계나 시대적인 상황이 한일간의 화해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을까?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고, 정치적인 고려로 인한 용서가 과연 순수한 용서일까? 이에 대해 데리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다시 주권의 역사로 되돌아오게 됩니다. 우리가 용서에 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때로 "나는 너를 용서한다"라는 말을 참을 수 없거나 가증스러운 것, 더 나아가 외설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주권의 주장입니다. 그것은 종종 위로부터 아래로 말을 걸어오고, 자신의 고유한 자유를 확언하거나 용서의 능력을 부당하게 가로채 버립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희생자로서 혹은 희생자의 이름으로 행해진다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희생자 만들기, 다시 말해 피해자로부터의 삶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혹은 "내가 용서할게"라는 입장에 이를 수 있게 하거나 허용하는 이 자유와 힘과 권한을 박탈하는 희생자 만들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거기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은 피해자로부터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말 자체를, 모든 표명의 가능성을, 모든 증언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때 피해자는 거기에 더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라라고 잠재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적인 가능성마저 빼앗긴 상태가 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적인 범죄는 오로지 살인의 형상으로만 도래하는 것이 아닙니다.(P261)


데리다는 국가나 제 삼자가 피해자를 대신해서 정치적인 상황이나 시대적인 상황에 따라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을 피해자의 용서할 수 없는 권리를 빼앗는 살인과 같은 절대적인 범죄라고 말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 사회는 용서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을 행하고 있지는 않은가? 권력에 의해, 타인에 의해 피해를 당하고도 용서해만 한다는 또 다른 권력에 떠밀려 자신의 용서할 권리마저 빼앗기고, 용서가 아닌 용서하는 사람들... 그들이 그 용서를 한 후에 가졌을 그 허탈감과 상실감을 누가 알까? 용서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피해를 가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용서의 의미가 회복되고, 용서의 권리가 다시금 피해자에게 돌아오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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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데리다의 [세기와 용서]는 '미셸 비비오르카'와의 대담 내용으로서 [신앙과 지식]이라는 글과 한 책 안에 실려 있다.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주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란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해석을 했다면, [세기와 용서]에서는 주로 '얀켈레비치'의 [용서]와 [공소시효 없음]이라는 책에 대해 데리다적인 시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한나 아렌트'의 글들도 언급되고 있다.

얀켈레비치는 이 책에서 용서에 조건을 붙였다.(이것은 한나 아렌트의 시각과도 비슷하다.) 그가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 제시하는 조건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그것이 용서 가능한 범죄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홀로코스트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용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처벌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벌이 불가능한 것을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얀켈레비치에게 있어서 홀로코스트와 같이 인간성을 해치는 범죄는 용서의 대상이 아니며, 용서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는 홀로코스트를 '속죄할 길이 없는 것' 또는 '수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얀켈레비치는 속죄할 길이 없는 것 혹은 수선할 수 없는 것으로부터 용서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P229


그러나 데리다는 이런 용서의 개념을 자기모순을 지적한다. 데리다는 용서라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용서의 개념 자체를 다루어보자면, 논리와 상식이 이번만은 역설과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제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용서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사실상 그것이야말로 용서해야 하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용서를 부르는 유일한 것이 아닙니까? ...... 만일 용서해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언어로 사람들이 대죄라고 부르는 것, 최악의 것, 용서할 수 없는 범죄나 과오일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메마르고 무자비하며 가차 없는 형식으로 기술할 수 있는 아포리아가 나옵니다. 즉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만을 용서합니다. 우리는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겠지만, 만일 용서라는 게 있다면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하는 곳에만 있을 것입니다." P223


데리다는 만일 우리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사람만을 조건적으로 용서한다면, 그 죄를 회개한 사람은 우리가 전에 용서해야 할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미 그는 죄를 회개했기에 그전에 우리가 알던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진정한 용서는 용서 불가능한 대상을 용서하는 것이다.

"죄인이 참회하고, 행실을 고치고, 용서를 구하고, 따라서 새로운 약속에 의해 변화된다는 조건, 그리하여 그가 더 이상 이전에 죄를 범했던 사람과 전적으로 동일한 사람이 아니라는 조건에서만 용서를 한다고 생각해봅시다. 이 경우에도 여전히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양측 모두의 입장에서 너무 쉬운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 그 자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니까요. 용서가 존재하려면 죄와 죄인을 그 자체로서, 죄와 조인이 둘 다 죄악만큼이나 죄악 그 자체로서 불가역적으로 남아 있어서 전환도, 개선도, 뉘우침이나 약속도 없이 여전히 다시 반복되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그 지점에서 용서해야만 하지 않습니까? 용서라는 이름에 합당한 용서가, 만일 그런 것이 존재하다면,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만 하지 않나요? 그리고 무조건성 역시 그것의 반대항인 회개라는 조건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산에 기입되어 있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P233


결국 데리다는 우리가 '용서'라는 이름으로 말하고 있는 모든 용서가 진정한 의미의 용서가 아님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결국 용서란 불가능한 것인가? 데리다에게 있어서 용서란 인간애가 추구해야 할 목표이다. 그 목표가 현실에서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해 가야 하는 것이다.


한국인의 정서에는 데리다의 말보다 얀켈레비치의 말이나, 한나 아렌트의 말이 더 설득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설득이 있다기보다는 정서적으로 더 공감이 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 '용서'에 담긴 진정한 뜻을 이해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데리다의 말에 귀를 귀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으며 문득 작년에 미국에서 자신의 흑인 아들을 죽인 백인 살해자를 용서하는 어머니의 인터뷰 영상이 떠올랐다. 범죄자는 인종 혐오자로서 흑인 교회에서 가서 총기를 난사했다.(미국 남동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흑인교회) 이 사건으로 인해 9명의 흑인이 사망했다. 그중 한 흑인의 어머니가 가해자에게 그가 빼앗아 간 것이 얼마나 자신에게  값진 것인지를 모를 것이라며, 그럼에도 자신의 가해자를 용서한다는 말을 했다. 울면서 진정으로 상대를 용서하는 어머니와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덤덤히 듣던 피해자의 얼굴이 교차되어서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럼에도 어쩌면 이 어머니의 용서가 진정한 용서가 아닐까? 점점 용서라는 단어가 변질되어 가는 시대에 데리다가 말하는 용서의 의미가 너무나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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