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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만큼 니체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은 음악가인 '바그너'이다. 사실 니체나 바그너 모두 쇼펜하우어의 제자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한 때는 둘 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에 갇혀 있기에 고통 속에 있다고 말하고, 그 표상의 세계에서 의지의 세계로 도구 중 하나로 음악을 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표상의 세계에서 객체화 된 육체를 넘어서 내면의 의지를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바그너는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감명을 받아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했다.


같은 스승을 두었으니 둘은 처음부터 통했다. 특히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은 니체가 거이 바그너에게 바치는 책과 같았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발견했고, 바그너를 게르만적 이상을 표현하는 음악가로 칭송했었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니체에게 쇼펜하우어를 비판한 것처럼 바그너를 비판한다. 니체는 바그너가 대중들의 인기에 영합해서 그들에게 독재자처럼 군림한다고 비난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을 결코 독장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대중들의 신경을 사로잡는 교묘한 선전술로 파악했다. 바그너의 언어는 대중들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교묘하게 고안된 극장의 언어이며, 바그너는 대중을 사로잡고 지배하려는 폭군적인 배우라는 것이다. 니체의 바그너 비판은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에 대한 근대 대중의 열광과 복속에 대한 비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그너의 음악의 대두기가 독일 제국의 도래와 일치하는다는 것은 이 점에서 깊은 의미를 갖는다. 후기 니체는 바그너 음악을 니힐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 유태주의적 음악으로서 데카당스의 전형이라고 본다. (P129-130)


개인적으로 바그너의 음악과 오페라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 그러기에 니체가 바그너의 어떤 부분을 보고 실망을 했는지는 정확히 묘사할 수가 없다. 그러나 니체와 바그너의 결별이 단지 사상적인 면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니체는 바그너의 인간적인 다른 면을 보고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쇼펜하우어에게 실망했던 것처럼... 니체가 추구하고, 본받으려고 했던 인간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리고 과연 그것을 현실에서 발견할 수는 없었을까? 그러기에 그의 초인사상이 더 견고해지지 않았을까? 쇼펜하우어는 바그너를 뛰어넘는 초인... 어쩌면 니체는 자기 신에게도 실망하지 않았을까? 니체 역시 초인이 될 수 없었을테니까... 그렇다면 아무도 기대할 수 없고, 자기 자신에게도 만족할 수 없는 한 인간이 겪었을 고독은 어떤 것이었을까? 나는 니체의 책들을 읽을 때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하며, 철학자 니체가 아닌 인간 니체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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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읽는다 2부는 니체가 영향을 받았지만 대부분 후기에 들어 비판하거나 대립관계로 넘어간 당대의 학자들을 언급한다. 부르크하르트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다윈이다. 이 중 부르크하르트는 당대 그리스문화에 가장 정통한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가 생명력이 넘치는 문화였으며,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영웅들이 근대의 상처받는 약한 인간들이 아닌 고통에 맞서서 싸우는 강한 인간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부르크하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부르크하르트가 준 것 보다 더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체가 주장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생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로 내려오는 정통적인 서양의 관념철학에 이어져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보여지는 현상계와 보여지지 않지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로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계는 허상일 뿐이고, 참다운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현상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보았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란 인간의 타고난 인식 능력(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인식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 되지 않는 근원적인 세계인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발현된 것로 그 발현된 객체 중 하나가 인간이다. 그리고 그 객체화된 인간은 의지의 발현인 '생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가 표상화된 객체에 부여해 준 '생의 의지'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예술로 발현된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에 갇혀 자신만의 '생의 의지'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고통의 근원으로 보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의 의지'를 초월해 '의지로서의 세계'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의지으로서의 세계'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온 이데아의 세계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기에 니체는 초기에는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를 찬양하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비판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인격신 따위의 허구적 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가 내면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생존에의 의지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지적인 성실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니체는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고 도덕적인 것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의지로 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P108)


후기 니체에 있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악의에 찬 '천재적인 시도'다. 쇼펜하우어가 예술, 영웅주의, 아름다움, 인식비극에 대해서 '의지'를 부정하고 삶의 체념을 가르치는 것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예술이 사람들을 관조적인 인식의 상태에 빠지게 하면서 맹목적인 생존의지와 욕망에 의해서 내몰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수단이라고 본다. 쇼페하우어는 이러한 예술관을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평한다. (P110)


더 나아가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상속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도교가 속된 것으로 거부했던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인식, 비극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 다시 말해 대지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의 관점에서 시인한다. 즉 예술을 현실과 고통 그리고 생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평안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로서 시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일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다. 예술은 우리가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만 맹목적인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욕망으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행위를 통해서 욕망을 완전히 근절하고 부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P110-1)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처음부터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 아니면 그의 사상이 발전되어 가면서 쇼펜하우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와 결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둘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었고, 니체에게 그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삶의 건강치 못하게 만드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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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한국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 한다. 그럼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온다. 나 역시 은희경 작가를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그 작가를 싫어한다. 그리고 왜 이 작가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럼 무어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다. 은희경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내면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은희경 작가의 책들을 읽다보면 어린 시절 우리집 강아지가 생각난다. '예삐'라고 부르는 이 강아지는 주인인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참 잘 따랐다. 어느날 예삐가 대문 밖을 나가서 놀다가 지나가던 차에 치혀 다리가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 피뭍은 다리를 쩔뚝거리고 돌아온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상처를 보기 위해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으르렁 소리를 내면 우리의 손을 물고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가끔 세상을 살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게 되면 어린시절의 예삐를 떠올려 본다. 나도 상처를 입었구나!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의 손을 무는 구나! 그리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구나! 은희경 작가의 소설 주인공들에게서 나는 이렇게 상처입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98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서였다. 시 나는 한국소설을 좋아했고,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매 년 구입해서 읽고 있었다. 이전의 대부분의 수상작들을 읽으면서 납득이 갔다. 아! 이래서 수상을 했구나!' 그런데 은희경 작가의 [아내의 상자]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은 뭐지?'라는 생각이 났다. 읽으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화도 났다. '왜 아내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남편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했을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의 글과 이미지가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었다. 특히 그녀가 병든 이웃집 개에 대해서 남편에게 했던 이야기의 문장들이 기억이 났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음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이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 [아내의 상자] 중에서 -

 

 당시에는 내가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었을까?

 

 

그 후 같은 해에 출간된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사랑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인 '강진희'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랑에 대한 냉소를 이야기 한다.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 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진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체중을 양다리에 나눠 싣고 아랫배로도 좀 덜어왔으므로 몸가짐이 가뿐하고 균형 잡기가 쉽다. 혹 넘어지더라도 덜 다칠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내게는 언제나 세번째 선택이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전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중에서 -

 

왜 그녀는 이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일까? 아니, 그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여야 한다고 집착할까? 사랑하며 받는 상처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사랑은 상처로 이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그 다음 해에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란 책을 일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나는 가장 늦게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후에야 은희경 작가의 주인공들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또 다른 이름의 '진희'는 12살의 소녀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없이 할머니와 이모와 삼촌과 산다. 그녀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 있는 불신과 배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보여지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성년이 된 진희는 이렇게 독백한다.

 

"하긴 사랑이나 존재라는 말 못지않게 배신이란 말의 뜻도 가볍다. -중략- 그러므로 누구 누구를 배신한 것이며 누구의 배신이 더 심각한가 따위

 

, 배신의 진앙과 진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따 할지라도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새의 선물] 중에서 -

 

 

세상을 살면서 주변에 상처입은 사람들을 본다. 상처로 인해 자신을 가두고, 남의 배려에도 으르렁 거리는 사람들을 본다.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그들 안의 상처를 본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글들이 느껴진다. 더 나이가 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더 많은 상처를 보듬어주고, 더 많은 책들을 이해하게 될까? 아직까직은 은희경 작가의 상처입은 주인공들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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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우리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더 우리의 삶은 타의에 지배받는 것 같습니다.

가을벚꽃 2016-02-22 11:0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구절이 오랫동안 마음에 기억이 남더라구요^^
 

 

니체를 읽는다 1부의 후반부에서는 니체가 초인사상을 예술과 사회에 적용하고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니체는 예술 역시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과 그렇지 않은 예술로 나눈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은 삶을 긍정하는 예술이다. 심지어 삶의 비극적이 요소까지도 긍정으로 받아들인다. 반대로 인간을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예술은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예술은 세상의 비극을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것을 긍정하는 것이다.


인간을 건강하게 만드는 예술은 현실세계에서 보이는 끔찍한 현성들조차도 이 세계가 갖는 무궁한 힘을 보여주는 것으로 긍정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승화시킨다. 또한 세계가 갖는 그러한 무궁한 힘을 흔쾌히 긍정하고 자신을 강화시키는 계기로 삼는 건강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간의 삶을 승화시킨다.(P64)


니체의 이런 예술관은 [비극의 탄생]이란 책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나눈다. 아폴론적인 것은 이상적인 것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 즉 디오니소스적이라는 것은 현실의 비극을 받아들이고, 그 현실을 긍정하며, 현실을 춤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세계는 자신의 무궁무진함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인 비극적 영웅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한다.그러나 비극적 영웅은 이러한 희생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긍정한다. 아니 그는 오히려 고통을 찾아다니고 그것과 대결하면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본다. 비극은 이러한 인간에 대한 찬양이며 이러한 인간이 갖는 힘의 충일 상태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려고 한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고통조차도 삶을 보다 충실하게 만드는 자극제로 작용한다. 비극적 영웅은 창조와 파괴를 거듭하는 세계의 현실을 흔쾌이 받아들이면서 세계의 충일함을 반복한다. 니체는 이런 의미에서 세계와 비극적인 영웅을 '디오니소스적이 인것'이라고 부르며 진정한 예술은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고 본다.(P68)


나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인간'이란 단어를 접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과연 니체의 이런 생각은 그의 생애의 어느 부분에서부터 시작했을까? 약한 것을 경멸하고, 강한 것에 대한 무한한 긍정은 어떤 연유로 그의 사상에서 싹트기 시작했을까?


철학자의 사상과 그의 삶을 연관시키는 것은 올바른 철학적인 탐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학문적인 탐구가 아닌, 니체라는 한 인간에 대해 알고싶다. 그는 왜 그렇게 약함을 경멸했을까? 그리고 왜 그렇게 힘을 추구했을까? 무엇이 그렇게 자신의 약함을 부정하게 하고, 무엇이 그렇게 자신이 갖지 못한 힘을 추구하게 했을까? 내가 니체라는 사람을 철학자가 아닌, 인간으로 알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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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를 처음 접하게 된 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였다. 우리 과에서 유난히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따로 지내는 동기가 한 명 있었다. 그 친구와 우연히 대화를 하면서 친해지게 되었다. 당시 나는 기독교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그 친구는 기독교에 대한 철저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우리는 신의 존재나 종교의 문제에서는 일치점을 찾지 못했지만, 대부분의 대화에서는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내게 추천한 책이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그 때 구입한 낡은 니체의 책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내가 처음 니체의 책을 접하면서 가졌던 감정은 니체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가졌던 경탄이나 환희의 감정이 아니었다. 반대로 니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가졌던 증오나 비판의 감정도 아니었다. 니체의 책은 나에게 한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주었다. 니체를 좋아해서 그 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이 들으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겠지만, 나는 니체를 읽으며 세상을 향해서 홀로 몸부림 치는 한 인간의 처절한 투쟁을 보았다. 마치 거친 풍랑 위에서 커다른 배를 이끌고 혼자 항해하는 사람의 집념과 열정, 황량한 사막 위를 혼자 걷는 사람이 느끼는 고독과 좌절을 보았다. 그 후 니체의 책들을 좋아하고, 그 책들을 읽으며 니체에 대해 더 친숙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니체는 내게 어려운 존재였고, 그의 사상은 마치 안개 속의 사물처럼 모호하게 보이는 대상이었다.


거이 10년 가까이 정신없이 사느라 니체의 책들을 접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우연히 아카넷 출판사에서 나온 [니체를 읽는다]라는 책을 통해 다시금 니체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그동안 나온 많은 니체의 해설서와는 다르게, 니체의 사상의 형성과정과 니체의 철학을 해석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의 사상이 어떻게 현대 사상의 영향을 미쳤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에서는 니체의 핵심사상을, 2부에서는 니체와 그 시대의 사상가들에 대해서, 3부는 니체사상의 해석을 다루고 있다.


1부의 초반부에서는 주로 니체의 형성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원회귀' 사상이다.


니체의 초인사상은 기존의 서양철학의 뿌리와 같은 플라톤과 기독교 사상에 대한 반발이다. 플라톤은 현실세계를 초월한 이데아를 주장했고, 기독교는 그 플라톤의 이데아를 신의 개념과 동일시했다. 그로 인해 서양철학은 현실세계를 부정하고, 이상세계를 강조했다. 그러다보니 현실의 어려움을 직시하기 보다는 현실 너머의 세계에서 위안을 받으려 했다. 니체는 이에 대해 부정하며 짜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통해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며, 신에 의존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세상과 맞서는 삶을 주장한다. 그렇게 세상이 만든 가치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가치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 바로 니체가 말하는 '초인'이다.


'영원회귀'사상은 니체의 초인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쩌면 초인사상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세계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니체는 세상을 영원히 반복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똑같이 반복되는 삶이라면 그 삶은 얼마나 고통일까? 그런데 니체는 바로 그 반복되는 삶을 긍정할 수 있는 사람, 내 삶이 계속해서 반복되더라도 그 삶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을 초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이런 니체의 초인사상과 영원회귀 사상을 설명하면서, 니체의 사상을 건강한 사상이라는 부분을 강조한다. 즉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세상과의 싸움을 피하지 않기에 그의 사상은 강인하고 건강한 사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약한 인간이 히말리야 같은 험한 산을 올라가야만 할 때 그 산은 그들을 힘들게 할 뿐인 저주의 산으로 나타나는 반면에,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인간에게는 오히려 험하기 때문에 더욱 숭고하고 아름다운 산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자에게 투쟁과 갈등이 지배하는, 생성 소멸하는 이 세계는 그 자체로 완전한 세계다. 이 세계에는 강한 동물과 약한 동물이 존재하듯이 탁월한 인간뿐이 아니라, 열등한 인간이 존재하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고 보완한다는 점에서 이 세계는 완전한 세계다. (P26-27)


니체의 철학은 모든 것을 병적이냐 건강하냐 혹은 우리를 병적으로 만드냐 건강하게 만드냐라는 관점에서 평가하다는 점에서 생리학적인 철학이다. 물론 그러한 생리학은 신체적인 차원의 건강과 병을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 전체의 건강과 병을 진단하는 점에서 통상적인 생리학과는 다르다. (P49)


예를 들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허약한 자는 강한 바람을 두려워하고 혐오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바람을 두려워하는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낄 것이지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강한 자는 강한 바람을 오히려 즐기고 또한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느끼고 자신이 고양된다고 느낄 것이다. 이 경우 바람은 혐오스러운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과 바람은 언뜻 보기에는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사실은 상호대립을 토한 상호 간의 고양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양자 간의 투쟁은 사랑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P54-55)


이 부분을 읽으며 오랫 동안 가졌던 니체의 사상에 대한 의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과연 니체가 주장하는 '신은 죽었다'는 말이나, '인생이 영원히 반복된다'고 말들이 과연 그가 실제로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아포리즘적인 격언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다. 니체의 무신론은 버트란트 러셀과 같은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상가들의 무신론들과 다르다. 그들은 신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쓰고 있다. 그러나 니체의 사상은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선언적이다. 그는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음으로, 삶을 일회적이라고 생각함으로 우리 인생이 건강하지 않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면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았기에, 자신의 삶이 불행했었다고 믿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신을 믿기보다 자신을 믿음으로, 무한이 반복되는 삶을 긍정함으로서 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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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1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에 대한 탐구를 많이 하셨네요. 니체가 발견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맹목적인 의지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의지인 것 같아요. 맹목적인 의지는 원인이 외부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는 초월적인 힘에의 의지는 행위나 목적의 원인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이죠. 그래서 니체의 초인은 스스로 자기극복을 시도하는 자신의 힘을 강화하려는 자기 초월적 의지의 소유자라는 것이죠. 그래서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를 긍정하는 자기 초월적 의지를 가짐으로써 세계는 무한히 긍정되고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죠. 아뭏든 건필하세요. *^

가을벚꽃 2016-02-22 11:12   좋아요 0 | URL
니체를 좋아하지만 그의 사상은 아직도 어렵기만 하네요. 나름 정리를 허고 있는데... 아직도 모호허네요. 좋은 답글 감사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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