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부터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라면서 인문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면서부터 철학이나 심리학 강의와 이와 관련된 학술모임 등을 많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런 강의나 모임에 들어가면 처음에 꼭 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 있었다. 교수나 선배가 '여기 기독교인 있으면 손들어 봐요!'라고 말을 한다. 꼭 몇 사람이 손을 든다. 그러면 그들은 손을 든 사람을 마치 진화하지 못한 구석기 시대 사람을 바라보는 것 같은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기독교나 신앙이 왜 허구인지에 대해 한참을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절대진리인냥 여기는 몇 권의 책을 제시해 준다. 그들은 신앙을 가지고는 철학이나 심리학과 같은 인문학에 접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시기에 읽은 가장 기억나는 책이 버트란트 러셀의 [종교는 필요한가]라는 책이었다. 지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범우사 출판사의 책으로 읽었는데, 원제는 "Why I am Not a Christian"이었다. 나름 직역하면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러셀은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관점을 유지한다. 인간은 원자와 결합하여 만들어진 물질적인 존재이고, 그런 물질적인 존재에게 영혼이나 사랑 같은 것은 들어갈 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것은 화학반응이 만들어낸 감정이 만들어 낸 허구이며, 특히 기독교 신앙은 이런 허구적인 감정 중에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죄의식이 만들어 낸 감정이라고 비하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을 정치 지도자나 성직자들이 이용해 인류 역사상 수많은 폐해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물론 니체의 책들도 빼놓지 않고 추천하는 책들 중의 하나였다. 니체의 여러 저서 중에서 러셀과 비슷한 맥락의 책은 [도덕의 계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을 이야기한다. 지배자들은 자신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종교를 만들고, 그 종교로 노예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앙이나 도덕은 강자가 자신의 지배를 위해 만든 허구라는 것이다.

심리학자 중에 위와 같은 맥락을 주장하는 여러 사람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의 종교에 대한 여러 편의 글들을 모아 놓은 [종교의 기원(열린 책들)]이란 책에서, 프로이트는 종교는 원시시대의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당시의 의식이 인간의 무의식에 남아 유전되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토템과 타부]라는 책에서는 친부 살해라는 의식이 유전되어 기독교가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최근의 신앙의 허구에 대해 지적하는 책들은 이런 지도층의 음모론보다는 진화론에 근거를 두는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학자가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란 책에서 인간 안에는 오랜 기간 진화 과정에서 생존경쟁에서 승리한 유전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생존한 유전자의 대표적인 유전자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것이다. 물론 이 이기적 유전자는 단순히 지협적이고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곳 집단 전체의 공멸을 가져오는 것을 유전자가 알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유전론적 진화론을 통해 종교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바로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이다. 그는 인류는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신을 창조했고, 그것이 유전을 통해 전해왔다는 것이다.

조금은 다른 맥락이지만 신앙이 진화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획기적인 이론의 책 중에 최근 번역되어 출간된 [부정 본능(부키)]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수많은 동식물 중에서 유독 인간만이 지적인 존재로 진화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는 그 열쇠로 '부정본능'이란 것을 제시한다. 다른 동물은 진화 심리학에서도 많이 등장하는 '마음이론'을 통해 다른 동물의 죽음을 보고 자신의 죽음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삶의 의욕을 멈추고 도태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만은 죽음을 부정하고, 죽음 이후의 영생의 개념을 가지면서부터 진화를 계속했다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부터 읽기 시작하는 니콜라스 웨이드의 [종교 유전자] 역시 종교를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책이다. 종교를 진화의 관점에서 해석한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방향만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를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교가 유익하기 때문에 후손들을 통해 계속 유전되어 왔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스 웨이드 역시 이런 경향을 가지고 있다. 다윈의 적자생존의 원칙을 통해 종교를 설명하려면 이런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진화론자들은 종교가 진화되었다고 주장하는 목적 중에 하나는 종교를 부정하고 그 폐해를 알리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가 유익해서 진화가 되었다고 하면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 도킨스처럼 종교는 유익하지도 않는데 유전을 통해 진화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스티븐 핑커'와 '리처드 도킨스'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종교가 유익하지도 않으면서도 진화 과정에서 유전되었다고 주장하는가? 이들이 주장하는 이론은 앞에서 러셀이나 니체가 주장하는 사제 계급의 음모론이나, 대학시절 선배들이 주장했던 신앙을 유아적 성향으로 보는 관점과 비슷하다. 저자는 이 두 이론을 이야기하면서도 이것을 비판한다.



 

"만일, 핑커가 말하는 것처럼, 종교적 행동이 적응과 무관하다면 그것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핑커는 종교가 일반 사람에게는 유해했지만 성직자들에게 유리했기 때문에 퍼져나갔다고 주장한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핑커는 종교가 성직자 계급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 사회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수렵-채집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다. 그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었지만, 몇몇 부족의 샤먼을 제외하고는, 종교적 전문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의례는 공동체 전체의 활동이었으며,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P126)



 

"도킨스는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죽거나 죽이는 것을, 스스로 가진 유도 시스템에 따라 불에 뛰어드는 나방의 그릇된 행동과 비슷한 것이라고 본다. 그런 나방의 행동이 비적응적인 것처럼, 종교적 행동 역시 비적응적이다. 그렇다면, 실수로 종교를 만들어 내게 된 초기의 우위적 특질은 무엇인가? 그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연장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이는 단순한 규직을 가진 어린이의 뇌가 선택적 유리함을 가진다." 도킨스에 따르면, 종교적 신념은 부모의 영향을 쉽게 받아들이는 아이에게 전달되어 마치 바이러스처럼 퍼진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세대에 걸쳐 반복된다. 따라서 종교는 부모가 말하는 것을 믿는 아이의 성향으로부터 우연한 부산물로서 생기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약간 억지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의미 없는 정보였다면 생존 경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2000세대에 걸쳐 아프리카를 탈출한 이후의 모든 인간 사회에서 받아들여진 이유는 무엇일까?" (P129)



 

그동안 종교적인 논쟁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될 수 있는 한 서평을 자제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 문제나 종교 문제만 나오면 극단으로 치우쳐 논쟁이 아닌 진흙탕 싸움으로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걱정이 앞선다. 이 글이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읽힐지에 대해서...

개인적인 바람은 우리가 종교를 바라보는 시각이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쪽 극단에는 종교를 무조건 악으로 보는 경향이 존재한다. 그래서 이들은 종교에 대한 어떤 비리나 자신들이 몰랐던 작은 사실이라도 발견되면 그것이 전부인냥 생각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몇 년 전 유행했던 [다빈치 코드]란 책에 대한 반응이다. 이 책은 허구의 사실을 그냥 소설로 쓴 것일 뿐인데 그것이 마치 커다란 사실을 밝혀낸 것이나 절대진리인냥 흥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마케팅의 관점에서도 그런 것을 부추기기도 한다. 다른 한쪽 경향은 종교에 대한 비판을 대해 알레르기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종교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이나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을 무조건 무시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종교도 인간의 모임이기에 실수와 잘못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받아들이고 고치면 된다. 칸트의 주장처럼 인간의 순수이성의 한계로 인해 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에 인식의 한계를 가질 수 있고, 이 부분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 부분은 서로의 견해를 이야기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의 시각은 매우 본받을만 하다. 저자는 자신이 종교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일단 진화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를 바라본다는 것은 신의 존재나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종교에 장단점을 이야기하고, 여러 학자들의 학설을 객관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진화심리학으로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껄끄러운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으며 최대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으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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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정치인과 지도자들은 초기에는 대중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의견을 잘 경청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위에 올라가고, 최고의 통치자가 되는 순간부터 대중들의 의견에 귀를 닫기 시작한다. 대중들의 반대의견을 묵살하거나 자신의 통치 스타일을 힘으로 밀고 나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리더십은 단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고 작은 기업 조직이나, 지역 공동체에서도 이런 스타일의 리더십은 쉽게 접하게 된다. 권력이 사람을 변하게 해서 일까? 아니면 원래 권력이란 그런 것일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리더십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도자나 리더가 되기 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그들의 불만에 공감하며, 함께 윗선의 실책을 비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자신이 지도자가 되니, 이렇게 사람들의 의견만 듣다가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지도자의 위치에 서니 일이 추진되려면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 붙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의외로 많은 리더들과 대화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정말 대중들은 불평불만하는 것일까? 그들은 오직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하는 것일까? 그들의 의견을 들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의 다섯 번째 주제는 '공동체적 탐구 논리와 진보적 사회사상'이다. 제목은 조금 복잡하지만 내용은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과 미국의 민주주의 정치사상의 연결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m)가 독일의 관념론이나 프랑스의 합리론, 영국의 경험론과 같이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이라고 말한다. 실용주의는 그 독특한 색깔 때문에 철학 사상에서는 많은 배척을 당했었다. 실용주의는 '반본질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본질주의'란 변치 않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정통적인 철학 사상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일상의 삶에서 유익한 것이 진리라는 상대적인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



 

"실용주의는 처음부터 고정된 지리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데서 새 지식이 얻어지고 문제 해결의 방법이 고려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다고 여긴다. -중략- 실용주의가 고정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무한한 가능성의 실현을 믿기 때문에 비판자들은 실용주의가 보편적 진리를 무시하는 상대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이 미국인들의 참 철학이 될 수 없다고까지 단정하기에 이른다." - P 144

 

 

개인적으로도 그동안 실용주의에 대한 이런 비판에 어느 정도 동조해 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실용주의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실용주의는 단순히 개인들이 자신들의 방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상대주의나 개인주의와는 다르다. 그들은 삶의 과정에서 진리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단순히 개인이 고립되어 만들어낸 진리가 아니다. 실용주의는 공동체적인 관계 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나간다. 실용주의자들은 사회나 공동체와 분립되어 개인의 의식 속에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란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진리란 공동체 속에서 관계를 관계를 맺어가며, 그 공동체가 발견해 나가는 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해 나가는 진리가 결국 우주적인 진리에 접근하게 된다는 것이다.



 

"듀이에 의하면, 인식하는 개인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개인이며, 절대적이고 고립된 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은 어디까지나 이 사회적 개인의 의식이다."  - P 162

"퍼스의 공동체론은 사랑의 공동체론으로 설명된다. 공동체를 통해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사적 이해관계와 편견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특수성으로부터 독립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퍼스의 기독교적 공동체관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중략 - 퍼스는 나름대로 자신의 우주론을 편다. 절대적 우연과 기계적 필연성, 그리고 사랑의 법칙이 우주 안에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이 우연과 필연을 넘어서서 목적을 향해 전진시키는 힘을 발휘한다." - P 165

 

 

저자는 이렇게 공동체적인 탐구와 반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해 가는 과정을 인정하는 미국의 실용주의 철학이 미국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었다고 본다. 그들은 인간의 성장, 공동체의 도덕적 진화를 믿는다. 교육과 토론을 통해 인간이 성장하고 공동체가 진화한다고 믿는 것이다.

저자는 그동안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란 책에서 근대성이란 개인의 자아의식이 성장하는 것이고, 그 자아의식이란 개체성이 자유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얼핏 오해하면 개인주의적인 사상으로 오해하기 쉬웠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며 진정한 자아의식이란 공동체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이제 결론을 맺으며 다시금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도록 하겠다. 과연 지도자는 대중을 믿을 수 있는가? 리더는 공동체를 믿을 수 있는가? 정말 리더가 공동체원들과 상의를 하다보면 더 나의 진리를 도출해 낼 수 있을까? 아직도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생각을 이상이나 환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심지어는 좌파적인 생각으로 매도를 하기도 한다. 어쩌면 한 고위공직자의 술자리 농담처럼 '민중은 개와 돼지'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백성은 그냥 통치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적인 민주주의는 독재가 더 효과가 있다는 생각을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지도자나 리더가 자신이 속한 대중이나 공동체를 믿지 못한다면, 과연 그들은 무엇을 위해 지도자나 리더가 되었을까? 단순히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일까? 비록 더디기는 하지만 대중과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지도자나 리더가 되야 하지 않을까? 미국의 실용주의철학과 정치사상을 접하면 이런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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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우리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두 편의 소설을 읽었다. 한 권은 올해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이혁진 작가의 [누운 배]라는 소설이다. 주인공이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현지의 신생 조선소에서 3년 동안 경험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건조 중이던 배가 침몰해서 누워 버리고, 이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회사의 주먹구구식 운영과 조직적인 무능이 드러난다. 이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은 조직사회의 억압 속에서 회사를 떠나고, 회장과 조직의 방침에 순응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주인공은 일부 사람들은 나름 회사를 혁신하기 위해 분투를 하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회사를 나오면서 이야기가 결말이 난다.

다른 한 편의 소설은 최근 영화화되어 더욱 관심을 받고 있는 소재원작가의 [터널]이라는 소설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 운전 중 터널에 갇힌다. 언론과 네티즌들의 동정으로 사건이 관심을 받고, 부실 공사에 관련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이 공격을 받는다. 그러나 구조 과정으로 인해 터널 개통이 늦어지고 인근 주민들이 고통을 받자, 언론과 네티즌들은 무리한 구조작업을 강행하는 가족들과 구조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결국 언론과 네티즌의 횡포 속에서 구조를 기다리던 주인공도, 가족들도 자살로 비참한 결말을 맞는다.


 


이 두 소설을 접하면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거대한 조직문화 속에서 한 개인이 조직문화의 부속품이 되어 버리는 현실과 획일적이고 자극적인 인터넷 문화 속에서 한 개인의 생명권조차도 철저히 짓밟히는 현실을 보게 되었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두 소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철학의 목적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모두들 이제는 철학의 역할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철학의 기능은 각 시대마다 개인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철학이 그동안 제기했던 물음들은 수없이 많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철학은 여러 학문들에 많은 것을 양보하면서 많은 것을 잃기도 했으며, 근래에 와서는 철학이 아직도 필요한가라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다. 철학의 종언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논의가 있지만, 철학이 할 수 있는 역할에 관해 많은 견해가 여전히 제시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철학이 끝가지 버릴 수 없는 것은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다." (P113)

"인간다운 삶이란 다름 아린 바로 개개인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삶을 가리키며, 철학은 이 삶의 영위가 소수집단에만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많은 집단에서 그러한 실현이 이룩될 수 있도록 이론을 모색한다. 또한 그 이론은 가능한 많은 사회가 용인할 수 있도록 어느 정도 일반성을 갖추어야 할 것이나 이것이 그리 쉽게 얻어질 수 있는 것만도 아니다. 그러나 역사가 인간의 해방이라는 보편적인 목표를 향해 진행한다면 철학도 자유와 권리라는 보편적 이념들의 실현이라는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P119)



 

저자는 철학은 각 시대마다 개인이 사회와 관계를 맺어가며, 그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고대 플라톤에서부터 근대의 헤겔에 이르기까지 철학은 주어진 환경인 자연과 세계를 극복하고 개인의 자아성을 찾아가며 자유로운 존재로 성장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근대 이후부터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사회가 조직화되면서 개인은 그 조직사회의 한 부속품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러기에 근대 이후의 철학자들은 과학사회 속에서 어떻게 한 개인이 매몰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찾아가며,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단지 과학기술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이 우리 삶에 지배하면서, 이런 가상공간 속에서 어떻게 개인의 자아성을 실현할지를 고민한다.

 



"과학기술 시대에서, 문명 비판가들은 개체성의 종언을 염려해왔다. 이들은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의 주체로서 인간의 위치가 점차로 위축되어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이 두려움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자율성이 억제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없을 만큼 일상적인 삶이 과학과 기술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것이다. (P132)"



 

결국 지금의 철학은 과학 문화의 조직사회에서,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 속에서 개인이 매몰되지 않고, 그 자아의식을 찾아갈 수 있도록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자아의식이 처음부터 주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체성과 개체성은 만들어져야 한다. 한 개인이 스스로 평화의 의미를 배우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창의성을 구현하고, 자신의 사적 선택이 이웃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책임을 지는 태도와 행동은 그가 다른 개인들과 공존 관계에서 성취하는 것이다. 이 개체성은 개인들이 놓인 사회체제의 환경에 의해 크게 규정되는 만큼, 앞에서 언급된 것처럼 정신적, 문화적 여건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한다면, 이 여건 조성은 철학 교육에 의해 개인들의 내적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다. 기존의 사회적 환경이 교육의 형태를 규정하고, 교육이 사회 성원들의 사유와 삶의 양식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교육을 통해 새롭게 구성되어야 하며, 철학은 이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P139-40)



 

현대 시대는 조직문화의 생각이 개인의 생각을 대체하고, 인터넷 여론이 개인의 생각을 대체한다. 한 개인이 주체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규정하려는 데카르트 이후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 사라지고, 저자의 말처럼 현대 사회의 개인들은 아무런 비판 없이 눈에 보이고, 귀로 들려지는 대로의 세계를 받아들인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권력의 힘이 작용하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개인이 그렇게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냥 조직의 생각에, 대중의 생각에 따라가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남들이 비난하는 사람을 비난하고,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을 따라가는 것이 편하기에 개인들이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소설처럼 한 개인들이 매몰되고, 피해를 입는다. 

그나마 이것에 대한 경고가 철학과 인문학에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인 노 교수 역시 자신의 평생 몸담아 왔던 학문인 철학이 이런 시대에 개인의 자아실현의 길을 제시해 주는 학문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마음에 이런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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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제일 먼저 읽은 철학 서적은 플라톤의 [국가]였다. 그리고 그 [국가]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내용은 플라톤이 말하는 '동굴이론'이었다. 플라톤은 보통 인간은 동굴에 손발이 묶인 채로 갇혀서 동굴의 벽 쪽만 보도록 되어 있는 죄수와 같은 상태와 같다고 말한다. 죄수는 동굴 입구에서 비춰오는 태양에 의해서 만들어진 실제 물체의 허상을 동굴 벽을 통해 볼 뿐이다. 그러던 중에 한 죄수가 우연히 결박을 풀고 동굴 입구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태양을 보고, 실제 물체들을 본다. 그는 순간 밝은 빛에 정신을 잃지만, 곧 자신이 그동안 실제라고 믿었던 것은 허상이며, 자신이 지금 보는 것이 참다운 세계임을 깨닫게 된다.

그 후 근대철학을 접하면서 데카르트의 철학에서도 플라톤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기존의 지식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식이란 것이 확실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의심할 수 없는 체계 위에 놓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의심의 극단까지 밀고 나가기 위해 한 가지 가정을 한다.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모든 허상을 우리의 감각과 마주하게 한다. 결국 우리는 실제 존재하지 않는 허상들을 접하지만, 악마의 속임에 의해서 그들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보고, 느끼고, 만지는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결국 실제로 존재한다고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여기서 데카르트는 악마가 모든 것을 속이더라도 속는 나 자신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그리고 근대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유명한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명제를 도출해 낸다.



 

 

플라톤과 데카르트는 비록 시대적인 차이가 있지만, 서양 철학의 뼈대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사회와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며, 자신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진리를 발견해 낸다. 특히 데카르트의 '코키토 에르고 숨'이라는 명제에서 근대철학, 근대성이 시작된다. 결국 근대철학이란 사회의 대다수가 인정하는 권위나 가치, 사상들을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던 개인이, 그것들을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하며, 그것들을 주체적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결정과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연대가 가능해진다. [근대성과 자아의식]의 저자인 차인석 교수는 이것을 '자아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아의식이야 말로 근대성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자아의식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자각이자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주체라는 믿음이며, 이 의식의 부재나 미숙은 상하 예속 질서의 사회관과 타율에 맡기는 생활태도를 개인들로 하여금 받아들이게 한다.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든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합리화되더라도 그 안에서 움직이는 개인들의 주체의식 없이는 제도의 합리화가 순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P 69-70

"근대성으로의 이행은 사회 구성원들이 주체라는 것을 자각하고 각자가 다른 주체들과의 연대에서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등의 모든 영역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P90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는 단기간에 근대화가 되었지만, 사회 구성원들의 자아의식은 형성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기존의 권위주위적인 유교사상이나 물질적 숭배만을 강조하는 기복사상이 사회의 상층부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 사회는 겉으로는 근대화가 되었지만, 내부적인 사상은 아직도 전근대적인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개인들의 자아의식의 개발 없는 경제 발전의 기도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로 생산수단의 합리화에 의해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보장되는 민주적 정치의 발전은 이룩되지 못하고 종국에 가서는 경제 발전도 한계에 부딪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사회가 놓이게 된 상황이다." P 69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되었지만, 사회의 구성원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삶의 행동과 방향을 결정하지 못한 채, 기존 사회가 요구하는 물질적인 부의 축적과 쾌락 추구만을 쫓아가게 되었다. 자본주의가 저급해지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것이 단지 한국의 문제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고질적인 병폐이지만, 한국에서만 유독 그 병폐가 심하다고 말하고 있다.



 

"상품 숭배 사회에서는 오관에 주어지지 않는 것들은 인식 대상이나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모든 것이 현세적이며, 초월적 존재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 초월적 윤리 또한 상정되지 않으며 오로지 쾌와 불쾌가 선악의 기준일 다름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 소비문화는 삶을 복과 재앙으로 그리고 도덕을 쾌와 불쾌로 규정하는 무속문화와 친화성을 강하게 갖기 마련이었으며, 자본주의 사회가 지속되면서 외래의 상품 숭배와 토속의 물신 숭배가 결합하여 오늘날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는 두 축이 되어 버린 셈이다." - P 84-5



 

근래에 언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김영란법'이다.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말들이 많다. 대부분 언론들이 하는 말은 일반적인 음식점이나, 농수산업자들, 생산자들이 큰 피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이 법이 득보다는 실이 많다며, 헌법재판소까지 가기도 했었다. 그리고 많은 대중이 그 언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과연 이런 논쟁이 근대사회라고 말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뇌물을 금지하면, 경제가 죽기에 뇌물을 유지해야 한다는 논리가 어떻게 21세기 근대화 사회에서 가능할까? 아직도 한국 사회에 근대성과는 거리가 멀며,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아의식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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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인터넷을 보던 중에 충격적인 동영상을 보았다. 우리나라 1위 기업의 회장이 자신의 집으로 보이는 고급빌라에서 세 명의 여성들을 불러들이는 장면이다.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수고했다면 한 명씩 5백만 원이 들어있는 돈봉투를 건네 주었다. 이 영상도 충격적이었지만, 이것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다. 최근 연예인들이 성폭행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고, 이때마다 언론들은 매일같이 이 문제를 보도했고, 아나운서와 유명 패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토론을 했었다. 심지어는 검찰총장까지 나서서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인터뷰까지 하는 야단을 보였었다. 그런데 재벌 기업 회장의 성매수 혐의가 분명한 이 영상에 대해서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든 매체들이 잠잠했다. 그리고 그 영상이 보도된 지 하루가 지나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모든 인터넷과 신문에서 이 영상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 도대체 이런 상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것이 바로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전근대적인 힘과 문화가 지배되고 있다는 단면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이번에 아카넷 출판사에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인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저자가 1990년대에 근대성에 관해서 발표한 6편의 글을 묶어서 출간한 책이다. 이 책의 글들의 논지의 핵심은 우리 서양사회의 경제적인 성장 모델을 따라가고 있지만, 근대성의 부분은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낯선 학자와 그의 저서 한 권을 소개하려 한다. 현대 중국인 사상가인 이택후의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라는 책이다.(지식산업사) 중국식 이름으로는 '리쩌허후'라고 불리는 이택후는 우리나라에 중국 미학을 소개하는 [미의 역정]이라는 책으로 그나마 알려져 있다. 그러나 중국 현대사상을 관통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중국현대사상사의 굴절]이란 책에서 중국에서 단 시간 내에 사회주의가 급격히 지도층과 서민층의 지배한 것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나라도 사회주의가 이처럼 순식간에 넓은 지역을 점령한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를 통하여 사실은 중국 사회주의는 유교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것을 밝혀 낸다. 몇 천년 동안 뿌리 깊게 중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유교가 사회주의라는 탈을 쓰고 새롭게 부활한 것이다. 그 증거로 유교의 무신론이나 음양의 대립 등이, 사회주의의 유물론이나 변증법과 유사하다는 것을 밝혀낸다.


 


 

차인석 교수가 이야기하고 있는 맥락도 중국 학자 이택후와 비슷하다. 한국에는 오랫동안 기복사상(祈福思想)이라는 것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근대화되었지만 국민들의 마음 저변에는 이 전근대적인 기복사상이 뿌리 깊게 내려져 있다. 이것이 근대적인 합리성과 시민들의 자아의식 성장을 방해하고 오직 부에 대한 집착과 감각적인 쾌락만을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절망적이다. 눈부신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에서 기대될 수 있는 자아의식은 성숙되지 않았고, 오히려 쾌락주의에 젖은 이기심이 경제행위의 동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쾌락 추구의 자기중심주의는 다름이 아니라 수천 년 묵은 기복제화(祈福除禍)의 무속신앙으로 더욱더 증가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의 자본주의 경제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아니라 무속신앙이 이념적 동인이 되어 움직여왔다. 이 기복제화 의식은 모든 종교에 스며들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유교 등은 이 무속신앙을 바탕으로 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스러운 것에 대한 귀의라기보다는 물신 숭배가 신앙의 양식이 되어버렸다. 이는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 지향성과 강력한 친화성을 갖게 되었으며, 이 나라를 상품 사회로 만드는 데 그다지 아려움이 없었다. P 42-3



 

결국 이런 부에 대한 탐욕과 쾌락적인 자본주의가 권력과 만나 우리 사회의 온갖 부패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일단 부를 이루면 그것이 최고이고, 그 부를 이루려는 목적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이고, 그 부와 권력을 가지고 있는 세력에게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것이 바로 기복사상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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