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를 이야기할 때 자주 쓰이는 용어가 '탈근대성'이란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근대성이 추구한 거대서사(거대담론)과 대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도 불리는데, 탈근대성은 사회-역사적 시대를 가리키는 용어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에 대한 문화적 반응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탈근대성은 영국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의 '위험사회 이론'에서 시작된다. 그는 산업화로 인해 세상이 여러 가지 위험요소에 처해 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할수록 더 알지 못하는 위험요소가 생긴다고 말한다. 결국 이런 현상은 세상을 설명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는 거대서사나 대타자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탈근대는 '거대서사(grand narrative)'의 종말로 설명된다. 거대서사란 모든 삶과 사물의 총체성을 해명하고자 하는 해석 혹은 서사이다. 가장 대표적인 거대서사 중 하나가 마르크스주의인데, 리오타르는 (다른 거대서사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거부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시 보편성을 위해 삶의 구체성과 사물들의 개별성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전체주의적이고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지젝은 포스트모던 비판 철학자들의 이런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 [누가 전체주의를 말했나? (Did Somebody Say Totalitarianism?)]을 썼다. 이 책에서 지젝은 리오타르 등이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 논리에 굴복했다고 비판한다." -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03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이 제시하는 문제들을 '제조된 위험', '자귀재귀적인 올가미', '재귀성'같은 단어로 표현한다. 또는 '우리는 우리가 짠 거미줄에 걸려 있다'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렇다고 지젝은 탈근대적 시대 이전에는 대타자의 존재를 믿은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들은 믿지 않았지만, 믿는 것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지젝은 이 상황을 우화에서 벌거벗은 왕을 옷을 입은 것처럼 생각하는 백성들의 시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이런 비교를 통해 지젝은, 우리가 모두 실재 너무의 상징적 세계를 위해, 날것의 실재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최소한의 이상화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부인을 '마치 ~인 것처럼'이란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이웃과 함께 살기 위해 마치 역겨운 냄새를 맡지 않은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꼴을 보지 않은 것처럼 행동한다. 판사 앞에 섰을 때에 그 판사가 무식한 늙은이가 아닌 것처럼, 마치 그 판사가 법이 연명되는 통로인 것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충실한 시민으로 남기 위해 실제로 새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벌거벗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게 아닌 것처럼 해동한다." (P 103-4)

"그래서 대타자는 우리가 모두 개별적으로 동의하는 일종의 사기 또는 거짓말이다. 우리는 모두 왕이 (실재계에서)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상징계에서) 새 옷을 입고 있다는 기만에 동의한다. 그래서 지젝이 '태타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것의 '재귀성'으로 특징지어진 새로운 탈근대란 시대 속에서, 우리가 더 이상 왕이 옷을 입었다고 믿지 않음을 뜻한다." (P 104)

지젝의 대타자에 대한 설명 중에 가장 이해하기 쉬운 것이 상징적 효력이라는 단어이다. 대타자가 상징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주체는 스스로의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타자와 대타자의 시선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이것을 상징력의 효력'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유명한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201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김영하 작가의 '옥수수와 나'라는 작품에도 언급된 이야기이다)

"상징적 효력'이란, 어떤 사실이 진실이 되려면 단지 우리가 그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그 사실이 대타자에게도 알려졌음을 알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지젝은 자신을 낟알로 생각하는 미친 사람에 관한 농담을 통해 이를 설명한다. 치료가 끝나서 퇴원했다가 다시 병원을 찾은 사람은, 집에서 닭을 만났는데 그놈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고 털어놓는다. 의사가 화를 버럭 내며 당신은 인간이지 낟알이 아니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 사람은 '예, 나도 알아요. 하지만 그 닭도 그것을 알까요?'라고 대답한다." (P 104)

탈근대화 시대에는 점점 이런 상징적 효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지젝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가 오히려 인간을 스스로 억압하게 된다고 본다. 자유를 누리는 것을 반대하고 스스로를 피지배 아래에 놓게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를 파괴적이게 만든다고 말한다. 타자에 의해 파괴되기 전에 스스로를 파괴하는 형국이다. 지젝은 이것을 '탈근대성의 역설'이나 '타자의 귀환'또는 '규제에 대한 욕망'이라고 말한다.

"탈근대성이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생겨난 자유가 실제로는 어떤 부정으로 다가와 규제에 대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습관에 대한 헤겔의 논의와 유사하다. 헤겔에게 습관은 세계에 대한 기계적 반응의 하나로, 이 반응은 세부에 대한 관심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음으로써 더 심오한 문제에 참여하게 한다." (P 113)

또한 이러한 대타자에 대한 부정은 또 다른 타자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한다.

"이렇듯 작은 대타자의 구성 외에, 대타자의 붕괴에 대한 또 다른 반응은 진짜 실재 속에 존재하는 대타자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 '실재 속에 타자'에게 라캉 정신분석학이 붙인 명칭은 '타자의 타자'이다. 타자에 타자에 대한 믿음, 즉 실제로 배후에서 사회를 조정하며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사람이나 조직의 존재는 편집증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P 114)

지젝은 이런 탈근대성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상황의 틀을 깨는 것만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현상황의 틀을 깬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지젝에 따르면, 탈근대적 주체의 곤경을 해결하려면 탈근대의 가능 조건 자체를 거부해야 한다. 이런 곤경들의 의미를 갖는 지평 혹은 상징계를 바꿔야만 한다. 그런 정치적 행위는 곧 혁명이다. 물론 행위의 속성상 혁명 이후에 어떤 세상이 나타날지는 말할 수 없다. 일부 비판가들이 지젝의 사유를 모호하다고 비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현시점에서 지젝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은 오직 좀 더 나은 세계, 자신의 향락에 점령당하고 오직 노예 상태 속에서만 쾌락을 발견하는 편집증적 나르시시스트들의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가 열리리라는 희망 속에서 우리가 사는 세계(자본주의)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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