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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 쓴 책을 읽다가 난해함에 혀를 내두르고, 그에 대한 쉬운 인문서를 읽기 시작했다. 지젝의 인문서로 가장 잘 알려진 영국 학자 토니 마이어스가 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라는 책이다. 문제는 인문서도 난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몇 편에 걸쳐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첫 번째 주제는 지젝에게 영향을 미친 세 명의 사상가인 헤겔, 마르크스, 라캉이다.
슬라보예 지젝은 헤겔과 마르크스, 라캉의 사상으로 현대문화와 이데올로기들을 비판한다. 문제는 이들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지젝 나름대로 한 번 더 이들의 이론을 비틀어서 사용하고 있다.
먼저 헤겔의 이론이다. 헤겔의 변증법은 대부분 사람이 알고 있다. 흔히 일반인들이 이야기하는 정,반,합(正,反,合)을 통해 더 나은 통합을 이끌어 가는 과정이다. 헤겔은 관념이 이렇게 발전해 간다고 보았다. 지젝은 여기서 통합보다는 '테제'에 반대되는 '안티테제'의 존재에 관심을 가진다. 모순의 존재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의 변증법에 대한 관습적인 생각으로, 이에 따르면 서로 다른 관점들은 언제나 더 큰 진리로 화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젝은 이러한 헤겔 본인 시대의 이해와는 상관없이, 독창적으로 헤겔을 읽는다. 지젝에게 헤겔과 그의 변증법은 훨씬 더 급진적이다. 지젝이 읽은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화해나 종합적 관점이 아닌, 헤겔 자신이 말한 '모순은 모든 동일성인 내적 조건'이라는 인식을 생산한다. 이 명제를 통해 헤겔은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은 언제나 불일치로 분해되며 이 불일치야말로 그 관념이 애초에 존재하게 된 필연성임을 주장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6
결국 지젝은 헤겔의 변증법을 통해 모순된 관념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모순된 관념이 있기에 모순되지 않는 관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마르크스의 정치학이다. 마르크스는 문화나 정치를 이루는 상부구조는 경제를 중심으로 한 하부구조, 또 다른 용어로 토대(base)에 의해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지젝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생각들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일말의 주저함도 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선언하는 지젝은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이 갖는 가치와 진실을 확신하며, 더 나은 방법으로 사회를 조작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헤겔의 변증법이 지젝에게는 이데올로기 비판에 필요한 분석 도구를 제공했다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비판은 그런 분석과 비판의 이유를 설명해 준다. 다시 말해서, 지젝은 자신의 작업을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바꿈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원하도록 만드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의 일부로 간주한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49
마지막으로는 가장 난해한 라캉이다. 이 부분이 지젝이라는 철학자를 가장 특색 있고 매력 있게 만들어 주는 원인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라캉의 난해함이 지젝의 철학을 더 난해하게 만들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이어받아, 심리학을 통해 사회 전반을 해석한다.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라는 세 영역을 이야기한다.
상상계는 불완전한 어린아이가 거울을 보고 자신을 완전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과 같다. 라캉은 인간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 상상계의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말한다.
상징계는 상상계를 통해 이상적인 모습을 좇아가던 자아가 언어와 상징의 세계를 만나면서, 이를 통해 상상계를 규정하는 것이다. 라캉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언어나 상징을 통해 규정하기보다는 언어가 이런 것들을 규정한다고 보았다. 결국 우리는 타인이나 사회가 만든 언어나 상징 속에서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재계는 이런 언어의 상징계에 갇힌 자아가 원래 존재하는 실체를 좇아가는 것이다. 라캉은 실재계를 상징계에 의해 난도 당하기 전에 온전한 모습이라고 했다.
"지젝은 '실재의 철학자'라고도 불린다. 이 호칭은 지젝이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유럽 각국의 화장실 디자인이나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영화 등 우리의 생활과 직접 연관된 '실재적'인 주제를 다룬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얘기한 라캉적 의미의 '실재' 확장하고 자기화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지젝은 거의 언제나 상징계와의 관계 속에서 실재를 다룬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젝의 작업에 개성을 부여하는 특징 중 하나이다. 지젝이 국제적인 비평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상징계와 상상계의 관계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지젝은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적대성에 관심을 돌림으로써 성차적, 이데올로기적, 윤리적, 탈근대적 형상들 속의 주체를 일관성 있게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66
사실 이런 라캉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라캉의 이론이 어떻게 지젝에게서 펼쳐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더 쉽지 않다. 이 부분은 앞으로 지젝의 책을 더 읽어가며 발견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