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을 읽을 때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가 '주체'라는 단어이다. 지젝의 책을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주체'나 '주체화'라는 단어가 나오고,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 해서 독해가 방해받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젝에게서 '주체'란 무엇인가?

지젝이 말하는 주체를 알기 위해서는 데카르트의 '코키토(cogito)'라는 개념을 알아야 한다. 데카르트는 극단적인 회의주의를 통해 지금 자신이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어쩌면 악마가 자신을 속이기 위해 만든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사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극단적인 회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록 악마가 자신을 속일지라도, 속임의 대상이고 생각의 주체인 자신은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어낸다. 그래서 나온 명제가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근대철학이 바로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자아, '코키토'에게서 시작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의 탈구조주의 이르러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데카르트의 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반면 지젝은 이 데카르트의 '코키토'를 계승한다. 

 

"지젝에 따르면 오늘날 뉴에이지 반계몽주의자, 포스트모던 해체주의자, 하버마스주의자, 하이데거주의자, 인지과학자, 생태주의자,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자, 페미니스들은 한결같이 '코키토'로 알려진 데카르트적 주체를 현대적 사유에서 추방하고자 한다. 한 마디로 거의 모든 이들이 코키토를 비난한다. 지젝의 비판적 사유에 매료된 사람들은, 지젝이 학계의 이런 흐름과는 반대로 데카르트적 주체 모델을 받아들이는 데 놀라지 않을 것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1



 

현대 사상가들이 '코키토'를 반대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가 외부 세계와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완전함의 상태이다. 그 완전함은 어떤 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이른바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의 주된 결함 역시 아무것도 개인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모든 사람은 고립된 섬으로 자기충족적이고 독립적이며, 스스로 의지하는 것을 할 자유가 있다. 달리 말해, 개인에게 은총으로 보였던 모든 것들은 또한 불행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런 개인은 전적으로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자기 책임 아래 있으며, 자기 통제에 따른다. 객관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75



 

탈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는 주체를 부정하고, 주체는 외부 세계인 지배 이데올로기와 당대의 역사에 종속된다고 보았다.

이전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절대적 주체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다고 본 반면, 탈구조주의자들은 주체적 생각은 원래부터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 지젝은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완전한 주체의 존재는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주체는 외부의 영향들을 자신 안에서 통합해가며 새로운 생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 과정을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통해 설명한다.



 

"지젝은 이 영화 속 인조인간들이 지닌 위상을 들어, 우리 인간이 탈구조주의자들이 말하는 '불가항력적인 힘들에 조종되는 꼭두각시'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영화 속 인조인간들을 인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주입된 기억을 가지고 자신의 개인 신화를 창조하는 그들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상징적 질서 속의 요소들을 개별적인 방식으로 통합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언어나 그 외상징적 질서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지젝은 '주체화'라 부른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93

 

 

 

결국 지젝에게 있어서 주체화란 외부에서 주입된 생각과 자기만의 생각이 통합되는 자기화의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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