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글에서 '주체'라는 단어와 함께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이데올로기'라는 단어이다.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는 구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조주의는 주체가 스스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계급(마르크스적 용어)이나 사회, 언어나 의식구조 등에 의해 지배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늘 어떤 시대, 어떤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 조건이 우리의 견해나 느끼고 생각하는 방식을 기본적으로 결정한다. 따라서 우리는 생각만큼 자유롭거나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회려 대부분의 경우 자기가 속한 사회집단이 수용한 것만을 선택적으로 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기 마련이다.그리고 그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고 있는 것은 채오부터 우리의 시야에 들어올 일이 없고, 우리의 감수성과 부딪히거나 우리가 하는 사색의 주체가 될 일도 없다."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갈라파고스) P 27

비록 구조주의자는 아니지만, 이런 구조주의의 시작을 마르크스에게서 보는 경우가 많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란 '왜곡된 의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우리 인간의 의식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되어 있고, 이런 이데올로기를 깨는 방법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즉 우리사회의 국가체제나 경제체제가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고 순응적으로 끌려 가고 있다가, 이것을 자각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면서 그렇게 한다."

이런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이론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사람이 알튀세(알튀세르)이다. 그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는 개념을 통해 국가가 군대나 학교 등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한다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이론을 잘 설명해주는 것이 '호명'모델이다. 내가 경찰이나 누군가에서 호명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즉시 나도 모르게 그 국가 이데올로기에 편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알튀세의 이론을 부분적으로 인정하지만, 이 이론이 이데올로기의 전부를 모두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페테 슬로다익의 글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렇게 행동한다."

슬로터다익은 이미 사람들은 자신이 이데올로기에 조정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냥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냉소적인 주체'라고 한다. 지젝은 이 슬로터다익의 사상을 이어받는다.

"슬로터다익과 지젝이 주장하는 바는 이런 냉소가 이미 공식문화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냉소를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냉소주의적 주체는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전망이 이미 왜곡되어 있다는 것, 그런 왜곡된 전망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용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P 129

지젝은 우리가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으면서도, 그 이데올로기를 믿는 것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이 믿음은 생각의 믿음이 아니라 행동의 믿음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돈이 전부인 것처럼 행동한다. 제젝을 라캉의 용어를 빌려서 이것을 그는 이렇게 인간이 그렇다면 인간은 이 이데올로기 체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지젝은 이데올로기를 순전히 이원론적인 방법이 아닌, 삼원론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이원론적인 방법은 이데올로기와 현실을 이원론으로 나누지만, 삼원론적인 방법은 현실에서 상징계로 인식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실재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것을 상징계 내부의 틈을 은폐하는 이데올로기의 유령이라고 부른다. 이데올로기화되지 않은 실재계를 의미한다. 지젝은 이런 유령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확인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이야기함으로 이데올로기를 비판할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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