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리고 유탄>이란 소제목이 붙어있다. 이 소제목의 의미 역시도 앞의 소제목인 <지하 납골당>처럼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 했다.  이 역시 데리다의 직접적인 글로 그 의미를 유출해 본다.

"이러한 전제 혹은 일반적 정의가 제시되었고, 정해진 지면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므로, 이제 최종적인 15개의 제안을 낱알을 떼어내듯, 유탄을 던지듯, 산종된, 경구문의, 불연속적인, 병렬적인, 단호한, 직설적 혹은 가상적인, 경제적인, 한마디로 그 어느 때보다 더 전보문 같은 형식으로 궤도를 띄워 올려보자"(P161)


쉽게 이야기해서 시간이 없으니 앞의 전개보다 조금 더 빠르게, 조금 더 압축적으로 주제를 정의하겠다는 말 같다. 그래서일까.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읽기가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데리다는 앞에서 언급한 종교의 두 가지 원천, 즉 '기계적인 것''성스러운 신성성'을 다시 언급한다.(이 용어는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가져왔다.) 여기서 기계적인 것이란 이성의 인식 안에 있는 경험 가능한 것이고, 성스러운 것은 이성의 인식 밖에 있는 경험 불가능한 것이다.(이 두 영역의 구분은 칸트의 이성이 한계에 대한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데리다는 '기계적인 것'이라는 용어를 '원격과학기술'이란 용어로 바꾸어 현대 인터넷 문화에 적용한다. 베르그송은 종교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  도약하려면 둘의 관계가 상호공존적이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데리다는 이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고 부른다.

이런데 이런 '세계 라틴화'의 과정에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종교의 자가 면역 기능'이 발동한다. 종교가 스스로를 해체하면서 종교를 보호하는 미디어가 오히려 종교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종교 전쟁이 발생한다.


 

앞 부분에서 데리다는 앞 부분에서의 '자가 면역'과정을 이제는 '남근 현상'이나 '남근적인 것'이라는 모티브로 설명한다. 역사상 세계에 존재하는 남근의 모티브는 생명의 생산과 함께 생명의 희생의 이미지를 함께 가지고 있다.

"남근적인 것, 그것은 또한 페니스와는 다르게 일단 자신의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면, 사람들이 일으키고, 전시하고, 물신으로 숭배하고, 행령을 지어 끌고 다니는 꼭두각시 인형이 아닌가? 사람들은 가상의 가상이라고 할 거기에서, 계산 불가능한 것을 가지고 셈하고 계산하면서, 원격과학기술적인 기계, 즉 생명에 봉사하고 있는 이러한 생명의 적을 설명하기에, 종교적인 것의 잠재적 자체, 즉 죽어 있기에 자동적으로 생명을 초과하는/경계 위에 살아 있는 것으로서, 그 유령적인 판타스마안에서 부활한 것으로서 가장 생생한/살아 있는 신앙, 그러니까 신성한 것, 온전히 무사한 것, 무손한 것, 면역된 것, 성스러운 것, 한 마디로 하일리히를 번역하는 모든 것과 동맹을 맺게 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히 강력한 논리의 역량 혹은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가?" (P163)

 

결국 데리다는 '남근적인 것'이란 종교의 신성성이 기술적인 것과 만나서 도약하는 과정에 대한 또 다른 모티브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성은 스스로를 파괴하며, 생명에 대한 희생을 야기한다.

"그렇다면 또한 동일한 움직임에서 명백한 이중의 전제 설정을 설명해야 한다. 즉 한편으로 생명에 대한 절대적 존중, '절대 죽이지 말라'는 명령, 낙태, 인공수정 등 설령 유전자 치료 목적이라 해도 유전적 잠재력에 대한 수행적 개입을 금하는 '체제 유지적인'금지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종교전쟁, 그들의 테러 행위와 대량 살상에 대해서는 심지어 언급조차 하지 않는) 희생제의적 소명이 있는데, 그것 역시 보편적이다." (P167)

 

데리다는 마치 종교를 하나의 유기체처럼 보고 있다. 신의 뜻대로 움직이는 종교가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신성성과 기술성의 결합으로 생성된 종교성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자신을 보존하고, 또한 자신을 파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지금 이 과정에서 우리는 종교와 디지털 문화와 만남을 통해 종교의 자가 면역성, 또는 남근 현상과 만나고 있다. 데리다는 이것이 미디어 문화를 통한 테러와 파괴의 양상을 띄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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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은 모두 55개의 단문으로 되어 있고, 전반부인 1~26번은 주로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라는 책을 통해 종교가 이성의 한계 안에서 도덕적으로 사유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밝히고 있다.

27번 이후부터는 '추신(POST-SCRIPTUM)'이라는 제목 하에 끝까지 이어지는데, 그중 37번까지는 <지하 납골당>이란 부제가 붙어 있다.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 부제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정확히 파악을 하지 못 했다. 다만 데리다의 글 주에서 이 부제의 의미를 암시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것은 아직 확인되지 않은 벌판에 널려 있는 동일한 수의 지하 납골당과 같다. 때로는 불모지대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사막처럼, 아니면 잔해들과 지뢰와 우물과 동굴 묘와 묘지 터와 종자 즐이 흩어져 잇는 벌판처럼, 우리가 이미 가까이 다가서고 있지만, 아직 확인되지 않은, 심지어 세계로서도 확인되지 않은 벌판의 지하 납골당. P148


이 부분에서 데리다의 종교에 대한 사유를 이끌고 있는 두 가지 개념은 '믿음의 경험'과 '신성함'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의 데리다가 베르그송의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의 개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베르그송은 [종교와 도덕의 두 원천]이란 책에서 자신의 집단의 이익만을 고집하는 닫힌 사회에서 타인과 세계의 이익을 존중하는 열린 사회로의 도약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또한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도약의 과정에서 종교의 두 원천인 '믿음의 경험'과 신성의 경험'으로 제시한다. '믿음의 경험'이란 반복적인 약속을 위해 물리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험이고, '신성의 경험'은 신비적인 경험이다.(번역자의 해제에서) 베르그송은 정적인 종교에서 동적인 종교로의 도약은 두 경험이 서로 보완하며 발전할 때 가능하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이런 종교의 도약 과정을 '세계 라틴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종교의 신성성이, 믿음이의 경험인, 원격 과학기술(현대의 미디어 기술)과 결탁하여 종교성을 확대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이런 '세계 라틴화' 과정에서 '종교의 자기 면역성'이 등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자기 면역성'이란 데리다 철학에서 사회와 종교를 이해하는 중요한 개념인데, 이 개념은 911테러 이후 하버마스와의 대화를 다룬 [테러의 시대]라는 책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개념을 번역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생명과 죽음은 단순히 대립적인 것이 아니다. 생명 내부에는 죽음의 자리가 처음부터 기입되어 있다. 자가면역이라는 개념은 이러한 생명 활동을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자가면역은 의학용어다. 데리다는 [신앙과 지식]에서 이 개념을 종교 현상에 적용하여 종교가 자신의 신성을 보호하기 위해 동원한 면역적 기제, 즉 원격 과학기술을 부지불식간에 신성을 다시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자가면역적 반격을 가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테러 시대의 철학]에서 이 비평적 개념은 국제정치에 적용되어 다시 한 번 그 적절성 및 효용성을 입증받았다. 해체가 하난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라면 자가면역성은 하나의 시스템을 스스로 붕괴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자가면역은 자기 해체의 논리를 밝힌 후기 데리다의 핵심적인 비평 개념인 것이다. P47


즉 종교의 자기 면역성라는 것은 종교가 세계 라틴화 과정을 스스로 해체한다는 것이다. 미디어를 통해 자신을 확장해 가던 종교가 다시금 미디어를 통해 자기를 파괴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데리다는 이것을 현대의 종교전쟁의 원인으로 파악한다.

오늘날 종교는 자신이 전력을 다해 반작용하고 있는 원격 과학기술과 동맹을 맺고 있다. 종교는 한편으로 진정한 세계 라틴화이다. 종교는 자본과 미디어에 의해 원격적으로 전파되는 지식을 생산하고, 받아들이고 활용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황의 방문과 세계적인 이슈화도,'살만 루슈디 사건'의 국가 간 공조도, 전 세계적 테러리즘도 이런 리듬으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징후들을 무한히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종교는 곧바로, 동시에 반작용한다. 종교는 자신을 자신의 모든 고유의 장소로부터, 사실상 장소 자체로부터, 자신의 진실의 장소-가짐/일어남으로부터 쫓아내기 위해서 자기에게 이 새로운 권력을 부여하는 것에 전쟁을 선포한다. 종교는 이러한 모순적인, 즉 면역적이면서 자가면역적인 이중의 구조에 따라 자신을 위험하기 위해서만 자신을 보호하는 것에 맞서 끔찍한 전쟁을 수행한다. -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P159-160


이 부분의 데리다의 글들은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앞의 글들이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 헤겔의 [믿음과 지식],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어야만 이해가 가능했다면, 이 부분은 베르그송의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이라는 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또한 이 부분에서 제시하는 데리다의 개념들, '세계 라틴화'나 '자기면역성'의 개념들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데리다가 말하는 현대의 종교 전쟁의 개념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종교가 미디어와 관련하여 종교성을 발전시키다가 어느 순간 종교 내부 안에 있는 모순으로 인해(데리다는 이것을 유령이라는 개념으로 설명) 스스로를 해체시키고, 이 과정에서 종교 전쟁이 발생한다는 정도만 이해할 뿐이다. 더 깊은 이해를 위해서는 앞에 언급한 책들과 함께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대화 책인 [테러 시대의 철학]이란 책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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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짧은 글은 모두 52개의 단문들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단문들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다. 특히 그 중 앞의 1번에서 26번까지는 주로 과거 철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종교에 대해 사유하고, 27번부터 55번까지는 현대의 문화와 종교의 관련성을 사유한다.

 

앞의 종교에 대한 사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철학자는 칸트이다. 데리다는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는 책에 대해 주로 언급한다.(이 책의 번역자는 이 책을 [순수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아카넷이나 다른 출판사에서 번역된 책의 제목은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이성 밖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이성 안에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도덕성 뿐이다. 칸트의 이 도덕성은 흔히 우리에게 정언명령으로 알려져 있는 보편타당한 법칙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신 안에 있거나 타인과의 관계에 존재하는 정언명령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정언명령은 조건이나 이유가 없는 명령이다. 무엇 때문에나~ 무엇을 얻기 위해서~라는 말이 붙지를 않는다. 정언명령은 무조건적인 명령임으로 조건이나 결과의 보상없이 따를 뿐이다. 따라서 칸트는 우리가 신의 존재를 생각하고 신에게 보상을 받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도덕적인 행동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 칸트는 만약 조건이 있거나 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정언명령에 따르는 도적적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반성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이 칸트의 반성적 신앙을 지지한다.

 

도덕적인 종교로 말하자면 그것은 삶의 바른 행동에 관심을 보인다. 이 종교는 행함을 지시하고, 앞을 거기에 종속시키는 동시에 그로부터 불리시키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행동하면서 더 선해질 것을 명령한다. 바로 "다음의 원리가 그 가치를 보존하는" 곳에서 말이다. 즉 "누구에게든 본질적이고 필요한 것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혹은 했는지를 아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구원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해야 할 바를 아는 것이다." 칸트는 그런 식으로 '반성적신앙', 즉 그 가능성이 우리의 논의 공간 자체를 열어줄 수 있는 개념을 정의한다. 반성적 신앙은 본질적으로 어떤 역사적 계시에도 의존하지 않고 순수한 실천 이성의 합리성에만 부합하기 때문에 지직 너머의 선의지를 장려한다. 따라서 반성적 신앙은 독단적 신앙에 맞선다. 그것은 이런 '독단적 신앙'과 뚜렷이 구별되는 이유는 후자의 경우에는 신앙과 지식의 차이를 안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작 그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 중에서

 

데리다는 이성으로 인식할 수 없는 기존 교리에만 집착하는 종교를 '독단적인 신앙'라고 말하고,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도덕을 행하는 종교를 '반성적 신앙'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고 데리다가 칸트의 주장에 전부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칸트가 이야기하는 도덕종교가 기독교에만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칸트를 극복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의 이론을 받아들인다. 그는 하이데거를 통해 기독교 안에만 갇혀 있던 도덕종교에 대한 논의를 보편종교로 확대한다. 

 

 


개인적으로는 철학자의 사상이 그 뒤의 해석자에게게 오해받고 있는 대표적인 학자를 칸트라고 생각한다. 칸트는 우리의 순수이성이 신의 존재와 같은 신앙적인 것을 인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도덕을 인식할 수 있고, 그 도덕을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정언명령으로 보았다. 이 정언명령은 인간의 내부 안에 존재하고, 그것의 근원은 '선의지'이다. 이로 인해 기독교학자들은 칸트가 기독교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이성주의자나 이신론자들은 칸트가 신의 존재를 배제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칸트가 이성 넘어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이성 넘어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말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해석이 가능하다. '인식할 수 없기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쇼펜하우어가 의지와 표상의 세계를 주장할 때 표상의 세계의 기반으로 의지의 세계를 이야기 하듯이, 칸트 역시 이성의 한계에서 인식되는 도덕의 세계를 이야기 할 때 그 기반에는 이성의 한계 넘어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칸트의 '정언명령'이나 '선의지'는 이성의 기반 위에 서 있는 우연적인 부산물들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의 한계에 넘어 있는 존재론적인 것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럼에도 칸트 후대의 사람들은 칸트의 전제를 무시한다. 그리고 데리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의 글을 읽으며 데리다가 칸트를 무시하기 보다는 칸트에게서 자신의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남어지 부분은 하이데거나 다른 학자들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데리다는 칸트, 헤겔, 하이데거와 같은 학자들의 글을 해체해서 자신만의 종교에 대한 사유를 진행시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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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지식]의 시작은 데리다 특유의 아름답지만 조금은 모호한 아포리즘적인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떻게 '종교를 말할 것인가?' 종교에 대해서? 오늘날, 특별히 종교에 대해서? 이날 어떻게 두려움이나 떨림없이 그것에 대해 감히 단수로 말할 것인가? 게다가 그토록 적게, 그리고 그토록 빨리? 과연 누가 대담하게 그것이 식별 가능한 동시에 새로운 주제라고 호언할 수 있을까? 과연 누가 오만하게 거기에다 몇몇 아포리즘을 맞춰 넣을 수 있을까? 이에 필요한 대담함, 오만함 혹은 공평무사함을 갖추기 위해서는 어쩌면 잠시 동안 어떤 특정한 추상을 행하는 척해야만 한다. 추상화하는, 모든 것을 추상화하는, 혹은 거의 모든 것을 추상화 하는 추상, 어쩌면 추상들 가운데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손쉬운 것에, 하지만 동시에 가장 황량한 것에 내기를 걸어야 한다. - [신앙과 지식] 중에서


여기서 데리다가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추상'이나 '추상화'라는 단어이다. 한 마디로 추상화 하는 방법으로 종교에 대해서 사유하겠다는 것이다. 결국 어렵고 난해한 데리다의 이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추상화 하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개인적으로는 데리다와 같은 해체 철학자들이 비판하는 플라톤식 사고에 집착하기에 데리다의 글을 이해하기도 쉽지않고, 그의 언어를 마구 해체하는 손놀림을 따라가기도 버겁다. 다만 개인적으로 이해한 '추상하기'는 다른 말로 하면 '칸트의 이성 안에서의 사유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앞에서 데리다는 종교에 대한 헤겔의 사변적 방법보다는 칸트의 도덕적 방법을 택했다고 말을 햇다. 그리고 칸트의 도덕적 방법이란 종교를 이성의 한계 안에서 사유하는 것이다. 칸트 이전에는 이성과 신앙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간은 감성과 오성이라는 선천적 인식능력을 가지고 태어났고, 신앙적인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 밖에 있다고 말을 한다. 다만 인간의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인간 안에 있는 '도덕능력'뿐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이것을 '칸트식 선긋기'라고 말한다. 결국 칸트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것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순수이성의 명령) 그리고 말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실천이성의 명령) 결국 우리는 이성의 범위 안에서만 말을 하고 사유할 수 있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사유한다고 한다. 이 추상적으로 사유하기의 반대는 구체적이 아닌, 전체적이라고 말한다.(P36) 결국 추상적인 사유는 부분적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전체에서 부분을 떼어내어 사유하는 것이 추상적 사유이다. 그리고 이것이 데리다식의 해체적인 사유이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사유로 종교를 사유한다는 것, 데리다식의 해체식으로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은 데리다의 말을 통해 그 방법의 대략만을 짐작할 뿐이다. 


 

 

오늘날 종교를 추상적으로 사유하기 위해 우리는 이러한 추상의 힘에서 출발하여 위험을 무릎쓰고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이 모든 추상과 분리의 힘들 (뿌리뽑기, 탈지역화, 탈육화, 형식화, 보편화하는 도식화, 객관화, 원거리 커뮤니케이션 등)의 견지에서 보자면, '종교'는 그것에 반하는 적대와 동시에 그것을 재인정하려는 경쟁적 부추김 가운데 존재한다. 거기는 지식과 신앙이, 말하자면 한편으로(자본주의적이고 신탁적인) 과학기술과 다른 한편의 믿음, 신용, 신뢰성, 신앙 행위가 항상 그 장소 안에서 그들의 적과 동맹을 결성하고 이해관계를 같이 하게 될 바로 그런 곳이다. 거기서 아포리아 - 길, 방도, 출구, 구원의 어떤 부재 - 와 두 가지 원천이 유래한다. - [신앙과 지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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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넷에서 출간한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의 앞 부분에는 이 책의 역자인 쓴 해제가 실려있다. 이 해제의 제목은 '데리다의 오늘, 오늘의 데리다'이다. 역자는 이 해제에서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언급한 기존 사상가의 책의 내용과 데리다의 사상을 비교하고 있다. 사실상 데리다의 [신앙과 지식]이라는 책을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인 요소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언급된 책은 헤겔의 [믿음과 지식]이다. (역자의 글에서는 이 책을 '신앙과 지식'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데리다의 책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한국에서 번역된 제목인 '믿음과 지식'이라고 나름대로 바꾸어 부르기로 햇다.) 헤겔이 [믿음과 지식]에서 추구한 종교는 '사변성'이다. 그는 칸트 이후의 계몽주의 사상이 종교를 해석함에 있어 이성으로만 해석하려는 경향을 비판하고, 이성의 안에 가두는 종교는 제대로 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며, 경험적인 종교를 사변적인 종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언급된 책은 칸트의 [이성의 한계 안에서의 종교]이다. 칸트가 추구한 종교는 '도덕성'이다. 사실 칸트가 헤겔 이전의 철학자이고, 헤겔의 종교에 대한 사상은 주로 칸트의 종교에 대한 사상에 대한 비판이다. 그럼에도 역자는 헤겔의 사상을 먼저 언급한 후에 칸트의 사상을 언급한다. 그것은 데리다가 헤겔의 사상 보다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해석하려 한 칸트의 사상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칸트는 신의 존재나 초월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이성 밖으 것으로 보고, 이성 안에서 종교를 탐구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성 안에 있는 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주로 선의지나 정언명령 등으로 언급한 인간 안에 있는 도덕성이었다.


세 번째 언급된 책은 베그르송의 [도덕과 종교의 원천]이다. 베르그송의 추구한 종교는 '신비성'이다. 베르그송은 종교의 두 가지 원천을 닫힌것과 열린것, 동적인 것과 정적인 것으로 구분하고, 기독교를 전자에서 후자로 나가는 과정으로 보았다.


데리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도 어급한다. 데리다는 이 세가지 사상가 모두 기독교적인 종교에만 갇혀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세 사상가를 뛰어넘은 사상가를 하이데거로 보았다.


기독교는 한계의 철학자 칸트에게는 유일한 도덕적 종교였고, 전체성의 철학자 헤겔에게는 사변적으로 재건되야 할 수난의 종교였으며, 생명의 철학자 베르그송에게는 정적 종교에서 동적 종교로의 도약에 성공한 유일한 신비의 종교였다. 데리다 텍스트의 제목에 기입된 세 명의 저자 모두에게 기독교는 범례이자 예외였던 것이다. - 중략 - 그렇다면 기독교적 예외에서 벗어나 종교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ㄹ일까? 데리다가 보기에 마르크스에서 니체, 프로이트로 이어지는 계열에서 가장 멀리 나간 사상가는 하이데거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기독교적 모티브를 제거함으로써 존재신학 너머의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 본문 중에서-


해제를 읽으면서 데리다가 [신앙과 지식]에서 언급하려는 방향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데리다는 그동안 플라톤적 사고로 지배했던 형이상학적이고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종교를 바라보는 것 대신, 칸트의 이성과 신앙의 선긋기의 시각에서 종교를 바라보고자 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즉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것을 제거하고 현상 안에서 종교를 보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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