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책을 읽는 사람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좋아하는 한국작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은희경 작가를 이야기 한다. 그럼 대답은 두 가지로 돌아온다. 나 역시 은희경 작가를 좋아한다. 반대로 나는 그 작가를 싫어한다. 그리고 왜 이 작가가를 좋아하느냐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그럼 무어라고 말하기가 참 힘들다. 은희경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내 내면적인 문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은희경 작가의 책들을 읽다보면 어린 시절 우리집 강아지가 생각난다. '예삐'라고 부르는 이 강아지는 주인인 우리 식구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참 잘 따랐다. 어느날 예삐가 대문 밖을 나가서 놀다가 지나가던 차에 치혀 다리가 크게 다쳐서 돌아왔다. 피뭍은 다리를 쩔뚝거리고 돌아온 강아지는 마루 밑으로 들어가 나오지를 않았다. 상처를 보기 위해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으르렁 소리를 내면 우리의 손을 물고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가끔 세상을 살다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입게 되면 어린시절의 예삐를 떠올려 본다. 나도 상처를 입었구나! 그래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의 손을 무는 구나! 그리고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구나! 은희경 작가의 소설 주인공들에게서 나는 이렇게 상처입은 인간의 연약함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한없는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98년도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통해서였다. 시 나는 한국소설을 좋아했고,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매 년 구입해서 읽고 있었다. 이전의 대부분의 수상작들을 읽으면서 납득이 갔다. 아! 이래서 수상을 했구나!' 그런데 은희경 작가의 [아내의 상자]라는 작품을 읽으면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은 뭐지?'라는 생각이 났다. 읽으면서 무언가 알 수 없는 화도 났다. '왜 아내는 스스로를 파괴하고, 남편에게 상처를 주고, 가정을 파괴했을까?'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품의 글과 이미지가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었다. 특히 그녀가 병든 이웃집 개에 대해서 남편에게 했던 이야기의 문장들이 기억이 났다.
"그게 아니구요, 나 같은 사람은 선택 이론에 의해서 도태되게 되어 있어요,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우성만 유전되고 열성음 도태되는 게 진화잖아요. -중략- 옆집 개 말이예요, 그 더러운 개새끼는 곧 굶어죽을 거예요. 죽는 날까지 토실토실한 개한테 가까이 달라붙겠죠. 뻔뻔스럽게도 그 개가 크는 것까지 가로막으면서 말이죠. 빨리 죽어 주면 좀 좋아. 개들은 왜 자살 같은 걸 안 하나 몰라." - [아내의 상자] 중에서 -
당시에는 내가 도저히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삶에 대해서 비관적이었을까? 왜 그렇게 자신에 대해 냉소적이었을까?
그 후 같은 해에 출간된 은희경 작가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에는 사랑에 대해 지극히 냉소적인 '강진희'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랑에 대한 냉소를 이야기 한다.
"셋은 좋은 숫자이다. 오직 하나뿐이라는 것? 이 어리석은 은유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연히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 둘이라는 숫자는 불안하다. 일단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결국은 첫 선택에 대한 체념을 강요당하거나 기껏 잘해봤자 덜 나쁜 것을 선택한 정도가 되어버린다. 셋 정도면 조금 느긋한 마음으로 일이 잘 안 될 때를 대비할 수가 있다. 가능성이 셋이면 그 일의 무게도 셋으로 나누어 가지게 된다. 진지한 환상에서도 벗어나게 되며, 산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체중을 양다리에 나눠 싣고 아랫배로도 좀 덜어왔으므로 몸가짐이 가뿐하고 균형 잡기가 쉽다. 혹 넘어지더라도 덜 다칠 게 틀림없다. 실제로도 내게는 언제나 세번째 선택이란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애인이 셋 전도는 되어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유지할 수 있다는 얘기다." -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중에서 -
왜 그녀는 이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일까? 아니, 그렇게 사랑에 냉소를 보여야 한다고 집착할까? 사랑하며 받는 상처가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사랑은 상처로 이어진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이미 알았기 때문일까?
그 다음 해에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란 책을 일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들보다 먼저 출간되었지만, 나는 가장 늦게 읽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후에야 은희경 작가의 주인공들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또 다른 이름의 '진희'는 12살의 소녀이다. 그녀는 아버지와 어머니없이 할머니와 이모와 삼촌과 산다. 그녀는 어린 아이의 눈으로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 안에 있는 불신과 배신을 본다. 그리고 그녀는 '보여지는 나'와 '바라보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보여지는 나'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책의 마지막 에필로그에서 성년이 된 진희는 이렇게 독백한다.
"하긴 사랑이나 존재라는 말 못지않게 배신이란 말의 뜻도 가볍다. -중략- 그러므로 누구 누구를 배신한 것이며 누구의 배신이 더 심각한가 따위
, 배신의 진앙과 진도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그런 것을 따지다 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의도하진 않았따 할지라도 누군가를 배신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마치 서로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처럼 심상하게 얽혀 짜여져 있지만 이 삶 속에서 누군가의 적이 되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한 것처럼, 삶 속에는 타의가 있는 법이니까" - [새의 선물] 중에서 -
세상을 살면서 주변에 상처입은 사람들을 본다. 상처로 인해 자신을 가두고, 남의 배려에도 으르렁 거리는 사람들을 본다. 처음에는 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점점 그들 안의 상처를 본다. 그리고 그런 아픔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글들이 느껴진다. 더 나이가 들면,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더 많은 상처를 보듬어주고, 더 많은 책들을 이해하게 될까? 아직까직은 은희경 작가의 상처입은 주인공들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