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를 읽는다 2부는 니체가 영향을 받았지만 대부분 후기에 들어 비판하거나 대립관계로 넘어간 당대의 학자들을 언급한다. 부르크하르트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다윈이다. 이 중 부르크하르트는 당대 그리스문화에 가장 정통한 학자였다는 것 외에는 개인적으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가 생명력이 넘치는 문화였으며,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인 영웅들이 근대의 상처받는 약한 인간들이 아닌 고통에 맞서서 싸우는 강한 인간상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런 시각을 부르크하르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니체에게 부르크하르트가 준 것 보다 더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니체가 주장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 즉 생을 긍정하고 욕망하는 것은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로 내려오는 정통적인 서양의 관념철학에 이어져 있다. 플라톤은 세계를 보여지는 현상계와 보여지지 않지만 이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데아'로 나누었다. 그리고 현상계는 허상일 뿐이고, 참다운 실재는 '이데아'의 세계라고 주장했다. 칸트에 이르러서는 현상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인간의 인식 능력으로 보았다. 즉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계란 인간의 타고난 인식 능력(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개념으로 인식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 되지 않는 근원적인 세계인 '물자체'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쇼펜하우어는 이런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는 세계를 '표상으로서의 세계'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표상으로서의 세계 너머에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발현된 것로 그 발현된 객체 중 하나가 인간이다. 그리고 그 객체화된 인간은 의지의 발현인 '생의 의지'에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다.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가 표상화된 객체에 부여해 준 '생의 의지'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며, 이것이 예술로 발현된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은 부정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해야 할 것으로 본다. 반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표상의 세계에 갇혀 자신만의 '생의 의지'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고통의 근원으로 보고,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생의 의지'를 초월해 '의지로서의 세계'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의지으로서의 세계'는 플라톤으로부터 내려온 이데아의 세계와 같은 맥락을 가진다. 그러기에 니체는 초기에는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를 찬양하다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것을  비판한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인격신 따위의 허구적 관념을 끌어들이지 않고, 우리가 내면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생존에의 의지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 지적인 성실성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니체는 무엇보다도 삶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해명될 수 없고 도덕적인 것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의지로 보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받아들인다. (P108)


후기 니체에 있어서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악의에 찬 '천재적인 시도'다. 쇼펜하우어가 예술, 영웅주의, 아름다움, 인식비극에 대해서 '의지'를 부정하고 삶의 체념을 가르치는 것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특히 예술이 사람들을 관조적인 인식의 상태에 빠지게 하면서 맹목적인 생존의지와 욕망에 의해서 내몰리는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위로수단이라고 본다. 쇼페하우어는 이러한 예술관을 니체는 '그리스도교를 제외하고 역사상 가장 엄청난 심리학적 날조'라고 평한다. (P110)


더 나아가 니체는 쇼펜하우어가 그리스도교적 해석의 상속자에 불과할 뿐이라고 평가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도교가 속된 것으로 거부했던 영웅주의, 천재, 아름다움, 인식, 비극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들을 그리스도교적인 의미로, 다시 말해 대지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의 관점에서 시인한다. 즉 예술을 현실과 고통 그리고 생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평안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길로서 시인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은 일시적인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다. 예술은 우리가 예술을 통해 아름다움을 경험하는 순간에만 맹목적인 의지와 욕망으로부터 구원을 가져다 줄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욕망으로부터의 영원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금욕적인 행위를 통해서 욕망을 완전히 근절하고 부정해야만 한다고 본다. (P110-1)


개인적으로는 니체가 처음부터 쇼펜하우어의 '생의 의지'와 다른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든다. 아니면 그의 사상이 발전되어 가면서 쇼펜하우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그와 결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둘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에게는 현실세계를 뛰어넘어 존재하는 '의지로서의 세계'가 있었고, 니체에게 그런 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삶의 건강치 못하게 만드는 허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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