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사상 중 일반인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은 처자공유와 재산공유를 언급하는 부분이다. 이 부분으로 인해 플라톤의 사상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오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중세의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나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같은 책은 플라톤의 처자공유와 재산공유의 사상을 이어 받는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공상적 사회주의사상이나 원시적 공산주의 사상이라고 부르며, 마르크스의 [자본론]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플라톤의 처자공유와 재산공유에 대한 부분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하여 생각하기 전에, 먼저 플라톤이 왜 이런 주장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플라톤의 처자 공유제와 재산 공유제에 대한 사상은 그의 저서 [국가] 5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플라톤은 [국가]라는 책에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을 대화를 통해  이상 국가, 즉 정의로운 국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로운 국가란 통치자(지혜), 수호자(용기), 백성(절제) 계급들이 자신의 일을 바르게 수행하는 상태를 말한다. 특히 이 중에서 소크라테스가 강조하는 계급이 수호자 계급이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급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생명까지 내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행동의 목적이 물질적 보상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해서가 아닌, 그것 자체가 정의이기 때문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내용이 주로 [국가] 4권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국가] 5권에서는 본격적으로 수호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사상을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수호자 계급은 공동생활을 하며, 가정이나 사유재산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도 이런 주장이 당시로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고, 조롱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이상국가를 만들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이 부분을 특유의 대화법으로 청중들에게 설득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하는 수호자계급의 처자공유제와 재산공유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들 모든 남자는 이들 모든 여자를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여자도 어떤 남자와 개인적으로 동거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네, 또한 아이들도 공유하게 되어 있고, 어떤 부모도 자기 자식을 알게 되어 있지 않으며, 어떤 아이도 자기 부모를 알게 되어 있지 않다네." (P 334)

"구별할 길이 없다네. 그러나 이들 중의 한 사람이 신랑으로 된 날부터 이후 일곱 달째에서 열 달째까지 사이에 태어나는 아이들 모두를 이 사람은 남자들의 경우에는 알들들로, 그리고 여자들은 딸들로 부를 것이고, 이들은 그를 아버지로 부를 걸세. 또한 이런 식으로 그들의 아이들을 그는 손자들로 부를 것이며, 이들은 그 또래를 할아버지들 그리고 할머니로 부를 걸세.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이들의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아이를 낳던 그 시기에 태어난 자들을 형제 자매로 불러, 방금 우리가 말하고 이었듯, 서로 건드리지 않을 걸세." (P341)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되는 혈연 관계를 없애려는 이유는, 수호자들의 타락으로 인한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서이다. 수호자들이 내 가족과 내 것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이해관계가 생기게 되고, 나라는 분열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주장이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앞서 말한 것들은 지금 말한 것들과 함께 이들을 한층 더 참된 수호자들로 만들어 주며, 동일하지 않을 것을 '내 것'이라 일컬음으로써 나라를 분열하게 하는 그런 일이 없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즉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것을 두고 '내 것'이라 일컫게 됨으로써, 한 사람이 자기가 남들과 따로이 가질 수 잇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며, 다른 한 사람도 다른 자기 자신의 집으로 그렇게 끌고 가고, 또한 아내도 자식들도 따로 갖고, 사사로운 것들에 대한 사사로운 즐거움과 고통도 나라에 생기게 함으로써 분열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말일세. 오히려 이들이 자기 자신들의 것에 대한 한 가지 신념으로 동일한 것을 목표로 삼고서, 고통 및 즐거움과 관련하여 모드가 최대한으로 '공감상태'에 있도록 만들지 않겠는가?" (P 347)



 

이런 수호자 계급의 공동생활을 위해서 소크라테스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남녀평등사상이 이야기한다. 그는 남녀의 성향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면 다른 일을 해야한다는 주장에 반박한다. 그는 남녀가 국가를 수호하는데 있어서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인 성향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당시로서는 획기적으로 자질이 있는 여성은 남성과 같이 군사훈련련과 시가교육을 받으며, 수호자로서 훈련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당시 체육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김나지온(Gymnasion)에서 훈련을 받아야 했는데, 김나지온은 벗은 상태라는 김모스(Gymos)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유례했듯이 모두 옷을 벗고 운동을 했다. 여성이 그런 남성이 훈련을 받는 곳에 함께 동참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사상이었다. 그럼에도 소크라테스는 그런 편견을 버리고 여성이 남성과 같이 옷을 벗고 김나지온에서 체육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우수하게 길러진 수호자 계급의 여성과 남성의 결합을 통해 출생적으로도 건강한 수호자 계급의 자녀를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 5권의 끝부분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이런 이상국가의 시스템과 수호자계급의 양성을 위해서는 그는 철학자나 철학적 사상을 가진 사람이 통치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철학자들이 나라들에 있어서 군왕들로서 다스리거나, 아니면 현재 이른바 군왕 또는 최고 권력자들로 불리는 이들이 진실로 그리고 충분히 철학을 사랑하게 되지 않는 한, 그리하여 이게 즉 정치권력과 철학이 한데 합져지는 한편으로, 다양한 성향들이 지금처럼 그 둘 주의 어느 한쪽으로 따로따로 향해 가는 상태가 강제적으로나마 저지되지 않는 한, 여보게나 글라우콘, 나라들에 있어서, 아니 내 생각으로는, 인류에게 있어서도 나쁜 것들의 종식은 없다네." (P 365)



 

플라톤의 사상은 현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이상적인 면이 있다. 플라톤 역시 [국가]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그런 부분을 인정한다. 자신의 사상이 최고의 이상 국가의 사상이고, 일반적인 국가에서는 온전히 실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이상을 바라보고 나갈 때 국가가 혁신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처자공유제와 재산공유제는 통치자나 수호자 계급에만 한정함으로서, 모든 국가에 적용하는 사회주의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과는 다르다. 특히 그는 국가의 통치자나 수호자들이 개인의 부귀영화에 집착해서 일을 하는 것을 원치 않고, 오로지 국가와 정의를 위해서 일을 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 방해가 되는 가정이나, 처자, 재산의 부분에서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던 것이다. 어쩌면 현대의 정치인의 재산공개나, 특정 이권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들과 취지는 비슷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럼에도 플라톤이 가정의 중요성을 간과한 것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그는 효율적으로 수호자 계급을 양성하기 위해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없애려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단지 효율적이 교육만으로 양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가정을 통해 부모가 주는 인성의 부분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외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어도, 바른 인간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이다. 결국 가정과 자녀, 그리고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고도, 그런 것에 집착하거나 좌우되지 않을 투명한 시스템이 현대 정치인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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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양면성이 있다. 대부분 종교의 교리에는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종교인들이 자기보다 가난한 자를 돌보고, 심지어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놓거나 일생을 받치며 약한 자를 돌보는 경우가 있다. 인도의 성녀로 불리는 마더 테레사나 일평생 문등 병자를 돌보았다는 한국의 손양원 목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반면 종교가 특정한 권력에 갇히게 되면, 교리가 폐쇄적으로 되어간다. 그로 인해 종교는 신이나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특정한 권력의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변모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중세 유럽의 가톨릭이다. 유럽과 교황의 권력 안에 갇힌 종교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끔찍한 일들을 저질렀다. 현대에는 알카에다나 IS의 권력에 갇힌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종교를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본 [종교 유전자]라는 책에서는 종교가 인간이 수렵-채집 생활을 하면서부터 생겼다고 이야기한다.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면서부터 그 공동체를 위한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 희생에 동기를 부여하는 것이 바로 종교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가 형성되고,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나면서 종교는 전쟁과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종교와 전쟁의 관계에 관해서 3대 일신교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 유대교는 확장적인 신앙에서 시작했지만 패배를 경험한 다음 평화적인 종교로 변했다. 기독교는 처음에 비폭력적이었으나, 나중에는 제국을 위해 공격적인 종교가 되었고, 세속 국가의 발흥과 더불어 어느 정도 중도적인 방향으로 돌아섰다. 이슬람은 제국의 종교로 시작했으나 아직 세속 국가 안에서 어울리는 역할을 발견하지 못한 상태로 존재한다.

종교와 전쟁 사이에는 일관된 관계성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교는 통치자가 다양한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강력한 잠재적 도구인 것만은 확실하다. 종교가 초기의 인간 사회에서 발생했던 끊임없는 투쟁의 산물이라고 보는 진화론의 관점에서는 그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다. 종교적 행동은 사회가 전쟁을 할 수 있는 활력을 부여하고, 사람들이 결핍을 견디면서 전쟁에서 목숨을 바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전쟁은 종교적 결속력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P 434)



 

과연 종교가 인간들을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들이 전쟁을 위해 종교를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일까? 저자는 후자의 입장에 무게를 둔다.



 

종교는 현대의 전쟁에서 더 이상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것이다. 세속적인 권력자가 종교를 구실로 전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현대 국가에서조차, 종교는 병사에게 전투를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키는 비공식적일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전쟁의 슬로건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은 무엇보다 땅을 차지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족은 문제의 본질이 종교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전쟁을 정당화하고 국민들의 결의를 굳히는 데 종교를 이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는 전쟁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수단이다. 그리고 종교는 무기처럼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한 국가의 군비증강이 적국에 대해 참기 어려운 위험이 된다고 여겨질 때, 무기는 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무기는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P 452-3)



 

또한 평화시 종교인들은 종교 지도자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지만, 전쟁 시에는 그 불만을 타종교에 표출하며 잔악한 학살을 하게 된다. 띠라서 종교지도자들은 자신에 대한 불만을 회피하기 위해 종종 전쟁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십자군 전쟁이다.

결국 종교가 잔혹해지는 이유는 특정 지도자들이 종교를 전쟁의 수단으로 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슬람의 청년들이 전쟁의 무기가 되어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함께 버리고 있다. 결국 저자는 종교가 세속 권력과의 결탁을 끊는 것이 종교의 폭력성을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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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스릴러 작가인 '장 크리스토프 그랑제'는 주로 인간의 원시성과 그로부터 나오는 공포를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의 작품 중에서 [악의 숲](문학동네)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은 끔찍한 연쇄 살해로 시작된다. 살해 현장에서 시신은 잔인하게 잘려 있고, 시신이 있는 벽면에는 시신의 피와 배설물로 해독할 수 없는 주술적 모양의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주인공의 사건을 추적하면서 이 사건이 원시부터 내려온 친부 살해의 관습과 관련이 있고, 그런 관습을 이어받은 어디에게 존재하고 있는 원시 종족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한다.

 

[악의 숲]이란 소설에서 나오는 친부 살해와 원시 종족의 모티브는 프로이트의 [토템과 타부]라는 논문에서 가져온 것이다. 모두 4편의 논문을 묶여 있는 이 책은 주로 토템과 타부를 주제로 한 논문들이다.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토템과 타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열린책들의 프로이트 전집인 [종교의 기원]이라는 책에 수록된 부분을 읽었다.) 이 논문들에서 프로이트는 원시 종족에서 발견되는 특정한 동물에 대한 토템과 근친상간에 대한 타부를 방대한 조사와 책들을 인용하며 언급한다.  그리고 이런 관습이 현대 유럽에서도 형태만 바뀐 채 여전히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이런 토템과 타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프로이트는 다윈의 진화론을 근거로 태초의 원시 종족의 형태를 언급한다. 태초의 원시 종족은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한 명이 여러 여성들을 거느리는 부족 형태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들들이 아버지를 살해하고, 아버지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죄책감을 나누기 위해 아버지의 시신을 먹었고, 이 풍습이 유전되면서 종교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토템과 타부]라는 논문은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현대에는 대부분의 학자가 이 논문의 이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 논문에 등장하는 친부 살해와 원시적 의식의 과학적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환자들에게서 발견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여러 가지 강박증을 진화론적 심리학으로 해석하다 보니, 나름 하나의 신화를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신의 존재나 종교의 허구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의 견해를 뒷받침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적 이론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학자가 [이기적인 유전자]나 [만들어진 신] 등으로 유명한 리처드 도킨스이다. 그는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부모의 관습을 따르는 유아기적 심리가 종교성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니콜라스 웨이드는 [종교 유전자]라는 책에서 도킨스와는 다른 각도로 진화심리학을 통해 종교를 접근한다. 그는 다른 진화심리학자들과는 다르게 종교의 유용성을 언급한다. 인류가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우두머리가 전체를 관활하는 유인원 무리와 다르게, 인간은 모두 평등한 관계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정한 우두머리가 없이 공동체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 종교가 필요는 것이다. 종교는 공동체의 존립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동기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종교의 유익성은 현대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종교의 나무'라는 이론을 주장한다. 언어가 원래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종교도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종교란 특별한 종류의 언어다. 종교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식이며, 의식적으로 또는 정서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몸짓과 언어적 상징으로 표현되는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식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만일 이 '특별한 언어'가 언어와 거의 동일한 패턴으로 변화하고 분화해가는 것이라면, 이론적으로 볼 때, 전 세계의 언어를 포괄하는 계통수를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세계의 모든 종교를 포함하는 종교의 나무(종교의 계통수)를 그릴 수 있을 것이다." (P265-6)



 

이런 신념에 의해 저자는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교의 기원을 설명한다. 저자의 설명의 공통점은 이런 종교들이 결국은 국가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서 기존의 종교나 관습들을 변형하며 발전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론은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일관성이 있다. 프로이트가 현대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강박증을 해석하기 위해 원시의 토템과 타부를 언급하여 인류의 심리상태의 커다란 줄기를 그리고 있다. 니콜라스 웨이드 역시 종교의 존재의 필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원시사회에서부터 부족국가, 근대국가와 현대 국가에 이르기까지 종교의 역할과 변화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문제는 이런 이론들이 이론적으로는 완벽하나, 프로이트의 이론처럼 실질적으로는 밝혀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연 유인원에서 수렵-채집 사회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탄생했지는, 그 종교가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지, 또 그런 유익을 위해서 여러 종교가 만들어진 것인지에 대한 문헌이나 유물로 발견된 것이 없다. 단지 종교가 인류의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되고, 그것이 유전적으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여러 가지 상황을 언급할 뿐이다.  

이런 비슷한 상황은 인문학에서 종종 발견된다. 인문학자들은 무언가 인류와 사회를 하나로 해석할 수 있는 거대담론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다. 마르크스, 칸트, 헤겔 등 역사상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학자들마다 역사와 인류 정신을 해석하기 위해 거대 해석이론을 만들었다. 그리고 학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이 만든 이론 하나로 모든 역사와 인류 정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그들의 이론이 전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전부를 설명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니콜라스 웨이드는 종교심리학의 관점에서 종교의 기원과 진화를 해석하는 이론들을 제시한다. 그중에서는 공감이 가는 부분도 있고, 예리한 부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진화심리학이란 한 가지 분야, 그리고 그 진화심리학 중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한 가지 이론으로 과연 세상의 방대한 종교의 기원과 진화 과정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 먼 훗날 인류의 과학이 발전하고, 인간의 유전자를 통해 과거를 완벽하게 읽을 수 있다면, 그때는 또 어떤 이론이 나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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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과사무실이라는 곳에 수많은 피켓과 현수막들이 널려 있었다. 사무실 캐비닛에는 오래전에 사용? 했다던 쇠 파이프까지 들어있었다. 그렇게 1학년 생활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3년간 휴학을 했었다. 3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은 정치나 공동체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취업을 위한 공부가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IMF가 터졌다. 나는 우리 시대의 의식구조는 IMF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理想)을 위해서 살았다. 물론 그 이상이라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광기 어린 이상도 있었고, 잘못된 판단으로 많의 사람의 고통을 강요한 이상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며 살았다. IMF 이후는 사람들은 이상을 버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현실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현실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현실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고, 스스로를 거대한 자본주의 문화 속에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라는 책은 6편의 글들이 실려져 있다. 그중 마지막 글의 주제가 '기술의 합리성과 세계의 운명'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의 변질된 이성인 '과학적 이성'과 '자본주의 이성'을 비판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성은 개인의 자아의식의 발현이었다. 데카르트가 '코키토 에르그 숨(cogito ergo sum)' 이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자아를 이야기한 후, 서구사회의 지성은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식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개인의 자아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물질문화의 가치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은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원시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 과정을 이야기했다. 자본론에서는 이 과정을 역사의 필연성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필연성은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마르쿠제'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과정은 필연적이 아닌, 개인의 자아의식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어느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성숙으로 역사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이 사회적 혁명의 선행 조건임을 강조했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결정론자였으며 그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주어진 객관적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고, 혁명적 행위 자체도 이 인식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 이론가들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결코 세계의 모사(模寫)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행위의 산물이고, 또한 사회적 행위는 사회적 여건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밖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에 따라서 그의 행위는 이 세계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P206)



 

마르쿠제의 이론에 의하면 결국 사회는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화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변화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과학주의적인 이성과 자본주의적인 이성이, 철학적 이성을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래 서구의 이성이라는 개념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의 합리성이 대두되면서 이성은 곧 합리성이 되었다. 즉 현대의 이성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보다는 수학적 합리성을 통해 물질적인 결과의 이득만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들의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적인 계산적인 이성만 남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IMF 이후 한국의 어두운 자아상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이성은 계산이란 뜻을 지니는 합리성이다. 이윤 증대를 목표로 모든 자원을 계산해서 조직적으로 동원한다고 할 때,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합리성은 자본주의 발달의 불가결의 조건이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는 업적을 올리는 조건이다. 쾌락 추구는 억제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일과는 설정된 생산 목표의 달성에로 정향 되어야 한다." (P215)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 이성의 합리화 과정이 이미 마르쿠제에 의해 예견되었다고 말한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성은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비이성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고도의 생산성과 자연 관리가 인간의 자기소외를 가져옴으로써 파괴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개인과 개인 간에, 집단과 집단 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원 자원전쟁으로 이어져나가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성은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더 이상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이 되지 못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조직과 능력으로 전락해버린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이성의 비이성화다." (P215)



 

그렇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없을까? 저자는 글에서는 회의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동안 사회가 변화되었던 것 소외계층이나 청년들이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회변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까지도 사회 변화보다는 그 사회 속으로 자신을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아의식을 개발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이성에 몰입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희망은 끈을 놓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 문화는 하이데커가 가르치는 '본래적 존재로의 결의를 내릴 수 있는 정신적 조건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도 생산성의 논리는 자유나 자율 그리고 자발성 등의 이념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느 시대고 그리고 어느 곳이든 변화를 부르짖는 세력은 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그가 속한 사회구조로부터 분리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쿠제의 믿음이기도 하다." (P 242)



 

요사이 우리의 삶을 볼 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경쟁만을 강요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먹구름이 이 사회를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닥쳐왔고, 이제는 그 파도에 저항하던 소수의 사람들마저도 그 파도에 모두 삼키움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와중에도 다시금 개인이 주체적 자아로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이런 글들이 남아 있음을 위안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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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에 유난히 관심을 가진 인문학 분야가 윤리학이었다. 그 시절 윤리학은 내게 너무나 매력적인 학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인 울타리 안에서 자라다 보니, 때로는 종교적이라는 것이 위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종교 없이 도덕의 기초를 세우겠다는 현대 윤리학자들의 거창한 포부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다. 그때 관심을 가지고 오랫동안 탐독했던 책이 두 권이 있었다.

한 권은 H.J.페이튼의 [칸트의 도덕철학]이란 책이었다. 신이나 영혼의 언급 없이 이성의 범위 안에서 인간 안에 보편타당한 정언명령을 통해 도덕의 기초를 세워가는 칸트의 글들을 읽으면서, 마치 거대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우는 거장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른 한 권은 실천윤리학의 거장으로 불리는 피터 싱어의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라는 책이었다. 피터 싱어는 현대의 물질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를 비판하며, 종교 없이 합리적인 생각만으로도 윤리를 세울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책들을 읽어가며 결론 부분에 이르렀을 때, 그 결론을 통해 과연 종교 없는 도덕이 가능한가를 물었을 때 대답의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용두사미(龍頭蛇尾)라는 말처럼 무언가 대단한 것을 소개하는 것처럼 수많은 이론과 체계를 제시했지만, 결론은 너무 초라해서 과연 이런 결론으로 현대의 복잡한 세상에서 윤리가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들게 되었다.

 

 


니콜라스 웨이드의 [종교 유전자]라는 책을 읽으면서 다시금 그 시절 생각이 났다. 저자는 종교를 진화심리학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즉 인간이 진화의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서 종교를 만들었고, 종교가 유익하기에 유전자를 통해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유인원 사회의 특징은 철저한 계급주의인 반면, 처음 유인원에서 진화한 인류의 수렵-채집 사회의 특징은 평등주의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평등주의가 가능했던 것은 인간에게 종교성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동물사회처럼 힘으로 지배하는 우두머리가 없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집단을 위해 희생하기 위해서는 종교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종교성이 자손들을 통해 유전되었다는 것이다. (3장 종교적 행동의 진화 참조)

그렇다면 이런 종교성이 없는 도덕적인 사회는 가능할까? 존 로크나 막스 베버와 같은 학자들은 종교성이 경제적이 도덕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들에게 신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다른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존 로크는 종교가 사회의 작동에 불가결한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는 [관용에 대한 편지]에서 사회가 기독교의 다양한 분파를 허용할 수는 있지만, 무신론자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그는 무신론자의 서약과 약속은 무가치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신론자들은 자신들이 한 서약과 약속을 지킬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조에 대한 로크의 생각은 역사적으로 유지됐고 지금도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P349)



 

반면 마크 하우저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은 인간이 신의 존재를 생각해야 도덕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을 너무나 낮게 보는 형태라고 말한다.



 

"진화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 역시 도덕적 판단을 하는데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보는 하우저의 주장을 지지한다. 도킨스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이 없다고 악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신의 징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선량한 사람이 된다고 하는 생각을 비웃는다. 신의 감시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신에 대한 신앙이 일순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인간은 모두 친절함, 자비심, 관대함 등 인간의 모든 미덕을 버리는, 자각 없는 이기적인 쾌락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는 대단히 낮은 수준의 인간적 자존심을 가지는데 만족해야 할 것이다." (P 377)



 

저자는 종교인이 모두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교가 없는 무신론자로만 구성된 사회에서 도덕이 가능하다는 주장에는 회의를 제기한다.



 

"전적으로 무신론자들로만 구성된 사회는 공동체로서 유효하게 기능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도덕과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까? 흥미진진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한 사회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대는 별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쟁이나 불경기 등으로 인해 긴박한 상황에 처했을 대에도, 공동체는 질서와 시민 정신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P 379)

 

 

서양의 윤리는 근대 이후 신의 존재 없이 인간의 이성이 가진 합리성만으로 도덕적 기초를 쌓기 위한 몸부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 윤리학은 수많은 도덕적인 이론을 제시해가며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자신과 타인, 공동체에게 모두 유익하다는 것을 제시한다. 대표적인 예가 '죄수의 딜레마'와 같은 이론들이다. 결국 진화론적이고 무신론적인 서양 윤리학의 핵심은 피터 싱어의 책의 결론과 같다.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이익이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젊은 날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문득 섬뜩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었다. 만약 이것이 현대 윤리학의 기초라면,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것도 지켜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원인이라면, 만약에 자신이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 궁지에 몰려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의 최후의 선택은 무엇일까? 그리고 얼마 전부터 이런 내 섬뜩한 생각이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죽음 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이, 모든 것을 잃었을 때 그들이 마지막으로 하는 행동이 뉴스나 신문에서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요즘과 같이 종교적인 타락과 광신자들에게 의한 테러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종교적인 믿음이 딱히 도덕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희망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현대 윤리학이 인간의 이성을 너무나 신뢰하며, 리처드 도킨스처럼 인간이 도덕적 존재임을 너무 과신하는 것은 분명히 착오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처럼 평화시에는 이런 인간은 종교없이도 도덕적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인이 궁지에 몰리거나 사회적인 재난이 접했을 때,  자신을 제어할 아무런 신념이 없는 사람들이 벌이는 행동은 광기와 공포의 수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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