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과사무실이라는 곳에 수많은 피켓과 현수막들이 널려 있었다. 사무실 캐비닛에는 오래전에 사용? 했다던 쇠 파이프까지 들어있었다. 그렇게 1학년 생활을 보내고 군대를 다녀오느라 3년간 휴학을 했었다. 3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학생들은 정치나 공동체의 문제 등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취업을 위한 공부가 전부였다. 그리고 얼마 후 IMF가 터졌다. 나는 우리 시대의 의식구조는 IMF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그전에는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理想)을 위해서 살았다. 물론 그 이상이라는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는 광기 어린 이상도 있었고, 잘못된 판단으로 많의 사람의 고통을 강요한 이상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현실보다는 이상을 꿈꾸며 살았다. IMF 이후는 사람들은 이상을 버리기 시작했다. 오로지 현실만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학생들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현실만을 이야기하며, 현실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현실을 위해 살아가는 동안 개인은 자신의 자아를 잃어가고, 스스로를 거대한 자본주의 문화 속에 부속품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차인석 교수의 [근대성과 자아의식]라는 책은 6편의 글들이 실려져 있다. 그중 마지막 글의 주제가 '기술의 합리성과 세계의 운명'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후기 자본주의의 변질된 이성인 '과학적 이성'과 '자본주의 이성'을 비판하고 있다.
서구의 근대성은 개인의 자아의식의 발현이었다. 데카르트가 '코키토 에르그 숨(cogito ergo sum)' 이라는 명제를 통해 생각하는 자아를 이야기한 후, 서구사회의 지성은 끊임없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식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런 개인의 자아의식이 점점 사라지고, 물질문화의 가치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저자는 이 과정은 마르쿠제의 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원시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의 발전 과정을 이야기했다. 자본론에서는 이 과정을 역사의 필연성으로 해석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필연성은 역사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이런 모순을 지적한 사람이 바로 '마르쿠제'이다. 그는 역사의 발전과정은 필연적이 아닌, 개인의 자아의식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마르쿠제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어느 특정한 사회적 조건의 성숙으로 역사가 저절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혁명이 사회적 혁명의 선행 조건임을 강조했다. 러시아혁명을 주도했던 볼셰비키의 지도자 레닌은 결정론자였으며 그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주어진 객관적 조건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고, 혁명적 행위 자체도 이 인식에 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 이론가들에게 사회 현실의 인식은 결코 세계의 모사(模寫)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적 행위의 산물이고, 또한 사회적 행위는 사회적 여건을 능동적으로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인간이 밖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의미에 따라서 그의 행위는 이 세계를 형성시킨다는 것이다." (P206)
마르쿠제의 이론에 의하면 결국 사회는 저절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성원들의 의식이 변화될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사회는 변화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후기 자본주의에 이르러 인간의 과학주의적인 이성과 자본주의적인 이성이, 철학적 이성을 대체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원래 서구의 이성이라는 개념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러 서구의 합리성이 대두되면서 이성은 곧 합리성이 되었다. 즉 현대의 이성은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보다는 수학적 합리성을 통해 물질적인 결과의 이득만을 계산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개인들의 자아의식은 사라지고, 오로지 자본주의적인 계산적인 이성만 남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언급한 IMF 이후 한국의 어두운 자아상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이성은 계산이란 뜻을 지니는 합리성이다. 이윤 증대를 목표로 모든 자원을 계산해서 조직적으로 동원한다고 할 때, 합리적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합리성은 자본주의 발달의 불가결의 조건이다. 일상생활의 합리화는 업적을 올리는 조건이다. 쾌락 추구는 억제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의 모든 일과는 설정된 생산 목표의 달성에로 정향 되어야 한다." (P215)
저자는 이런 자본주의 이성의 합리화 과정이 이미 마르쿠제에 의해 예견되었다고 말한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자본주의 이성은 합리화 과정을 통해서 비이성이 되어버린다. 왜냐하면 고도의 생산성과 자연 관리가 인간의 자기소외를 가져옴으로써 파괴적 힘이 되기 때문이다. 경쟁은 주어진 사회 안에서 개인과 개인 간에, 집단과 집단 간에 일어나는 것으로 그치지 않으며, 그것은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자원 자원전쟁으로 이어져나가기 때문에 자본주의 이성은 파괴적이라는 것이다. 이성은 더 이상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식별하는 능력이 되지 못하고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의 조직과 능력으로 전락해버린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이성의 비이성화다." (P215)
그렇다면 변화의 가능성은 없을까? 저자는 글에서는 회의적인 느낌마저 든다. 그동안 사회가 변화되었던 것 소외계층이나 청년들이 자아의식을 가지고 사회변혁을 시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까지도 사회 변화보다는 그 사회 속으로 자신을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아의식을 개발하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이성에 몰입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서 희망은 끈을 놓지 않는다.
"후기 자본주의 문화는 하이데커가 가르치는 '본래적 존재로의 결의를 내릴 수 있는 정신적 조건을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고도 생산성의 논리는 자유나 자율 그리고 자발성 등의 이념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의미를 밝히지 못한다. 그렇지만 어느 시대고 그리고 어느 곳이든 변화를 부르짖는 세력은 나오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식은 그가 속한 사회구조로부터 분리되려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르쿠제의 믿음이기도 하다." (P 242)
요사이 우리의 삶을 볼 때 저자가 이야기하는 결과만을 중요시하고, 경쟁만을 강요하는 거대한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먹구름이 이 사회를 덮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오래 전부터 자본주의 이성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닥쳐왔고, 이제는 그 파도에 저항하던 소수의 사람들마저도 그 파도에 모두 삼키움을 당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와중에도 다시금 개인이 주체적 자아로서 세상을 바라볼 것을 이야기하는 이런 글들이 남아 있음을 위안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