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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평점 :
<7년의 밤>으로 문학계를 뒤흔들었던 정유정이 2년 3개월 만에 <28>로 돌아왔다. <7년의 밤>이 세령호를 둘러싼 이야기라면 이번 <28>은 '불볕'이라는 뜻의 도시 '화양'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모두가 평범한 일상을 영유하던 겨울날, 인구 29만의 서울 근교 도시 화양에 '빨간 눈' 괴질이 돌기 시작했다. "바이러스인지, 세균인지, 전염방식이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접촉한 지 하루면 눈이 빨갛게 되고, 빨간 눈이 나타난 지 이삼 일 내에 사망에 이"르는 무시무시한 이 전염병은 화양이라는 도시 안팎을 뒤흔든다. "자신이 죽음의 손아귀에 갇혔다는 사실에" 두려워하는 안쪽과 "자신에게 죽음의 손이 뻗어 올까 봐" 두려워하는 바깥쪽.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무게. <28>은 28일간 화양에서 벌어지는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본성 대한 뜨거운 이야기다.
<7년의 밤>이 꽤 괜찮았기 때문에 <28> 어느 정도 기대감을 걸었다.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7년의 밤>에 비해 <28>은 자극적이긴 하나 독보적이지는 않았다. 전염병, 폐쇄된 공간, 그곳에서 일어나는 공포와 무질서,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빨간 눈' 괴질의 시작점인 개를 죽이거나 생매장하는 모습은 수많은 소돼지를 살처분한 구제역 사태가 떠오르게 했고 폐쇄된 공간에서 국가 권력이라는 이름 하에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가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연상케했다. 물론, 작가도 후기에서 밝혔듯이 "만약 소나 돼지가 아닌 반려동물, 이를테면 개와 인간 사이에 구제역보다 더 치명적인 인수공통전염병이 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이야기였으니 이런 연상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에서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소돼지를 개로 치환해 어디서 본 듯한 이야기에 그쳐 아쉬움이 남았다. 물론, <28>을 읽으며 나 또한 작가처럼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인간이 서슴지 않고 '가족'처럼 여기는 반려동물의 목숨도 빼앗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려동물뿐이겠는가. 화양 밖의 사람들의 모습처럼 다른 인간의 삶마저도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정유정은 '빨간 눈' 괴질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의 공포를 통해 이런 인간의 가장 본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알 수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서슴 없이 타인의 삶을 딛고 서려는 모습을 보며 오싹해졌다.
다섯 명의 사람과 한 마리 개의 관점에서 사건을 전개하다보니 다양하게 사건을 조망할 수 있었지만, 이야기는 다소 산만해졌다. 119 구조대원 기준의 이야기나 개썰매 레이스에 참가한 이력이 있으나 유기견 구조센터를 운영하는 재형의 이야기,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전개나 인물의 묘사 등이 적절히 배치된 느낌이었지만 간호사 수진과 기자 윤주 그리고 사이코패스 동해와 관련된 부분은 인물이 주체가 되어 이야기를 끌어가는 느낌보다는 관찰자(또는 구경꾼)에 그치는 것 같아 아쉬웠다. 특히 동해라는 캐릭터는 화양을 한층 광기의 도시로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 동해라는 인물이 전체 이야기의 본질과는 조금 떨어져 있는 듯해서 꼭 들어가야 했을까 고개가 갸웃했다. (차라리 동해를 중심에 둔 사이코패스 소설이었다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싶지만 그랬다면 짜증나서 덮었을지도.)
'빨간 눈' 괴질 자체가 원인도 해결책도 알 수 없는 병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가족들은 희생됐지만) 주인공들은 어떤 이유에서 원인균에 감수성이 약해 그 누구도 빨간 눈 괴질에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나 화양 밖으로 도망칠 수도 없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점도 좀 작위적이지 않나 하는 싶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걸고 넘어지면 피해갈 작품이 몇이나 되겠냐마는) 이래저래 불평을 토로했지만 <28>은 흡입력 있는 소설이다. 500쪽에 가까운 이야기를 바쁜 와중에도 한 호흡에 읽은 것도 참 오랜만이니 이야기꾼으로 정유정의 능력은 높이 사고 싶다. <7년의 밤>을 읽을 때처럼 나도 모르게 어느샌가 <28>을 머릿속에서 영상으로 그려갔다. 장면 하나하나를 생동감 있게, 캐릭터 하나하나를 맘껏 뛰놀 수 있게 하는 것은 정유정이 가진 최대의 무기가 아닐까. <28>을 읽는 동안 화양에서 그랬듯이 소설 안팎에서도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생명이 죽어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늘도 살아가고, 살아가려 한다. 그렇게 삶은 지금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