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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연인들 ㅣ 사랑의 기초
정이현 지음 / 톨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던 20대의 마지막 해. 친구들은 하나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이러다 나만 남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조금씩 찾아왔다. 잇속 따지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조금씩 깨달아가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조건 없이 '그냥' 잘 통하는 사람과 연애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군가를 몇 달이나 마음에 담아두고 있다는 얘기에 누군가는 철이 덜 들었다고 핀잔을 줬고, 누군가는 나도 그런 두근거림을 느껴보고 싶다며 설레했다. 카페에 앉아 가만히 창밖에 오가는 사람들을 볼 때면 대체 저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서 어떻게 사랑하게 된 걸까 하는, 똑 부러진 정답이 없는 호기심을 안고 지내던 어느 날, <사랑의 기초>를 만났다. 알랭 드 보통과 정이현의 공동 작업이라는 점도 관심을 끌었지만 "첫사랑도 마지막 사랑도 아닌, 바로 지금 우리의 사랑"이라는 띠지 문구에 '남의 사랑 이야기'를 '내 사랑 이야기'처럼 읽고 싶어 연애를 시작할 때의 두근거림을 안고 읽기 시작했다.
82년생 준호와 84년생 민아. "애인을 사귀려는 목적으로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을 소개받"는 자리를 두 사람이 준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 사람이 내 짝이었으면 좋겠다는 얕은 희망 혹은 기대를 품고 나간 자리.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둘은 순조로운 첫만남에 우여곡절을 거쳐 '연인'으로 발전한다. 하나씩 서로의 과거를 나누고, 현재를 공유하며, 미래까지 꿈꾸는 두 사람. 하지만 여느 커플이 그러하듯 둘의 연애도 마냥 핑크빛은 아니다. 요양원에 모셔진 할머니의 존재 같이 때로는 조금은 부담스러운 감정의 공유를 시도하고, 내색하지는 않지만 서로에 대한 불만이나 짜증도 조금씩 쌓여간다. "둘이 얼마나 똑같은지에 대해 열심히 감탄하며 보내는" 연애 초반부를 거쳐 "그것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를 야금야금 깨달아가는" 중반부를 지나 "나눌 것은커녕 남아 있는 것도 거의 없는" 종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준호와 민아는 함께 걸어간다.
서로 모르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는 과정을 담기에 200페이지 남짓한 분량은 결코 길지 않다. 하지만 분량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둘 사이에 있었던 수많은 사건과 수많은 감정의 뒤섞임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다. 소개팅 자리에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애쓰다 비슷한 반경에서 생활해왔다는 것을 알게 돼 안도하는 준호와 민아처럼 초반부에 나 또한 이들의 연애와 나의 연애를 겹쳐보고 공통점을 찾으려 애썼다. 동갑에다가 비슷한 고민까지 하는 여주인공이라니. 100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이거 내 얘기 같잖아' 싶었다. 아니, 어쩌면 민아는 직장생활을 하는 20대 후반의 미혼 여성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어느 정도 투영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실감 있는 인물 설정은 사십대인 작가 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니라 실제 이십대와 소통한 것에서 연유한다. 정이현은 알랭 드 보통과의 대담(<사랑의 기초: 한 남자> 뒤에 수록되어 있다)에서 "자의 반 타의 반, 이십대 남녀들을 만나 그들의 사랑과 연애에 대한 솔직한 생각들을 물어"보는 과정을 거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요즘 이십대의 연애관이 자신의 이십대 때와는 사뭇 달라 "어느 순간엔 세대차이 같은 것도 느꼈"다고 술회한다. 이런 사전 인터뷰 과정 덕분인지 "모든 이십대 남녀를 일반화해선 안 되겠지만" 정이현은 이십대와의 간극을 좁히는 데 성공했고, <사랑의 기초: 연인들> 속의 민아와 준호는 "분명 지금 이십대의 방식으로, 이십대들이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을 나"누었다.
인물상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만남도, 사랑도, 이별도 그 모습은 조금씩 다를지 모르겠지만, 모두 "사소하게 꿈꾸고 사소하게 절망하고 사소하게 후회하기를 반복"하는 "보편적인 연애"를 하면서 지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 다른 포물선을 그리며 살아온 두 사람이 하나의 점으로 겹쳐졌다가 다시 각자의 포물선을 그리는 과정. 기적 같은 찰나의 교차. 이 과정을 한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느 정도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사랑의 기초: 연인들>에는 존재한다. 그후로 그들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유의 연애판타지를 그린 것이 아니라 읽고 나면 기어이 맥주 한 캔을 따게 하는 결말이기에 더 공감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치정 때문에 죽고 죽이는 고대 희랍식 드라마는 자주 일어나지 않으며, 드라마 퀸이 되기를 열망한다고 해서 아무한테나 그런 역할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처럼 그저 함께 걷던 두 사람이 어느새 점점 멀어져 각자의 길을 걷는 과정은 불꽃 튀는 격정적인 사랑이나 이별보다야 더 현실감 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명색이 연애소설이니 말랑말랑하고 몸이 배배 꼬이는 듯한 달달함을 기대한 독자는 이 무덤덤한 연애에 실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이현이 섬세하게 그려낸 별것 아닌 담담한 연애가 마냥 달콤한 사탕 같은 연애소설보다 더 매력적이다. 읽고 있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연애를 했으면, 하고 꿈꾸게 하니 말이다. 결국 각자의 길을 가게 된 두 사람처럼 이 책과, 그리고 민아와 준호 두 사람과 이별하며 "불완전한 인간들끼리 나눌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완벽한 작별인사"를 건네고 싶다. "안녕"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