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2 : 국내편 - 완결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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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생 시절 만화책을 빌려보던 도서대여점에서 빌린 첫 소설은 『퇴마록』이었다. 소설이라면 쉽게 풀어쓴 고전이나 『클로디아의 비밀』 『빨간머리 앤』 같은 성장소설, 셜록 홈스 시리즈를 즐겨 읽던 그 당시 내게 『퇴마록』은 그 자체로 충격이었다. 동시대가 배경인 소설을 거의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느낀 충격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이렇게 이야기에 사람을 휘어잡을 수 있는가라는 생각에, 탐닉하듯 『퇴마록』 시리즈를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후로 거의 15년만에 다시 만난 『퇴마록』. 추억 삼아 읽어보자는 마음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 그때에 비해 그래도 책이라면 좀 읽었는데 과연 지금 읽어도 재미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앞섰다. 잔뜩 기대하고 읽었지만 그 기대를 채우고 남을 정도로 『퇴마록』힘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국내편에는 총 열아홉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박 신부, 현암, 준후, 승희. 이 네 명의 주인공이 어떤 능력을 지녔고, 그들이 어떤 일을 겪어 퇴마사의 길에 들어섰는지, 그리고 네 사람이 함께 퇴마를 하러 다니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현암과 박 신부, 준후의 강렬한 첫 만남을 그린 「하늘이 불타는 날」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분명 주인공은 같지만 같은 장르의 소설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매력을 뽐낸다. 초등학교 때 종종 하던 분신사바를 소재로 한 「영을 부르는 아이들」이나 저주받은 산장이라 불리는 산장에서 벌어지는 힘과 힘의 한판 대결을 그린 「측백산장」, 혼자 집을 지키던 한 소년이 겪는 보이지 않는 방문자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도 없는 밤」 등은 여느 공포소설보다 더 오싹하다. 한곳을 바라보고 죽어 있는 유골이 500구나 발견되어 거기에 얽힌 비밀을 풀어가는 「초치검의 비밀」은 팩션으로 읽어도 무방할 정도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모험담, 판타지적 성격도 가지고 있으니 『퇴마록』은 그냥 장르문학이라고 에둘러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리 장르를 넘나들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해도 『퇴마록』이 가장 매력 있을 때는 역시 네 주인공의 이야기가 드라마처럼 전면에 부각될 때다. 준후의 어린 시절을 엿볼 수 있는 「하늘이 불타던 날」을 비롯, 박 신부의 과거에 대해 다룬 「파문당한 신부」나 현암과 동생인 현아의 이야기를 다룬 「태극기공」, 현암이 항상 지니고 다니는 월향과 현암의 이야기를 다룬 「귀검 월향」, 승희의 첫 등장이자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 「초상화가 부르고 있다」 등에서 만나게 되는 네 사람의 사연은 한편으론 짠하면서도 한편으론 세상에서 악함을 몰아내기 위한 의지나 퇴마에 대한 번뇌 등이 느껴져서 재미있었다. 우리가 귀신이라 하며 삶에서 배제해온 것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날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퇴마록』 속의 네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퇴마를 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을 것 같다는 생생함을 『퇴마록』은 전해준다.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우혁은 새롭게 책을 펴내는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퇴마록-국내편』은 지금의 제 눈으로 보기에도 전체적인 스토리나 구성은 나쁘지 않지만, 문체 면에서 본다면 글공부도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책을 출간하게 된 당시의 제 어수룩함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만큼 미숙한 점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전면적으로 개정을 할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이미 수백만 권 이상이 팔린 만큼 독자분들이 아껴 주신 부분을 손대는 것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어 오자나 문구 몇 줄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 출간하기로 했습니다.
  18년 전의 집필한 작품이라 지금 다시 읽으신다면 어색해 보이는 부분도 많을 것입니다. (중략) 그리 멀지는 않지만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잠깐의 시대인데, 그 시대가 자취로 남았다는 면에서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작가는 전면 개정도 생각했다고 하지만 이야기 자체가 워낙 힘이 있기 때문인지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다거나 어색하지 않다. PC통신에서 한 채팅이 긴 분량으로 나오는 「아무도 없는 밤」처럼 PC통신 세대가 아니라면 낯설게 느껴질 이야기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힘은 반감되지 않는다. 국내편을 시작으로 엘릭시르에서는 외전-세계편-혼세편-말세편을 순차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앞으로 이 네 퇴마사는 어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될까. 시대는 변해도 이야기의 힘은 변하지 않는구나 싶었던 『퇴마록』. 이어질 『외전』에서는 그동안 소개하지 않았던 새로운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더 기대가 된다. 새 옷을 입고 새롭게 다가왔지만 여전히 녹슬지 않은 매력. 장르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소장할 가치가 충분한, 한국 장르문학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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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09-2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마록... 국내편만 읽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죠. 세계편도 빌려 읽었던 기억인데 국내편만큼은 재미를 못줬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손 대지 않았는데... ㅎㅎ

이매지 2011-09-28 17:28   좋아요 0 | URL
이번에 새로 쓴 <외전>이 곧 나온다고 하더라구요. 저는 <혼세편>까지 미친듯이 달렸던 터라 ㅎㅎ
지금 읽어도 재밌더라구요 ㅎ
 
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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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작가의 첫 장편의 대 성공. 내가 작가였다면 성공은 둘째치고 황석영, 성석제 같은 문단 선배들의 추천사만으로도 몸둘 바를 몰랐을 것 같다는 생각도 슬몃 들었던 <두근두근 내 인생>. 예상 외의 큰 성공 때문인지 이 소설의 작품성은 요즘 한국문학계의 가장 뜨거운 감자가 아닐까 싶다. 차세대 한국문학의 희망이라는 의견과 '청춘만화' '재치문답'이라는 다양한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한다. 딱히 김애란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어쩐지 싸이월드 스킨 같은 소녀감성 표지에 마음이 가지 않아 미뤄오다가 결국 등 떠밀리는 심정으로 <두근두근 내 인생>을 만나게 되었다.

  열일곱. 누군가는 불장난에 아이를 낳고, 누군가는 나이보다 몸이 빨리 늙어 죽어간다. 같은 열일곱 살을 다른 방식으로 보낸 이들, 바로 아름이네 가족이다. 열일곱에 아이를 가져 우여곡절 끝에 결혼생활을 시작해 몸도 마음도 고되지만 행복한 시절을 보낸 것도 잠시. 어린 아름이는 조로증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순식간에 부모보다 더 늙어버린다. 열일곱의 나이에 여든의 몸을 가진 아름이는 집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그 나름대로 살아간다. 그러던 중, 아름이는 병원비 마련을 위해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투병중인 또 다른 소녀와 첫사랑에 빠져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를, 단 한 번의 찬란한 여름을 보낸다.

  <두근두근 내 인생>의 주된 소재인 조로증은 일단 호기심은 끈다. 열일곱이지만 외모도 신체 기능도 팔십 대 노인과 별 차이가 없는, 딱히 원인도 치료법도 알 수 없이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병. 아름이는 이렇게 죽음과 맞닿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상대방의 반응에 일희일비하며 첫사랑에 두근거리고, 부모 몰래 일을 꾸미는 등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에게서 만날 수 있는 풋풋함도 갖고 있다. 불장난 같은 사랑으로 열일곱 시절을 보낸 아빠 엄마의 이야기와 그저 오가는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아름이의 첫사랑이 오버랩되면서 누가 이 아이의 평범한 삶을 빼앗아갔는가 하며 이야기의 비극성은 극대화된다. 김애란은 이런 비일상적인 상황에 놓인 주인공을 통해 비극 속에서 행복을, 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아 이야기가 신파로 흐르는 것을 막는다. 죽음이 지척에 있지만 그럼에도 웃기는 놈이 되고 싶어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불합리한 삶을 긍정하는 힘도 잃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다.

  페이지는 술술 넘어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야기의 결말부까지 다다르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이상하게도 아무 감흥이 남지 않는다. 장편이라면 조금 더 인물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도 좋았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이야기를 끈끈하게 이어갔으면 좋았을 것 같은데, 책을 놓는 순간 단편보다는 분량이 좀 많은 단편을 읽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독특한 소재를 끌어왔지만, 이야기의 전개 자체는 어디까지나 예상가능한 범위 안에서 이뤄져 식상한 느낌마저 들었다. 소재의 신선함, 그리고 아포리즘으로 이뤄진 '잘 만들어진'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 실망스러웠다. 아직 젊은 작가니 앞으로 이어질 장편의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아쉬움을 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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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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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푹푹 찌는 여름, 지쳐서 침대에 누워서 무슨 책을 읽을까 하고 가만가만 눈으로 책장을 훑다가 눈에 들어온 한 권의 책. 바로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이었다. 더이상 구차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한국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김승옥. 하지만 어디서 국문과 나왔노라고 얘기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그의 작품을 '자발적으로'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같은 작품의 기억 때문인지 현대인의 고독과 단절 등을 그린 작가라고 나도 모르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표제작인 <내가 훔친 여름>의 몇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나의 그런 선입견은 산산이 부서졌다.

  표제작인 <내가 훔친 여름>은 어느 날 두꺼비 같이 생긴 한 청년(장영일)이 주인공(이창수)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울대 뱃지를 달고 나타난 영일은 절에서 '고신가 지랄인가'를 준비하다가 놀러왔다고 이야기하지만, 창수는 자신 앞에 나타난 영일이 자신이 어린 시절 알던 그 영일이가 맞는지 영 의심쩍다. 하지만 "마치 뚱뚱보는 다른 뚱뚱보에게, 포마드는 다른 포마드에게, 철모는 다른 철모에게, 개는 개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서울대생인 창수는 서울대 뱃지를 한 영일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다. 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얘기를 늘어놓는 영일에 대해 창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가져갈 것도 없기에 영일의 구라를 즐기다 결국 그와 함께 무작정 무전여행을 떠나게 된다. 돈 한 푼 없이 시작한 여행. 여행의 시작과 함께 영일과 창수의 소소한 사기극 또한 시작된다.

  <내가 훔친 여름>이 유쾌한(하지만 날카로운) 청춘소설이라면 <60년대식>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 아내와 이혼을 암묵적으로 약속한 주인공(도인)이 유서를 쓰는 것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신의 짐을 하나씩 정리한다. 하지만 신문사에 간곡히 자신의 유서를 게재해줄 것으로 요청했지만 그것이 묵살되자 자신의 죽음이 흔해빠진 염세 자살로 취급돼버릴 것만 같아 선뜻 자살을 감행하지 못한다. 다음 날까지 일단 자살을 유예하고 수첩을 뒤적이다 잊고 지냈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는 도인. 하숙집 주인 딸인 돌싱 애경양을 임신시키고는 냅다 도망쳐버렸던 기억이 떠오른 도인은 마지막으로 용서를 빌기 위해 애경양을 찾아 길을 나선다. 우여곡절 끝에 도인은 애정양이 결혼상담소에서 맞선녀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인생의 마지막 날, 도인의 마지막은 과연 어디로 향할 것인가.    

  <내가 훔친 여름>(1967)과 <60년대식>(1968) 두 작품은 모두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작품이다. 하지만 2011년인 지금 읽어도 전혀 촌스럽지 않을 정도로 시대를 초월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내가 훔친 여름>에서 만난 '재기발랄함'이었다. 미워할 수 없는 두 청년의 사기행각(?)을 읽다보면 그들이 속이는 것이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지, 아니면 서울대 뱃지로 상징되는 '간판'에 현혹되는 소설 밖의 독자인지 가늠하기 힘들다. 오늘날 잊을만 하면 신문을 장식하는 학력위조, 학력사기 같은 사건과 창수의 영일이 카바레 장식을 해주겠노라며 강동우에게 얹혀 지내는 모습은 거기서 무엇을 어느 정도 얻었느냐만 다를 뿐 사실 사기라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지방 유지인 강동우네 일가가 서울대생으로 상징되는 지식인(하지만 그 또한 사기)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은 킥킥 웃게 하다가도 슬몃 가슴 한 켠을 쿡쿡 찌르고 들어온다.

  <내가 훔친 여름>이 다소 에둘러 뜨끔하게 했다면 <60년대식>은 조금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촌철살인을 날린다. 도인(道仁)이라고 한자가 병기되어 있지만 어딘가 도인(道人) 같은 주인공 도인은 "본인의 죽음이 작으나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같은 얼토당토한 내용의 유서를 신문사에 보내고, 유서가 신문에 실리지 않자 어떤 죄책감 때문이라기보다는 마침 생각이 났으니 용서나 빌어보겠다며 총각딱지를 떼어준 애경양을 찾으러 나선다. 그렇게 만난 애경양은 "제가 맡은 역은 돈 많고 가정적이고 젊은 과부 역이거든요. 호호호, 왜 그렇게 어리둥절해하세요? 남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자가 바로 그런 종류의 여자가 아닌가요?"라며 "필요 이상으로 용서를 구하려 한다는 건 죄악에 속하는 것일 거예요. 전 요즘 행복해요. 제 직업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고, 그러니 도인씨는 저로부터 용서받은 게 아니겠어요?" 하고 우문현답을 한다.

  애경양과의 사건 외에도 자살을 유보한 하루 도인은 여기저기 발길 닿는 데로 떠돌며 짧은 시간 동안 온갖 군상을 만난다. 누군가는 도인에게 "식료품을 공업용 색소를 넣어 만들어 판다고 야단이지요? 난 그런 놈이 많니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놈이 있어야 소비자들은 정신을 번쩍 차리고 단결합니다. 무장간첩? 얼마든지 오라지요. 그놈들 덕택에 국민의 단결심은 더욱 강해지지. 사기꾼? 얼마든지 있어도 좋습니다. 한번 사기를 당해봐야만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데 영리해지는 법이거든. 살인강도? 좋아요, 경찰 기술이 발달됩니다. 어떤 미련한 친구가 한탄하더군. 요즘은 살인하는 수법도 끔찍해졌다고 말야. 하지만 그것이 바로 좋은 징조란 걸 모르는 멍텅구리가 하는 소리지. 요컨대 먹겠다는 놈과 먹히지 않겠다는 놈이 있어야 발전이 있는 거요. 먹겠다는 놈이 극악스러우면 극악스러울수록 먹히지 않으려는 놈도 극악스러워지는 거지. 그걸 알아야 해요"라고 자뭇 인생의 선배처럼 충고한다. 도인이 사표 낸 학교의 교장은 "우리 이런 내기 하나 합시다. 십 년 후에 말야, 누가 더 재벌이 돼 있나 말야. 어떻소?" 하며 결국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재벌'이라며 도인에게 내기를 건다. 도인이 만난 다양한 사람을 통해 김승옥은 돈에 대해, 정숙에 대해, 사랑에 대해 비꼬듯이 비난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형에게서 제가 느낀 바로는, 형은 많은 지식도 가지고 계신 것 같고 교양도 있어 보이고 선량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만, 뭐랄까요, 정열은 없는 사람 같습니다. 정열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저는 별로 무서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며 결국 무엇보다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정열을 잃은 도인(혹은 독자)이라고 한다. 김승옥은 이렇게 "과도한 정열" "정열로 위장한 추잡한 욕망"이 아닌 "이성과 지성에서 나온 판단을 밀고 나갈 힘이 되어줄 최소한의 정열"을 갖지 못한 자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어떻게 보면 사회비판소설이지만, 어떻게 보면 그저 한바탕 웃고 넘길 수 있는 청춘명랑소설. 30년이 훌쩍 넘은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60년대식'인 한국사회를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60년대식'에서 나아가지 못한 우리를 슬퍼해야 하는 것인지 책을 놓은 뒤에도 망설여진다. 하지만 한 가지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한국문학사에 있어 김승옥이라는 작가가 있었음에, 그리고 그가 남긴 <내가 훔친 여름>을 함께 훔칠 수 있었다는 점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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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모노레일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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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의 소설의 맛은 '장난스러움'에 있다. 표지뿐만 아니라 본문 곳곳에 들어간 그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정신없이 따라가다보면 역시 김중혁은 '재간둥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어느 인터뷰에서 <미스터 모노레일>은 좌석버스 맨 뒷좌석에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며 쓴, 자신이 즐겁기 위해 쓴 작품이라는 말을 본 적이 있는데, 읽는 내내 정말 작가가 즐기며 썼구나 하는 게 느껴져 읽는 나도 무작정 즐기며 읽었다.

  <미스터 모노레일>은 하나의 이야기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안과 밖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점은 '헬로, 모노레일'이라는 주인공 모노가 만들어 대박친 게임을 매개로 동그랗게 이어진다. 어린 시절부터 게임에 익숙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모노가 일주일 동안 방에 콕 쳐박혀 실제로 한 번도 가본 적 없은 유럽을 배경으로 만든 보드게임 '헬로, 모노레일'. "제한된 환경 속에서 누가 오랫동안 살아남는가를 겨루는" 이 게임은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 퍼져나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모노를 돈방석 위에 앉힌다. 그런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헬로, 모노레일'의 업그레이드판을 만들기 위해 이번엔 유럽으로 직접 떠난 모노. 하지만 그 사이를 틈타 모노의 동업자인 고우창의 아버지가 5억을 들고 사라진다. 책임감이 강한 고우창은 어떻게든 아버지를 찾고 5억도 되찾으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좇던 고우창은 아버지가 볼교(ball敎)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아버지를 좇아 볼교의 본부가 있는 벨기에로 떠난다. 마치 '헬로, 모노레일'의 캐릭터 블루(형사), 화이트(소설가), 레드(농부), 블랙(은행강도), 핑크(미용사)를 연상케 하는 인물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유럽에 하나둘 모여 유럽을 배경으로 일생 일대의 모험을 시작한다.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끝날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을까? 자신의 뜻대로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에서 어쩌면 우리는 보드게임 위에 놓인 말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주사위를 던졌을 때 숫자가 매번 바뀌듯이, 어떤 때는 생각보다 버스가 일찍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악천후로 연착되기도 하는 인생. 작은 것에 만족하고 소소한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꼬일대로 꼬여서 자포자기하고 싶게 만드는 일상도 있다. 이런 인생에 대해 <미스터 모노레일>은 탱탱볼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뭐 아무렴 어때, 하고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힘을 준다. 뭐 이런 터무니 없는 이야기가 다 있지 싶다가도 이런 얘기가 없으리라는 법도 없잖아 하고 어느새 볼스 무브먼트, 특별기동검표반, 동네 디자이너 등의 이야기를 믿게 되버린다. 뭐 그렇게 심각하냐고 어깨에 힘 좀 풀고 그냥 즐기는 것도 좋지 않냐고 나를 무장해제시킨 김중혁. "어떤 숫자가 나오든 상관없다. 어디로 가든 상관없다"라는 표지문구처럼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상관없다. 삼천포로 빠져도 상관없다'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숨바꼭질하듯, 술래잡기하듯 책 속의 주인공들과 한바탕 잘 뛰어놀았다.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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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 (양장) - 조선의 문장가 이옥과 김려 이야기
설흔 지음 / 창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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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수상작이라 그런지 신문 광고나 인터넷 광고로 자주 접한 책. 하지만 그런 광고보다는 대학 시절 이옥의 매력에 빠져 지낸 적이 있어서 과연 이옥과 김려의 우정을 어떤 식으로 풀어갔을지가 궁금했다. <소년, 아란타로 가다>에서는 마지막으로 조선통신사가 떠난 계미사행을 배경으로 청유라는 소년의 이야기가 그려졌었고,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에서는 연암의 아들 박종채를 내세워 팩션의 형식으로 글쓰기에 대해 풀어갔다면,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는 이옥과 김려라는 두 실존 인물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진행한다. 

  정조의 문체반정은 설명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양반전>을 쓴 연암이 문체반정의 가장 큰 희생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연암도 어느 정도 꾸중을 듣긴 했지만 어쨌거나 그는 사대부였기에 비교적 가벼운 수준의 벌을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 이옥은 문체반정의 가장 큰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이옥은 죽은 글쓰기가 아닌, 살아 있는 글쓰기를 시도하다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당하고 유배형에까지 처해진다. 하지만 이런 시련 앞에서도 이옥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세상을 살아간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는 바로 그 이옥과, 그의 절친이었던 김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과거 문체반정에 휩싸여 유배를 당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현감이 되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는 김려. 평온하기만 한 봄날,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들이닥친다. 남루한 옷차림에 무례한 태도. 놀랍게도 그는 자신의 벗 이옥의「백봉선부」를 읊는다. 김려는 그 청년이 이옥의 아들 우태임을 알게 된다. 우태는 그냥 넘겨주는 것이 아니라 하며 아버지가 남긴 글 뭉치를 김려에게 보여준다. 그리운 벗의 글. 우태의 등장으로 김려는 글 때문에 모진 고초를 당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되고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유배생활도 떠올린다. 그리고 그때를 추억하며, 그는 이옥과의 우정에 대해, 글쓰기의 본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기회를 얻는다.

  이옥과 김려라는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게 다가갈 수 있는 두 선비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글쓰기와 신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단순히 두 문사의 우정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싹튼 사랑, 묵묵히 자신의 곁을 지켜준 하인에 대한 고마움 등 얇은 책 속에서도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지루하지 않다. 단순히 옛이야기를 읽어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이옥과 김려의 글을 통해 당시의 문체반정의 중심에 있었던 소품체를 직접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 될 듯하다. 어느 정도 시대적 배경을 알고 읽으면 분명 더 재미있을 책이지만, 별다른 사전 정보가 없는 독자가 읽어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과연 청소년들이 읽으면서는 어떤 느낌을 가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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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5-27 0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머니독서회 6월 토론도서로 정했어요.^^

아~ 그리고 문학동네 사랑의 책보내기 이벤트에 당첨돼서 100권 받아요.
물론 우리집에 두는 건 아니고, 주민센터 도서실에 보내는거에요.
문학동네~~~ 너무너무 고마워요@@^^

이매지 2011-05-27 09:34   좋아요 0 | URL
오아오아 100권이라니!!
순오기님 완전 부러워요! ㅎㅎ
좋은 일에 쓰신다고 하셔서 뽑아주신 거 아닐까요? ㅎㅎㅎ
여튼 축하드려요!

세실 2011-05-2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참 맘에 드는데(별다른 사전정보 없어도 쉽게 읽을수 있고 이옥에 대한 사실적 접근이 좋았어요),
지난 수요일 우리도서관에 채운씨가 와서 이옥에 대한 강의를 했는데요. 이 책 별로라고 하더라구요.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네요. 그 말 들으니 괜히 속상한거 있죠.

이매지 2011-05-27 09: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저는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그렸다는 의견에 어쩐지 갸웃해지는데요.
뭐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를 수 있으니까요^^
작가의 책은 세번째 읽었는데, 가장 좋았어요. ㅎㅎ

하늘바람 2011-05-27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년 아란타로 가다 궁금하네요.
저는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제 처한 상황 때문인지 자꾸 제 이야기로 느껴져서 잠시 멈추고 있어요.
역시 이매지님 이옥에 대해 먼저 아셨다니
아 난 왜 아는 게 없을까.
^^
역시 이매지님은 멋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매지 2011-05-27 13:17   좋아요 0 | URL
아, 이옥은 전공이 국문학이라 고전문학 수업 때 관심을 가졌던 문인이었어요^^
소년 아란타도 조선통신사에 대해서 이야기와 버무려 잘 보여주는 책이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