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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덧니가 보고 싶어』로 오랜만에 생동감 있는 '지금-여기'의 이야기를 만나게 해준 정세랑의 두번째 장편소설.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늦게 출간됐지만 그보다 먼저 집필된 작품이라 그런지 『덧니가 보고 싶어』보다 더 풋풋한 느낌이었다. 두 작품 모두 기본적으로 '연애'를 소재로 다루지만, 『덧니가 보고 싶어』가 여러 이야기가 잘 어우러진 패치워크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구에서 한아뿐』은 잘 직조된 모직원단 같은 느낌이라 비교해가며 즐길 수 있었다. 느닷없지만, 최근 에피톤 프로젝트의 2집 중 <이제, 여기에서>를 들으며 "열한 시간을 건너 이곳까지 널 찾아왔어"라는 부분에 어쩐지 가슴이 두근, 했었다. 누군가 나를 만나기 위해 열한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다면 그게 누구든 간에(아, 스토커는 논외로 하자) 어쩐지 감동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제, 여기에서>와 뉘앙스는 조금 다를지 몰라도, 『지구에서 한아뿐』도 간단히 말하자면 그런 얘기다. 오직 한아를 만나기 위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큰 빚까지 져가며 2억 광년(!) 우주를 횡단해 지구에 온 외계인의 사랑 이야기니 말이다. 이렇게 요약하자니 '이 무슨 황당한 상황이지' 싶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연은 조금 더 복잡하다.
일류대 의상디자인학과를 나왔지만 절친 유리와 함께 사연이 있는 옷을 리폼하는 친환경 옷수선집 '환생'을 꾸려가는 한아. "평일 오후 2시의 6호선 전철 한 칸에서 가장 예쁠 정도"(곧 "출퇴근 시간 2호선 한 칸에선 20위권에도 못 들 수준")의 외모인 한아는 조그만 가게에서 행복하게 일하며 정착하지 못하며 철없이 훌쩍 여행을 떠나는 남자친구 경민과 어쨌거나 그럭저럭 무탈한 나날을 보낸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느닷없이 캐나다에 별똥별을 보러 간 경민이 소형 운석 폭발에 며칠 연락이 두절됐다가 무사히 귀국한 이후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캐나다에 다녀온 후 경민은 전에 먹지 않던 음식을 먹기 시작하고 집까지 배웅을 해주는 등 평소보다 더 다정해진다. 내심 싫지는 않지만 뭔.가.이.상.하.다. 대체 경민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궁금증이 커져가던 차에 밝혀진 비밀. 응? 경민이 경민이 아.니.라.고?! 캐나다에서 소형 운석이 폭발했을 때 진짜 경민은 한아를 만나기 위해 2억 광년을 날아온 외계인에게 신분을 넘기고 우주로 여행을 떠났다는 것.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이 정체를 밝히자 처음엔 당황한 한아. 하지만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라고 말하는 데 두근, 하지 않을 이가 어디 있을까. 이렇게 시작된 한아와 경민(의 모습을 한 외계인)의 범우주적 사랑은 시작된다.
"자신들의 사랑이 온 우주에서 단 하나뿐임을 바라는 연인을 위한 순도 100프로 무공해 소설이 떴다!"라는 조현의 추천사처럼 『지구에서 한아뿐』은 사랑을 꿈꾸는 모든 연인들의 '로망'을 담은, 유무형의 빚을 지면서까지 사랑을 하는 지구상 아니 우주의 모든 연인을 위한 다디단 책이다. 하지만 마냥 달콤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범우주적 사랑' 외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름, 얼굴, 기본적인 정보는 공유하고 있지만 마인드는 전혀 다른 존재로 갈음되었을 때 그는 어디까지 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껍데기만 빌릴 뿐 전혀 다른 존재가 되버리는 것인가? 이런 의문은 우주를 여행하던 진짜 경민(엑스)이 돌아오면서 더 커진다. 이 지구상에 두 개여서는 안 되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의 당혹감, 엑스와 경민의 간극은 분명 존재에 대한 고민을 안겨준다. 이처럼 무엇이 존재를 존재로 만드는가라는 물음도 있지만,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대한 물음도 담겨 있다. "인간과 인간 아닌 모든 것들이 서로를 끊임없이 죽이고 있는 이 끔찍한 별에서" "파괴적인 종족으로 태어났지만 그 본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한아라는 존재를 통해 자본주의나 인간의 이기심을 중심으로 굴러가는 이 지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봤지만, 뭐 궁극적으로 『지구에서 한아뿐』은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SF 연애물이다. 등장인물들의 대사는 여전히 말맛과 현실감이 살아 있고, 『덧니가 보고 싶어』에서 밝힌 "농담이 되고 싶다"는 포부 또한 유효하다. 이제 갓 두번째 발걸음을 내딛었기에 아직은 그의 농담이 어디로(혹은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이 농담을 기꺼이 또 한 번 즐기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