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 고인다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달려라 아비>에서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소외된 환경 속에서 스스로를 방치하고 거기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삭막해진 세상 속에서의 소외를 하나의 습관처럼 받아들이는 주인공들. 하지만 그들이 절망적이다거나 막장 인생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책 속에 등장한 인물들을 주변에서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80년생이라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지만 나이에 비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잡혀있는 듯한 느낌을 나는 <달려라 아비>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 첫 만남을 가진 것이 약 2년 전. 이번에는 소설집 <침이 고인다>로 좀 더 성숙해진 그녀를 만났다. 

  기본적으로 <침이 고인다> 속의 주인공들도 <달려라 아비>에서처럼 현실을 살고 있다. 남루하고 비루한 삶. 그리고 그런 생활 속의 비애를 담담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도 <달려라 아비>와 비슷하다. 달라진 점이라면 이 책을 지은 김애란도, 책을 읽고 있는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것. 그리고 내가 진심으로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 동조하고 공감하고, 위로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없는 살림에 피아노를 장만하고, 그 피아노를 부(혹은 희망)의 상징으로 생각하는 엄마의 모습은 놀랄만큼 우리 집과 비슷했고, 국문과를 나와 제대로 직장을 잡지 못한 채 떠돌다 결국 공무원 시험에 눈을 돌리는 모습도 나와 비슷했다. 생계를 위해 만두를 만들고, 칼국수를 만드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부업으로 실밥 처리를 해서 밥에서 가끔 실밥이 나오곤 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서 왠지 모르게 가슴이 먹먹해졌다. 

  청춘이라는 단어만으로 반짝반짝 거리던 시대는 지났다. 5월의 푸르름 같았던 청춘은 소설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이제는 푸르름보다는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방같은 절망, 4인실 독서실에서 지내는 듯한 고독이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김영하의 <퀴스쇼>에서 그려지는 88만원 세대는 일면 소설같은 느낌을 주는 데 반해,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속 88만원 세대는 뭔가 따스함을 주는 것 같아 어두운 터널의 끝에서 엷은 빛 한 줄기를 본 것처럼 안도감이 들었다. 삶의 구질구질함을 처절하게 보여주지만 김애란은 이들의 모습을 마냥 절망적으로 보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30분 넘게 미로같은 길을 돌며 출구를 찾아 헤매다가 마침내 출구를 찾아내는 것처럼 김애란은 이들이 절망을 딛고, 혹은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이 책의 미덕은 소설 속 등장인물 뿐 아니라 책을 읽는 독자도 위로를 받고 다시 삶을 견딜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준다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기분 전환이나 할 요량으로 겸사겸사 읽었는데 의외의 잔향을 남겨준 책이었다. 이제 겨우 두 권의 소설집만을 세상에 선보였지만 진심으로 김애란을 만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좀 더 성숙해진 김애란을 좀 더 성숙해진 내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웽스북스 2008-08-17 2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애란 좋아요 ㅎㅎ 김중혁 책도 한번 읽어보세요 ^_^

이매지 2008-08-17 23:56   좋아요 0 | URL
김중혁은 <펭귄뉴스>만 본 것 같네요.
<악기들의 도서관>도 보기는 봐야할텐데 ㅎㅎ
 
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겨레문학상의 수상작을 고작 2권 읽어봤을 뿐이지만(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나의 아름다운 정원), 어느 정도 가벼움을 유지하면서도 주제 의식이 돋보이는 작품들인 것 같아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올해 수상작인 <무중력 증후군>의 표지와 제목을 보고 이 작품도 왠지 재미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고, 아니나 다를까 의외로 쏠쏠한 재미를 안겨줬다. 80년생 작가의 손에서 나온 작품이라 '너무 깊이감이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오히려 젊기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작품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고 너무 깊이감이 없고 가볍기만 한 소설은 아니었다.)

  어느 날 달이 번식을 하기 시작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은 달리 하나 더 생기고, 15일을 주기로 하나씩 달이 번식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달이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중력이 약해진 것처럼 점점 무중력 상태로 향해간다. 주인공 노시보의 엄마는 어느 날 달구경을 간다는 쪽지만 남겨둔 채 집을 나가버리고, 고시원에서 사는 형은 우렁각시처럼 찾아와 아버지가 기원에서 돌아오기 전에 요리를 해놓고 떠난다. 전화로 땅을 파는 주인공는 이런 세상의 무중력 상태를 한발짝 멀리서 바라보며 관찰자의 삶을 살려고 하지만, 그 역시 무중력 증후군을 앓고 있기는 마찬가지. 무중력자들이 점차 늘어나는 지구의 운명은 대체 어떻게 되는건지...

  공상 과학 소설같은 제목을 갖고 있지만, 이 책은 공상은 모르겠지만, 과학과는 거리가 있다. 달이 늘어난 사건을 두고 언론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토론들, 그리고 마치 종교처럼 퍼져가는 무중력자들, 달의 번식을 기회삼아 무중력을 아이템으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들까지 마치 달이 더 생기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은 달의 번식에 한 편으로는 충격을, 한 편으로는 재미를 느낀다. 일종의 얄팍한 대중 심리랄까, 무중력 증후군이라는 병명까지 만들어내자 사람들은 유행병처럼 무중력 증후군을 앓고, 심지어 돈을 주고서라도 무중력 증후군을 앓기를 희망한다. 무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뭐든 팔리고, 무중력이라는 이름을 붙인 채 생산되는 많은 UCC들. 이것은 굳이 '무중력'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한다고 해도 익숙한 것이라 왠지 모르게 씁쓸한 웃음을 남겼다. 

  달이 더 생겨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란 사실 달이 없는 현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건들이었고, 처음에는 달이 하나 더 생겼다는 사실이 문자로 올만큼 중요한 뉴스였지만, 달이 6개가 되었을 때는 더이상 뉴스가 아니게 된다는 점들을 보며 뉴스에서 떠들고 있지만 않는다 뿐이지,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 주위에 달이 몇 개씩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력의 작용이 없는 무중력 상태로 나아가고 싶지만, 차마 중력을 끊어버릴 수 없기에 무중력을 꿈꾸는 현대인들. 어쩌면 우리는 달이 하나 더 생기는 것처럼 지루한 일상에서 우리를 구원해 줄, 혹은 해방시켜줄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것이 음모요, 모든 것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라 하여도, 무중력자들은 무중력의 그 순간만큼은 해방감을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이 책을 다 읽은 나도 책을 읽었던 순간만큼은 왠지 즐거운 일탈을 한 기분이 들었다. 

  책날개에 있는 사진만 보면 천상 여자같이 생겼지만, 여자 작가라면 떠올리기 쉬운 부드럽고 섬세한 문체가 아니라 더 의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이또한 결국 중력처럼 알게 모르게 작용하고 있는 힘인가?!) 이런 말 하는 것도 식상할 지 모르겠지만, 윤고은의 다음 작품이 무척 기다려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는 박민규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독특하면서 재미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를 해서인지, 아니면 작가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인지 최근의 박민규의 작품은 그저 그렇고, 그냥 그런 수준이다. 이 책이 나올 때만 해도 한국 문학에서 이런 스타일의 글을 쓰는 사람은 박민규밖에 없었기에 그에게 거는 기대가 더 컸을 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굳이 박민규가 아니더라도 가벼우면서 정곡을 찌르는 한국 소설들을 만날 수 있어서 그에게 거는 기대도 그만큼 덜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어깨에 힘을 빼고 근 4년 만에 다시 읽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여전히 박민규라는 브랜드가 헛방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 

  해마다 이 맘 때가 되면 프로야구의 열기가 찾아온다. 야구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해도 주변에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둘 있기 마련이고, 그들이 해주는 야구 이야기를 좋거나 싫거나 듣게 마련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야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야구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도 모두 읽을 수 있는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통해 성장해간 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시작되고, 자신이 살고 있는 인천을 연고지로 정한 삼미 슈퍼스타즈가 생기게 되고 야구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주인공. 하지만 유니폼에는 슈퍼맨이 새겨져 있고, 선수들의 이름도 외우기 쉽다는 과학적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삼미 슈퍼스타즈는 그야말로 지기 위해 지구에 내려왔다고 할 정도로 오늘 지고, 내일도 지고, 두 번 졌으니까 잠깐 쉬었다가 또 지는 팀이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삼미 슈퍼스타즈. 그들과 함께 중학생이었던 주인공은 늙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83년 삼미는 6위가 아닌 2위라는 믿을 수 없는 결과를 내놓는다. 이에 달라지는 주변의 태도. 하지만 84년 이후 다시 삼미는 꼴찌로 전락하고, 주위의 시선도 다시 달라진다. 이후 주인공은 삼미의 고별전을 보고, 결국 '소속'이 사람을 바꾼다는 것을 깨닫고 미친듯이 공부를 해서 일류대에 들어가 프로의 삶을 살기 시작한다. 하지만 IMF 한파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나앉은 그에게 친구인 조성훈은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을 만들자는 제안을 하는데...

  이 책에서도 말하듯이 인생을 야구에 비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이 아웃이라고 포기하려는 주인공에게 조성훈은 니 인생은 아웃된 게 아니라 포볼이라고, 1루로 진루하라고 이야기한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처럼 적당히 잡을 수 있는 공만 잡고, 칠 수 있는 공만 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프로의 세계를 아마추어처럼 살아가는 것은 주위로부터 비아냥을 받기 십상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아무렴 어떠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를 통해 모두가 프로로 살아가려는 현실을 비판하는 이 책을 읽으며 평범한 삶을 살아가기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 

  책을 읽기 전에는 약 1년 간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실패만 거듭하고 있는 내 인생이 투아웃에 투스트라이크 정도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인생이 정말 그렇게 절망적이라는 생각일까라는 생각이 들며 왠지 위로를 받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볼이라 1루에 나가서 쉬는 주인공처럼 빈둥거리며 쉴 수는 없겠지만 그랬거나말거나, 경기는 계속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플레이볼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8-08-07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이 가장 고마웠던 것은, 9회말 투아웃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서일 거예요. 이렇게 신나게 웃으면서 또 통렬하게 아파하기. 전 박민규가 너무 좋아요^^

이매지 2008-08-07 22:34   좋아요 0 | URL
최근 작품들은 너무 가볍기만한 것 같아서 아쉬워요.
박민규식의 화법은 좋은데 말이죠 :)
 
소년, 아란타로 가다 나를 찾아가는 징검다리 소설 13
설 흔 지음 / 생각과느낌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맨 처음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아란타'가 대체 어디일까라는 점이었다. 대체 소년은 아란타로 떠난 것인지, 아란타에서 무슨 일들을 겪은 것인지 등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책을 폈는데 기대와 어긋나는 전개때문에 살짝 당황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청소년용 역사 팩션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던 책. 

  이 책의 주인공인 청유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꿈이 있다면 아버지의 친구인 이정의 딸인 연희를 색시로 맞아들이는 것. 하지만 떵떵거리며 부산을 주름잡는 이정과 끼니걱정을 해야하는 청유의 격차는 크기만 하다. 이에 청유는 부자가 되기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하고, 대마도에서 인삼을 현지인에게 건내는 것을 조건으로 뒷문으로 조선통신사에 합류하게 된다. 하지만, 일이 꼬일려는지 대마도에서 통신사 일행을 왜인이 살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그 배후로 인삼이 얽혀있음이 의심된다. 간신히 이언진의 도움을 받아 인삼을 없애고 목숨도 구한 청유. 하지만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을 뿐인데...

  부록으로 실린 조선통신사에 대한 설명처럼 우리나라는 일본에 문화를 전수해주기 위해 몇 번이나 통신사를 보낸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것은 마지막 통신사였던 계미사행. 그 전에는 더 많은 곳들을 갔지만, 이 시기는 정한론의 대두로 통신사를 썩 반기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통신사는 쓰시마, 오사카 등의 몇몇 곳만 방문한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통신사가 도착하는 곳마다 시문을 받겠다고 줄을 서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러 오는 등의 모습도 드러난다. '야만적이었지만 문물을 빼어나고, 어수룩해보이지만 실속을 챙기는 데는 빠른 일본' 주인공 청유는 부자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지만, 오히려 그 곳에서 이언진으로부터 이 세상에는 더 많은 문물이 있고,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조선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고 빗장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있을 뿐. 자신의 글로 조선의 문을 부수려고 하는 이언진의 노력이 결국 실패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청유는 외국의 문물을 배워와 조선의 문을 부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이 책에서 기대했던 부분은 <리진>이나 <리심>처럼 평범한 조선인이 외국 생활에서 겪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부분보다는 조선 통신사라는 소재를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전에 봤던 <해유록, 조선 선비 일본을 만나다>보다는 청소년들이 읽기에는 쉬운 느낌이라 조선 통신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당시의 사회 현상(예를 들어, 서얼이 천대받는 모습이나 상업이 발달해가는 모습 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이해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 폭넓은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너무 이야기가 짧게 끝나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청유가 아란타로 가겠다고 결심한 부분에 대해서도 다소 설명이 부족한 것 같아서 아쉬웠고. 어쨌거나, 저자인 설흔은 이전에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로 처음 만났는데, 두 번째 만남은 다소 아쉽긴 했지만 우리 문화를 다시 살려 현대의 독자들에게 당시의 사회 현상을 쉽게 이해하게 해줬다는 점에서는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약간의 아쉬움이 들기는 했지만 가독성이 좋아 금방 읽을 수 있었던 책. 조선의 소년이 어떤 고민을 했는지 엿보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비춰보는 것은 어떨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뿌리 깊은 나무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를 시큰둥하게 읽었기 때문에 소위 한국형 팩션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다소 미스터리한 이야기일 뿐, 독특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근 드라마 '별순검'을 보면서 다시금 이런 류의 한국형 팩션에 관심이 가게 되어 나름대로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별순검'의 배경은 19세기라 어느 정도 반상의 차별이 무너져가는 과정에 있다면, 이 책의 배경은 15세기로 반상의 차별 뿐만 아니라 성리학적 질서가 강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인 요소들과 함께 세종을 둘러싼 음모가 그려지는 이야기는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아우른 제법 괜찮은 팩션으로 다가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겸사복 강채윤은 본디 변방의 일개 군사였다. 그런 그가 우연히 김종서 장군의 눈에 들어 궁 안에 들어가 겸사복이 된다. 하지만 본디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그에게 궁 안은 답답하기 그지없고,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은 반인 가리온 뿐이다. 그렇게 평온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 집현전 학사의 살인 사건이 떨어지며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잇달아 일어나는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 증거라고는 현장에 남겨져있던 마방진과 학사들의 몸에 공통적으로 있는 문신 뿐. 공통점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오행의 상극에 이치에 따라 죽게 됐다는 점을 발견하지만 범인의 정체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가, 왜 왕의 학사들을 죽였는가? 

  세종의 치세를 떠올리면 정조 때 실학이 유행했던 것처럼 이 시기도 실용적인 학문이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을 비롯하여 측우기, 물시계를 비롯하여 각종 역서와 농서 등이 간행되었던 시기가 바로 세종 때다. 하지만 이런 세종의 정책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신하들도 있었으니 이들은 경학을 세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매 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3~4줄 가량 이야기를 요약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읽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소 낯선 개념인 오행이 소재인 살인사건이기에 가볍게 읽기에는 녹록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미천한 신분의 겸사복 채윤이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은 흥미로웠지만 그 벽은 너무나 높고 컸기에 채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상대임을 알고도 젊은 혈기로 덤비는 채윤의 모습은 나름대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쉽게도 크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매력은 없었지만. (열혈 겸사복이라는 점 빼고는 달리 캐릭터의 매력이 없어서 아쉬웠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적과 대립하는 내용이 아니라 새것과 옛것의 대결, 우리의 것과 중화의 것의 대결, 격물을 중시하는 실용과 사장을 목숨처럼 떠받드는 경학의 대립이 배경에 깔리기에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었다.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역사적 지식이 많지 않아도 제법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표지에 훈민정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그에 얽힌 살인사건이겠거니하고 읽어갔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결국 베일에 꽁꽁 쌓여있다가 2권 중반이 넘은 시점에서 드러난다. 음양오행의 이치와 건곤의 섭리, 천지인 삼재와 천원지방의 원리, 그 모든 조화를 품은 스물여덟자의 글자. 마침내 정체가 드러났을 때의 놀라움이란. 하지만 사람의 입안을 그림으로 그려 소리가 나는 위치와 방법을 하나하나 세밀히 배워 닫힌 입이 열리고 굳었던 혀가 움직이기 시작한 벙어리 궁녀 소이는 너무나 소설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소이를 일반 민중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글을 배움으로써 그동안 내지 못한 목소리를 내게 된 상징이라 생각할 때면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당히 긴장감있게 흘러가다가 결말부가 약간 흐지부지하게 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단순히 '역사가 배경인' 소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한 팩션도 가능하구나'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작가의 최근 작인 <바람의 화원>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11-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뿌리깊은 나무에 비해서 바람의 화원이 훨씬 재밌었어요^^

이매지 2007-11-20 21:32   좋아요 0 | URL
바람의 화원도 기대되네요 :)
안그래도 마노아님의 리뷰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