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물고기 -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35억 년 진화의 비밀
닐 슈빈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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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다윈은『종의 기원』에서 “나는 곰과의 동물들이 자연선택에 의해 물속에서 살기에 더 적합한 신체 구조와 습성을 가지게 되고 입이 점점 터 커지며 마침내 고래 같은 동물이 되어가는 것이 전혀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며 그를 비판했다.

우리가 ‘진화’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장 알기 쉬운 것이 바로 자연선택, 적자생존이다. 하지만 이것 못지않게 중요한 생물학적 법칙이 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를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생물학적 모든 것의 법칙이라고 할 만한 개념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체에는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은 ‘업그레이된 물고기’라는 과학적 발견을 일깨워주고 있다. 

저자는 인간의 몸은 다른 동물들의 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으로 인간의 부모를 찾아내고자 한다. 즉 이 책에는 물고기에서 인간까지의 35억 년 진화의 비밀이 담겨져 있다. 가령, 그는 우리가 박쥐의 날개를 만들고자 한다면 손가락을 아주 길게 늘이면 된다고 했다. 해부학자 리처드 오언이 발견했던 다양한 생명들의 중요한 패턴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리처드 오언은 생물들의 팔다리는 모두 공통의 설계를 따른다고 했다. 즉 팔의 상완골이나 허벅지의 대퇴골처럼 먼저 한 개의 뼈가 있고, 거기에 두 개의 뼈가 관절로 연결되며, 거기에 또 작고 뼈들이 여러 개 붙어 있고, 마지막으로 손가락이나 발가락으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즉, 뼈 한 개- 뼈 두 개- 둥근 뼈 여러 개- 손. 발가락, 이라는 패턴을 알게 된다.

그런데 저자가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었던 것은 팔다리의 패턴을 다름 아닌 물고기의 지느러미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봐서는 곰이 ‘거의 고래 같은’ 만큼이나 인간이 ‘거의 지느러미 같은’ 것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우리의 일상적인 통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 그는 우리에게 생명의 역사는 다시 한 번 화석 물고기를 탐구하게 한다.

생명의 역사에 있어 확실히 어류로 보이는 유스테놉테론(3억 80000만 년 전)과 확실히 양서류로 보이는 아칸토스테가(3억 6500만 년 전) 사이에는 ‘잃어버린 고리’가 있었다. 그러나 육기어류라 불리는 ‘틱타알릭’(3억 7500만 년 전)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생명의 수수께끼가 풀렸다. 육기어류라는 것은 물고기와 사지동물의 중간단계에 속하는 것으로 발이 있는 물고기라는 것이다.

인간의 몸이 왜 이렇게 생겼을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한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알게 된다. 첫째 생물의 팔다리는 지느러미에서 생겨났다. 그리고 최초의 팔다리는 걷는 도구가 아니라 헤엄치는 도구였다. 둘째 틱타알릭이라는 물고기는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었다. 셋째 생명의 위대한 전환은 새로운 DNA의 탄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지느러미 발생에 관여했던 오래된 유전자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닐 슈빈의『내 안의 물고기』는 ‘틱타알릭’을 흥미롭게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그동안 진화의 ‘잃어버린 고리’라고 당연시 여겨왔던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찾아낸 고리’라고 하면서 생명의 진화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시야를 열어놓았다. 그만큼 생명의 역사는 앞으로 발견해야 할 고리가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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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미같은 사랑은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나를 너무 귀여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야. 또 내가 엄마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난 남자보다 여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거든. (…) 그러니까.. 말해 봐. 네가 남성다움이란 무엇이지? 음…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 마누엘 푸익의『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범여인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여느 여자들처럼 얌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잔인한 짐승으로 변합니다. 표범여인이 되어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할퀴며 끝내는 죽이고 맙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표범여인의 비극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섹스는 더러운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은『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표범여인이 사랑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사랑할 수 없어 생기는 병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사랑이 그토록 깨지기 쉽다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범여인은 다릅니다. 동물원에 갇힌 표범처럼 만들어진 야성(野性)때문입니다. 사람 같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몇 겹으로 두르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표범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에게 키스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가 거미여인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거미여인은 아무 일 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 사랑이 오면 붙잡습니다.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곧 삶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거미여인으로 불리는 몰리나가 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입니다. 그와 함께 비좁은 감방에 수감된 발렌틴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남자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쏟아냅니다. 발렌틴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려고 한다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면 조국의 침략자를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몰리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렌틴은 여자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본다면 즉 젠더로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이 말 그대로 남성이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여성같은 남성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감성에 있습니다. 감성이 예민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異性愛) 보다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同性愛)가 훨씬 더 예민한 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말했던 여인은 해리엇 테일러였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가지기 힘든 여러 장점을 한꺼번에 타고난 미인이요,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근본이요 내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표준이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몬드 보부아르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만나면서 자기를 능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작가 말대로 ‘사랑은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리나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흔히 거짓 섹스라고 불리는 동성애에 대해 달갑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사실 동성애는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며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어는 누구는 표범여인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구는 거미여인이 될 것입니다. 표범여인에게 사랑은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는 물과 같습니다. 반면에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흐르는 물입니다. 고요있는 물은 소리도 없으며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작가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라고 있는 어두운 오솔길 위에서 사랑을 얻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싹튼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몸속에는 거미줄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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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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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즉 간서치였던 이덕무는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했다. 내가 나의 벗이라는 뜻인데 책에 파묻혀 살았던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부커스다. 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승하면서 사고방식에까지 많은 혜택을 받는다. 즉 어떤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 무지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는 많은데 정작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려움과 대면하기 일쑤다. 또한 사회적 양서(良書)와 개인적 양서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책의 눈높이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가령 니체의 『차라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며 읽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가 앞선다.

우리 시대의 책벌레인 이권우는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에서 이중환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책읽기의 두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비타민적 읽기다. 당장의 효과를 노리고 읽는 것이 아니라 은근짜하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읽기다. 다음으로 아스피린적 읽기다. 빠르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실용적 독서다.

이중에서 어느 정도 책 냄새를 아는 사람이라면 비타민적 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려면 먼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이른바 속독(速讀)은 주마간산(走馬看山)에 비유할 수 있다.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정독(正讀)은 주자(朱子)가 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깊이 읽고 겹쳐 읽는 것이다. 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여 지식을 깊게 하는 것이 깊이 읽기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각각 다른 분야에서 다른 책들을 서로 비교하며 읽는 것이 곧 겹쳐 읽기다.

마지막으로 쓰기 위한 독서술(讀書術)이다. 읽는 것 못지않게 글쓰기를 위해서라는 것이 확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문자향(文字香)이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글이나 한 권의 책에서 주제의식나 논리 전개의 방식, 은유나 직유 같은 수사학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애써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책읽기의 달인 방법은 독서를 가늠할 수 있는 작은 단면에 그치지 않는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더 할 나이 없이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우리가 호모 부커스일지라도 거장(巨匠)들의 독서론을 엿보고 싶은 까닭은 독서의 희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독서론은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라고 할 수 있다. 각주라는 말이 본문의 어떤 부분을 보충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본문의 아래쪽에 베푼 풀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관과 감성을 옹호하고 보충하고 지지하는 책을 읽는 행위가 바로 각주의 책읽기다. 반면에 이크는 “놀랐다.”라는 감탄사인데 저자는 지적 충격으로 해석한다. 즉 나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이크의 책읽기다. 전자가 행복한 책읽기라면 후자는 고통의 책읽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책읽기의 달인에 있어 진정한 발견은 애들러 말대로 하자면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읽기는 고통”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덧붙이면 과정은 고통이나 그 결과는 행복한 것이 책읽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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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35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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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 폴 발레리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에서도 ‘액체 근대’는 낯설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근대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근대의 다채로운 향연을 만끽하고 있다. 시와 역사 다음으로 사회학을 제 3흐름이라고 하는 보는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그의 명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정신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고체와 액체라는 물리적 특성을 통해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 정시이란 고체에서 액체로 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정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유동성이라는 액화 과정은 견고한 것들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한다. 어쩌면 창조라는 것이 결국에는 다시 고체화되겠지만 얼마든지 창조적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액체성 즉 유동성(流動性)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가령, 문명의 역사를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승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이 원시적이며 자연적이며 비공간적이라고 한다면 정착민은 문명적이며 지배적이며 공간적이다. 정착민이 공간에 대한 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가속화시키고 고체 근대를 포드주의적 세계로 결합시켰다. 포드주의적 세계는 생산자 사회이며 규격화된 시간 아래 노동을 지상에 묶어 두었다. 곧 육체화된 노동이며 개인의 자유는 통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액체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목민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조명되고 있다. 유목민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공간의 지배는 무의미하다. 그 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이 되었다. 휴대폰의 등장이 말해주듯 소비자 사회에서는 즉시성(卽時性)이 삶을 주도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지속성보다는 시간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탈 육체화된 노동인 소비자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해방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액체 근대에서 개인화의 역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사회에 복종하는데, 복종은 개인의 해방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화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모호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법률상으로 시민이 되지 않고서는 실제상 개인’으로 변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서 발견한 독특한 사회 현상은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의 차이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차이는 ‘이성이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다시 잠에 빠져들 때 생겨났다.’라고 했다. 이성이 완전하다면 인간적 삶은 견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해방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판단력 차이에서 오는 공동체 사회의 ‘안전 부재’에 대한 부작용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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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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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Homo Sspiens)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생각의 잔가지를 잘라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를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럴 때 생각은 만만하지 않다. 생각은 양식이며 에너지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굳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생각의 무감각과 생각의 감각은 다르다. 전자가 생각의 권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생각의 쾌락이다. 전자가 생각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별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종이란 바로 이현우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나오는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이다. 호모 사피엔스와 인플루엔자의 합성어인 호모 사피엔자는 제목에 나와 있듯 인문학자에 가깝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수잔 손택이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문학자는 폭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문학자는 로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쟈는『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며 살인자다. 살인자에 대한 변명을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말을 빌려보면 좀 더 의미가 있다. 견고한 학문을 깨트리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로쟈만의 인문학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곁다리 인문학자’의 세상 보는 법이 매우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이 책을 몇 장만 읽어보면 금세 곁다리의 놀라운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책읽기와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드는 명쾌한 비평은 확실히 뒤샹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뒤샹의「자전거바퀴」는 자전거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리 이동’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곳(도구)에서 저곳(이미지)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혹은 저자 말대로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으로 저공비행하는 것이다.

가령, 로쟈는 영화「나쁜 피」에 나오는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두려운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순간은 시간적이면서 동시에 반시간적이다. 이로 인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감성적 사랑이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라면 초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제어되지 않는다. 그래서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인 탓에 숭고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쟈의 유쾌한 철학은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텐가?”라고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던 니체의 사유와 가깝다. 남성의 진리는 어린아이며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도둑질 한 것이다. 반면에 여성의 진리는 위버멘쉬(초인)이며 바다며 자궁이다. 전자가 “이게 다가 아니야.”라는 이데아 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게 다 예요.”라는 아줌마 철학이라고 한다. 즉 이데아 철학이 현실 너머라고 한다면 아줌마 철학은 충만한 현실이다.

로쟈에게 니체가 아줌마 철학자였다면 괴물 같은 지젝은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젝주의자’라고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라는 지젝의 주장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눈여겨 볼만 했다.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 ‘앎’이 아니라 ‘행함’에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변기의 물을 내리는 하찮은 일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지 설명한다. 그리고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그야말로 잡학(雜學)하고 다식(多識)하다. 누군가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고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책 읽기가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아는 것에서 모두가 모르는 것’으로 뒤집어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즐겁게 읽혀지는 좋은 번역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원저나 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시오랑이 말한 ‘눈물의 일반이론’을 웅숭깊게 감싸고 있다. 어려움이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철학의 무능력을 부정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쉽고 명쾌하며 무엇보다도 고전(古典)이다. 결과적으로 철학이 메마른 시대에 이 책은 대중지성을 적시는 단비와 같다. 고리타분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고체(固體)라는 학문의 빈틈을 파고든다. 이것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유동하는 액체(液體), 유동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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