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태보고서 -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
한나 홈스 지음, 박종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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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다. 하지만 그냥 걸어 다니지 않는다. 만약에 그랬다면 우리는 맹수 같은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생태계의 최고의 포식자로 자리매김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달리 호모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기나긴 진화 과정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다른 동물들처럼 먹고 사는 본능에만 몰두했다면 결코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동물 분류학상 영장류(靈長類, Primates)에 속한다. 영장류 중에서도 고릴라, 침팬지 같은 유인원(類人猿, anthropoid)들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동물로 파악되고 있다. 이러한 신체적인 특징 때문에 흔히 ‘털 없는 원숭이, 걸어 다니는 원숭이 혹은 요리하는 원숭이’로 불러졌다. 한마디로 원숭이의 본능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동물일까? 21세기 레이첼 카슨으로 불리는 한스 홈스는『인간생태보고서』에서 매우 흥미롭게 이 문제를 관찰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라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고 있는 동물생태학을 찬찬히 읽어보면 인간중심주의의 한계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도구를 사용하고 말한다고 하지만 다른 동물들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본능과 싸울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책을 통해 몇 가지 능력을 살펴보면 먼저 ‘있으나마 한 털가죽’을 이야기하고 있다. 보통 “왜 털가죽이 없을까?”라고 고민한다. 그러나 저자는 “왜 인간의 털가죽은 쥐 한 마리의 체면도 가려주지 못할 만큼 그 크기가 줄어들었을까?”라고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직립보행에 따른 뇌를 보호하기 위해 머리카락은 방열의 역할을 한다. 반면에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몇몇 신체 부위에 있어 남자의 성모가 많은 이유는 ‘성(性)선택’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다. 다윈의 적자생존에 의하면 수공작의 꼬리는 화려하기만 할 뿐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 선택에 따르면 수공작의 아름다운 꼬리는 번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뇌다. 인간의 뇌는 20%의 열량을 소비한다. 그래서 동물의 뇌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렇다고 뇌의 크기가 지능과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즉 뇌의 크기가 크다고 해서 지능이 높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뇌 또한 진화의 산물이며 뇌의 크기가 컸던 이유에 대해 저자는 마키아벨리적인 이론, 먹이 찾기 이론, 인지적 지도 이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뇌가 독특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뇌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남성이냐 여성이냐 따라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가령 지성을 담당하는 ‘회질과 백질’에 있어 남성이 뇌의 전 영역에 고루 분포된 반면에 여성은 전두엽이 많이 관장한다.

 



세 번째로 오감이다. 시각을 보면 파리의 눈이 초당 200개의 서로 다른 영상을 처리할 때 인간의 눈은 초당 20개 정도다. 또한 쌍안으로 이루어진 덕분에 인간은 120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입체적으로 지각한다. 그러나 동물은 눈이 얼굴이 전면에 딸려 있어 306도에 가까운 경계용 지각이다. 청각에 있어 동물들이 소리를 듣고 눈을 통한 정밀 탐색이 이루어지는 반면에 인간은 소리를 눈의 길잡이로 삼는다. 화학적 지각이라고 불리는 미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이 있다. 또 하나 제6감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는데 예지몽, 독심술, 예언 같은 것이다.

 



네 번째는 식성이다. 인간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잡식성 동물과 다르다. 첫째 인간은 대부분의 먹이가 뜨거운 상태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을 ‘요리하는 원숭이’로 부르는 이유다. 인류의 제 1호 시간 절약용 주방기기였던 불을 사용하면서 인간은 먹을수 있는 것을 가공했다. 뿐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수를 늘렸다는 것이 대단한 전환이었다. 둘째 인간은 적정한 양보다 많이 먹는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비만이 없는데 인간에게는 고칼로리에 대한 생물학적인 비용과 노력이 미미했다. 그런가하면 ‘반(反)굶주림 상태’에서도 나타난다.

 



다섯 번째 의사도통이다. 동물의 언어가 인간의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를 충족해야 한다. 첫째, 단어들이 자의적인 기호들이어야 한다. 둘째, 단어들을 통사론적 순서대로 배열해야 한다. 셋째, 신조어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작은 단위들이 합해져서 큰 단위군(群)들이 되어야 한다. 다섯째, 실재하지 않는 대상이나 일어난 적 없는 사건들에 관하여 추상적으로 뇌까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생태계 충격’이라는 불편한 사실이다. 동물들이 본능에 따라 자원을 통제하지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통제하면서 영역을 확대해왔고 개체 수를 증가시켰다. 이로 인해 생태계의 가하는 충격은 나쁘다.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개면서도, 나무를 쪼개는 기술을 개량하거나 다양화하지 않았다. 또한 비버들은 나무를 베면서도 다른 동물들이 사는 곳으로 던지지 않았다. 오직 인간만이 생태계를 파괴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거꾸로 자연의 재앙이 인간을 압박하면서 저자의 지적대로 ‘고독감’이 생겨났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을 재발견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동물적 자아를 규정함으로써 자연 세계 안에서의 내 정체성’이 분명해지기를 희망하는 저자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매우 희귀한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뉘우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다른 동물들에게 없는 ‘도덕적 책임’이 우리의 미래를 동물들과 상생하는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는 데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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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능성이다 - 기적의 트럼펫 소년 패트릭 헨리의 열정 행진곡
패트릭 헨리 휴스 외 지음, 이수정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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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와 대화를 나누는 여자로 알려진 제인 구달은 자서전『희망의 이유』에서 가족이나 가까운 몇 사람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안면 실인증인 그녀가 침팬지의 얼굴을 구분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은 제목만큼이나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희망이 있습니다. 만약 희망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절실할 것입니다. 장애라는 운명으로 태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한평생을 장애로 산다면 삶은 쉽게 부서질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이 있다면『나는 가능성이다』에 나오는 패트릭 헨리처럼 ‘기적의 트럼펫 소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무안구증으로 평생 앞을 볼 수 없었습니다. 팔다리마저 비정상이라 혼자 걷지도 서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트럼펫은 그의 불가능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그의 트럼펫 기적은 “나는 가능성이다!(I Am Potential)"로 연주되면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차동엽 신부가 말했듯 ‘감동뿐 아니라 지혜를, 지혜뿐 아니라 위로를, 위로뿐 아니라 치유를, 치유뿐 아니라 소망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장애’가 아니라 ‘능력’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잘하는 것을 갖고 있다”라고 삶을 격려했습니다.


그는 ‘피아노가 내 첫사랑’이라고 고백할 정도로 음악을 가장 하고 싶어 했습니다. 위대한 발명은 우연에서 비롯된다는 경우가 흔한데 그가 피아노 소리에 귀 기울인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어렸을 때 울음이 멈추지 않았던 자신을 달래주기 위해 아버지는 피아노를 연주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피아노 소리에 울음을 그쳤습니다. 피아노 소리가 다른 어떤 소리보다도 매우 특별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는 음악을 삶의 궁극적인 도전 과제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칭밴드에서 연주하면서 ‘디즈니세계 스포츠 정신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그의 단단한 삶을 보고 있으면 ‘용기 있는 사람’이 무엇인지를 감동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장애는 별일입니다. 장애아의 사소한 하나하나가 별일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별일을 “별일 아니야”라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진짜 한계를 알기 위해 불가능에 도전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는 자신의 목표를 알고 집중하면서 현재(오늘)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하는 동시에 ‘자신이 하는 일을 사랑’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삶의 장애라는 현실은 누구에게라도 부닥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이건 불공평해!”라고 흐느껴 울 수도 있습니다. 오렌지 같이 달콤해야 하는데 레몬처럼 시린 인생을 좋아한다는 게 어렸습니다. 너무나 어려운 탓에 버트란트 러셀이『행복의 정복』에서 말한 ‘적절한 이유’를 무의미하게 했습니다. 즉 “어떤 불행이 닥쳐오면 진지하고 신중한 태도로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불행을 직시하고 나서는, 그 불행이 그렇게까지 끔찍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만한 적절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제시해보라. 그럴 만한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나는 가능성이다』의 주인공인 패트릭 헨리에게 ‘적절한 이유’는 음악이라는 축복의 선물에 있었습니다. 음악은 그의 분신이었습니다. 그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강한 에너지는 없다는 믿음을 실천했습니다. 휠체어에 앉은 채 연주하는 트럼펫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다른 사람들이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시 그에게 돌아왔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잠시 이런 생각이 스쳤습니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너무나 평범해서 그저 사랑을 반복적으로 소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혹 우리가 사랑하고 있지만 정작 그 사랑이 가벼워서 작은 불행 앞에서 멜랑콜리해지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봤습니다. 패트릭 헨리뿐만 아니라 우리는 누구나 크고 작은 결핍을 안고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와 격려는 삶을 긍정적으로 회복시켜 줍니다. 무엇보다도 마음으로 보고 느끼는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영혼은 한결 평화롭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래서 인지 트럼펫의 기적은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아로새겨졌습니다. 우리에게 5분 정도의 거리가 그에게는 30분도 부족하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건강함의 사치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내 몸이 멀쩡하다는 것이 멋져 보여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몸 아픈 사람이 마음까지 다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끝으로 어느 순간 삶의 불행이 찾아올 때 너무 슬퍼하거나 포기하지 않기를 당부하고 싶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적절한 이유’는 있습니다. 삶의 불행이 약(藥)이 될 수도 있고 독(毒)이 될 수도 있음을 오랫동안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패트릭 헨리를 만나면서 삶의 불행을 좋다 혹은 나쁘다, 라고 더 이상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가슴 뛰게 하는 삶의 활력소는 ‘가능성’이며 가장 ‘적절한 이유’였습니다. 정말이지 가능성이라는 놀라운 기적에 가슴이 뿌듯해졌습니다. 그래서『나는 가능성이다』에서 울려 퍼지는 ‘가능성’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기대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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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라이어 - 성공의 기회를 발견한 사람들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최인철 감수 / 김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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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로 맘먹은 것은 ‘아웃라이어’라는 제목만큼이나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공의 비결은 모두 틀렸다!’라는 것이 마음을 움직였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꿈(dream)과 도전을 빼놓을 수 없다. 가령, 자기 몸집에 턱없이 부족한 날개를 가진 꿀벌이 날아다닐 수 있는 비결은 날고 싶다는 꿈 때문이었다. 그래서 꿀벌은 1초에 250번을 움직인다. 그런가하면 백열구를 만든 에디슨은 “나는 백열구를 만들기 위한 2천 번의 실험을 거쳤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티핑 포인트』, 『블링크』를 통해 성공의 뒷모습을 명료하게 파헤졌던 말콤 글래드웰이 이번『아웃라이어』에서는 ‘1만 시간의 법칙’을 들려주고 있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말 그대로 성공하기 위한 매직넘버다. 순수한 능력 위주의 사회에서 꿀벌의 1초에 250번, 에디슨의 2천 번의 실험 그리고 아웃라이어들의 1만 시간의 법칙은 최고의 아이디어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 말대로 최고 중의 최고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훨씬, 훨씬 더 열심히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말콤 글래드웰은 ‘이 모두가 틀렸다!’라고 거침없이 반박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성공한 사람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 이렇게 성공을 사람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적 관점이다. 반면에 무에서 유를 창조하지 않는다는 것은 갈릴레오적 관점이다. 이는 성공을 상황(situation)으로 보는 것이다. 즉 성공의 주된 원인을 사람 그 자체보다는 관계의 측면에서 성공의 뒤집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관계의 힘은 어느 정도일까? 저자는 캐나다 하키팀을 지배하는 철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캐나다 하키팀 선수들의 생일을 보면 1월, 2월, 3월에 월등히 많다. 이유인즉 캐나다에서는 1월1을 기준으로 나이를 헤아리며 연령대를 기준으로 사람을 선발하고 분류하고 집중적으로 교육시킨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즉 같은 연령대에서도 생일이 늦은 사람들보다 더 몇 달간 더 숙달될 수 있는 기회를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런 만큼 로버트 머튼의 ‘자기실현적 예언’대로 재능이 돋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관계가 보다 사회적 맥락으로 확대된 것이 문화다. 이 책에서 저자는 벼농사와 수학 실력의 놀라운 상관관계를 분석하면서 문화의 차이를 설명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두 나라의 속담이 있는데 바로 러시아와 중국이다. 러시아 속담은 “하느님이 키우지 않으시면 땅에서도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 속담은 “1년 내내 해 뜨기 전에 일어날 수 있다면 어찌 부자가 못 되리”였다. 두 나라의 속담의 차이는 땀 흘려 일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있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인들이 수학을 더 잘하는 이유는 실력이 아니라 노력과 끈기라는 태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문화적 비밀은 비행기 추락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고는 대개 일곱 가지의 실수가 결합한 작용이며 결과다. 우리에게 단순히 지연된 비행기 사고에서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피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로 의사소통에 있었다. 비상상태에서 완곡어법(mitigated speech)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일상적인 어투에 불과할 뿐이다. 완곡어법이란 전달 내용을 부드럽게하거나 상대편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화법이다. 이러한 완곡어법은 홉스테드가 말한 ‘권력 간격 지수(Power Distance Index, PDI)가 매우 높기 때문이다. 권력 간격 지수란 특정한 문화가 위계질서와 권위를 얼마나 존중하는지를 나타낸다. 결과적으로 완곡어법 때문에 비행기 추락이라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21세기형 성공의 비결을 예감할 수 있게 된다. 그 비결이란 간단하다. 열심히 일만 한다고 해서 꼭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하기 위해서 일만 한다면 오히려 성공의 부담감만 백배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평범한 사람과 비범한 사람의 작은 차이는 성공을 즐기는 마음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아웃라이어의 비밀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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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두사의 시선 - 예견하는 신화, 질주하는 과학, 성찰하는 철학
김용석 지음 / 푸른숲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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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메두사의 시선』의 저자인 김용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철학자인 그가 다름 아닌 철학 에세이를 쓴다고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편견이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저자의 개성적인 사유 방법을 깨닫게 된다. 저자 말대로 철학 에세이는 지식으로 쓰는 글이다. 그러나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라고 한다면 자기 성찰은 곤란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신화-과학-철학을 연계하는 저자의 글쓰기는 앞서 말했듯이 독특했다. 같은 지식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 지식을 이해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생각하는 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사건의 역사가 아닌 ‘상상력의 역사’라고 말했던 저자의 명랑함이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인‘메두사의 시선’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과학자의 시선’이다. 저자에 따르면 메두사의 눈초리는 이중적이다. 즉 변화하는 것들의 뒤에 숨어 있는 불변의 법칙을 붙잡아 두는 과학의 시선인 반면에 그런 과업에 몰두하는 과학자에게‘업보’로 돌아갈 시선이다. 이로 인해 메두사의 시선은 과학 활동의 원천이며‘과학적 패러다임은 메두사의 시선이 화석화된 법칙의 체계’가 되는 것이다.

프리고진이 갈릴레오에 대한 지지를 “지구가 수정 구슬로 바뀐 뒤에 더욱 아름다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메두사의 눈초리에 의하여 다이아몬드의 조각상으로 변화될지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메두사의 시선에 붙잡힌 자연법칙의 조각상이란 단순해야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또한 메두사의 시선이 확장되면 진리의 빛이 대통합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통합은 ‘모든 것을 하나로’라는 단순함과 ‘모든 것이 함께 조화로운’이라는 아름다움에 더해 ‘전체’가 ‘여기 있다’는 장엄함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그의 사유는 엉뚱하다. 그렇다고 해서 엉뚱함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엉뚱함이 제기하는 의혹에서 무엇보다도 ‘충분한 논증’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저자에 따르면 충분한 논증이야말로 철학자가 보통 사람과 다른 존재의 이유가 된다. 가령,「피그말리온의 타자성」를 보면 자신이 조각한 여인의 상(像)이 제 아내가 되기를 바라는 피그말리온이 나온다. 그런데 저자는 피그말리온이 지독한 이기주의자 혹은 자기중심주의자가 아닌가? 라고 반문했다. 이러한 까닭에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 탓이다. 진화의 종점이 인간이라고 했을 때 저자가 우려하고 바는 타자에 대한 불필요성에 있다. 인간이 근원적인 자기반성과 변화를 하기 위해서는 타자와 만나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또 하나, 저자의 놀라운 탐색을「디오니소스와 포도주의 인식론」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니체도 그랬지만 우리가 디오니소스를 이해하는 한계는 주신(酒神)만을 다루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포도주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예리하게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찰스 다윈은 인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간의 문화적 특성을 세 가지로 활동을 들었다. 즉 술 빚기, 빵 굽기, 글쓰기이다. 이들의 특징은 자연적이지 않으며 발효의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포도주는 포도와는 달리 문화이며 이것이 곧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일찍이 몽테뉴는“우리가 가장 모르는 것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 믿는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둘러싼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된다. 즉 한때는 네 발로, 한때는 세 발로, 한때는 두 발로 걸으며, 일반적인 법칙과는 반대로 발이 많을수록 약한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정작 어린 아이도 풀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스핑크스의 반인반수(半人半獸)의 시선에서 깨닫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보다 잘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관심과 신화적 은유를 철학적 성찰에 연계’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 책의 가치를 높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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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 2010-03-2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음 두 가지 수학진리를 대한수학회의 부당업무 관련 죄인, combacsa(그네고치기), melotopia(snowall), Pomp On Math & Puzzle(박부성) 등은 권위만을 앞세워 부인하는 잘못을 범하였던 것이다.
첫째, 다음 세 가지 공식들은 모든 피타고라스 수를 구할 수 있다.
X=(2AB)^(1/2)+A, Y=(2AB)^(1/2)+B, Z=(2AB)^(1/2)+A+B.
상기 공식은 c^2=A=Z-Y, 2d^2=B=Z-X 일 때 X=2cd+c^2, Y=2cd+2d^2, Z=2cd+c^2+2d^2 같이 된다.
위 공식은 c+d=r 일 때 X=r^2-d^2, Y=2rd, Z=r^2+d^2 같은 기존 공식이 된다.
둘째, [2^{(n-1)/n}+……+2^(2/n)+2^(1/n)](자연수)^{(n-2)/n} 과 (자연수)/(무리수) 는 항상 무리수가 된다.
최미나 010-7919-8020.
 
휴먼 스테인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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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강의에 출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제가 두 학생에게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 spooks이란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통례적이고 본래적인 의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겁니다. 저는 spooks이란 단어가 이따금씩 흑인들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쩌면 한 오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제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중에서




“전기는 불입니까?”
어느 날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대교인 두 명의 율법학도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자 유대교 율법에서는 토요일(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학적인 현상인 전기와 불은 서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으키는 스파크 현상이 얼마든지 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전기는 불이다, 아니다? 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파인만은 “전기는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필립 로스는『휴먼 스테인』에서 “SPOOKS"가 일으키는 아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spooks라는 말이 당사자의 마음과 삐끗 어긋났습니다.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었는데 뜻밖의 말실수가 되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아 난처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놀람뿐이겠습니까? 살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을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말대로 ‘관습을 거스르는 대담함’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 변화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단독성이란 우리(we)가 아니라 나(i)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콜먼은 보통 이상의 남성입니다. 보통 이상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런 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테나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5주가 지나도록 출석하지 않는 2명의 학생에 대해 유령들(spooks)"이라고 한 마디 던졌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평범하게 툭 던진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명의 학생이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SPOOKS의 또 다른 의미인 검둥이가 ‘더러운 것, 나쁜 것’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종차별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콜먼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델핀 루 학장은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델핀 루는 콜먼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학장이었습니다. 전임 학장이었던 콜먼은 대학의 품질혁명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로 인해 후임 학장 델핀 루를 비롯한 교수들은 콜먼을 불신하는 반작용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콜먼이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SPOOKS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인종차별자라는 불명예를 덮었습니다. 말하자면 추한 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콜먼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주커먼에게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콜먼에게 주커먼은 남의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주커먼은 콜먼의 얼굴을 보면서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금 누르스름한 피부색의 심한 곱슬머리 유태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주커먼의 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작가말대로 콜먼은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호한 분위기 탓에 콜먼은 오랜 세월을 거짓 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콜먼이 자신의 운명을 백인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흑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의 인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콜먼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노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구멍이 한순간 뻥 터질 때가 있습니다. 노년의 교수 콜먼에게 불어 닥친 시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콜먼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는지, 어떻게 삶의 탈진현상(burnout)을 극복해나가는지 은근슬쩍 우리의 내면을 건드렸습니다. 삶의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콜먼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선과 편견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며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해 작가는 위험한 과거를 지닌 여자인 포니아를 등장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삼십사 년을 사는 동안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한 서른넷의 포니아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일흔 살의 콜먼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콜먼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대받고 문맹인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사랑의 실수 즉 섹스라는 가속페달을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들의 만족과 당당함을 위해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스릴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고 거창한 토론도 아니었습니다. 콜먼이 고백하듯 스릴같은 사랑은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에서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삶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작가는 인생에서 정말 난해한 변화가 생길 때는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몰라’라고 말할 때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사회에서 불행한 이유는 유럽 문학이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휴먼 스테인』을 읽으면서 인간의 오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닌 듯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민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실하고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의 모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텅 빈 감정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야만적 농담이라는 생각……이것이 필립 로스가 던지는 또 하나의 오점이었습니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고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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