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한 다스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문화인류학, 개정판 ㅣ 지식여행자 7
요네하라 마리 지음, 이현진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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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아무도 그런 말은 한 적은 없다네. 성경의 그 어디에도 그런 말은 적혀 있지 않아. 다만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것이 아닐까, 하고 한 번 생각해 보았던 것뿐일세. 하느님은 항상 오른손을 쓰시고 오른편에만 앉아하시니까 말이야.(…)이는 누구도 하느님의 왼편에는 앉아 있지 않아. 그곳은 텅 비어 있기 때문이자. 그러니까 하느님은 왼손잡이라고 할 수 밖에.(…)하느님에게는 왼손이 없어.”

정말로 하느님은 왼손이 없는 걸까? 그러나 굳이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아주 가까이 우리들의 왼손을 바라보면 황량함을 느낄 수 있다. 왼손의 처지가 곤란하다. 오른손잡이에게 왼손의 쓸모는 매우 미미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주눅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비록 우리 눈에 쉽게 발견되지는 않지만 왼손은 분명 우리 몸의 일부이다. 좋든 싫든 오른손은 왼손과 한 평생을 같이해야 한다. 만약 왼손이 없다고 상상한다면 얼마나 위험한가를 금방 알 수 있다. 스스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퍼트리면서 얼마든지 악마(?)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돌이켜 보면 우리 삶에 있어 악마 혹은 악녀는 자유롭지 못하다. 사람들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이유는 요네하라 마리가『마녀의 한 다스』에서 지적 했듯 악녀는 ‘마음가짐이 나쁜 여자가 아니라 용모가 미운 여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녀는 미녀에 에게 질투가 심하여 결국 ‘달갑지 않은 친절로 전화(轉化)’되었다고 했다. 악녀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모두가 도망가기에 급급하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고통 받고 있는 악녀의 편에 선다는 저자의 표현대로 ‘이단’이라는 불편한 진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단을 숫자로 나타내보면 이 책의 제목과 같은 ‘마녀 한 다스’가 된다.

보통 한 다스라고 한다면 ‘12’개가 된다. 12라는 숫자가 물건의 단위를 넘어 생활 속에서 상징하는 것은 아주 긍정적이며 밝은 색깔을 나타낸다. 12는 행운의 숫자이며 예수가 태어난 것도 12월이다. 이와는 달리 마녀의 한 다스라고 한다면 ‘13’개가 된다. 13이라는 숫자는 어둠 그 자체이다. 교수대의 층계가 13개가 되고 예수를 배신한 사람은 13번째 제자였다. 그런데 서양과 달리 동양에서는 좋은 숫자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 13은 좋은 숫자일까? 나쁜 숫자일까? 또 하나 질문을 던지면 ‘좋은 혹은 나쁜’ 이라는 절대적 가치는 있는 것일까?

요네하라 마리는『마녀의 한 다스』라는 에세이를 통해서 ‘절대’라는 묵직한 고민을 소박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가 동시통역사라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동시통역사여서 이 나라 저 나라를 몸소 겪은 것이 저자에게는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이러한 큰 힘 덕분에 ‘다른 사람의 말을 다른 사람의 귀로 듣고 다른 사람의 입이 되어 전하는 즐거움’ 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즐거움이 웃음으로 끝나지 않고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 나아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뭔가를 되새길 수 있게 했다. 그중에서도 어느 문화권에서 ‘절대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다른 문화의 가치관에 비추는 순간 ‘맥없이’ 무너져 간다는 것을 속속들이 들춰냈다. 결국 저자의 스승이었던 나카자와 선생이 ‘절대 절대 외치지만, 인간사에 절대라는 것은 절대로 없어’라는 기묘한 명언은 터무니없고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책의 ‘마녀 한 다스’라는 제목은 심상치 않다. 동시통역사인 저자 자신이 곧 마녀 한 다스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마녀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정의를 공격하는 어떠한 폭력이거나 위협이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전체주의적 사고를 싫어하는 이유는 세상과 소통하기를 단절하기 때문이다. 단절은 곧 이성과 감성의 틀에 갇히는 것이다. 저자에게는 이러한 우물 안 개구리는 ‘나쁜 마녀’일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저자는 세상과 단절 없이 자유자재로 글을 쓰고 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바라보는 저자의 생각은「천동설의 맹점」에서 파악할 수 있다. 한마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천동설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자기와 자신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천동설이 언제나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생명체의 자기보존 본능은 오랜 자연의 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천동설의 맹점은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만큼 상대방의 입장에서라는 타인에 대한 배려는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저자는 ‘차라리 상대방이 스스로 말하게 한 후 거기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이는 자세를 취하는 편이 더욱 효과적’이라고 조언해주고 있다.

그리고 인생의 매 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비극이 희극으로 바뀌는 순간」에서 들려주고 있다. 살다보면 뜻밖의 사태로 인해 불안해지기 마련이다. 이럴 때 저자는 ‘나무를 보고 숲을 보라’고 당부했다. 궁지에 몰릴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삶의 공허함을 바꾸기만 해도 행복은 얼마든지 회복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자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단순한 방법은 정신 건강에 아주 좋았다. 병든 가슴을 치유하기 위해 이런저런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지만 제3자의 눈은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대상과의 거리를 코앞에서 한순간에 휙 늘이는 방법, 바로 그 낙차로 인해 생기는 웃음’이 진정한 행복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단지 불편을 참고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을 즐긴다는 발상은 참으로 재미있고 신선했다.

이렇듯 이문화(異文化)에 대한 애정과 사려깊은 눈길이 담뿍 담긴 이 책은 저자 말대로 ‘즐거움의 발견이요, 패턴화된 뇌세포에 대한 자극’이었다. 서로 다른 두 언어의 문화적 경계를 넘나들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널리스트 고종석의 표현대로 ‘지루하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매력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저자가 동시통역사를 하면서 깨달은 삶의 진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저자의 새로운 눈을 통해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며 앞서 말했듯이 ‘절대 절대는 없다’는 것이다.

일찍이 생텍쥐페리는『어린왕자』에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라고 했다. 각각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아주 짧은 순간에도 마음속에는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과 같은 머물게 한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마녀의 한 다스』를 읽어보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 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맹꽁이들」에서 나오는데 ‘좁은 시야, 오만한 강요, 무지하고 자만에 가득 찬 독선, 다른 문화나 역사적 배경에 대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결여된 상상력을 가진 소유자’들이다. 이 책을 읽으면 우리 자신이 ‘맹꽁이들’과 같은 존재라는 것은 뜨끔하다. 그 순간 우리 삶이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뀌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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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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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은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사랑이란 매우 매우 매우 큰 감정이다. 거짓 사랑은 작은 감정이며, 진정한 사랑은 매우 큰 감정이다. 하지만 절대라는 관점에서 모든 사랑이 다 작지 않은가? 물론이다. 바로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합리성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어떤 절제도 무시하려고 하며, 사실성에서 벗어나 ‘열정의 생동하는 광란으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광적이 되고자 한다.
- 밀란 쿤데라의『불멸』중에서

 


  
 
사랑을 3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1단계는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저런 간섭으로 사랑이 불안해지는 것이 사랑의 2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전망이 더 이상 없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이 사랑의 3단계입니다. 만약 사랑 때문에 7킬로그램을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사랑의 2단계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랑의 3단계에서는 덧없이 흩어지거나 혹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이런 사랑의 2단계 혹은 3단계를 ‘사랑 저 너머’라고 불렀습니다. 사랑 저 너머는 곧 사랑의 다른 쪽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중요시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는 못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1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야.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마치 ‘새장 속 새 인양 나의 가슴 속에서 파닥거리는 날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 있다면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사랑보다 삶을 선택해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즉 사랑 저 너머에 있지 않다면 이런 사랑은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불멸! 이 소설에서 작가는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불멸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작은 불멸입니다.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큰 불멸입니다.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스꽝스런 불멸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 우화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을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괴테와 베티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물 여섯 살의 베티나가 예순 살의 괴테를 사랑하는 것은 모호했습니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흥분이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면서 희열을 느낄 때 괴테 또한 그녀를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솔직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 둘이 만나적은 불과 서너 번 정도였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베티나는 어느 편지에서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베티나는 괴테를 사랑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는 역사 속 인간 이었습니다. 괴테는 유럽의 한 가운데 있는, 기막힌 중심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 극단을 두려워하여 우물쭈물 하는 소심한 중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양 극단을 유럽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기막힌 균형 상태로 유지하는 견고한 중점이었습니다. 베티나가 괴테를 사랑했던 것은 견고한 중점에 어울리는 견고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불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불멸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괴테로부터 ‘쇠파리’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테의 젊은 여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베티나의 불멸의 몸짓은 두 명의 여자 즉 아녜스와 로라에게 되살아났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아녜스와 로라의 몸짓은 베티나에 대한 불가사의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덧셈 법과 뺄셈 법입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습니다. 이는 뺄셈이며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로라의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습니다.

가령, 사랑에 있어 아녜스는 ‘보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방할 수 없고 교환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사랑을 심은 자, 즉 사랑의 대상을 향한 것이기에 변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녜스의 사랑을 달리 ‘관계-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라는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습니다. 어떤 천상의 손길이 인간의 영혼에 피우는 불꽃, 사랑하는 이가 손에 들고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는 횃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라의 사랑을 달리 ‘감정-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을 읽으면서우스꽝스런 불멸을 생각해봤습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삶을 운명적으로 바꾸는 뭔가 본질적이라고 한다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인과적 잠재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괴테에게 베티나와의 만남은 양적으로 미미했지만 개념의 상대성에 있어서는 결국에는 베티나는 괴테의 삶의 일부로 통합되어 승리했습니다. 어쩌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침상의 보물이 아니라 사랑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1단계 즉 '사랑은 사랑일 뿐이야' 라고 여겨야 가능했습니다.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사랑은 '사랑 저 너머'에 있으면 불멸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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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ㅣ 키워드 한국문화 6
최기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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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에서 울려 퍼졌던 귀곡성(鬼哭聲)은 여전히 온 몸을 전율하게 한다. 한국인에게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은 오랜 트라우마다. 그래서 공포물이라는 장르에서『장화홍련전』 같은 버전이 어김없이 귀신으로 들락날락하고 있다. 지금은 너무나 지나치게 잔인할 정도로 육체적 공격을 감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기숙의 『처녀귀신』은 ‘정서적 공격’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에 따르면 그것은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였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귀신에 대한 양가적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은 ‘경이원지(敬而遠之)’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좀 더 말하자면 ‘형상으로서의 귀신은 부정되었지만, 원리와 존재로서의 귀신은 인정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주희는『중용』에서 귀(鬼)와 신(神)을 구별했다. 즉, 귀의 속성은 음(陰)으로서 돌아가고 물러나며 소멸하고 죽는 것이다. 또한 가을과 겨울처럼 머물러 있고 조용하며 안으로 수렴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속성은 양(陽)으로서 흩어지고 펼쳐지고 쉬고 생겨나는 것이다. 또한 봄과 여름처럼 생동적이고 표현적이며 움직이고 밖으로 발산하는 성질을 지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리학적 개념에서 귀신은 음양의 두 기(氣)를 바탕으로 천지만물을 변화시키는 이(理)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귀신을 인간의 사후적 존재로 여겼다. 무엇보다도 누구나 죽어서 귀신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귀신은 이승에 미련을 가진 자를 말하며 한이 깊어서 도저히 현실을 떠날 수 없는 자만이 귀신이 되는 것이었다. 즉, ‘귀신은 생과 사의 경계에 있다. 그(녀)는 자연사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현실에서 추방된 존재인 동시에, 죽음의 세계에도 안주할 수 없는 방랑자다. 이승에서의 생명이 멈춘 뒤에도 귀신으로서의 생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연장되는 삶이란, 차라리 저주받은 삶’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귀신이 등장한다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삶과 죽음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서로 넘나들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귀신은 전통적인 가치관을 전복한다. 누구라도 귀신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냉정하고 잔혹한 현실이 만들어낸 가학적 증거물’이기 때문이다. 귀신, 특히 처녀귀신이 비운의 주인공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귀신의 대부분이 순탄한 죽음을 맞지 못한 원귀(寃鬼)다. 그리고 원귀의 대부분이 처녀귀신인 것은 ‘남신여귀(男神女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남자 귀신인 남신은 ‘죽어서도 존경을 받으며 현실을 통제하는 파수꾼’이었다. 반면에 여자 귀신인 여귀는 ‘구천을 떠도는 한(恨) 많은 난민’이었다.

일찍이 『여성, 문화, 사회』에서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남성은 문화, 여성은 자연’이라고 했다. 남성이 사회적으로 정교화된 제도 내에서 거둔 성취에 의해 정의되는 한 남성은 남성이 만든 인간 경험체계의 아주 뛰어난 참여자다. 그래서 남성의 세계는 문화라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공식적인 사회질서 체계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삶을 영위한다. 그녀의 지위는 생애 주기에서의 위치, 생물학적 기능 그리고 특히 남성에 대한 성적인 또는 생물학적인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보면 ‘처녀귀신’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시대 여성의 불행한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귀신이 ‘당대 사회의 건강성을 반영하는 지표’라고 했다. 귀신은 단순히 사신(死神)이 아니었다. 그 보다는 ‘자신의 죽음을 믿을 수 없어 현실로 찾아온 상담 신청자’라고 했다. 그래서 귀신이야기가 타인에게는 공포물이지만 당사자의 관점에서는 비극이 되는 것은 이러한 까닭이었다. 귀신이라는 공포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의 이면에는 사회적 모순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귀신은 이것을 온 몸으로 고백하면서 동시에 비판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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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기 위하여 - 자크 아탈리
자크 아탈리 지음, 양영란 옮김, 정중호 감수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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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사는 네안테르탈인의 위기 탈출의 방법은 무엇일까? 돌이켜보면 현재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위기들이 있었으며 그럴 때마다 슬기롭게 위기에서 벗어나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면 모든 시대, 모든 위험및 모든 위기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 물음에 자크 아탈리는 [살아남기 위하여]에서 '7가지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자긍심의 원칙, 전력투구의 원칙, 감정이입의 원칙, 탄력성의 원칙, 창의성의 원칙, 유비쿼터스의 원칙, 혁명적 사고의 원칙 등이다.  

첫 번째, 자긍심의 원칙은 스스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와 존재의 이유를 단순히 '살아남기'가 아니라 '더 낫게 살기'라는 의지여야 한다. 두 번째, 전력투구의 원칙이다. 이는 시간을 강도 높게 살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다. 가령, 20년 장기 계획을 명확하게 수립해야 한다. 세 번째, 감정이입의 원칙이다. 이는 자연이나 타인들로 부터 가해질 수 있는 위험을 제대로 평가하는 능력을 말한다. 

네 번째, 탄력성의 원칙이다. 이는 위협 요소들로 부터 충격을 견뎌내는 것이다. 비록 완벽하게 준비된 행동 계획은 아니더라도 예기치 못햇던 적대적인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신속한 대응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 창의성의 원칙이다. 이는 위험이 실제로 구체화되었을 대 위험을 기회로 바꾸는 법과 결핍을 혁신의 기회로 만드는 법이다. 여섯 번째, 유비쿼터스의 법칙이다. 생사가 걸린 예측과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없을 대 지금까지의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혁명적 사고의 원칙이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합법적이건 불법적이건 죽음을 무릅쓰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7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하여 개인, 기업, 국가, 인류 등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각각 보여주고 있다. 가령, 개인의 경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스스로를 중요하게 여긴다. 두 번째 시간의 밀도를 높여야 하는데 매 순간을 마지막 순간인 것처럼 최대한 충만하게 사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 성인인 그의 얼굴에서 어릴적 얼굴을 찾아내야 한다. 네 번째, 충격을 겪으면서도 다시 튀어올라야 한다. 다섯 번째,  위험을 기회로 바꾼다. 여섯 번째, 하나느이 정체성만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일곱 번째, 혁명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인류의 경우를 살펴보면 첫 번째 인류의 권리를 정의하고 준수해야 한다. 두 번째, 100년 후의 인구,경제,생태계 동향을 모두 감안한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세 번째, 동맹을 통해 위기를 분석해야 한다. 네 번째, 위협 요소들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세계 차원의 공공 재화'라는 개념을 선정해야 한다. 다섯 번째, 새로운 생활방식을 고안한다. 여섯 번째, 전혀 다른 삶의 조건에 적응하기 위해 '키메라'처럼 스스로 유전자를 변형시켜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불복종자가 되어야 한다. 앙드레 지드에 따르면 "세계는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불복종들에 의해서만 구원될 수' 있다. 불복종자들이야말로 지상의 소금이며 신이 보낸 책임자들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7가지 원칙은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의 혁명을 이룩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으며,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없다'는데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여러분 스스로가, 여러분이 세계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변화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7가지 원칙은 생존을 위한 적극적인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자포자기, 속세이탈, 회개, 타인에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은 소극전략이다. 소극적인 전략이 'no liver'라고 한다면 적극적인 전략인 7가지 원칙은 'yes liver'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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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탄생 - 모성, 여성, 그리고 가족의 기원과 진화 ㅣ 사이언스 클래식 15
세라 블래퍼 허디 지음, 황희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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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선택은 좋은 습관일까? 나쁜 습관일까? 진화의 관점에서 적자생존은 허버트 스펜서가 말한 대로 “최고의, 그리고 가장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자의 생존”을 의미했다. 이를 다윈은 당시의 환경에 가장 잘 적응된 개체들이 살아남아 번식하며, 자신이 소유한 속성들을 미래세대에게 전수한다고 했다. 겉만 보면 자연선택은 좋은 습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자연주의적 오류에 불과하다. 즉, 자연의 세계에서 미래세대에게 전수한다는 것은 ‘수컷 간의 경쟁’을 의미했다. 이와는 달리 암컷은 다산(多産)의 연옥, 모성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세라 블래퍼 허디는『어머니의 탄생(Mother Nature)』에서 자연선택을 ‘나쁜 습관을 노부인’이라고 했다. 이것이 결국 이 책의 제목인 Mother Nature(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어머니 대자연) 이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남성은 생산하며 여성은 재생산 할 뿐’이라는 스펜서식의 정당화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여성이 어머니가 된다는 모성이라는 본질주의는 시몬드 드 보부아르가『제2의 성』에서 지적했듯 ‘그녀는 자궁이고 난소다. 그녀는 암컷’이었다.

생물학적으로 모성은 임신과 출산을 말한다. 그러나 부모투자와 성선택에서 보면 모성은 양육으로 확대된다. 자식의 생존 가능성을 위해 부모투자는 불평등하다. 수컷에 비해 암컷이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된다. 그리고 적게 투자하는 수컷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경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쟁에서 수컷은 암컷 및 새끼를 희생한다. 반면에 암컷은 자기희생을 한다. 그래서 모성하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것이 보편적인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모성에 대해 매우 놀랍고도 불편한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들에게 순수하고 희생적인 이미지인 모성이 정작 자연세계에서 매우 드문 현상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랑구르원숭이를 관찰한 것을 토대로 하여 이를 보여주고 있다. 랑구르의 수컷은 영아 살해를 하며 암컷은 자신의 새끼를 죽인 바로 그 수컷과 함께 번식한다. 이러한 랑구르의 성선택은 한 종의 집단선택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개체선택을 한다는 것인데 암컷의 짝 선택에서 비롯되었다.

이제까지 암컷의 짝 선택은 모성의 이미지였다. 모성은 생명우선론(pro-life)이다. 하지만 암컷의 야망이라고 한다면 선택우선론(pro-choice)이다. 암컷의 번식 성공은 태어나는 새끼의 수가 아니다. 그 보다는 얼마나 많이 살아남아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암컷의 모성이든 야망이든 성(性)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암컷의 진짜 운명은 다름 아닌 수유(授乳)라는 것이다. 오직 수유만이 암컷의 성 특징적이다.

암컷은 수유를 통해 두 가지 호르몬으로 영향을 받는다. 하나는 프로락틴이다. 프로락틴은 스트레스 호르몬 혹은 부모 역할 호르몬으로 불린다. 다른 하나는 옥시토신이다. 옥시토신은 어미와 자식 간의 만족감을 형성한다. 그런데 암컷의 수유는 단순히 생리적인 것은 아니다. 암컷의 수유 효과는 사회적 관계를 촉진시킨다. 결국 수유는 ‘사회적이고 지능적인 동물들의 진화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동정심의 능력을 진화시킨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형성’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러면 모성은 본능일까? 아닐까? 본능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떤 생물학 기초도 갖지 않는 ‘증여된 선물’일까? 일찍이 스티븐 핑커는『빈 서판』에서 인간은 본성은 백지(白紙)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 본성이라는 종이는 단 한 번도 백지였던 적이 없다’고 했던 해밀턴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다시 말하면 ‘각인된 백지’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볼비의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에인즈워스의 ‘낯선 상황 실험’을 통해 확고해졌다. 낯선 상황에서 아기들은 ‘불안/양가적, 불안/회피’ 그리고 불안 애착으로 불리는 ‘무질서/혼란’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모성은 지뢰밭이라고 했다. 첫째 모성은 자기희생적적이라는 통념적인 기대와 항상 부합하는 것이 아니다. 둘째 모성의 행동은 논쟁거리다. 만약 모성이 에로틱한 성적 감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면 비난받기 일쑤다. 하지만 저자는 모성과 성성(sexuality)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즉‘성애 행위 동안 발생하는 다양한 오르가슴 수축을 모성적인 것으로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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