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같은 사랑은 어떤가요?

 

 어릴 때부터 나를 너무 귀여워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말이야. 또 내가 엄마 치마폭에 파묻혀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고. 하지만 사람은 항상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는데, 난 남자보다 여자가 되고 싶어. 왜냐하면 여자야말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존재거든. (…) 그러니까.. 말해 봐. 네가 남성다움이란 무엇이지? 음…그 누구에게 허풍 떨지 않는 것…심지어 권력을 쥐고 있더라도 말이야…아니야, 그것 이상이야. 허풍 떨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문제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남자가 된다는 것은 그 이상의 무엇이야. 그건 명령이나 팁 따위로 그 누구도 깎아 내리지 않는 것이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네 옆에 있는 누구에게나 자신이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고, 또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이지  

                                                      - 마누엘 푸익의『거미여인의 키스』 중에서

 

듣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표범여인이 있습니다. 보통 때는 여느 여자들처럼 얌전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에게 키스를 하면 잔인한 짐승으로 변합니다. 표범여인이 되어 키스하는 남자의 얼굴을 할퀴며 끝내는 죽이고 맙니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돌변하게 만들었을까요? 표범여인의 비극은 섹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섹스는 더러운 것이며 죄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마누엘 푸익은『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표범여인이 사랑 때문에 죽음이라는 벼랑 끝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데 정작 사랑할 수 없어 생기는 병일수도 있습니다. 혹은 사랑하는 마음과 달리 사랑이 그토록 깨지기 쉽다는 안타까움을 견디지 못해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표범여인은 다릅니다. 동물원에 갇힌 표범처럼 만들어진 야성(野性)때문입니다. 사람 같은 동물이 된다는 것은 거짓을 몇 겹으로 두르며 살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랑하는 사람이 표범여인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당신은 그녀에게 키스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그녀가 거미여인이기를 바랄 것입니다. 거미여인은 아무 일 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끈기있게 거미줄을 만들어 놓고 어느 순간 사랑이 오면 붙잡습니다.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곧 삶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거미여인으로 불리는 몰리나가 있습니다. 그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구속된 동성애자입니다. 그와 함께 비좁은 감방에 수감된 발렌틴은 게릴라 활동을 하다가 검거된 정치범입니다. 성격이 다른 두 남자가 평행선을 달리면서 삶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쏟아냅니다. 발렌틴이 책을 읽으며 자신의 스타일을 지키려고 한다면 몰리나는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사랑의 환상에 빠집니다. 그중에 하나를 보면 조국의 침략자를 여자가 사랑할 수 있는가를 두고 몰리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발렌틴은 여자 게릴라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그들은 남자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본다면 즉 젠더로 봤을 때 그들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발렌틴이 말 그대로 남성이라고 한다면 몰리나는 여성같은 남성입니다. 남성과 여성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감성에 있습니다. 감성이 예민하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은 여성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의 이성애(異性愛) 보다 남성과 남성의 동성애(同性愛)가 훨씬 더 예민한 감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사랑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존 스튜어트 밀은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이라고 말했던 여인은 해리엇 테일러였습니다. 그녀는 보통 사람이 한 가지도 가지기 힘든 여러 장점을 한꺼번에 타고난 미인이요, 재치있고 자연스러운 기품이 스며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밀은 그녀를 기억하는 것은 나에게 하나의 종교였다. 그녀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 모든 가치의 근본이요 내 생활을 이끌어나가는 표준이었다. 라고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시몬드 보부아르는 그 어떤 남자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를 만나면서 자기를 능가하는 단 한 사람의 남자라고 말했습니다.

이렇듯 사랑의 가치는 작가 말대로 ‘사랑은 또 하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은 서로의 육체를 쳐다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그들은 서로에게 아름다운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몰리나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흔히 거짓 섹스라고 불리는 동성애에 대해 달갑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런 엇갈린 사랑을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시몬드 보부아르는『제2의 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즉 사실 동성애는 의식적인 배덕도 아니며 숙명적인 저주도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를 갖는 것과 동시에 자유로이 선택하는 하나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선택하는 기준은 다를 것입니다. 어는 누구는 표범여인이 될 것이고 어느 누구는 거미여인이 될 것입니다. 표범여인에게 사랑은 유리그릇에 담겨져 있는 물과 같습니다. 반면에 거미여인에게 사랑은 흐르는 물입니다. 고요있는 물은 소리도 없으며 흐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흐르는 물은 소리가 납니다.

모름지기 사랑은 작가 말대로 사랑하는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합니다. 수많은 어려움이 도사리라고 있는 어두운 오솔길 위에서 사랑을 얻을 때까지 싸워서 이기는 사람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안에서 싹튼 자신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몸속에는 거미줄이 수북하게 쌓여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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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ㅣ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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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즉 간서치였던 이덕무는 스스로를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라고 했다. 내가 나의 벗이라는 뜻인데 책에 파묻혀 살았던 자신의 심정을 고백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앙드레 지드는 “나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호모 부커스다. 책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지식에 대한 이해의 폭이 상승하면서 사고방식에까지 많은 혜택을 받는다. 즉 어떤 문제에 있어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어 무지의 답답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책에 대한 이런저런 찬사는 많은데 정작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는지? 어려움과 대면하기 일쑤다. 또한 사회적 양서(良書)와 개인적 양서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책의 눈높이도 빼놓을 수 없는 문제다. 가령 니체의 『차라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머리를 싸매고 전전긍긍하며 읽어야 하는가? 라는 회의가 앞선다.

우리 시대의 책벌레인 이권우는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에서 이중환 선생의 글을 인용하면서 책읽기의 두 종류를 이야기하고 있다. 먼저 비타민적 읽기다. 당장의 효과를 노리고 읽는 것이 아니라 은근짜하게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읽기다. 다음으로 아스피린적 읽기다. 빠르게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실용적 독서다.

이중에서 어느 정도 책 냄새를 아는 사람이라면 비타민적 읽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러려면 먼저 천천히 읽어야 한다. 이른바 속독(速讀)은 주마간산(走馬看山)에 비유할 수 있다. 제대로 읽을 수 없으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에 정독(正讀)은 주자(朱子)가 말한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깊이 읽고 겹쳐 읽는 것이다. 한 분야의 책을 두루 섭렵하여 지식을 깊게 하는 것이 깊이 읽기다. 그리고 같은 주제를 각각 다른 분야에서 다른 책들을 서로 비교하며 읽는 것이 곧 겹쳐 읽기다.

마지막으로 쓰기 위한 독서술(讀書術)이다. 읽는 것 못지않게 글쓰기를 위해서라는 것이 확실시해야 한다. 그래야 문자향(文字香)이 예사롭지 않다. 한 편의 글이나 한 권의 책에서 주제의식나 논리 전개의 방식, 은유나 직유 같은 수사학을 눈여겨보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애써야 한다.

저자가 말하는 책읽기의 달인 방법은 독서를 가늠할 수 있는 작은 단면에 그치지 않는다.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더 할 나이 없이 효과적인 방법론이다. 우리가 호모 부커스일지라도 거장(巨匠)들의 독서론을 엿보고 싶은 까닭은 독서의 희열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저자의 독서론은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라고 할 수 있다. 각주라는 말이 본문의 어떤 부분을 보충하여 설명하기 위하여 본문의 아래쪽에 베푼 풀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자신의 세계관과 감성을 옹호하고 보충하고 지지하는 책을 읽는 행위가 바로 각주의 책읽기다. 반면에 이크는 “놀랐다.”라는 감탄사인데 저자는 지적 충격으로 해석한다. 즉 나를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 이크의 책읽기다. 전자가 행복한 책읽기라면 후자는 고통의 책읽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책읽기의 달인에 있어 진정한 발견은 애들러 말대로 하자면 “더 적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더 많이 이해하는 상태로 스스로를 고양하는 것”이다. 그래서 “책읽기는 고통”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덧붙이면 과정은 고통이나 그 결과는 행복한 것이 책읽기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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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모 쿵푸스 실사판 : 다른 십대의 탄생] 공부는 셀프!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4-06 17:35 
    ─ 공부의 달인 고미숙에게 다른 십대 김해완이 배운 것 공부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 몸으로 하는 공부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적절한 계기(혹은 압력?)를 주시곤 한다.공부가 취미이자 특기이고(말이 되나 싶죠잉?), ‘달인’을 호로 쓰시는(공부의 달인, 사랑과 연애의 달인♡, 돈의 달인!) 고미숙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부해서 남 주자”고. 그리고 또 말씀하셨다.“근대적 지식은 가시적이고 합리적인 세계만을 앎의 영역으로 국한함으로써 가장 ...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이일수 옮김 / 강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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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정신은 스스로 만들어낸 것을 과연 정복할 수 있을까?  

- 폴 발레리

 

지그문트 바우만의 『액체 근대』는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근대에 대한 수많은 해석 중에서도 ‘액체 근대’는 낯설다.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겨보면 근대를 움직이는 새로운 힘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자는 사회학적 관점으로 근대의 다채로운 향연을 만끽하고 있다. 시와 역사 다음으로 사회학을 제 3흐름이라고 하는 보는 저자는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그의 명제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그는 근대를 20세기 근대와 21세기 근대로 나눈다. 20세기 근대를 근대라고 했을 대 21세기 근대는 이차 근대, 탈근대 등등 여러 가지 용어로 쓰여 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에 대하여 저자는 감각적이면서도 쉽게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로 사고를 확장시킨다. 고체 근대가 견고해서 무거운 근대라고 한다면 액체 근대는 유동적이어서 가벼운 근대라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 정신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고체와 액체라는 물리적 특성을 통해 파악한다. 그래서 인간 정시이란 고체에서 액체로 되는 과정을 통해 충분히 정복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유동성이라는 액화 과정은 견고한 것들을 녹여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게 한다. 어쩌면 창조라는 것이 결국에는 다시 고체화되겠지만 얼마든지 창조적 파괴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액체성 즉 유동성(流動性)의 가장 큰 특징이다.

가령, 문명의 역사를 '유목민에 대한 정착민의 승리‘의 특징이라고 하였다. 유목민이 원시적이며 자연적이며 비공간적이라고 한다면 정착민은 문명적이며 지배적이며 공간적이다. 정착민이 공간에 대한 지배를 통해 문명화를 가속화시키고 고체 근대를 포드주의적 세계로 결합시켰다. 포드주의적 세계는 생산자 사회이며 규격화된 시간 아래 노동을 지상에 묶어 두었다. 곧 육체화된 노동이며 개인의 자유는 통제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액체 근대에 들어서면서 유목민의 가치가 새삼스럽게 조명되고 있다. 유목민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공간의 지배는 무의미하다. 그 보다는 시간을 지배하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더 빠른 것과 더 느린 것 사이의 게임’이 되었다. 휴대폰의 등장이 말해주듯 소비자 사회에서는 즉시성(卽時性)이 삶을 주도하고 있다. 공간이라는 지속성보다는 시간이라는 순간적인 만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것이 탈 육체화된 노동인 소비자 사회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개인은 사회로부터 해방되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액체 근대에서 개인화의 역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개인은 사회에 복종하는데, 복종은 개인의 해방 조건’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화는 사회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자율성과 모호한 관계를 형성하는데 ‘법률상으로 시민이 되지 않고서는 실제상 개인’으로 변할 수 없다고 역설하고 있다.

『액체 근대』에서 발견한 독특한 사회 현상은 고체 근대와 액체 근대의 차이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차이는 ‘이성이 완전히 잠에서 깨지 못하거나 다시 잠에 빠져들 때 생겨났다.’라고 했다. 이성이 완전하다면 인간적 삶은 견고할 것이다. 그럼에도 인간 이성의 힘을 해방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 해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즉 판단력 차이에서 오는 공동체 사회의 ‘안전 부재’에 대한 부작용을 성찰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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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현우 지음 / 산책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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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피엔스(Homo Sspiens)는 생각하는 사람이다.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로 생각의 잔가지를 잘라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데카르트를 볼 수 있다.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럴 때 생각은 만만하지 않다. 생각은 양식이며 에너지다. 아주 일상적이어서 우리가 굳이 생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생각의 무감각과 생각의 감각은 다르다. 전자가 생각의 권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생각의 쾌락이다. 전자가 생각하는데 불편하지 않는 반면에 후자는 오히려 불편하다.

우리가 호모 사피엔스의 별종을 주목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별종이란 바로 이현우의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나오는 호모 사피엔자(Homo Sapienza)이다. 호모 사피엔스와 인플루엔자의 합성어인 호모 사피엔자는 제목에 나와 있듯 인문학자에 가깝다. 우선적으로 저자는 수잔 손택이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폭발한다.”를 인용하고 있다. 인문학자는 폭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인문학자는 로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로쟈는『죄와 벌』에 나오는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며 살인자다. 살인자에 대한 변명을 카프카의 “한 권의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라는 말을 빌려보면 좀 더 의미가 있다. 견고한 학문을 깨트리는 것 못지않게 새로운 뭔가를 창조해야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로쟈만의 인문학 방법을 발견할 수 있다. ‘곁다리 인문학자’의 세상 보는 법이 매우 낯설면서도 흥미롭다. 이 책을 몇 장만 읽어보면 금세 곁다리의 놀라운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양한 책읽기와 종횡무진 경계를 넘나드는 명쾌한 비평은 확실히 뒤샹 효과를 불러 일으켰다. 뒤샹의「자전거바퀴」는 자전거바퀴와 의자를 접붙임한 것이다. 그럼에도 새로운 예술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리 이동’에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곳(도구)에서 저곳(이미지)으로 공간이동을 하는 것이다. 혹은 저자 말대로 ‘아직도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에 더 관심으로 저공비행하는 것이다.

가령, 로쟈는 영화「나쁜 피」에 나오는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이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두려운 사랑의 흔적을 찾아내고 있다. 순간은 시간적이면서 동시에 반시간적이다. 이로 인해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더 이상 ‘감성적 사랑’이 아니라고 한다. 감성적 사랑이 생존의 욕구에 의해 제어되는 사랑이라면 초감성적 사랑은 생존의 욕구에 제어되지 않는다. 그래서 순간에 완성되는 사랑은 죽음을 무릅쓰는 사랑인 탓에 숭고하고 두렵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쟈의 유쾌한 철학은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쩔텐가?”라고 도발적인 물음을 던졌던 니체의 사유와 가깝다. 남성의 진리는 어린아이며 자신이 발견하지 못한 것이며 도둑질 한 것이다. 반면에 여성의 진리는 위버멘쉬(초인)이며 바다며 자궁이다. 전자가 “이게 다가 아니야.”라는 이데아 철학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이게 다 예요.”라는 아줌마 철학이라고 한다. 즉 이데아 철학이 현실 너머라고 한다면 아줌마 철학은 충만한 현실이다.

로쟈에게 니체가 아줌마 철학자였다면 괴물 같은 지젝은 대중적인 철학자였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젝주의자’라고 주저하지 않는다. “레닌을 반복해야 한다.”라는 지젝의 주장보다는 ‘이데올로기의 환상’이 눈여겨 볼만 했다.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이 ‘앎’이 아니라 ‘행함’에 있다는 것이다. 지젝은 변기의 물을 내리는 하찮은 일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용하는 지 설명한다. 그리고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화장실에 들르는 순간 우리는 또다시 이데올로기에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는 그야말로 잡학(雜學)하고 다식(多識)하다. 누군가 뭘 물어봐도 막힘없이 대답하고 있다. 그가 말한 대로 ‘책 읽기가 즐거운 도망이고 즐거운 저항’이라는 측면에서 ‘모두가 아는 것에서 모두가 모르는 것’으로 뒤집어 본다. 그래서 이 책은 즐겁게 읽혀지는 좋은 번역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원저나 다른 언어의 번역본을 참조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게 한다.

그런가하면 시오랑이 말한 ‘눈물의 일반이론’을 웅숭깊게 감싸고 있다. 어려움이 처한 인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철학의 무능력을 부정하면서 그의 글쓰기는 쉽고 명쾌하며 무엇보다도 고전(古典)이다. 결과적으로 철학이 메마른 시대에 이 책은 대중지성을 적시는 단비와 같다. 고리타분하고 변화의 가능성이 희박한 고체(固體)라는 학문의 빈틈을 파고든다. 이것은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말한 대로 유동하는 액체(液體), 유동하는 지식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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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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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시를 읽으며 행복했습니다. 시를 외우는 만큼 시를 사랑했습니다. 지금이야 그때의 벅찬 감동이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시는 아름답습니다. 시는 봄에 피는 조팝나무의 하얀 꽃잎을 더욱 곱게 생각하게 합니다.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를 보게 합니다.

언제 읽었는지 기억하기 쉽지 않지만 가슴에 담아둔 시(詩)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영국의 여류 시인 크리스티나 로제티가 노래했던「생일」을 떠올렸던 것은 고(故) 장영희 교수님 덕분입니다. 오랫동안 신문에 ‘영미시 산책’을 연재하면서 아름다운 시를 우리와 가깝게 했습니다. 삶이 무엇일까? 갈팡질팡하고 있을 때「생일」이 응원해주었습니다.
 

 내 마음은 샘물가에서
물오른 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새
내 마음은 주렁주렁 맺힌 열매로
휘늘어진 사과나무
(……)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보다 더 기뻐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
내 생애의 생일이 왔으니까요
내 사랑이 나를 찾아왔으니까요

 위의 시심(詩心)을 따라가 보면 사랑이 내게 온 날 내 삶이 시작된 생일이라는 것입니다. 흔히 생일이면 주민등록증에 나와 있는 여섯 개의 숫자를 얄팍하게 아는 정도입니다. 그러면서도 케이크에다 몇 개의 초를 꽂아야 하는지 선물을 어떤 것이 좋은지, 세상에 태어난 그날의 기쁨을 골고루 만끽합니다.

이런 자잘한 일상을 바라보는 섬세한 눈을 가진 시인에게는 뭔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생일을 하염없이 좋아하고 있을 때 시인은 “당신의 진짜 생일을 알고 있나요?”라고 묻습니다. 듣고 보면 대수롭지 않았는데도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물컹거렸습니다. 그제 서야 태어난 날이 생일이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는 그 날이 비로소 진짜 생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생일」이 메마른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한 편의 시라고 한다면 장영희의『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한 권의 에세이입니다. 모름지기 생일 같은 책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기적 같은 책이라고 해야 훨씬 행복합니다. 그녀를 익히 아는 사람에게도 그렇고 소아마비, 암이라는 병에 걸려 비틀거렸던 불행을 몰랐던 사람에게도 그렇습니다. 목발에 때로는 빨간약에 삶을 맡기면서도 그녀는 문학전도사로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기적 같은 삶은 우리 모두에게 살아갈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책에 앞서 하늘나라로 떠났습니다. 만약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이 세상과 함께 할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병상에서 그녀가 간절히 원했던 삶은 분명 그녀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필요로 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녀를 영영 볼 수 없다는 슬픔도 없지 않겠지만 이제 더 이상 누추한 일상을 뛰어넘는 그녀의 마법이 사라졌다는 아쉬움이 읽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녀의 소박했던 마음은 훌륭한 가르침을 선물해주었습니다. 가령, ‘도둑에게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뉴욕 주립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각고의 노력 끝에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심사 날짜에 맞춰 돌아올 마음으로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그만 논문이 들어있는 트렁크를 도둑맞은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다독거려도 슬픔에 빠져 웅크리고 있었을 그녀의 모습이 눈물 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슬픔의 끝에서 오히려 도둑에게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니, 도독을 용서하면서 삶이 더욱 행복하고 건강해졌다고 말했습니다.

일찍이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부활』에서「마태복음」18장을 인용하면서 참다운 용서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즉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주님, 한 신도가 내게 죄를 지을 경우에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께서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고 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어쩌면 그녀의 용서하는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둑을 용서하기 힘든 현실에서 그녀처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리고 그녀의 고질적인 ‘미루기 신드롬’ 탓에 웬만해서는 미리하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지막 순간에 아슬아슬하게 지나쳐 왔습니다. 이런 그녀가 놀랍게도 ‘은혜를 미리 갚기’로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늘 누군가로부터 은혜를 받아오면서도 그녀는 나중에야 감사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미리 갚아요」라는 영화를 보면서 ‘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즉 자신이 세 명의 다른 사람에게 앞으로 질 빚을 갚는 친절을 베풀고. 그 세 사람이 각기 또 다른 세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날 은혜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시대에 그녀처럼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그녀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은 솔직했습니다. 미사여구 없이 담백했습니다. 병마와 싸워야 했던 고독을 품에 안고 있으면서 희망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희망! 희망이 그녀에게 진짜 약(藥)이었습니다. 절망의 순간순간마다 위기를 오기 있게 넘겼습니다. 사는 게 권태롭고 아무리 노력해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 하소연 하는 우리에게 그녀는 “괜찮아! 괜찮아!”질거라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괜찮다는 말이 자신의 못난 인생을 위로하는 듯 들려 서럽게 울기도 했습니다. 남들과 다른 거추장스러운 삶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삶이 가볍다고 해서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아프다는 것에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살아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녀 말대로 “조금만 참으면 이제 다 괜찮아” 라는 믿음이 반짝반짝 빛났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녀는 나쁜 운명으로 천천히 그리고 작게 걸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마음만은 옹골찼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저벅저벅 울리며 큰 걸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녀에게 나쁜 운명, 좋은 운명은 서로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서로 만나는 대각선도 아니었습니다. 대각선은 나쁜 운명이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지그재그는 나쁜 운명은 머지않아 좋은 운명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좋은 운명도 나쁜 운명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을 마주대하는 그녀의 비결에는 겸손함이 가득했습니다.

현실을 순탄하게 극복하려고 했던 그녀의 살아온 기적에는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소금 3퍼센트, 무릎 끓는 나무 그리고 좋은 사람입니다. 소금 3퍼센트가 바닷물을 썩지 않게 하듯이 우리에게 나쁜 생각이 있어도 3퍼센트 좋은 생각을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가장 명품의 바이올린을 무릎 끓는 나무가 만든다고 합니다. 해발 3천 미터 수목 한계선에서 살기 위해 무릎 끓고 산다고 합니다. 끝으로 좋은 사람은 유명해서 좋은 사람이 아니라 좋은 사람 그 자체라고 합니다. 마음이 넓고 정답고 남의 어려움을 잘 이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삶을 따뜻하게 조화롭게 살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그녀의 책 속에는 무수히 많은 쉼표들이 있었습니다. 그만큼 허투루 읽을 수 없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읽는 것을 멈추고 눈물 나는 아름다운 그녀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함께 울며 웃었습니다. 그녀는 인생을 왜 살아야 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를 절실하게 대답해주었습니다. 그녀는 봄의 전령사마냥 행복전도사였습니다. 단지 봄 때문에 꽃이 피는 게 아닙니다. 꽃의 활발한 생(生)의 의지가 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삶의 치유를 노래했던 그녀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그들에게 교수님은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교수님의 커다란 영혼이 우리들을 언제 어디서나 바라보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활짝 웃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라도 얼마든지 “내일 뵐 수” 있다는 벅찬 그리움을 배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살아온 기적이 곧 살아갈 기적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수님!
“내일 뵙겠습니다.”라는 약속 꼭 지키며 살겠습니다.
앞으로 가야할 길,
한발 한발 천천히 그러면서도 당당하게 내딛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행복했습니다.
당신은 희망을 크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기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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