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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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할까, 어떤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숨 가쁘게 달리던 차들은 멈춘 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녀 혼자만이 횡단보도를 만보객(萬步客)마냥 걷고 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도시인이 만보객으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리라. 허공을 걷는 것이다. 혹은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네바 강을 배회하는 혼란스러움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슬픔에 대해서는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만이 자신의 슬픔을 우울하게 위로할 뿐이다. 정말일까?

6년 만에 김영하는 신작 소설집『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6년동안 작가가 세상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세밀하게 펼쳐놓고 싶었던 같았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21세기 삶은 도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듯 정차(停車)된 것만큼이나 번잡하며 그 간격이 좁아지는 데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도시에서 버림받는 자들의 가혹한 운명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망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타락은 우리들의 진짜 삶일까? 도시인의 타락을 바라보는 김영하의 시선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E. A. 포우 말대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치울 수 있는 장르인 단편소설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만으로 이미 소름이 돋았을’거라는 박민규의 엄살은 아주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산문은 벼락같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따분하지 않다는 것이며 쿨하다. 굳이 우리 시대의 굴곡이 무엇인지 또박또박 따지지 않았다. 그의 날렵한 산문은 작가 말대로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조용히 깃든 이 내밀한 유쾌’함에 우리들 가슴이 몹시 흔들리게 된다.

세상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상실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 어딘가에서는 분명 멈출 수 없는 붕괴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갈수록 건조해지고 탁해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전혀 꿈꿀 수 없는 신비로움이었다.「로봇」에서 수경은 황사 때문에 모래폭풍이 부는 도시를 ‘멋진걸’이라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는 실로 공평한 재난’이라고 했다. 수경의 상실감은 돈을 받고 사장과 이상한 관계를 맺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수경에게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로봇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사랑하는 대상 즉 수경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을 들려주었다. 즉, 제1조. 인간을 헤쳐서는 안 된다, 제2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봇3원칙 딜레마에 빠질 때도 있는데 수경이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랬다. 그러자 남자는 떠나고 만다.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수경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것은 분명 로봇3원칙의 딜레마였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과 달리「밀회」에 나오는 남자는 스스로를 ‘해파리’라고 했다. 허파를 갈망했던 남자는 ‘공기의 그 허약한 물질성마저 그리워’ 했다. 그 남자는 공기의 힘으로 세상을 유영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해파리일까, 궁금했는데 아마도 허파 때문이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공기를 많이 마실수록 투명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밀회」에서 이 남자는 제목대로 ‘밀회’를 하고 있다. 해파리의 밀회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파리가 마신 공기는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았다. 사랑일까, 비극일까? 라는 진부한 혹은 경건함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밀회」의 두 남녀에게 ‘정신적 정당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것은 밀회를 나누는 여자의 남편이 앓고 있는 ‘카푸그라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감정이 농후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남편에게 여자는 가짜 아내에 불과했다. 가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밀회를 나눈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이혼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욕망의 이면에는 친밀감이 사라진 외로운 존재의 꿈이 담겨져 있었다. 즉 밀회는 단순한 바람이 났다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인간의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기인한 감정의 칵테일 같은 것’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악어」는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허약하고 별 볼일 없는 작은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변성기(變聲期)가 찾아오면서 그의 일생은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모두에게 자기 생애 가장 슬픈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변성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변성이 목소리로 끝나지 않고 변성(變性) 즉 악어(鰐魚)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악어의 정체는 뭘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성기를 겪는 남자에게 악어(樂語)가 되는 것은 최고의 복수일 것이다. 비록 어느 순간 악어(惡語)로 나락하게 될지라도.

만약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악어(惡語)를 말한다면「퀴즈쇼」에 나오는 동국처럼 실패하고 말 것이다. 동국은 ‘퀴즈쇼’에서 마지막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국의 경쟁자였던 은이의 담담한 얼굴과 마주치며 전혀 뜻밖의 오답을 말해버렸다. 은이는 동국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동국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이코패스의 희생자로 성장한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그때의 불행으로 스물 살에 벌써 다 늙어버렸다는 그녀의 입에서 동국에게 ‘소양강 댐’이라는 시시한 말을 그냥 던진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집에서 운명의 모호함에 대한 또 하나의 막막함은「조」였다. 작가는「조」를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타락해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른 채 서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증폭하고 있다. 그럴 때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조」에는 필리핀에서 양봉업을 하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양봉업자에게 필리핀은 아마도 천국일 것이다.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약삭빠른 벌들이 필리핀에 겨울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살 갉아먹는 타락은 비극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도시인들의 가짜 사랑, 타락, 성적 욕망이라는 내면의 고통을 영화처럼 찍어내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영화같다고 하는 것은 바흐친의 따르면 ‘일상예찬론’이다. 그만큼 동시대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명예살인」에 나오는 ‘작은 뾰루지로 시작한 트러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퀴즈쇼」에 나오는 ‘인간은 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소설들의 반전(反轉)에는 타인의 마음을 충분히 상상해보게 했다. 김영하가 말하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은 뭐랄까,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찬란한 채찍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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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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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은교』를 읽었습니다. 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가 열일곱 살의 한은교를 사랑해서 놀랐습니다. 나이든 사람에게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70대의 사랑이 젊음을 갈망한다면 허영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파스칼이『팡세』에서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했지만 그건 위대한 철학자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정작 우리들에게는 셰익스피어 말대로 ‘분별력 없는 광기’여서 유치찬란해 보였습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황량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 늙은 소나무가 있는 집에 사는 이적요는 오히려 침묵을 깨뜨리면서 자신이 극적으로 살았던 삶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씻어내기 위해 파릇한 은교를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의 불협화음이 이 정도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는 이기적인 마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사랑이 사치스럽다고 불만을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요의 사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은밀했습니다. 관능,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다닥 불꽃 튀는 젊은 사랑만 뜨거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랑에 대해 이적요는 으레 그럴 줄 알았던 것 마냥 ‘멍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서지우가 멍청한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서지우는 은교를 사이에 두고 스승인 이적요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서지우는 쓰디쓴 자괴감을 참아야했습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감수성이 없었던 서지우는 이적요가 말한 관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던 서지우에게 은교는 어디까지나 은교였습니다. 반면에 이적요에게는 은교는 젊은 신부였습니다. 서지우가 꿈꾼 사랑이 ‘편안한 의자’였다면 이적요는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었습니다. 서지우가 보기에 미친 불꽃은 위험했습니다. 이적요가 한은교의 젊음을 더듬어 보게 할 만큼 타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둘의 사이를 간섭하면서 스승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이적요에게 버림만 받았습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사랑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은 70대의 남자입니다. 사랑을 감당하기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또 한쪽은 젊다고 할 수 없는 40대의 남자입니다. 그들이 스무 살도 안 된 은교에게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는 행동들은 사랑을 탕진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은교를 사랑하는 것은 거대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이적요가 자신의 집에 놓여져 있는 의자에서 잠든 은교를 보면서 ‘쇠별꽃’ 같다고 했을 때 사랑은 발화되었습니다. 그 순간 은교의 몸짓 하나하나는 불멸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사람과 몸짓 중에서 어느 것이 많은 것인가? 고심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몸짓이 많다고 한다면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란 쿤테라는 몸짓이 적다고 했습니다. 몸짓이 적은 이유는 그만큼 사랑의 고통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은교』에서 이적요가 은교를 쇠별꽃 같다고 하면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는겠는가’라고 절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지는 것도 사랑의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니 만지고 싶은 게 너무도 당연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데도 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적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70 노인의 성욕이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만져야 할지 모른다는 변명보다는 왜 만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처럼’ 절절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쇠별꽃 같은 몸짓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까요? 남들에게는 처녀의 숨결이 별 것 아닌 것이 이적요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로 불리는 자신의 낡은 코란도 차로 서지우를 죽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체온으로 꿈틀대는 관능을 모르는 자에 대한 마땅한 죗값이라고 하였지만 사랑을 주는 자의 쓸쓸함이라고 하겠지요. 죗값이라고 하기에는 남녀가 사랑하다 보면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보려고 애쓴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욕망이라는 것에 늘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적요에게 충직했던 당나귀가 끝내는 살인당나귀가 되고 마는 것은 질투의 마음의 극에 달한 이적요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가 말대로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 것이어서 자기 무덤을 파고 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것들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의 좋고 나쁨을 떠나 ‘우주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좀 더 편하게 사랑에 매혹당할 수 있습니다.『은교』에서 박범신은 사랑의 매혹덩어리가 ‘관능’이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이상한 힘이 생기면서 사랑이 발화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관능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은-교’라는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달콤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했습니다.『롤리타』에서 험버트가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에서 롤리타를 불렀듯이『은교』에서 이적요는 은-교를 부르면서 혀끝이 달콤하다고 했습니다. 혀끝이 달콤한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인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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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밭 위의 식사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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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압생트(Abstinthe)를 탐닉하며 마실까요? 녹색 술로 불리는 압생트에게 무슨 마술이 있는 걸까요? 오스카 와일드는 “계속 마시다 보면 당신이 보기 원하는 것들을 보게 되는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남들 사는 만큼 산다고 한다면 우리는 시시때때로 상념에 빠져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일을 하다가 지루하거나 사랑하다가 두렵거나 할  때 은근히 압생트를 마시면 인생을 사는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전경린의 장편소설『풀밭 위의 식사』를 읽으면서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을 가진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에두아르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고 우리가 난처했다면 이 소설에 나오는 누경이라는 여자는 ‘자신의 눈물로 제 뿌리를 적시며 생존하는 기이한 사막 식물’ 같았습니다. 그러니까 겹꽃잎처럼 피어 있는 눈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슬픔이 겹겹이 쌓여 단단해지다가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면 눈물이 되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와야 하는데 누경에게는 그런 힘마저 없었습니다. 그만큼 누경의 상처는 깊었습니다.

누경에게 열여섯 살은 아찔했습니다. 남모르게 좋아했던 서강주가 결혼하던 때이었으며 그와 함께 들판에서 보낸 봄날을 잊지 못해 풀밭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 데 그날 풀밭에서 낯선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열여섯 살의 상처로 인해 그녀는 우울해졌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잔인해졌습니다. 다른 남자와 조금 익숙해지거나 사랑에 빠지려고 하면 그녀는 당혹스러우리만치 일방적으로 사라졌습니다. 연애란 ‘두루뭉술한 의중들 속의 밀고 당김’이었는데 그녀는 두루뭉술한 의중들마저 두려워 했습니다. 누경에게 사랑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었던 탓이었습니다.

이런 누경에게 작가는 소풍을 가자고 하였습니다. 인생이 공휴일 같았던 누경에게 풀밭 위에서 ‘바삭하게 구운 빵에 치즈를 바르고 살라미와 야채샐러드를 얻고 붉은 와인을 잔에 부어요. 풋사과와 검붉은 포도도 먹어요’라고 명랑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상처로 얼룩진 열여섯의 당신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기억을 앓는 병에 걸린 누경에게 작가는 ‘부정된 기억’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기를 바랐습니다. 기억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부정하는 것’ 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풀밭은 망각 저편의 낭떠러지거나 남들과 함께 식사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네가 그린「풀밭 위의 점심」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여자를 보면 삶의 의외성이 달리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것도 대낮에 옷을 벗고 점심을 먹는 다는 것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속살을 보여주는 여자는 둥그스름한 얼굴마냥 행복했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경계를 허물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끝에 가서야 왜 제목이 ‘풀밭 위의 식사’가 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풀밭 위의 점심」에 나오는 여자처럼 자기 상처를 밖으로 드러내도 웃을 수 있는 행복을 누경에게도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삶에 낙심한 사람은 눈과 눈 사이, 뼈와 뼈 사이가 헐거워져 넓적한 얼굴이 된다고 했을 때 열여섯 살의 질긴 상처를 털어내지 못한 누경의 얼굴이 어떤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가는 누경에게 ‘어제의 무게’를 내려놓았으면 하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빛살을 중화시키고 내부로 빛을 범람하게 하는 스테인드글라스처럼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한 사람은 사랑으로 인해 다치지 않아’라고 말하면서 삶을 붙잡으라고 했습니다. 작가는 릴케의 시 ‘사랑은 어떻게 너에게로 왔는가. 햇살처럼, 꽃보라처럼, 또는 기도처럼 왔는가’를 인용하면서 누경에게 사랑은 다름 아닌 ‘풀밭’에서 왔음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풀밭에서 ‘행복이란 다른 게 아니라 내 몸의 고요’라는 것을 알게 되기를, 슬픔이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어야 한다는 것을 귀 기울이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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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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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느껴본 적이 있나요? 달리기를 오래하다 보면 마리화나를 피우는 것과 같은 환희를 느낀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숨이 차고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이 발바닥을 무겁게 짓누를 때 달리기를 그만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그 순간 참고 계속 달리다 보면 오히려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상쾌해집니다. 그래서 달리기를 완주(完走)한다는 것은 삶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꽃비가 내리는 5월, 삶의 기적하면 잊혀지지 않는 한 분이 있습니다. 바로 장영희 교수입니다. 그녀의 마지막 유작『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은 지 어느덧 1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아주 오랫동안 그 책을 읽고 난 이후 내내 머릿속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습니다. 문학전도사였던 그녀는 어느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때묻은 목발에 의지하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웃음으로 이겨내는 그녀의 명랑함이 너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정말이지 마음을 마구 휘저으며 눈물나게 했습니다.

헛되이 살지 않겠다는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삶의 노래를 다시 한 번『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에서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이번 책은 그냥 에세이가 아니었습니다.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였습니다. 그 향기는 ‘머리를 즐겁게 쳐들어라/갈색 소녀 나무들아/보드라운 갈색 곱슬머리를/너의 갈색 얼굴 주변으로 흔들어라’(엔젤리나 W. 크리크의「4월에」)는 초록의 달, 4월이었습니다.

또한 ‘사랑에 빠졌으니 1월 속의 6월이네.’(레오 로빈의「1월 속의 6월」)라는 청춘의 달, 6월이었습니다. 그리고 ‘꽃피는 나무 하나하나/커다랗고 아름다운 꽃다발/새들과 꽃들의 달인/향기롭고 아름답고 즐거운 5월에’(모드 M. 그랜트의「5월은」)의 꽃비내리는 5월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0월이 내 단풍나무 잎을 황금색으로 물들였네/이제 거의 다 떨어지고 여기저기 한 잎씩 매달렸네’(토머스B. 올드리치의「10월」) 라는 아쉬움의 달, 10월이었습니다.

그녀의 글을 찬찬히 읽으면 일상의 무거움이 점차 사라지면서 가슴이 후련해졌습니다. 살면서 해야 하거나 하지 않아야 되는 문제를 그녀는 영미문학을 통해서 쉽게 풀고 있습니다. 영미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은 아주 당연하겠지만 그녀는 참으로 우리말을 아름답게 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아주 가까이 곁에 있다는 느낌이 날 정도로 자상하면서도 명쾌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진리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보게끔 해주었습니다. 그녀는 우리들 모두의 천사였습니다.

이 책에서 그녀는 “Yes, I can”과 “I think I can”를 되돌아보게 했습니다. 전자가 “난 할 수 있어” 라고 한다면 후자는 “난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미덕이라 여겼는데 그녀는 그러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고집 때문에 자신의 꿈이 저당 잡히게 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녀 말대로 하면 된다, 라고 아무리 아우성쳐도 안 되는 일은 안 됩니다. 그 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생각해보는 것이 알맞은 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에 있어 그녀는 ‘한 번도 사랑해본 적 없는 것보다/사랑해보고 잃는 것이 차리리 나으리’(앨프레드L. 테니슨의「사우보 思友譜」) 라고 격려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이상한 사랑’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한 사랑이 괜찮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사랑을 받는 사람은 사랑을 주는 사람의 마음속에 오랜 시간에 걸쳐 조용히 자라온 사랑을 일깨운다’(카슨 메컬리스의『슬픈 카페의 노래』)고 했습니다.  

그녀의 글은 삶의 따뜻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삶의 지침으로 삼아 늘 마음에 간직해야 할 소중하면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꽃비가 축복처럼’ 내렸습니다. 이해인 수녀는「우리에게 봄이 된 영희에게」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순간마다 최선의 성실을 다하는/선하고 열정적인 삶으로/재밌고도 유익한 감동적인 글로/그대는 우리에게 따뜻하고 겸손한/희망의 봄이 되었습니다/그대와 영이별한 슬픈 5월이/눈물로만 얼룩지지 않기 위하여/우리도 영희를 닮은 봄이 되려합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장영희 교수처럼 산다면 ‘I shall not live in vain', 헛되이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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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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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신화의 힘』에서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인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2인칭인 그대와 3인칭인 그것의 차이는 ‘너와 나’의 친밀함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2인칭인 그대는 서로가 친밀해서 불편하지 않다면 3인칭인 그것은 친밀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김두식은『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입니다. 온갖 사회적인 문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인권의 확대내지 축소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회의 민주화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권은 누구나 주의를 기울일 만한 주제입니다. 인권 대 비인권이라는 기본적인 갈등은 그 동안 억눌려왔던 사회 문제가 표출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권이라고 하면 아직도 ‘제 몫 찾기’라는 후진성을 타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인권에 대한 구조적, 제도적 문제보다는 우리의 삶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 그대로 불편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령,「300」은 BC 480년 페르시이왕 크세르크세스가 유럽 정복에 나섰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영화에서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스파르타 친위대를 이끌고 크세르크세스왕의 264만 대군과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면서 전사합니다. 영화의 서사(敍事)로만 본다면 영웅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 말대로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 20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오락영화를 보면서 불편하다고 토로했습니다. 역사적인 왜곡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주의,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에 대한 불편함과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왜 영웅은 근육질 남성인데 악마는 장애인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감수성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불편함이야말로 인권감수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권감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말한 황금률이 그 출발점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말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다른 사람을 영화로 본다면 자신과 동일시되는 영화 속 주인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다보면 인권감수성 즉 불편함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오아시스」는 ‘빗나간 과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빗나간 과녁이란 ‘별것 아닌 일에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버하는 것은 아닙니다.「오아시스」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불편했던 것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는 남자 친구(종두)가 교도소에 가는데도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이 너무나도 계산적으로 작용한 나머지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뇌성마비는 지적인 면에서 일반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랑은 억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편견의 억울함을 뒤집어 보는 역설에서「밀양」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밀양」을 ‘놀라운 기독교 영화’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은 신애는 살인범으로부터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고백을 듣고는 쓰러졌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라는 강한 의문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낸 세금으로 살인범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보복 심리의 장단에 맞춘다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가 무색해집니다. 누군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형벌로 죄의식을 성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권의 문제가 곤란한 것은 인권이 인과성이 아니라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성은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만으로 문제만을 부분적으로 다루는데 그칩니다. 그러나 양면성은 인권의 당위적 가치의 논리를 바로 세우는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가끔씩 시청이나 광화문 주의의 도로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가로막는 경찰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 우리는 누구의 입장에 서야 할지가 어렵습니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사회가 무질서해질 수 있으며 분열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언론이나 뉴스는 그들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자는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빌리 에이전트」에서 보듯 탄광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은 약자의 이익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노동자들에게 복잡하게 얽힌 생계의 실타래를 한 올씩 풀면서 해고, 비정규직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인권의 종착역에서「해마다 4월이면」,「호텔 르완다」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제노싸이드 때문입니다. 제노싸이드란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범해지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학살의 주범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살의 주범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거대한 씨스템이 인권의 함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제노싸이드의 목표는 아주 단순합니다. 나 아닌 상대를 ‘그것’으로 여겨 무조건 죽이는 것입니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부르면서 비인간화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후투족과 투치족의 DNA의 차이는 0,05%만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이 얼마나 유효할까요?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권의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그저 한 번 보고 마는 일회용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의 저자는 또 다른 문화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편함’이었습니다. 인권은 늘 뜨겁습니다. 무상급식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습니다. 설전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누가 괴물이고 누가 약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 약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同性愛)라는 차별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인권의 문제에 있어 이성이냐 동성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저자 말대로 무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그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대에게 ‘불편해도 괜찮아.’라고 격려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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