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박범신의『은교』를 읽었습니다. 일흔 살의 시인 이적요가 열일곱 살의 한은교를 사랑해서 놀랐습니다. 나이든 사람에게도 봄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70대의 사랑이 젊음을 갈망한다면 허영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파스칼이『팡세』에서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했지만 그건 위대한 철학자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정작 우리들에게는 셰익스피어 말대로 ‘분별력 없는 광기’여서 유치찬란해 보였습니다. 사랑이라고 부르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황량함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 아래 늙은 소나무가 있는 집에 사는 이적요는 오히려 침묵을 깨뜨리면서 자신이 극적으로 살았던 삶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지긋지긋한 외로움을 씻어내기 위해 파릇한 은교를 사랑하는 것인데 사랑의 불협화음이 이 정도면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는 이기적인 마음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사랑이 사치스럽다고 불만을 내던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적요의 사랑은 뜻밖이었습니다.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은밀했습니다. 관능,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다다닥 불꽃 튀는 젊은 사랑만 뜨거운 게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랑에 대해 이적요는 으레 그럴 줄 알았던 것 마냥 ‘멍청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서지우가 멍청한 사랑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서지우는 은교를 사이에 두고 스승인 이적요와 경쟁해야 했습니다. 그럴수록 서지우는 쓰디쓴 자괴감을 참아야했습니다. ‘번개가 번쩍하는 찰나, 확 들어오는 그 세계를 단숨에 이해하는 섬광 같은’ 감수성이 없었던 서지우는 이적요가 말한 관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중년의 쌍꺼풀을 가지고 있었던 서지우에게 은교는 어디까지나 은교였습니다. 반면에 이적요에게는 은교는 젊은 신부였습니다. 서지우가 꿈꾼 사랑이 ‘편안한 의자’였다면 이적요는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었습니다. 서지우가 보기에 미친 불꽃은 위험했습니다. 이적요가 한은교의 젊음을 더듬어 보게 할 만큼 타락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둘의 사이를 간섭하면서 스승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이적요에게 버림만 받았습니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엇갈린 사랑은 처음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쪽은 70대의 남자입니다. 사랑을 감당하기에도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습니다. 그렇다고 또 한쪽은 젊다고 할 수 없는 40대의 남자입니다. 그들이 스무 살도 안 된 은교에게 어떻게 해서든 관심을 끌어보려고 하는 행동들은 사랑을 탕진하고 있는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은교를 사랑하는 것은 거대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이적요가 자신의 집에 놓여져 있는 의자에서 잠든 은교를 보면서 ‘쇠별꽃’ 같다고 했을 때 사랑은 발화되었습니다. 그 순간 은교의 몸짓 하나하나는 불멸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평생 갈망했으나 이루지 못했던 로망이 거기 있었고, 머물러 있으나 우주를 드나드는 숨결의 영원성이 거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사람과 몸짓 중에서 어느 것이 많은 것인가? 고심했습니다.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몸짓이 많다고 한다면 답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란 쿤테라는 몸짓이 적다고 했습니다. 몸짓이 적은 이유는 그만큼 사랑의 고통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불멸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은교』에서 이적요가 은교를 쇠별꽃 같다고 하면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는겠는가’라고 절망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만지는 것도 사랑의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니 만지고 싶은 게 너무도 당연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데도 만지지 않는다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걱정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이적요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70 노인의 성욕이 부끄럽거나 두려워서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만져야 할지 모른다는 변명보다는 왜 만져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것처럼’ 절절함을 삭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쇠별꽃 같은 몸짓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까요? 남들에게는 처녀의 숨결이 별 것 아닌 것이 이적요에게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나귀로 불리는 자신의 낡은 코란도 차로 서지우를 죽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체온으로 꿈틀대는 관능을 모르는 자에 대한 마땅한 죗값이라고 하였지만 사랑을 주는 자의 쓸쓸함이라고 하겠지요. 죗값이라고 하기에는 남녀가 사랑하다 보면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건을 자세히 보려고 애쓴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욕망이라는 것에 늘 놀라고 충격을 받습니다. 이적요에게 충직했던 당나귀가 끝내는 살인당나귀가 되고 마는 것은 질투의 마음의 극에 달한 이적요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가 말대로 질투심은 열등감의 다른 이름이며, 맹목적 잔인성을 갖는 것이어서 자기 무덤을 파고 마는 것인지 모릅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한 것들이 아주 작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의 좋고 나쁨을 떠나 ‘우주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좀 더 편하게 사랑에 매혹당할 수 있습니다.『은교』에서 박범신은 사랑의 매혹덩어리가 ‘관능’이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마음속에 이상한 힘이 생기면서 사랑이 발화된다고 하더라도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숨어 있던 관능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은-교’라는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달콤하지 않는가, 라고 반문했습니다.『롤리타』에서 험버트가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에서 롤리타를 불렀듯이『은교』에서 이적요는 은-교를 부르면서 혀끝이 달콤하다고 했습니다. 혀끝이 달콤한 이름을 불러보는 것은 얼마나 관능적인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