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진정한 보수주의자의 길 리라이팅 클래식 5
이혜경 지음 / 그린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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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孟子)』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낯설은 이야기를 발견했습니다. 순임금의 아버지가 살인을 했다면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은 평범한 일상을 반대합니다. 즉 “ 몰래 아버지를 업고 도망쳐 바닷가에 살면서 죽을 때까지 즐거워하면서 천하를 잊었을 것이다.”(「진심 상」25)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어떤 문제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데 오늘날 법치국가라는 것을 고려해볼 때 법(法)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맹자는 법보다는 부자(父子) 간의 인륜을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맹자를 보수주의자(保守主義者)라고 비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로 나온『맹자, 진정한 보수주의 길』을 오히려 진보주의자들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맹자의 관점에서 보면 진보주의자들은 경제적 인간입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도덕적 인간입니다. 경제적 인간이 이익을 우선시한다면 도덕적 인간은 바로 인(仁)과 의(義)를 중요시 합니다. 결국 진정한 보수주의자는 곧 도덕적 인간의 최상인 군자(君子)입니다.

맹자가 보수주의자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전국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거로 되돌아가라고 합니다. 전국시대에는 부국강병이 목표인 전쟁의 시대였으며 종법질서에서 횡법질서로 변화되었습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반이 와해되어 개인의 가치가 발달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상하관계에서 평등한 사회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도 맹자가 이를 부정하는 것은 바로 인륜(人倫)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맹자가 말한 인륜은 성선설(性善說)입니다. 성선설을 곧이곧대로 해석하자면 사람은 누구나 착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선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맹자가 말한 성선설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타고난 바탕을 따른다면 누구나 선하게 될 수 있느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성이 선하다는 의미이다. 사람이 선하지 않게 되는 것은 타고난 바탕의 잘못이 아니다.”(「고자 상」6)고 합니다. 덧붙이면 우리가 현실에서 사람에 대해 선하다 혹은 악하다 하는 것은 타고난 본성(善)이 아니라 도덕적 본성(德)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타고난 본성을 양성(養性)해야 합니다.

이러한 맹자의 윤리철학이 정치철학으로 실현되면 ‘왕도’(王道)가 되는 것입니다. 왕도는 도덕적인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패도(覇道)는 힘으로써 백성을 강요하는 것입니다. 맹자는 패도정치를 행사하는 군주를 왕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사내(夫)라고 하면서 누구라도 왕도정치를 하면 천하의 왕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책을 통해 맹자의 사상을 새롭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보수주의자라고 해서 뜻밖이었는데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저자의 획기적인 견해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보수주의는 진보주의에 비교하면 시대에 역행하는 듯 합니다. 그런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생깁니다. 사회가 나날이 진보하고 있는데 오히려 우리의 삶이 예전만큼 행복하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맹자는 “입이 좋은 맛을 추구하고 코가 좋은 냄새를 추구하는 것은 본성에 속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명(命)이므로 군자는 그것을 본성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부자간에 인(仁)이 있는 명에 속하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본성에 있으므로 군자는 그것을 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진심 하」24)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자신의 노력이 아니라 외부적인 노력에 의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명입니다. 반면에 내 자신이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본성인 것입니다.

이렇듯 맹자는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의 마음이 게을러진 것을 꾸짖고 있습니다. 맹자를 통해 우리는 위대한 전통에서 참다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서구의 가치가 갈수록 팽창하고 있는 현실에서 맹자의 사상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우선적으로 도덕적 인간에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보수주의 예언자 버크가『성찰』에서 “자신들의 조상을 되돌아보지 않는 사람들은 결코 후대를 전망하지 않는다.”라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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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까투리
권정생 글, 김세현 그림 / 낮은산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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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불이 났습니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불은 산에 있는 꽃이며 나무를 태워버립니다. 동물은 그나마 멀리 달아날 수 있어 다행입니다. 그런데 까투리네 가족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엄마 까투리에게는 아홉 마리 꿩 병아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길을 피해 이쪽저쪽으로 달아나려고 해도 얄밉게도 불길이 그 앞길을 가로 막습니다. 더구나 종종걸음을 하는 꿩 병아리들 때문에 불길을 피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과연 까투리네 가족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이 그림책을 보면 볼수록 자꾸만 물컹거리게 합니다. 속절없이 슬픕니다. 그러면서도 공허한 마음을 흔드는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사랑 때문입니다. 엄마 까투리는 아홉 마리 새끼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온 몸으로 감쌉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주저앉습니다. 아홉 마리 새끼들에게 엄마 품은 지금 이 순간 가장 안전한 곳입니다. 이로 인해 자신의 몸이 비록 검게 타들어갔지만 아홉 마리 새끼들은 산불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산에 사는 까치네 가족이나 마을에 사는 우리네 가족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엄마의 사랑 없이는 아이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만약 제대로 보살피지 않는다면 가령 이 책에서 볼 수 있듯 엄마 혼자 날아가며는…생각만하여도 아찔합니다. 새끼들이 위험천만한 불길의 공격을 당하리라는 것을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하지만 엄마 까투리가 그렇듯 우리네 어머니들도 자식을 위해 스스럼없이 희생합니다. 우리집도 어려울 때가 있었습니다. 꼭 어렵다고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먹는 것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입맛이 없다고 설레설레 하였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던 까닭에 곧이곧대로 정말로 입맛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어머니의 진짜 마음을 다시금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소재만 다를 뿐이어서 뻔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의 미묘한 감정은 권정생이라는 작가의 울림이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그는『강지지똥』으로 널리 알려진 동화작가입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평생을 5평짜리 오두막에서 병마와 함께 살다간 그가 보여준 삶이 눈물나게 했습니다. 아직도 살아생전 그가 빨래를 너는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어디에서 이런 놀라운 힘이 생겨났을까? 그것은 아마도 이 책에 나와 있듯 어머니의 사랑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인 이 책은 “좋은 그림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작가의 소박함이 한결 마음을 부드럽게 했습니다. 그가 떠나고 없는 이 세상이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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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과 육식 - 사육동물과 인간의 불편한 동거
리처드 W. 불리엣 지음, 임옥희 옮김 / 알마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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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이 말은 조지 오웰의『동물농장』의 일곱 계명 중에 나온다. 하지만 예외적인 동물이 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동물이기를 거부한다. 그러면서 지구의 절대적인 주인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동물을 사육하고 동시에 육식을 한다.

그러나 시시각각 육식에 빨간불이 켜지면서 몇 가지 충격적인 사실들이 밝혀졌다. 광우병(狂牛病)이 그렇고 조류 인플루엔자(AI)가 그렇다. 육식에 대한 두려움이 지구를 숨 막히게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후대책이라는 것이 놀랍게도 잔인하다. 발생농장은 물론 반경 몇 미터이내의 동물들이 매장을 당한다.

수많은 동물들의 떼죽음을 보면서 인간의 철저한 이기적인 행동에 대해 더 이상 간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 인간은 생존을 위협하는 동물에 대해 비윤리적으로 처벌하고 있다. 더구나 죄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동물을 살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고 있다.

과연 인간에게 무엇이 문제일까? 좀 더 부연하자면 인간이 동물에게서 멀어진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답하는 책이『사육과 육식』이다. 이 책에서 저자인 불리엣은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역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제시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사육이다. 그는 사육을 중심으로 전기사육시대, 사육시대, 그리고 후기사육시대로 구분하고 있다.

먼저 전기사육시대에는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넘나들 수 있는 샤면을 숭배했다. 동물을 숭배하고 상상 속에서 동물과 함께 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 들어오면서 ‘동물의 왕국’에 이르렀다. 여기서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은 사회적으로 복잡한 인간 사회의 출현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인간 이해관계에 따라 동물을 이용했다. 마지막으로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이 제공하는 제품을 풍부하게 소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저자는 사육화의 역사적 변화에 주목하고 있다. 변화의 핵심에는 사육동물이 유용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동물의 유용성을 물질적 용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한 물질적 용도 중에서도 1차적 용도인 고기(meat)를 중요시하고 있다. 예전에는 2차적 용도 즉 양털이나 노동을 얻기 위해 사육화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고기 때문에 사육화가 비롯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저자는 사육화에 따른 인간과 동물의 심리적 거리감으로 현대문명을 비판하고 있다. 사육시대에는 동물과 접촉하면서 죽음을 직접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후기사육시대에는 동물과 분리되면서 죽음을 볼 수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동물을 대하는 인간의 시각과 행동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양심의 가책이었다. 결국 사육화가 산업적으로 소비되면서 동물에 대한 양심은 그만큼 멀어져버렸다. 그리고 종(種) 차별주의를 내세우며 공격한다.

가령, 저자는 당나귀를 예를 들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육화가 되는 과정에서 당나귀가 어떻게 변화되는지 제시하고 있다. 전기사육시대에는 당나귀는 신성한 동물이었다. 그러나 사육시대에는 정력의 상징으로 바뀐다. 더 나아가 후기사육시대에는 가장 멍청한 동물이 되어버렸다. 이것을 토대로 예전의 멀쩡한 소를 오늘날 광우(狂牛)라고 말하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 미친 소(牛)라니!

일찍이 피터 싱어는『동물 해방』에서 ‘유인원 계획’(Great Ape Project)을 말한바 있다. 이 계획을 간단하게 말하면 인간과 다른 동물간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기본적인 권리를 보다 많은 존재(인간이 아닌 동물)에게 부여하려는 것이다.

후기사육시대에 인간의 고통은 곧 동물의 고통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동물이 진정으로 해방된다고 한다면 인간 또한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인간과 동물의 불편한 관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이 책을 통해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느낌을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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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31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람의 한평생 - 민속으로 살핀 탄생에서 죽음까지
정종수 지음 / 학고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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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장에 갈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발걸음이 무겁다. 망자(亡子)에 대한 예의 때문일까? 아니면 두려움 때문일까? 어쩌면 예의 때문에 두려움이 떠나질 않았다. 예의가 너무나 현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즘이야 이런 죽음이 일상화되었지만 예전에는 집에서 망자를 떠나보냈다. 어릴 때 마을에서 상여가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자란 탓에 장례식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사람의 한평생』이 나를 사로잡은 것은 앞서 말한 충돌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다. 굳이 이유를 따져보면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죽음을 다루는 의례를 상례(喪禮)라고 한다. 그리고 장례(葬禮)는 상례의 한 절차이다. 그런데 장례의 의미를 알고 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장례란 시체의 처리 방법, 매장과 관련한 예절이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장례식장이라는 이름의 반전(反轉)은 상례의 허구에 불과하다.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점이 이것뿐만 아니었다. 혼례(婚禮)에 있어서는 남녀차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두고 결혼(結婚)이라고 한다. 하지만 혼인(婚姻)일고 해야 옳다. 혼이란 여자의 집이란 뜻으로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든다는 것이다. 인은 남자의 집으로 여자가 시집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혼이라고 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장가가는 것 밖에 안 된다. 결국 결혼은 반쪽 잔치의 행복이었다. 그래서 결혼 후 불행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를 지레짐작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에는 전통이 혼란한 현실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사람의 한 평생에 대한 다양한 풍속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또한 풍속을 설명하는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관혼상제(冠婚喪祭)의 예술성이 돋보였다. 그만큼 예를 다하는 데 있어 소홀하지 않았다. 요즘같이 간편한 세상에서 책 속의 의례들은 다소 복잡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관혼상제는 우리의 역사다. 역사를 제대로 아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잘못된 예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또 다른 재미는 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피부에 와 닿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관혼상제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 왔는가? 에 대한 발자취인 동시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반추하게 한다. 그런데도 관혼상제라고 하면 그저 재미없고 딱딱하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 책을 쓴 저자 덕분에 관혼상제의 이모저모를 흥미롭게 살펴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단순히 의례의 절차나 형식을 정리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는 저자가 ‘저승사자’로 불릴 정도로 발로 뛰며 체험한 결과물이다. 특히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라는 화두를 던지면서 궁금하게 한다. 그러면서 그 해답을 실생활에서 풀어나가는 것이 상당히 현실적이었다.

일찍이 공자(孔子)는『논어』(論語)「안연」(顔淵) 편에서 ‘非禮勿視, 非禮勿言, 非禮勿動’을 말했다. 풀이하자면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마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공자가 말한 예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고로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우리는 지금 예가 아닌 것을 보고 예가 아닌 것을 말하고 예가 아닌 것을 움직이고 있다.

공자 말한 예를 좀 더 다른 시각으로 보면 노르베르트 엘리아스가『문명화 과정』에서 말한 ‘문명화 과정’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어릴 때 상여를 보고 자란 반면에 내 아들은 장례식장을 보고 자란다. 복잡한 현실을 고려하면 당연한 결과다. 오히려 내 아들이 상여를 보고 자라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그래야 우리 선조들이 상복을 벗더라도 적어도 3년 동안은 마음으로나마 상중(喪中)에 있는 것처럼 행동을 삼가는 ‘심상삼년(心喪三年)을 만든 까닭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람의 한평생』은 바쁜 현대인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다. 예의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의 형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의 형식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모든 문화는 예의 형식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일까? 이 책에 담긴 관혼상제의 뜻을 하나하나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더구나 잘못 알고 있거나 이해하고 있었던 옛 사람들의 내면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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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까치글방 133
E.H. 카 지음, 김택현 옮김 / 까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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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1960년 4‧19혁명이 발생했을까? 이 질문에 단 한 가지 원인만을 말 할 수도 있다. 요즘같이 역사의 문외한 시대에서 전혀 모르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단편적으로 기억하는 것은 위험하다. 무엇보다도 역사와 대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이 문제에 대해『역사란 무엇인가』를 쓴 E. H카는 세 명의 수험생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로 앞서 말했듯 한 가지로 답하는 수험생은 C 학점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로 여러 가지 원인들을 차례로 나열하는 수험생은 B 학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원인들을 정리하고 질서를 수립하고 해석하는 수험생은 A 학점을 받을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A 학점을 받은 수험생답게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답을 하고 있다. 그는 먼저 역사란 ‘역사가와 그 사실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한다.

그는 완전한 역사 대신 경험주의적 역사를 주장한다. 이것이 역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을 구분하게 된다. 가령 4‧19혁명이 1960년에 일어난 것은 역사의 사실이지만 1961년에 일어난다면 과거의 사실이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역사의 사실은 사실 자체의 어떤 성질이 아니라 역사가의 결정에 따라 좌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만 과거를 조명할 수 있고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거나 자신을 과거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데 있다.

E. H카는 이런 논리로 억센 개인주의를 반박한다. 즉 역사의 사실은 분명히 개인에 관한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회와 고립된 개인의 행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보다는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나폴레옹 같은 위인들은 자기의 시대를 실현하는 탁월한 개인으로 여겼다. 결국 그는 앞서 말한 대화는 곧 고립된 개인이 만든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의 대화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밖에도 그는 역사의 일반화를 지적하고 있다. 보통 역사는 특수한 사건을 다룬다고 한다. 물론 틀리지 않다. 가령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나 제 2차 세계대전은 모두 특수하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가의 관심은 특수한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 안에 일반화시키는 데 있다. 즉 이 두 가지 사건을 전쟁이라고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역사의 일반화가 중요한 것은 역사로부터 가르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그는 역사를 진보적인 학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과거가 미래를 밝혀주고 미래가 과거를 밝혀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역사의 정당화이다. 이로 인해 그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이야기했을 때 오히려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다시 한 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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