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 그린 -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 Nous 5
토머스 L. 프리드만 지음, 이영민 외 옮김, 왕윤종 감수 / 21세기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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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속 70km로 운전할 수 있는가? 더구나 부자병에 걸린 세계에서 말이다. 부자병은 과도한 경제적 성장 중독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시속 70km는 단순히 속도의 문제는 아니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요소가 있다. 이 속도는 공기의 저항을 최소화한다. 그만큼 연비가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지구온난화에 따른 ‘뜨거운 세계’를 막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레드 카(Red Car)를 그린 카(Green Car)로 바꿔야 한다. 레드카인 기존의 자동차는 가솔린 엔진인 반면에 그린카인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가솔린 엔진과 전기 모터를 함께 달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가솔린 엔진은 브레이크를 밟아 정지할 때 대부분이 마찰열로 손실된다. 그러나 하이브리드 자동차는 브레이크 마찰로 손실되는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저장하게 된다. 

오늘날 경제 위기 속에 하이브리드 자동차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경제적인 기댓값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바마노믹스(Obamanomics)의 핵심으로 떠오른 토머스 프리드먼의 통찰력은 탁월하다. 세계적인 국제분야 전문가답게 그는 시의 적절한 대안을 제시해왔다. 이번에 그의『코드 그린: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도 우리가 지금 읽어야 할 책이다. 만약 시기를 놓친다면 안타까움을 떠나서 후회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코드 그린’은 녹색혁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뜨겁고 평평하고 붐비는’ 세계는 지구 온난화, 세계화, 인구증가라는 세 가지 현상이 만들어낸 티스푼 효과를 혹독하게 치르고 있다. 지구 온난화의 주범은 석유, 석탄 같은 성장에너지에 있다. 저자는 이것을 ‘지옥 연료’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계가 평평해지면서 중산층이 늘어나 막대한 생산과 소비가 발생하면서 이상한 기후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구 증가로 인하여 산림이 훼손되고 물 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있음을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성장 중독증 혹은 석유 중독증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부작용이 현실화 되고 있음을 그는 풍부한 예를 들어서 설명하고 있다. 예컨대 네덜란드 병이라고 불리는 자원의 저주이다. 이는 풍부한 천연자원 때문에 산업공동화 현상이 발생한다. 또한 모든 일이 자원을 통제하고 자원에서 많은 부를 축적한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는 양상을 말한다.  

한편으로 저자는 석유중독증과 민주주의를 둘러싼 석유정치학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선진국의 석유중독증이 오히려 민주주의를 역행하는데 사용되는 자금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가가 올라가면 자유의 보복은 느려지며 유가가 내려가면 자유의 보복은 빨라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 독립혁명 당시 슬로건이 “대표권이 없이는 과세도 없다.”는 것이었다면 석유독재국가의 슬로건은 “과세가 없으니 대표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석유정치학의 제1법칙이다.  

그래서 그는 ET(Energy Technology)혁명을 주장한다. 즉 지옥의 연료 대신 천국의 연료인 풍력, 태양력 등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더 적은 연료로 더 높은 성장이라는 에너지 효율과 자원의 생산성을 향상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경보호라는 윤리적인 책무와 수탁을 당부한다. 책무란 자연 세계를 향한 관리인을 말하며 수탁이란 이 땅에 살게 될 미래 세대에 대한 부담감을 말한다. 따라서 오늘날 에너지를 절약하는 유능한 환경보호론자가 되지 않고서는 효과적인 외교정책을 수립하는 현실주의자도, 민주주의를 전도하는 유능한 이상주의자도 될 수 없다고 한다. 이것이 석유정치학의 제 2법칙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미래의 생존전략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아웃그리닝’(outgreening)이다. 남들보다 더 먼저 더 빨리 그린에 다가서는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에너지 기후 시대 우리의 의무이자 기회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가 다름 아닌 ‘Re 세대’(Re-generation)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연령에 상관없이 신재생자원, 재활용, 기타 지구의 자연 환경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들에 공통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에게 ‘나중에’란 말은 없다.  


그래서 일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정신이 번쩍번쩍 들었다. 그동안 집 안에서 사용하지 않고 플러그만 꽂혀 있어도 낭비되는 에너지에 무관심했다. 당장에라도 집 안에서 흡혈귀에너지를 사라지게 하고 싶었다. 이것 또한 지구를 살리는 손쉬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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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유전자 - 왜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하며, 왜 그들은 성공하는가?
바버라 오클리 지음, 이종삼 옮김 / 살림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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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씩 세상을 놀라게 하는 반사회적 범죄가 발생한다. 그럴 때마다 사건도 사건이지만 범죄자에 대한 뉴스에 관심이 쏠린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사람일까? 예를 들어 살인자일 경우 두 개의 유형이 있다. 감정적 살인자와 약탈적 살인자이다. 감정자 살인자는 감정에 복받쳐 살인을 저지른다. 반면에 약탈적 살인자는 감정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담하게 때로는 주의 깊게 계획한 절차에 따라 상대를 공격한다.

바버라 오클리의『나쁜 유전자』는 살인자들 즉 나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유전체학(遺傳體學)으로 파헤치고 있다. 이는 각 유전자는 무엇을 하는지 그리고 유전자 개개는 유기체의 염색체 사이 어디에 자리잡게 되는지를 정확하게 연구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정상적인 유전자와 불량한 유전자가 각기 어떻게 작동되는지 과학적으로 알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나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마키아벨리주의적 인간들’이라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주의적 인간들은 첫째로 사람들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조작 대상으로 간주한다. 둘째로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희박하고 거짓말, 속임수 등 여러 형태의 기만 행각을 예사로 벌인다. 셋째로 명백한 정신병리학 결핍 상태에 빠져 있다. 분명히 건강한 정신이 아닌데도 더 객관적인 실체와의 접촉은 정상적인 범주에서 이루어진다. 넷째로 이데올로기에 대한 헌신의 정도가 낮다. 궁극적인 이상주의적 목표를 위해 불굴의 노력을 하기보다는 우선 성취 가능한 목표를 위한 책략에 더 관심이 많다.

하지만 심리학자 존 매코스키 교수에 의하면 마키아벨리주의는 인간성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과 사회심리학자의 연구 주제이라고 한다면 임상심리학에서는 ‘사이코패시’라고 부른다고 말하낟. 이것이 곧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말하며 그 장애가 사이코패스와 유사하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가잔 사림들이 인류라는 구덩이 바닥에 있다면 사이코패스들은 삽을 꺼내어 계속 땅을 파는 그 하위집단을 형성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사람들을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로 만드는 것일까? 여기에는 유전자와 환경에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유전적으로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 작용에 주목해야 한다. 특히 세로토닌 운반체라는 ‘SERT 분자’이다. 또한 세로토닌과 관련된 대립유전자의 역할에 있다. 즉 짧은 SERT 대립유전자와 긴 SERT 대립유전자가 있는데 이들의 차이점은 운반체 분자가 얼마만큼 자주 생산되는지를 통제하는 유전자 부분에 있다. 가령, 짧은 SERT 대립유전자는 근본적으로 불안반응을 완화하는 일부 뇌기능을 잘 수행할 수 없게 한다.

한편으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을 이해하기 위한 연구 영역이 바로 ‘경계선 인격 장애’ 이다. 이것은 급격한 기분 변화, 정서 불안, 심각한 대인 관계 혼란, 태도나 행동을 카멜레온처럼 바꾸는 것이다. 주로 감정과 관련된 여러 문제들을 일으키는 인격 장애이다. 인간의 행동은 대뇌피질의 앞부분에서 일어나는 이성적 사고와 변연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적 통제(감정적 사고)에서 일어난다. 만약 이 부분에서 신경이 변화를 일으킨다면 인지 부조화의 행동 유형을 하게 된다.

이런 유전적인 요소는 환경의 영향에 따라 변화한다. 즉 정상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때 나쁜 유전자들은 반사회성 인격 장애를 유발하는데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어떤 사람들은 인격 장애의 특성에 완전히 굴복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스트레스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반사회성 인격 장애’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 심연이란 1차적으로는 유전자에 있으며 2차적으로는 환경에 있다. 어느 것이 좀 더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지를 세밀하게 연구해보면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몸 안으로 유전적인 장애를 가지고 있으며 몸 밖의 영향으로 정상적인 행동과 사악한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사악한 행동이 성공하는 것은 악의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의 기질을 더 의식적으로 조작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스탈린이 사교의 달인, 마오쩌둥이 가장 위대한 조작자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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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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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은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한 순간 농담 같은 문장으로 보였습니다. 사랑하면 다 괜찮은 것 아닌가요? 굳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의뭉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바보라는 말을 곱씹을수록 달짝지근했습니다. 정말이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지 모르며 살아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 던의 촘촘한 감정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따뜻한 위로도 잠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으로 물컹물컹한 액체가 가득 채워지면서 그들 모두들 불러보았습니다. 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눈물 나는 사랑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습니다. 언제가 한 번은 ‘엄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작가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멜로적인 말들이 남이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는 끊임없이 독백을 쏟아내게 했습니다. ‘그랬구나…이렇게 살았구나…미안하게 살았구나…’ 무심코 펼쳐든 책 속에서 ‘엄마’라는 글자를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망울이 젖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뒤늦은 후회가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쨍한 사랑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를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뜻밖에도 엄마의 부재에서 시작합니다. 더구나 ‘엄마를 잃어버린 일주일째다.’라고 파문을 일으킵니다. 생각할수록 아찔했습니다. 일주일째라는 오랜 부재의 시간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가족들이 어떻게 견뎌내는지 사뭇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떨리는 가슴으로 동행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엄마 집을 떠나 도시에 사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만큼이나 엄마 집이 무료하고 답답해졌습니다. 하긴 이렇게 사는 지도 어느 덧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몇 년을 그저 삶이 바쁘고 고단하다는 이유로 엄마 집과 뜸하게 지냈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거야, 라고 누군가 다독거려도 엄마 집이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고백 앞에서 차마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자살한 일상 속에서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실종이라는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누가 부순다고 해서 부서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한 번이라도 더 간절하게 보고 싶어집니다.

엄마에 대한 오해를 또 하나 풀고 가자면 이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설령 실종되지 않았다고 해도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일러줍니다. 무엇이 작가를 이렇게까지 뜨겁게 하는 걸까요? 어쩌면 엄마는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해보입니다. 가족들에게 엄마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게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너무도 쉽게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가족들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라는 말이 왜 상처인지, 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이 엄마였다는 것이 왜 아름다운지, 인생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왜 내 맡길 수 있어야 하는지, 가난이 힘이 되었던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엄마의 삶이 지금에 와서는 왜 서글픈지, 애틋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 보니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엄마의 삶인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엄마의 부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믿게 되면 자칫 ‘엄마 애호가’로 불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엄마라는 대수롭지 않은 이름에다 가족들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잃어버렸다, 를 중심으로 소설을 막힘없이 엮어내는 작가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먹먹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늘 집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혹시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럽게 의심해봤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생각해보면 묘한 감정이 출렁였습니다. 가족들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절망 속에서 엄마의 신비로운 삶이 하나둘 밝혀집니다. 딸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엄마의 완전한 사랑은 그림자였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을 갈 때마다 엄마는 뭘 잔뜩 안겨줍니다. 밭에서 땀 흘리며 가꾼 농산물을 차에다 실어줍니다. 가뜩이나 다리가 불편해서 여간해서는 농사짓는 것이 수월하지 않는데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겨나는지 해마다 창고에는 엄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입니다. 이것이 엄마에게는 생전의 낙(樂)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제발 손에 흙 묻히지 마세요.’

그래서 엄마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미안함은 곧이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체념처럼 들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굳이 너, 당신으로 약간은 관심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우리가 너, 당신이 된다면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삶에 지칠 뿐입니다. 가족이라는 부담감으로 삶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이렇기 때문에 술에 취해야 겨우 마음의 문을 열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소설의 작가처럼 지난날의 혼란한 감정들을 말끔히 치유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엄마를 부탁해.’라는 말이 ‘엄마를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벅찬 감동으로 들렸습니다.

일찍이 파스칼은『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눈 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만약 자기가 오만과 야심과 정욕과 결함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엄마를 부탁해』에서 작가는 엄마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리고 엄마의 인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의 죄의식 때문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죄의식을 무관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의 삶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지 못한 체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빠르게 반응해온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마에 대한 사랑과 죄의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의식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다시 파스칼은『팡세』를 읽어보면 ‘인간의 결함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는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가 진실된 것이기를 갈망하는 마음 외에 무엇을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 또한 마지막에 이르러 종교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실종된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 가족 모두 스스로 지쳤다는 것을 공감할 때 작가는 우리를 저 멀리 성 베드로 성당으로 안내합니다. 그곳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성애(母性愛)를 경건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을씨년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피에타상은 엄마에 대해 눈 뜬 장님으로 살아온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하고 참회의 눈물을 쏟아내게 합니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엄마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모(聖母) 앞에서 고백합니다.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엄마는 매우 소중합니다. 엄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엄마는 고향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향을 잃어버리며 허겁지겁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엄마가 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안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엄마가 된다고 해도 더 이상 엄마가 아닙니다. 그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도에서 맴돌 뿐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각박한 일상을 파고드는 엄마의 사랑이 어제와 사뭇 다른 오늘의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심각한지, 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탄식과 절망이 희망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상처와 결핍을 잘 만져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눈물이 묻어나는 메시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서서히 그러면서도 뚜렷하게 엄마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엄마를 사랑해”라고 털어 놓고 싶었습니다. 사랑스런 바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마주하는 엄마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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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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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세상이 우유 빛처럼 하얗게 보인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수록 아찔하다. 의학적으로 눈이 멀기 때문이다. 실명이 되는 슬픔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보다 더 가장 큰 어려움은 실명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싸움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있다. 모든 병(病)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에 나오는 혼란스러움은 사뭇 다르다. 솔직히 누구나 조금씩은 공감하고 있을 것이지만 누군가의 불행한 이야기는 지루할 수도 있다. 불행한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는 것은 병든 세계를 반복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일까? 작가는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실험정신이 돋보이는 문학으로 현대사회의 정체성을 세밀하게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세상에서 가장 논리적인 병이 무엇인가? 라는 무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실명이 전염된다는 것이다. 즉 멀어버린 눈이 멀지 않는 눈에 실명을 옮기는 것이다. 맹인을 피한다고 해서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희망은 제로에 가깝다. 이유인즉 맹인을 볼 수 없는 곳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소설은 횡단보도 신호등이 파란불이 켜지고 차들이 활기차게 움직이는데 중간 차선의 선두에 있는 차가 멈춰 서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에서 시작된다. 사방에서 경적이 울려대지만 정작 운전자는 움직일 수 없다. 차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운전가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차가 고장난 것이라면 평범한 사고이다. 그러나 도무지 까닭을 모르는 운전자의 실명은 심각한 사고이다.

이 운전자는 도시 전체를 눈멀게 하는 최초의 사람이다. 사람들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는 사이에 백색 질병은 도시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간다. 즉 운전자를 집까지 데려다준 남자, 그가 찾아간 안과의사, 그리고 안과의사한테 진찰을 받은 사람들이 차례로 눈이 멀기 시작한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의사의 아내만은 정상이다. 오히려 그녀는 장님인척 살아야하는 묘한 운명에 놓인다. 위기를 느낀 정부가 실명이 된 모든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가둬놓았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 체 눈먼 사람들이 차차 동물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암울하게 목격한다. 더욱 충격적인 장면은 갈수록 부족한 식량을 앞에 놓고 여성을 강간하는 남자들이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작가는 먼저 이런 공포 속에서 인간의 눈먼 욕망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가령, 눈이 먼 남자를 도와준 멀쩡한 남자가 도둑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도둑이 되어버린 것은 어쩌면 우리의 양심이라는 것이 더 이상 삶의 해독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인생이다. 사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멀쩡한 남자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침내 비정한 세계에 눈이 번쩍 뜨게 되는데 이것이 눈먼 도시에 살아남는 한 가지 방법이다. 자신의 양심을 강요한다.

작가는 양심이란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악한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얼버무리려 하는 사람은 결국 가혹하게도 자신이 받아 마땅한 벌의 두 배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사람이 한 순간 동물이 되어버린 지옥 같은 굴레에서 가장 안전하면서도 굉장한 힘을 지니게 하는 것은 ‘수치심’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수치심이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말한다. 이것이 곧 우리의 존엄성이 양심을 제대로 바라보게 한다. 눈먼 사람들이 정신병원을 탈출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것이 아니라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깊은 고뇌에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비정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이라는 불편한 진실이 도시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동정심으로부터 탈출하게 만든다.

끝으로 도시라는 것은 어떤 곳일까? 하늘로 치솟는 빌딩과 시끄럽게 도로를 달리는 차량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무심하게 일상을 걷는 곳이다. 그곳에서 모든 것은 길을 잃어버린다. 작가의 솔직한 표현을 빌리자면 도시는 미쳐버린 미로(迷路)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색 공포가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 눈망울을 떨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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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 생각의 출현 - 대칭, 대칭의 붕괴에서 의식까지
박문호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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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게라는 생물이 있다. 멍게 유충은 바다를 헤엄쳐 다닌다. 그런데 이 멍게 유충이 바위에 붙어 자라기 시작해 성체가 될 때 척색과 척수를 삼켜 소화시켜버린다. 움직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박문호는『뇌, 생각의 출현』에서 움직일 필요가 없을 동물은 뇌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동물에게 뇌는 운동의 출력기관이기 때문이다.

동물에게 중요한 만큼 뇌에 관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뇌의 각 부위 명칭과 기능에 대해 자세히 파고들지 않아도 뇌의 대략적인 지도를 그릴 수 있다. 뇌 공부에 있어 세부에서 전체 구성으로 올라가는 보텀-업 방식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톱-다운 방식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매우 효과적이다. 어려울 것 같은 뇌의 진면목을 쉽게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특히 이 책의 주제인 생각을 진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저자는 이니스의 “생각은 진화적으로 내면화된 움직입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생각의 실체를 파고든다. 요약하자면 생명의 기본 단위는 세포이다. 생명은 단세포에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해서 다세포 동물들이 출현한다. 이 과정에서 좌우대칭 생명체가 나타난다. 좌우대칭은 방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운동성이 신경활동과 통합되면서 의식의 출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의식에는 1차의식과 고차의식으로 나뉜다. 1차의식이란 시각, 청각, 체감각이 우리의 욕망에 규격화된다. 이것을 애덜먼은 ‘지각의 범주화’라고 한다. 더 나아가 지각이 범주화되는 과정을 다시 한 번 범주화하는 ‘개념의 범주화’가 생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1차의식은 언어 이전에 이미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뇌의 활동에서 의식의 영역은 5%에 불과하다. 의식의 지평으로 올라오지 않은 무의식이 나머지 95%를 차지한다. 이 95%의 무의식이 자동적항상적시스템과 관련이 있는데 ‘느낌이전까지’를 말한다. 느낌이란 바로 비자동적인 항상성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즉 감정(무의식)이 아닌 느낌(의식)일 때 강력한 뇌의 능력이 생겨난다. 우리가 불확실성에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칙센트미하이가『창의성의 즐거움』에서 “창의성 이야말로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창의성이 표출된다.

저자는 창의성을 달리 생각의 대칭 붕괴라고 설명하고 있다. 생각이라는 것이 대칭과 대칭 분리를 일으키며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다. 창의적인 사람은 감정이 풍부해야 한다. 그래야 번뜩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충분한 학습량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창의성의 전제조건이다. 일단 정보량이 임계치를 넘어서야 한다. 임계치를 넘은 정보가 질(質)로 바뀌기 때문이다. 결국 창의성은 정보의 질이 아니라 양(量)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끝으로 저자는 뇌는 복잡계일까? 복합계일까? 비교 분석하고 있다. 복잡계는 다양한 하위 시스템이 섞여 있는데 이것들이 무작위로 상호작용한다. 반면에 복합계는 복잡계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만 목적 지향적 시스템이다. 결론적으로 뇌는 복합계이다. 도킨스의 표현을 인용하면 “생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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