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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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사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은 “나는 두 가지 면에서 바보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기 때문에”라고 말했습니다. 한 순간 농담 같은 문장으로 보였습니다. 사랑하면 다 괜찮은 것 아닌가요? 굳이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의뭉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바보라는 말을 곱씹을수록 달짝지근했습니다. 정말이지 그가 아니라 내가 바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이 이토록 어려운지 모르며 살아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외면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존 던의 촘촘한 감정을 와락 껴안았습니다. 따뜻한 위로도 잠시 그동안 잊고 있었던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른거렸습니다. 그리고 가슴 한 구석으로 물컹물컹한 액체가 가득 채워지면서 그들 모두들 불러보았습니다. 눈물 나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니, 눈물 나는 사랑이었습니다. 

내일이면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었습니다. 언제가 한 번은 ‘엄마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는 작가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멜로적인 말들이 남이 듣기 좋으라고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작가는 끊임없이 독백을 쏟아내게 했습니다. ‘그랬구나…이렇게 살았구나…미안하게 살았구나…’ 무심코 펼쳐든 책 속에서 ‘엄마’라는 글자를 스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눈망울이 젖었습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뒤늦은 후회가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쨍한 사랑이었습니다. 엄마라는 존재를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뜻밖에도 엄마의 부재에서 시작합니다. 더구나 ‘엄마를 잃어버린 일주일째다.’라고 파문을 일으킵니다. 생각할수록 아찔했습니다. 일주일째라는 오랜 부재의 시간이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시간 동안 가족들이 어떻게 견뎌내는지 사뭇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떨리는 가슴으로 동행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엄마 집을 떠나 도시에 사는 것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들만큼이나 엄마 집이 무료하고 답답해졌습니다. 하긴 이렇게 사는 지도 어느 덧 10년도 더 지났습니다. 몇 년을 그저 삶이 바쁘고 고단하다는 이유로 엄마 집과 뜸하게 지냈습니다. 살다보면 그럴 수 있는 거야, 라고 누군가 다독거려도 엄마 집이 도시의 식구들을 위해 사시사철 뭔가 제조하는 공장이라는 고백 앞에서 차마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자살한 일상 속에서 엄마의 실종을 통해 엄마의 존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실종이라는 말은 공중으로 흩어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엄마에 대한 기억은 누가 부순다고 해서 부서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한 번이라도 더 간절하게 보고 싶어집니다.

엄마에 대한 오해를 또 하나 풀고 가자면 이 소설은 엄마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설령 실종되지 않았다고 해도 엄마를 잃어버렸다고 일러줍니다. 무엇이 작가를 이렇게까지 뜨겁게 하는 걸까요? 어쩌면 엄마는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해보입니다. 가족들에게 엄마하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게 사랑입니다. 우리는 엄마에게서 너무도 쉽게 사랑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가족들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라는 말이 왜 상처인지, 엄마는 부엌이었고 부엌이 엄마였다는 것이 왜 아름다운지, 인생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왜 내 맡길 수 있어야 하는지, 가난이 힘이 되었던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았던 엄마의 삶이 지금에 와서는 왜 서글픈지, 애틋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짚고 넘어가 보니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엄마의 삶인지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작가는 엄마의 부재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실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정말로 믿게 되면 자칫 ‘엄마 애호가’로 불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엄마라는 대수롭지 않은 이름에다 가족들에게 충분히 상처가 될 잃어버렸다, 를 중심으로 소설을 막힘없이 엮어내는 작가의 노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슴이 먹먹해서 읽기가 힘들었습니다. 엄마는 늘 집에 있어야 마음이 놓인다는 것을 혹시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럽게 의심해봤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생각해보면 묘한 감정이 출렁였습니다. 가족들이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가는 절망 속에서 엄마의 신비로운 삶이 하나둘 밝혀집니다. 딸에게 아들에게 그리고 남편에게 엄마의 완전한 사랑은 그림자였습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자신의 마음을 들키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인가요?

지금도 그렇지만 시골을 갈 때마다 엄마는 뭘 잔뜩 안겨줍니다. 밭에서 땀 흘리며 가꾼 농산물을 차에다 실어줍니다. 가뜩이나 다리가 불편해서 여간해서는 농사짓는 것이 수월하지 않는데도 어디에서 그런 힘이 생겨나는지 해마다 창고에는 엄마의 흔적이 고스란히 쌓입니다. 이것이 엄마에게는 생전의 낙(樂)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답답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습니다. ‘제발 손에 흙 묻히지 마세요.’

그래서 엄마는 가족들에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미안함은 곧이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고 이것이 가족들이 짊어져야 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이 체념처럼 들렸던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심장을 두근거리게 한 것은 우리가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비로소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등장인물들을 굳이 너, 당신으로 약간은 관심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엄마의 아픔을 모른 채 그저 우리가 너, 당신이 된다면 무엇이 엄마를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삶에 지칠 뿐입니다. 가족이라는 부담감으로 삶을 똑바로 보지 못하며 이렇기 때문에 술에 취해야 겨우 마음의 문을 열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소설의 작가처럼 지난날의 혼란한 감정들을 말끔히 치유해야 합니다. 이로 인해 ‘엄마를 부탁해.’라는 말이 ‘엄마를 사랑해’라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벅찬 감동으로 들렸습니다.

일찍이 파스칼은『팡세』에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눈 먼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만약 자기가 오만과 야심과 정욕과 결함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엄마를 부탁해』에서 작가는 엄마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줍니다. 그리고 엄마의 인생을 고통과 희생으로만 기억하는 건 우리의 죄의식 때문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죄의식을 무관심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엄마의 삶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느끼지 못한 체 겉으로 드러난 것에만 빠르게 반응해온 탓입니다. 그런 점에서 엄마에 대한 사랑과 죄의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의식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요? 다시 파스칼은『팡세』를 읽어보면 ‘인간의 결함을 그처럼 잘 알고 있는 종교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그처럼 간절하게 바라는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가 진실된 것이기를 갈망하는 마음 외에 무엇을 가질 수 있겠는가, 라고 묻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 또한 마지막에 이르러 종교의 힘을 빌리고 있습니다. 엄마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엄마가 실종된 지 9개월이 지났습니다. 가족 모두 스스로 지쳤다는 것을 공감할 때 작가는 우리를 저 멀리 성 베드로 성당으로 안내합니다. 그곳에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이 있습니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의 모성애(母性愛)를 경건하게 구현한 작품입니다. 이것이 오히려 아픈 상처를 건드리며 을씨년스럽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피에타상은 엄마에 대해 눈 뜬 장님으로 살아온 무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게 하고 참회의 눈물을 쏟아내게 합니다. 또한 엄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엄마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성모(聖母) 앞에서 고백합니다.

신경숙의『엄마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새겨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엄마는 매우 소중합니다. 엄마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엄마는 고향입니다. 우리는 지금 고향을 잃어버리며 허겁지겁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엄마가 되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일상의 안위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엄마가 된다고 해도 더 이상 엄마가 아닙니다. 그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도에서 맴돌 뿐입니다.

이 소설을 통해 각박한 일상을 파고드는 엄마의 사랑이 어제와 사뭇 다른 오늘의 풍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얼마나 심각한지, 왜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마에 대한 탄식과 절망이 희망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엄마에 대한 상처와 결핍을 잘 만져주고 있습니다.

작가의 눈물이 묻어나는 메시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서서히 그러면서도 뚜렷하게 엄마의 모습이 새겨졌습니다. “엄마를 사랑해”라고 털어 놓고 싶었습니다. 사랑스런 바보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과 마주하는 엄마의 삶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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