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를 껴안고 -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일본과 일본인
존 다우어 지음, 최은석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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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어떻게 재건되었을까?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더글러스 맥아더에 있었다. SCAP(연합국 사령부)가 맥아더 사령부라고 불릴 정도였다. 전후 독일과 달리 일본에서는 미국만이 통제권을 행사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식민지에 대한 맥아더의 메시아적 열정이 폭발적으로 작용했다. 전쟁으로 인한 황폐해진 일본을 안정시키는 핵심으로 군국주의 일소와 민주화를 구축했다. 이것이 그의 ‘미국화’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맥아더에게는 일본의 특수한 권력 형태인 ‘천황(天皇)’을 간과할 수 없었다. 존 다우어은『패배를 껴안기』에서 이 문제에 대한 갈등을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대부분의 책들이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에 대한 반감을 강조하고 있어 정작 패전국 일본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강대국이 되었는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에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듯 ‘승자(미국)과 패자(일본)의 껴안기’라는 전후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먼저 승자의 ‘천황 껴안기’를 다루고 있다. 승자에게 전쟁의 최고 책임자인 천황에 대한 처벌은 불가피했다. 일본은 천황에 의해 신민(臣民)화된 나라였다. 그러나 승자의 점령 후 일본 국민의 교다쓰(허탈) 상태라는 심리적 붕괴가 일본 최대의 적이 되었다. 이런 불안함을 느낀 승자는 천황을 평화와 민주주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즉 신격화된 천황을 국민에게라는 ‘쐐기정책’을 펼쳤다.

다음으로 승자의 ‘관료주의 껴안기’이다. 앞서 말했듯 승자에게 일본은 문화적으로 이국적이었다. 승자의 문화만으로 통치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승자의 선택은 일본을 직접이 아닌 간접통치를 하게 되었다. 이른바 상명하복이라는 관료주의는 일본 정치체제 중에서도 가장 비민주적인 기구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일본의 민주화를 실현하려고 했던 승자의 정책은 관료주의를 통해 ‘신식민지혁명’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승자의 시민이 되었다.

이렇듯 승자의 껴안기가 ‘위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이었다면 패자의 껴안기는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을 좀 더 주목하게 되는 부분이었다. 가령, 가스토리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종전 후 일본에서는 매춘과 퇴폐가 성행하였다. 이는 일본 여성의 정조를 지키는 방파제였지만 패전에 뒤이은 하위문화가 생겨났기 때문이었다. 이른바 단 한명의 미국인만을 상대하는 판판은 미국식 소비주의 문화의 선구자인 동시에 충성(忠誠)을 보여 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래서 가스토리 문화에서는 섹스와 혁명이 같았으며 ‘니쿠다이’가 칭송되면서 개인의 육체가 관능화되었다.

한편, 패자의 '과학의 껴안기'는 상당히 이색적이었다. 일본은 패전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실용주의적으로 직결시켰다. 원자폭탄에 항복했던 일본은 패전의 결정적 요인을 바로 ‘사이언스’라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발 빠르게 군수산업을 기계공업으로 전환하면서 ‘과학 기술’을 가속화하였다. 더구나 한국전쟁이라는 뜻밖의 행운을 이용해서 일본은 에드워즈 데밍(W.Edwards Deming)이 제창한 ‘품질 관리’를 받아들여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일찍이 루스 베네딕트는『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이중적인 성격을 말한 바 있다. 국화와 칼이 말해주듯 이 책에서 그녀는 ‘그러나 또한(but also)'이라는 틀로 일본을 이해하고자 했다. 그런 면에서 전후 일본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인 존 다우어의『패배를 껴안기』는 껴안기를 패전 후 다른 세계로 도약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보여주고 있다. 국화와 칼에 견주어 보면 ‘육체와 과학’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일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이 아니라 일본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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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데카르트를 읽으면 행복한가요? 

 

말로 표현하기가 참 힘들어. 표현하려고 하면 혼란스럽기만 하고. 어떤 땐 이런 생각이 들어. ‘이런 것 저런 것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 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을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서머싯 몸의『면도날』중에서







여기 세 종류의 면도날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인라인의 면도날(Heinleini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로버트 하인라인의『스타쉽트루퍼스』에 나오는데 ‘어리석음(stupidity)으로 인한 일을 악의(malice)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사기꾼에게 속아 친구 돈마저 잃어버렸을 때 그의 잘못은 어리석음에 있습니다. 혹 그 사람을 사기꾼과 한패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복잡한 설명은 싹둑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서머싯 몸의 면도날(Somerse Maugham’s Razor)입니다. 이 면도날은 아직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할 때 우리의 가슴에 선명한 자국을 남깁니다. 서머싯 몸의 『면도날』에 나오는 래리는 삶이 단지 먹고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그럴 때 사람은 누구나 자기 확신이라는 극적이 순간과 부딪히게 마련입니다. 언제 찾아오겠다고 어떻게 해서 그렇다는 것도 없이 어느 순간 불쑥 삶의 강렬한 열정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조종사였던 래리는 전쟁터에서 허망하게 전사한 전우를 보고 난 후 백지상태가 되어버립니다. 백지상태에 놓이면서 그는 세상 모든 일을 알았던 것은 잊어버리고 오히려 세상에 대해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솟아오른 절망감으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쓰디쓴 진실 때문에 고민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는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 돌아왔지만 많은 사람의 기대감을 저버리고 그 무엇을 찾아 미지의 삶으로 외로운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그를 어느 누구보다도 안타깝게 바라보며 제발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사람은 약혼녀 이사벨이었습니다. 전쟁이 아니었더라면 래리와 이사벨은 아무 걱정없이 결혼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사벨에게 모피코트를 사주기 위해 래리는 남들처럼 적당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평범한 삶이었지만 동시에 안전한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평범하게 살아도 행복을 누리지 못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래리는 이 모든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래리 말대로 ‘아무것도 안하고 싶었고 돈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보다는 공부하고자 하는 욕구가 뼛속 깊이 새겨졌습니다.

일찍이 E.F. 슈마허는『자발적 가난』에서 삶에 있어 직선의 논리와 곡선의 논리를 말합니다. 직선의 논리가 많음이 곧 많음이라고 한다면 곡선의 논리는 적음이 곧 많음이라고 했습니다. 전자가 생존의 논리를 위한 것이라면 후자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든 것입니다. 이를 부(富)가 가져오는 문제에 있어 전자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자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발적 가난이었습니다.

인생의 앞날에 돈을 벌어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작가 말대로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삶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그 사람을 만듭니다. 돈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정도 돈에는 개인적인 자존심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인생은 짧고 할 일은 많은 그래서 1분 1초를 낭비할 시간도 없는 상태에서 돈으로부터 자유는 시간을 절약하는데 빼놓을 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래리는 돈보다는 자기 자신의 가치에 대한 사랑을 열망합니다. 앞서 말했듯 래리에게 돈은 자발적 가난이라는 최소한의 버팀목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래리가 평범한 삶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삶을 두루두루 살피면서도 데카르트를 읽었기 때문입니다. 래리는 데카르트를 읽으면서 ‘평온함, 품격, 명석함’을 배웠습니다.

어느 누구는 래리를 나약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정말이지 현실감각이라고 찾기 힘들다고 쓴소리를 할 것입니다. 남들처럼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벌어야 하는데도 래리는 자신의 즐거움을 찾아 어두운 싸움을 합니다. 비록 그 싸움에서 실패한다고 해도 끝가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데카르트를 읽으며 맛보는 순수한 기쁨은 실패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데카르트를 읽지 않는 것일까요? 데카르트를 읽으면 우리는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에게는 지혜가 자유의 수단이었습니다. 반대로 우리에게는 데카르트가 골치 아픈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성공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돈인데 데카르트는 돈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데카르트를 사랑하는 래리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내가 가지 못한 길을 가고 있다는 용기 있는 행동이 마냥 부러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은 지혜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지 래리 혼자만의 작은 행복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행복한 삶을 살게 하는 면도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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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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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자히르!

당신은 우리를 어디론가 떠나게 했습니다. 당신을 사랑해서 그렇습니다. 일찍이 스탕달은 『연애론』에서 사랑에 눈 먼 사람을 말했습니다. 사랑하기 전에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뭇가지가 사랑한 후에 놀랍게도 다이아몬드 가지로 반짝인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사랑은 다이아몬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머릿속을 스치는 남녀 간의 흔한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은 결혼 문제가 놓여 있지만 빛이 납니다. 반면에 오자히르! 당신을 사랑하면 웬일인지 우리는 고독해졌습니다. 당신은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의 외로움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은 어두웠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이 겉을 화려하게 하는 타인의 사랑이라면 당신과의 사랑은 나를 정면으로 만나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노예인가요? 자유인가요?

파울로 코엘료의 『오 자히르』에서 처음 만난 당신을 통해 사랑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종군 여기자 에스테르는 어느 날 당신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에스테르가 그랬던 것처럼 나 또한 그랬습니다.

에스테르는 떠나기 전 그동안 같이 살아온 남편에게 자신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았습니다. 즉 당신과 함께 있는 것이 좋으냐는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당신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질문에도 똑같이“예스”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대답을 곱씹어 보면 사랑의 앞모습은 전자이며 사랑의 뒷모습은 후자였습니다. 전자가 사랑의 노예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랑의 자유였습니다.

그녀가 말하는 사랑의 자유는 다름 아닌 ‘자아 찾기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매달리면서 어쩔 수 없이 끌려가야 한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절망과 동행해야 합니다. 그녀는 결코 이런 삶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절망은 죽음보다 훨씬 무섭다는 것을 그녀는 알았습니다. 절망의 굴레는 그녀 말대로 어제와 같은 삶입니다.

오늘이 어제의 허기를 채우며 가까스로 산다고 한다면 ‘어떠한 모험도 할 수 없는 철저한 외로움’이라는 헤아릴 수 없는 불행이었습니다. 이렇게 그녀의 슬픔을 어루만지면서 어떻게 불쑥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버릴 수 있었는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랑은 피 묻은 천조각인가요?

그녀는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을 들여다봤습니다. 삶이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면 총알이 빗발치는 진짜 전쟁에서 그녀가 찾고자 했던 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피비린내 나는 인간의 어두움이 속살을 드러냈지만 그녀는 전쟁터에서 뭔가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전쟁 밖에서 이루어지는 로맨틱한 사랑은 사랑의 한계 중에서도 ‘신의 사랑’에 불과했습니다. 신의 사랑이란 한 사람이 자신의 배우자의 모든 면을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는 군인이 의사를 부르지 않고 자신의 피 묻은 천 조각을 주면서 ‘아들과 아내에게 내가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라고 가슴 뭉클한 사연을 통해 그녀는 우리는 혼자가 아닌 같이 살 수 밖에 존재라는 것이 뼛속 깊이 사무쳤습니다. 즉 ‘우리가 이웃들을 사랑한다면 그건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를 되찾을 것’이라고 들려주었습니다.

사랑의 거리는 143,5㎝?

오자히르! 당신은 사랑을 잃지 않고 살아갈 때 비로소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파편화된 삶의 고통에 맞서며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게 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 치여 혹은 어떻게 해서든 상대방의 관심을 끌어 보려는 사랑 때문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가치가 제로인 상태에서 당신의 사랑은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이 책을 통해 기찻길 선로 같은 사랑이 얼마나 활력이 없는지 새삼 느꼈습니다. 기찻길 선로는 143,5㎝로 반듯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길이를 줄이거나 늘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기찻길 선로 같은 규칙적인 사랑은 사랑을 주고받는 사람의 오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당신과 나 사이의 사랑은 아마도 그 거리를 찾아내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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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무엇인가?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께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일찍이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부정적 자유’와 ‘긍정적 자유’를 구분했습니다. 즉 부정적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freedom from)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이와 달리 긍정적 자유는 ‘할 수 있는 자유’(freedom to)입니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자유입니다.

이 소설에서 밀란 쿤데라는 삶이 무거운 사람을 역도 선수라고 합니다. 이는 긍정적 자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도 선수에게 신체적인 무게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데 어느 정도는 체질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야 합니다.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던 것도 귀머거리라는 절망을 희망으로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이 당신은 역도 선수가 되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맙니다. 물론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삶을 무겁게 사는 것은 곤란합니다. 삶의 무거움은 꼭 위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축구 선수도 야구 선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자신의 땀방울과 눈물을 흠뻑 흘려야 아름답습니다. 축구 선수에게 현란한 발놀림과 감각적인 패스 능력은 자신을 돋보이게 합니다. 동시에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단숨에 열광하게 합니다. 이러한 흥분을 느끼면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축구 선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축구가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오로지 축구 선수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돌려보면 역도 선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돌려야 할 만큼 역도 선수는 고독합니다. 축구와 달리 비인기 종목인 탓에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지 많지 경기라고 해도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의 끝에서 역도 선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고통의 파도를 힘겹게 넘어서려는 외과의사 토마스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지에 따른 결백’을 불안하게 바라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즉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하는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 살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라고 변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변명』에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닙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몰랐을까요? 토마스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결백한가에 있습니다. 가령,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쓰디쓴 진실을 끄집어냅니다.

광신자들의 무지는 잘잘못을 떠나 부끄러운 것을 정말로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광신자들의 변명에 차라리 오이디푸스처럼 제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를 이 소설에 나오는 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한 목동은 아이를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갔고, 그 왕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산 속의 오솔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였습니다.

그 뒤 그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예전에 산에서 죽인 남자가 자기 아버지이고 그가 동침했던 여자가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되자 그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납니다.

토마스는 광신자들에게 양심의 눈이 있다면 기꺼이 눈을 뽑아버리라고 섬뜩하게 말합니다. 광신자들이 몰랐다고 하여 용서까지 바란다는 것은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거짓 눈물입니다. 토마스가 이러한 주장을 잡지사에 투고하자 주위에서 기사를 철회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이 긍정적이고 가벼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역도 선수이거나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은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가볍지 않고 무겁다는 것이 긍정적인 까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값진 승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까지 머리 싸매며 고민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처럼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해야 옳은 삶입니다. 대중적으로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무겁게 고민해보는 것도 인생의 또 다른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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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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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단편『사람에게 얼마만큼 땅이 필요한가』에는 땅값이 ‘하루치 1천 루블로’라는 솔깃한 얘기가 나옵니다. 하루치란 사람이 하루 종일 걸은 만큼 땅을 드리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따릅니다. 당일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점까지 돌아와야 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농부 바홈은 많은 땅을 차기하기 위해 쉬지 않고 걷고 걸었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출발점까지 되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홈은 죽고 맙니다. 1분도 제대로 쉬지 않고 걸었는데 1분도 땅의 주인이 되지 못한 쓸쓸한 운명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정작 필요한 땅은 3아르신(1아르신은 약 70cm)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의 무덤을 만들만큼만 땅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보면 바홈을 가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홈은 죽어서 어떻게 되었을까요? 천국으로 갔을까요, 지옥으로 갔을까요? 이 세상에 욕망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삶의 이력서를 차분히 헤아려보면 그 이면에는 욕망이 숨가쁘게 한 고비를 넘기고 있습니다. 바홈이 이루지 못했던 욕망은 우리 앞에 던져진 삶의 한계를 짐작하게 했습니다. 바홈에게 땅은 아주 현실적이었습니다. 무엇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에서 그는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천국과 지옥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바홈이 죽어서 지옥으로 간다면 세상은 정말로 공평할까요?

한 순간 바홈을 변명해보고 싶었던 까닭은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을 우연히 만난 덕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집에는 5개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천국에 간 집달리」는 그중 하나였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말리코른은 집달리라는 직업상 남의 눈물을 흘리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법(法)이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자신이 죽으면 당연히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죽고 나자 천상(天上)의 재판관은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리코른처럼 가슴에 나침반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가고자하는 방향이 있습니다. 방향에 따라 산과 강을 지날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충분히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불공평함 앞에서는 나침반은 방향을 잡기가 곤란합니다. 지난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길 아닌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점잖게 말했습니다. 이에 대해 마르셀 에메는 삶이 뒤죽박죽 엉켜 있는 오늘을 보면서 “악법은 악법이다.”라고 직격탄을 날립니다. 꼭 길이 아닌 곳으로도 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해서 모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지적하며 재판관의 무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나오는 단편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딴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비록 분량은 짧았지만 놀라운 삶을 다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삶을 마음대로 드나드는 작가의 비범한 생각은 거짓말 같은 결과라는 절묘한 반전이 흥미로웠습니다. 작가는 삶의 상실감과 고통을 아주 희극적으로 그러니까 익살스럽게 드러내면서 삶이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더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발한 상상력을 통해 삶의 본질을 파고들면서 종횡무진 달려가는 작가의 글 솜씨로 인해 책 읽는 즐거움이 대단했습니다. 정말이지 ‘에메의 작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꼭 읽어봐야 할 소설이었습니다. 삶이 가벼워지고 통쾌해졌습니다.

사실 이 소설집을 흥미롭게 읽었던 까닭은 표제작인「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에 있었습니다. 얼핏 제목만으로도 이 남자가 사뭇 궁금했습니다. 이 소설은 ‘뒤티유월이라 불리던 그 남자에게는 특이한 능력이 하나 있었다. 마치 열린 문으로 드나들 듯이 아무런 장애를 느끼지 않고 벽을 뚫고 나가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었다.’로 시작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 그 남자의 삶을 엿보고 싶었습니다. 벽(壁)은 단단한 고체(固體)입니다. 이런 벽을 사람이 통과하기란 난감한 일입니다. 알고 보면 사람이란 물렁물렁 하지만 비나 물같은 액체(液體)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액체화된 몸입니다. 동시에 일상의 권태를 한 순간 녹여버리는 즐거운 몸입니다.

뒤티유월의 기발한 자유스러운 모험을 보면서 호모 오피스쿠스, 즉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봤습니다. 사람들은 직장에서 자신의 책상을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하루를 보내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는 지금 보다 더 나은 행복을 위해서 직장에 다닌다고 위로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면 전혀 행복이 묻어나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몇 백번 허망함이 밀려왔다 쏠려갔습니다. 지긋지긋한 외로움으로 가득 찬 사무실의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사람들 마음도 벽이 되고 맙니다. 직장 상사로부터 자존심을 건드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벽과 벽이 충돌하는 위험한 상황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는 ‘어떤 보람을 요구하는 행동’은 ‘자기 안에서 확대의 욕구, 자기 능력을 온전히 발휘하고 자기 한계를 뛰어넘고 싶은 열망’이었습니다. 이런 열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그는 스스로를 ‘가루가루(늑대인간)’이라고 불렀습니다. 야생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그의 본능은 길들여진 삶으로부터의 벗어나려는 진정한 기쁨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온통 벽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경계가 분명하며 금지(禁止)가 곧 삶이라는 것을 을씨년스럽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서로 이름만 다를 뿐 금지의 벽이 가지고 있는 양면이지 않을까요?

또 하나 「생존 시간 카드」도 귀를 활짝 열리게 했습니다. 외면하기에는 아까운 이 단편에서는 섬뜩하게도 ‘쓸모없는 사람’은 알맞게 희생양이 되어도 좋다고 말합니다. 즉 생존 시간 카드는 쓸모없는 사람들을 죽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생존 시간을 줄이자.’는 것뿐입니다. 한마디로 생산적인 사람들을 위해 비생산적인 소비자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에 있어 어떤 사람의 무용성 정도에 따라 일수(日數)를 정해놓고 그 일수만큼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이 분수(分數)에 맞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 라는 절박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곤혹스러웠습니다.

자기만의 분수에 맞는 방식으로 살면서 우리는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겠다.”는 말을 심심치 않게 내뱉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지겹고 무기력해서 그렇습니다. 생각해보니 분수라는 것이 얼마든지 지옥의 늪일 수도 있겠다는 불편함이 오래도록 가슴에 맴돌았습니다. 즉 불행한 사람들에게 행복은 ‘내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아픔을 던져 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시간에 쫓기며 허겁지겁 살면서도 남의 인생을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오스카 와일드는 “분수에 맞는 생활을 하는 사람은 상상력 부재로 괴로워한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르셀 에메의『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를 읽으면서 그 심정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작가는 분수에 맞는 재미없는 삶을 마구 흔들어 놓고 있습니다. 마치 조각난 삶의 퍼즐을 테두리 없이 맞추는 행복한 고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퍼즐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맞출 때마다 우리들 마음만큼이나 딱딱하고 비통한 삶이 미끄러져 내렸습니다. 유리창의 빗방울들이 한데 모이면서 물줄기를 만들며 가슴을 할퀴고 지나갔습니다. 꽉 막혀 있던 현실의 벽들이 한없이 잘게 부서졌습니다.

늘 세계 여행을 꿈꾸는 나에게 가고 싶은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파리에 세워져 있는 에펠탑의 화려한 야경을 오랫동안 사랑해왔습니다. 그런데 프랑스 문학의 희귀한 보석으로 불리는 마르셀 에메를 알게 된 후 비로소 알찬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여행이라고 하면 낯선 곳에 가는 것이라고 버릇처럼 말했지만 따지고 보면 익숙한 것을 보려고 했던 것은 아닌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그래서 작가의 고향인 몽마르트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틈엔가 작가의 생활을 엿보는 것도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여행이라는 것을 습득했습니다. 그곳에는 마르셀 에메를 그리워하는「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라는 동상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은 얼마만큼의 분수(分數)가 필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면 그 남자는 벽으로 드나들었던 것처럼 분수를 얼마든지 분수(粉水)로 액체화하면서 보다 쉽게 “불쌍한 욕망 기계에게 얼마만큼의 물이 필요한가요?”라고 특유의 위트로 반문할 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몰랐던 ‘몽마르트적인 삶’이었습니다. 이제 세상에는 벽을 만드는 사람보다도 벽을 드나드는 남자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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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데이 2012-11-23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우아 님. 저는 문학동네 편집부의 김선희라고 합니다. 올려주시는 리뷰 늘 유익하게 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의 띠지를 새로 제작하면서 오우아 님의 이 리뷰 중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블로그에 등록된 이메일로 보냈으니 확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