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무엇인가?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의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날아가버려 지상적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기껏해야 반쯤만 생생하고 그의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우리 생각에는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은 아틀라스가 그의 어께에 하늘의 천정을 메고 있듯 인간도 자신의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베토벤의 영웅은 형이상학적인 무게를 들어 올리는 역도 선수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중에서
일찍이 정치철학자인 이사야 벌린은 ‘부정적 자유’와 ‘긍정적 자유’를 구분했습니다. 즉 부정적 자유는 ‘벗어나는 자유’(freedom from)입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에서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이와 달리 긍정적 자유는 ‘할 수 있는 자유’(freedom to)입니다. 자신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자유입니다.
이 소설에서 밀란 쿤데라는 삶이 무거운 사람을 역도 선수라고 합니다. 이는 긍정적 자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역도 선수에게 신체적인 무게는 빼놓을 수 없습니다.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리는 데 어느 정도는 체질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의 무게가 무거워야 합니다. 베토벤이 위대한 예술가가 되었던 것도 귀머거리라는 절망을 희망으로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대부분이 당신은 역도 선수가 되고 싶은가요? 라는 질문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맙니다. 물론 위대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여 삶을 무겁게 사는 것은 곤란합니다. 삶의 무거움은 꼭 위대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삶을 보다 가치 있게 사는 방법입니다. 축구 선수도 야구 선수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인생이라는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는 자신의 땀방울과 눈물을 흠뻑 흘려야 아름답습니다. 축구 선수에게 현란한 발놀림과 감각적인 패스 능력은 자신을 돋보이게 합니다. 동시에 경기를 보는 사람들을 단숨에 열광하게 합니다. 이러한 흥분을 느끼면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많은 사람들이 축구 선수가 되려고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축구가 가장 대중적인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오로지 축구 선수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눈을 돌려보면 역도 선수도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눈을 돌려야 할 만큼 역도 선수는 고독합니다. 축구와 달리 비인기 종목인 탓에 화려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지 많지 경기라고 해도 애써 외면합니다. 외면의 끝에서 역도 선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고통의 파도를 힘겹게 넘어서려는 외과의사 토마스가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무지에 따른 결백’을 불안하게 바라봅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공산주의 체제 즉 범죄적 정치 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하는 확신하는 광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을 처형하며 이 길을 용감하게 지켜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천국은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은 살인자였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합법적 살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린 몰랐어! 우리도 속은 거야!”라고 변명합니다.
소크라테스는『변명』에서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지혜로움을 가장하는 것이지 진정한 지혜로움은 아닙니다.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체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죽음이 최대의 선인지 아닌지를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운 나머지 죽음을 최대의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무지는 부끄러운 것이 아닐까요? 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그들은 몰랐을까요? 토마스는 그들이 알았는지 몰랐는지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이 몰랐다고 해서 과연 그들이 결백한가에 있습니다. 가령,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고 쓰디쓴 진실을 끄집어냅니다.
광신자들의 무지는 잘잘못을 떠나 부끄러운 것을 정말로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는 광신자들의 변명에 차라리 오이디푸스처럼 제대로 살아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이디푸스를 이 소설에 나오는 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버려진 갓난아이를 발견한 목동은 아이를 폴리보스 왕에게 데려갔고, 그 왕이 아이를 키웠습니다. 성인이 된 오이디푸스는 산 속의 오솔길에서 마차를 타고 여행 중이던 낯모르는 왕을 만납니다. 두 사람은 말다툼을 했고, 오이디푸스가 왕을 죽였습니다.
그 뒤 그는 이오카스테 여왕과 결혼하고 테베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가 예전에 산에서 죽인 남자가 자기 아버지이고 그가 동침했던 여자가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태의 진상을 알게 되자 그는 바늘로 자기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되어 테베를 떠납니다.
토마스는 광신자들에게 양심의 눈이 있다면 기꺼이 눈을 뽑아버리라고 섬뜩하게 말합니다. 광신자들이 몰랐다고 하여 용서까지 바란다는 것은 악어의 눈물(crocodile tears)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거짓 눈물입니다. 토마스가 이러한 주장을 잡지사에 투고하자 주위에서 기사를 철회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파르메니데스는 가벼운 것이 긍정적이고 무거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밀란 쿤데라는 무거운 것이 긍정적이고 가벼운 것이 부정적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판단에 따라 옳고 그름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역도 선수이거나 축구 선수가 되는 것은 돌이켜보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삶이 가볍지 않고 무겁다는 것이 긍정적인 까닭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값진 승리를 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렇게 까지 머리 싸매며 고민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토마스처럼 “꼭, 그래야만 합니다.”라고 해야 옳은 삶입니다. 대중적으로 이리저리 휩쓸려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신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것보다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무겁게 고민해보는 것도 인생의 또 다른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