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의 탄생 - 유럽을 만든 인문정신
이광주 지음 / 한길사 / 200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달린 디트리히 슈바니트의『교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즉 ‘교양은 인간의 상호 이해를 즐겁게 해주는 의사소통의 양식이다. 요컨대 교양은 정신의 몸, 그리고 문화가 함께 하나의 인격체가 되는 형식이며, 다른 사람들의 거울 속에 자기를 비추어보는 형식’이라고 했다.

살다보면 종종 무례한 사람들로 인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상식이라고는 없는 그들과 의사소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찰력은 결국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는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대 간의 불협화음은 치명적이다. 한마디로 교양은 무용지물이다. 교양을 단순한 앎 정도로만 가볍게 받아들인다면 오히려 우리는 교양이라는 그럴듯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광주의『교양의 탄생』은 대단히 흥미롭다. 이 책은 교양인이 고전에 밝은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의미보다는 ‘경작(cultura)’에 대한 식견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키케로가 말한 ‘교양이 정신의 육성(cultura animi)’에서 비롯된 것으로 ‘교양인은 농민이 밭을 갈 듯 도처에 삶의 푸르름을, 교양의 토포스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양의 토포스를 박하다식하게 두루 살피면서 우리들을 교양의 역사로 안내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20세기에 이르는 동안 교양의 개념을 꺼내 놓는다. 그래서 우리는 교양인의 어제와 오늘에 관해서 풍부한 교양을 쌓는 지적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교양인의 고전적 초상은 고대 그리스에서 등장하는 데 바로 ‘파우스트’였다. 끊임없이 묻고 탐색하는 인간이었다. 로마에 이르면 ‘후마니타스’였다. 파우스트와 후마니타스는 문자의 문화 대신 소리의 문화가 우세했던 시대의 교양인이었다. 그들은 아고라와 같은 광장에서 담론적, 사교적 교양인이었다. 이들의 차이점을 보면 파우스트가 관조적 교양인 반면에 후마니타스는 실천적 교양인이었다.

중세에 이르러 궁정 문화가 싹트면서 귀부인의 사교 문화가 발달했다. 이것이 바로 그랑 다메(귀부인)이다. “사랑은 12세기의 발명이다”라는 프랑스 샤를 세뇨보스의 말처럼 ‘기사와 귀부인의 만남이 낳은 여성에 대한 섬세한 마음가짐과 여성을 고귀한 존재로 받들고 사랑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높인 궁정풍 사랑(armour courtois)'였다. 이러한 궁정풍 사랑은 16~17세기 살롱 문화를 낳았다. 살롱 문화에서 프랑스는 오네톰을, 영국은 젠틀맨이라는 사교적 교양인이 탄생하였다.

한편으로 살롱문화가 발달한 시기의 유렵은 아카데미의 시기였다. 이로 인해 백과전서적 교양인이 요구되었다. 그리고 18세기 과학 혁명을 통해 ‘유용성은 이제 신사 교양인의 세계에서 키워드’가 되었다. 이전에 과학(science)은 ‘값싼 요리의 지식(세네카)’, ‘내가 이 반지에 관해 갖고 있는 지식(세익스피어)’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베이컨이 주장했던 유용성이 학문의 중심이 되면서 과학은 전문적인 지식인, 전문적인 대학(大學)을 발전시켰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전통적 교양지상주의에서 전문성으로 변화되어 온 교양인을 이해할 수있게 된다. 더불어 대학이 전문화된 계기를 알 수 있다. 오늘날 대학의 전문주의에 안타까움은 18세기『백과전서』에서도 찾을 수 있는데 ‘보편적 지식은 이미 인간의 범위를 벗어났다’에 드러났다. 저자 또한 이 책을 통해 대학의 전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저자는 ‘아널드의 교양(liberal)’을 재조명하고 있다. 아널드는『교양과 무질서』에서 ‘교양이 생각하는 완성이란 개인이 고립되고 있는 한 불가능하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손을 잡고 완성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고, 사람들이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고 했다. 이러한 아널드의 주장에 대해 저자는 ‘사회적인 교양’이라고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는 모른다
정이현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때로는 아주 우연히 뭔가를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몇 십 년 만의 폭설이 세상을 하얗게 했다. 하지만 눈이 내릴 때의 행복도 잠시, 길은 탁해지면서 미끄러워졌다. 도로도 마찬가지였다. 승용차 안에서 느껴지는 네 바퀴의 통증은 어느 때보다 퍽퍽했다. 그래서 인지 사이사이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습기에 젖은 듯했다. 듣고 있는 노래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는 없었다. 노래가 끝나고 DJ가 “타르티니의 G단조 바이올린 소나타”라고 했을 때 겨우 클래식이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DJ가 그 곡의 부제가 “악마의 트릴”이라고 했을 때 정이현의『너는 모른다』가 불현듯 떠올랐다.

1713년. 스물세 살의 젊은 작곡가 타르티니는 악상이 떠오르지 않아 괴로워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속에서 악마를 만난다.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온다. 그의 영혼을 팔면 아름다운 음악을 주겠다는 것이다. 타르티니는 이 교환에 응해 제 영혼을 판다. 그러자 악마는 그가 처음 들어보는 놀랍도록 황홀한 선물을 연주한다.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미친 듯이 기억을 되살려 받아 적은 음악이 바로 <악마의 트릴>이다…(p 162) 

이 소설에서 타르티나를 알고 있는 주인공은 열 한 살의 소녀 유지였다. 음악의 신동으로 불리는 유지에게 ‘악마의 트릴’ 하나쯤 알고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는 모른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너’가 모르는 진실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었다. 유지는 <악마의 트릴>을 그저 듣는 것이 아니라 숨 막히는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악마를 끌어안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초구 서래마을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유지가 돌연 사라졌다. 유지가 사라지자 너의 가족들은 두드러져 보일만한 슬픔은 없었다. PC 방이나 친구 혹은 바이올린 레슨 선생님과 같이 있을 거라는 적당한 무관심이 서로 뒤섞여 나타났다. 비록 뒤통수를 한 대 후려 맞은 심정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원점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했던 ‘너’는 냉정을 지키려고 했다. 유지는 ‘너’의 가족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는 유지에게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가 소설을 읽을수록 ‘너’에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작가 말대로 의문이란 고요한 수면으로 흐트러뜨릴 가능성이 있는 돌멩이였다. 작가는 유지 실종 사건과 연루된 너의 가족들의 입장을 번갈아 추적했다. 이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불행한 사고를 당했을 때 나타나는 ‘가족 내 문제’가 투명한 탓이었다. 유지가 피해자인 반면에 너의 가족들은 가해자가 되는 투명한 사건이라고 할까?

이를테면 아버지 김상호는 사업 밖에 모르며 무뚝뚝한 이기심으로 사는가, 어머니 진옥영은 굳이 친정을 핑계로 왜 중국으로 은밀히 가려고 했나, 이복언니 은성은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살며 매번 짧은 사랑에 집착하고 있나, 이복오빠 혜성은 가짜 등록금 영수증을 내밀며 어째서 의대생 노릇을 하고 있나, 등등 그것이다. 반면에 유지는 엄마는 짱깨였고 엄마의 딸인 아이도 짱깨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기 위한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럴수록 내면의 동요를 감추는 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학교에서 바이올린을 핑계로 하여 애들과 어울리지 않아 왕따를 당하면서도 정작 유지는 자기가 혼자라는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작가는 너의 가족들의 황폐해진 삶을 따라가면서 상처뿐인 가족들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다. 어느 누구로부터도 사랑받고 있지 않다는 것은 곧 나 스스로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 소설에서 ‘유지는 뭐랄까, 누군가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였다. 누구에게나 골고루 무심했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인생을 유지는 아예 몰랐다. 알 필요가 없게 태어났다.’라는 우울함이 가족의 화목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나와 너』에서 ‘나와 너의 관계를 제시하려면 동그라미를 하나 그리는 수밖에 없다. 이 동그라미는 너와 관계하지 않는 모든 것을 그 둘레 밖으로 내쫓는다.’라고 했다. 어쩌면 가족은 가장 안전한 동그라미다. 이제껏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다. 하지만 가족마저 맹목적인 사랑에 갇히면 마르틴 부버가『나와 너』에서 말한 대로 ‘사랑이 상대방의 전체를 얻지 못하게 되며 상대방의 부분 밖에 더 보지 못할 때는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랑과 미움의 맹목적 관계’를 리얼리티하게 포착하고 있다. 유지의 실종과 함께 너의 가족들의 아주 일상적인 암묵적 규칙이 서로 겹치면서 가족이라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을 되돌아보게 했다. 어쩌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 놓인 가족은 서로의 정서적 공감을 향유하는 친구도 아니며, 사랑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는 연인도 아닌 ‘기습적으로 도착했던 생명’에 불과한 지도 모른다. 혹은 ‘그냥 식구’일수도 있다.

『너는 모른다』를 읽으면서 악마에게 영혼을 팔면 어떻게 되는 것인지 시종 궁금했다. 앞서 말했듯 사랑이 반쪽이라고 한다면 외로운 가족의 현실은 악마의 자화상이 아닐 수 없었다. 악마의 자화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낸다면 말줄임표(…)이거나 물음표(…?)였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삶이 정지된 슬픔 같은 것이었다. 가장 가까워야 하는 사이의 사람들이 가장 먼 사람이 되는 반쪽 사랑 같은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선비 - 사유와 삶의 지평
김기현 지음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매형(妹兄)과 매형(梅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시집간 손위 누이의 남편을 매형(妹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긋남이 없다. 하지만 매형(梅兄)은 사뭇 다르다. 사람이 아닌 매화(梅) 앞에서 매형(梅兄)을 부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무런 가치도 없는 희극적인 소리라고 여길 만하다. 하지만 예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더 많이 감동을 받고 사유하게 한다. 사람마다 그 표현법이 다르겠지만 퇴계 이황(李滉)은 매화를 보면서 몰아일체(沒我一體)했다. 그래서 매형(梅兄)이라고 불렀으며 그런 매형과 함께 시를 주고받았다.

퇴계 이황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 성리학의 거장이다. 좀 더 가깝게 이야기하자면 선비다. 선비는 조선시대 관료이며 지식인이다. 조선시대의 문화가 유학(儒學)을 실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선비는 유학의 인문학적 소양을 습득해야 했다. 선비에게 사서오경과 제자백가를 빼 놓을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선비의 세계를 탐색하는 것은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말한 사체(四體)와 거리가 멀다. 즉 온몸으로 인식하고(體認), 온몸으로 성찰하고(體察), 온몸으로 시험하고(體驗), 온몸으로 실천(體行)하는 것이다.

김기현은『선비』에서 앞서 말한 온몸의 지식인이 다름 아닌 선비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그리고 선비의 학문은 입신양명(立身揚名)임을 다시금 각인시켜 주고 있다. 이는『효경』에 나와 있듯 자아를 확립하여 진리와 도의를 행함으로써 이름을 후세에 날린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한 진리와 도의는 선비의 표상이며 자존심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명에 집착하여 입신출세(立身出世)라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선비에 대한 편견에 지나지 않다.

이 책의 내용은「자연」,「인간」,「사회」,「죽음과 삶」이라는 네 부분을 주제로 하여 선비의 사상을 온몸으로 조명하고 있다. 첫째,「자연」에서는 자연의 섭리를 원형이정(元亨利貞)으로 보고 있다. 이것과 다른 개념은 생장쇠멸(生長衰滅)이다. 전자가 유기체적 존재론적이라면 후자는 기계적 개체주의적 사고다. 이것은 자연의 본성과 연결되는데 퇴계의 비유를 빌려보면 “마치 한 조각의 달이 강과 바다, 그리고 술잔 속에도 둘 비치는 것”이다. 이는 개개의 사물들은 그 안에 자연의 섭리를 갖는 다는 점에서 원형이정은 보편자, 생장쇠멸은 개별자가 되는 까닭이다.

둘째,「인간」에서는『맹자』가 말한 대장부(大丈夫)를 다루고 있다. 대장부에게 대의명분(大義名分)은 위대한 힘이다. 이는 죽음의 위협에 맞서 삶을 완성시켜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법에 있어 순교나 은둔이라는 소극적인 행적을 두고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맹자』의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외로움 또한 내가 원하는 바지만, 두 가지를 다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하겠다.”에서 찾을 수 있다.

셋째,「사회」에 있어 조선의 신분 사회에서 화해와 조화의 이념이 허위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음양학에 있어 양존음비(陽尊陰卑), 양선음후(陽先陰後)처럼 인간관계도 상하(上下), 귀천(貴賤), 장유(長幼)라는 불평등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음양학이 대립이 아니라 상생이라고 했을 때 인간관계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사회에서 인간관계가 계산적인 이성(理性)이 아니라 서로 교감하고 생동하는 정(情)이라는 것이다.『주역전의』에 따르면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그러므로 교감 속에 형통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넷째,「죽음과 삶」에서는 소크라테스와 조광조를 비교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육체의 감옥으로 해방되는 것이며 저승으로 가는 행복한 여행이었다. 반면에 조광조의 죽음은 위대한 재생이었다. 이 책에 따르면 ‘그는 “죽어서도 썩지 않는” 도덕생명의 씨앗’이었다. 그리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저 씨앗을 각자 자기의 것으로 받아 키워 역시 자타의 삶을 완성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생(新生), 곧 시(始)의 뿌리가 될 종(終)’이었다.

오늘날 유교는 저자 말대로 ‘사람 잡아먹는 전통’으로 전락하고 있다. 서구적인 문명이 화려해서 좋은 것이라면 유교적인 전통은 초라해서 나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유교의 형식주의와 번문욕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겉치레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비의 정신까지 추방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이 책에서 보듯 선비는 단순한 자아가 아니라 역사적 자아를 궁극적으로 실천했다. 선비는 매형(梅兄)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욕망의 경제학 - 인간은 왜 이성적인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가
피터 우벨 지음, 김태훈 옮김, 이인식 해제 / 김영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당신 앞에 두가지 선택이 있다. 하나는 현금 1000만원. 다른 하나는 확률이 50%에 당첨금이 2500만원인 로또1장. 만약 꽝이 나오면 아무것도 받지 못하지만 당첨되면 2500만원을 받을 수 있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현금을 선택한다. 그런데 기댓값에 따르면 비합리적이다. 합리적이라고 하면 기댓값으로 따져봐야 한다. 전자가 기댓값이 1000원이라고 한다면 로또는 1250만원이다. 즉 250만원 더 많다.

위와 같이 우리가 현금을 선택하는 것은 유망이론 때문이다. 경제학의 선택기준인 효용이론과 달리 심리적인 특징을 반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회피(risk aversion)이다. 이득에 있어 사람들의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선호는 확실한 이득을 선호하는 성향을 보인다. 이와 달리 위험추구(risk seeking) 성향도 있다. 이는 확실한 손실보다는 불확실한 손실을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상식 밖의 현상이 발생하는 것일까? 피터 우벨은『욕망의 경제학』에서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은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 즉 경제적 인간이라는 한계를 지적하였는데 케인스는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의 영향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이먼은 ‘완전 합리성’ 개념에 달리 ‘제한적 합리성’개념을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는 ‘프로스텍트 이론(Prospect Theory)’을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저자는 비만의 원인을 ‘유전자가 아니라 자유시장’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우리는 자유시장에서 건강과 복지라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반면에 나쁜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애덤 스미스가 “우리가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것은 고기를 다듬는 사람이나 맥주를 빚는 사람, 혹은 빵을 굽는 사람의 인내심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의 결과인 비만을 방지하는 데 있어 자유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자는 비만은 비이성적인 미각 즉 자제력의 한계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보모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비만의 문제를 개인이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식해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비만에 관련된 각종 사업에 세금 정책을 실시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일종의 부드러운 개입주의다. 사람마다 비만에 대한 ‘탄력성’이 다르기 때문에 적지 않은 반발력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다 효과적으로 비만을 방지하지 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개입주의를 우선시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문화적 변화’다.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 습관의 문화적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주류 경제학이 말하는 ‘이성적인 뇌’ 때문에 관심 밖이었던 행동 경제학이 말하는 ‘파충류의 뇌’를 다시 한 번 주목하게 되었다. 파충류의 뇌는 곧 본능이다. 인간의 비이성적인 행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인간의 본능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1차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2차적인 이유는 ‘문화가 정책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반대로 정책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만을 적극적인 개입주의로 방지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정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의 역설 - 과소비사회의 소비심리를 분석한 미래사회 전망 보고서
질 리포베츠키 지음, 정미애 옮김 / 알마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A. J. 크로닌의『성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처음에는 일 년에 1000파운드만 벌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만한 수입이 들어오자 곧 희망 금액을 두 배로 올리고 그 숫자를 최대치로 잡았다. 그러나 그 최대치에 도달하고서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높여 나갔다. 가지면 더 갖고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갔다면, 그는 결국 파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앤드루)처럼 우리는 물질적 성공만으로 행복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물질적 성공으로 자신의 사회적 가치를 과시할수록 이러한 기댓값은 최대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댓값이 끝이 없다는 것이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돈이 있는데도 역설적으로 그가 불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질 리포베츠키는『행복의 역설』에서 흥미롭게도 과소비사회를 분석하면서 현대인의 불행에 접근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소비주의 3단계를 설득력있게 제시하고 있다. 즉 생산과 대중 마케팅의 1단계, 대중소비사회의 2단계 그리고 과소비사회의 3단계다. 특히 2단계인 대중소비사회는 물질적 안락함으로 인해 풍요로운 사회이며 욕망의 사회였다. 결과적으로 욕망이 양적으로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3단계는 비소비사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대중소비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아무래도 소비사회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단순한 생각과 달리 과소비사회를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상품과 불가분의 관계며 결국에는 소비하게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보다는 저자는 3단계에서는 우리가 수동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능동적인 소비자 즉 ‘소비주체(consommacteur)'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개인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이 아니라 문화적 정체성을 드러내는데 창조적 소비, 감정적 소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과소비사회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비록 질적으로 소비패턴이 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행복의 추구에 대한 또 다른 갈등이 있다. 이것이 곧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행복의 역설’이다. 저자는 5가지 패러다임을 통해 과소비사회의 심리를조명하고 있다.

첫 번째는 페니아(Penia)다. 소비주의 사회는 끊임없이 욕구를 자극하는데 그런 만큼 상대적인 박탈감으로 인한 절망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디오니소스다. 쾌락도시에서는 안락함과 풍요로움의 디오니소스다. 그러나 과소비사회에서는 유희-축제의 가치 기준이 확산되며 사실상 완전히 반디오니소스(anti-dionysiaque)다. 즉 개인이 디오니소tm적인 게 아니라, 개인은 자신의 만족을 위해 공동체를 도구화하며서 디오니소스적인 분위기를 소비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슈퍼맨이다. 실적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잠재력이 주요 결정 요소가 되었다. 완벽에 대한 집착이다.

네 번째는 네메시스다. 과소비사회는 투명한 사회다. 모두 보여주고 모두 말하고 모두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의 사적 영역의 마지막 힘이 바로 질투심이다. 풍요로운 사회일수록 질투가 더 심하며 ‘모방의 지옥’에 따라 행복이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호모 펠릭스다. 대중 미학의 소비시대에서 파괴적인 소비자가 아니라 책임감있는 소비자가 필요하다. 또한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미시 유토피아시대다. 개인의 자아도취에 따른 지혜조차 즉흥성과 감정이라는 ‘가벼운 지혜’가 되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를 역설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즉 정복과 위험에 대한 열정이 높은 사회라는 것이다. 행복의 보편화 현상과 위험한 행동의 증가가 함께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3단계의 과소비사회에서 개인의 위치는 역동적이며 초개인주의다. 그래서 단순하게 소비재에 열광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행복을 정복하면서 재창조한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