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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평점 :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신화의 힘』에서 “인디언들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그대’라고 불렀어요. 들소는 물론이고 심지어 나무, 돌 같은 것도 그렇게 불렀지요. 사실 이 세상 만물을 다 ‘그대’라고 부를 수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우리의 마음 자체가 달라지는 걸 실감할 수 있지요? 2인칭인 ‘그대’를 보는 자아는 3인칭인 ‘그것’을 보는 자아와 다를 수밖에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2인칭인 그대와 3인칭인 그것의 차이는 ‘너와 나’의 친밀함의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2인칭인 그대는 서로가 친밀해서 불편하지 않다면 3인칭인 그것은 친밀하지 않아 불편하다는 것입니다.
김두식은『불편해도 괜찮아』에서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인권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입니다. 온갖 사회적인 문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인권의 확대내지 축소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회의 민주화가 어떠한가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인권은 누구나 주의를 기울일 만한 주제입니다. 인권 대 비인권이라는 기본적인 갈등은 그 동안 억눌려왔던 사회 문제가 표출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인권이라고 하면 아직도 ‘제 몫 찾기’라는 후진성을 타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권을 함께 고민하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저자는 인권에 대한 구조적, 제도적 문제보다는 우리의 삶을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 제목 그대로 불편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가령,「300」은 BC 480년 페르시이왕 크세르크세스가 유럽 정복에 나섰던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영화에서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스파르타 친위대를 이끌고 크세르크세스왕의 264만 대군과 놀라운 전투력을 보이면서 전사합니다. 영화의 서사(敍事)로만 본다면 영웅의 상품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자 말대로 ‘타잔이 10원짜리 팬티를 입고 20원짜리 칼을 차고 노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오락영화를 보면서 불편하다고 토로했습니다. 역사적인 왜곡이야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종주의, 여성차별, 장애인 차별’에 대한 불편함과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왜 영웅은 근육질 남성인데 악마는 장애인이어야만 하는가? 라는 감수성이었습니다.
저자는 이런 불편함이야말로 인권감수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권감수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예수가 말한 황금률이 그 출발점이라고 했습니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말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보는 것’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한 다른 사람을 영화로 본다면 자신과 동일시되는 영화 속 주인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다보면 인권감수성 즉 불편함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이 책을 읽다보면「오아시스」는 ‘빗나간 과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빗나간 과녁이란 ‘별것 아닌 일에 오버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버하는 것은 아닙니다.「오아시스」는 우리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보여준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저자가 불편했던 것은 뇌성마비 장애인 공주는 남자 친구(종두)가 교도소에 가는데도 무기력하다는 것입니다. 장애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회적 편견이 너무나도 계산적으로 작용한 나머지 희생양이 되고 말았습니다. 뇌성마비는 지적인 면에서 일반인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외면하지 않았다면 그들의 사랑은 억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사회적 편견의 억울함을 뒤집어 보는 역설에서「밀양」을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밀양」을 ‘놀라운 기독교 영화’라고 했습니다.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결심하고 교도소를 찾은 신애는 살인범으로부터 “나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고백을 듣고는 쓰러졌습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용서할 수 있느냐?’라는 강한 의문은 하나님에 대한 거부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낸 세금으로 살인범을 먹여 살려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에 대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인의 보복 심리의 장단에 맞춘다면 국가가 존재할 이유가 무색해집니다. 누군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 합리적이고 공정한 형벌로 죄의식을 성찰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인권의 문제가 곤란한 것은 인권이 인과성이 아니라 양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과성은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만으로 문제만을 부분적으로 다루는데 그칩니다. 그러나 양면성은 인권의 당위적 가치의 논리를 바로 세우는 기준을 제시해줍니다. 가끔씩 시청이나 광화문 주의의 도로에서 시위를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가로막는 경찰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중에 우리는 누구의 입장에 서야 할지가 어렵습니다. 불투명하다는 것은 사회가 무질서해질 수 있으며 분열되기 쉽습니다. 더구나 언론이나 뉴스는 그들의 행위를 불법이라고 떠들어대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저자는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의 이익’으로 해석하라고 합니다.「빌리 에이전트」에서 보듯 탄광노동자들의 파업과 단결은 약자의 이익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노동자들에게 복잡하게 얽힌 생계의 실타래를 한 올씩 풀면서 해고, 비정규직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끝으로 인권의 종착역에서「해마다 4월이면」,「호텔 르완다」에서 끔찍한 장면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제노싸이드 때문입니다. 제노싸이드란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집단의 전체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로 범해지는 모든 행위를 말합니다. 이러한 학살의 주범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학살의 주범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국가의 거대한 씨스템이 인권의 함정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 발목을 잡는다는 것입니다. 제노싸이드의 목표는 아주 단순합니다. 나 아닌 상대를 ‘그것’으로 여겨 무조건 죽이는 것입니다. 후투족이 투치족을 ‘바퀴벌레’로 부르면서 비인간화로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런데 후투족과 투치족의 DNA의 차이는 0,05%만이 다르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이 얼마나 유효할까요?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나 제대로 알지 못했던 인권의 다양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권이라는 것이 그저 한 번 보고 마는 일회용 영화는 아닐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이 책의 저자는 또 다른 문화를 읽어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편함’이었습니다. 인권은 늘 뜨겁습니다. 무상급식을 놓고 많은 사람들이 설전(舌戰)을 벌이고 있습니다. 설전을 보고 있으면 우리는 누가 괴물이고 누가 약자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혹 약자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성애가 아니라 동성애(同性愛)라는 차별을 당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인권의 문제에 있어 이성이냐 동성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저자 말대로 무의미합니다. 무엇보다도 서로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친구를 ‘그대’라고 부를 수 있고 그대에게 ‘불편해도 괜찮아.’라고 격려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