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근과 채찍 - 목표로 유인하는 강력한 행동전략
이언 에어즈 지음, 이종호.김인수 옮김, 최정규 감수 / 리더스북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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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apple)만큼 우리의 선택에 끼친 과일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善惡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황금사과,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의 사과다. 그리고 최근 경제학 분야에 있어 리처드 탈러의 사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다음과 같이 사과 선택 문제를 냈다.

첫 번째 선택은 다음과 같다.
(A) 일 년 후에 사과 1개 받기
(B) 일 년이 지난 바로 다음날 사과 2개 받기

두 번째 선택은 다음과 같다.
(C) 오늘 사과 1개 받기
(D) 내일 사과 2개 받기

그는 선택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경제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면 (B)와 (D)를 선택할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B)와 (C)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언 에이즈의『당근과 채찍』을 보면 리처드 탈러의 사과 선택 실험에 나타난 현상이 무엇 때문인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Hyperbolic discounting)이다. 즉 사람들은 보상이 눈앞에 가까워질수록 작더라도 더 빨리 받는 쪽을 선택한다. 반면에 보상이 지연되면 상대적으로 가치를 덜 감소시킨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당장은 사과 1개를 선택하고 먼 미래에는 사과 2개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태 역전은 ‘동태적으로 비일관된 선호 현상’으로 불리는데 저자에 따르면 경제학에서 벌어지는 행동주의 혁명을 이해하는 열쇠였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경제적 유인(誘因)은 ‘당근과 채찍’이다. 당근이 어떤 행동에 대한 조건부 보상이라고 한다면 채찍은 어떤 행동에 대한 조건부 처벌이다. 보상과 처벌은 경제적 유인의 기본 요소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사람들의 비이성적인 선택을 설명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당근과 채찍은 더 이상 성공적인 유인을 만들 수 없게 된다. 그래서 행동경제학에서는 ‘약속 실천 계약’이 최선의 유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둘의 차이는 선택의 유무에 있다. 당근과 채찍은 보상과 처벌에 따라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약속 실천 계약은 억제력 때문에 미래에 잘못된 선택을 하지 못하도록 채찍을 설정하여 선택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약속 실천 계약이 가치 있는 이유를 보다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앞서 말한 과도한 가치폄하를 하는 사람들은 전형적인 ‘갈등 회피자’다. 어떤 행동을 하는 데 있어 그들은 ‘미루기’와 ‘미리 하기’라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이러한 한계 상황에서 약속 실천 계약은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목표로 유인하는 강력한 행동전략’이 된다. 이는 자신의 행동의 성공 가능성을 극대화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데도 아주 유용하다. 여기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정보와 유인’에 중점을 두었다면 행동경제학에서는 리처드 탈러가 말한 ‘선택설계’가 중점이 되었다. 전자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는 돈이 중요했다. 반면에 후자는 다른 사람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약속 실천 계약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는 3개의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3개의 문제란 어떤 것으로, 누구에게, 어떤 결과를 말한다. 첫 번째 어떤 것으로는 실질적으로 약속이 정확히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다. 이 부분에서 고려해야 할 사항은 너무 강한 채찍은 참여 제약을 부르기 때문에 채찍의 크기를 정할 때는 ‘중간점’을 찾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손실회피(loss aversion)’ 경향이 있는데 손실이 이익보다 2배나 더 커 보이기 때문이다. 가령, 50달러를 걸면 10퍼센트의 금연 가능성이 있고 200달러를 걸면 80퍼센트의 금연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금연 가능성의 확률이 ‘탄력적’이라고 한다면 돈을 많이 걸수록 돈이 절약되는 것이다. 그러나 판돈의 액수가 과하게 많아지면 금연 가능성의 확률은 ‘비탄력적’이 된다. 그만큼 더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누구에게는 약속 실천 계약의 상대바이 누구여야 하는가에 있다. 우리가 어떤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 다른 사람들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들은 경쟁자이며 비판자다. 이 부분에서는 다른 사람을 따라하게 하는 ‘또래 압력’과 ‘자기 협박’의 놀라운 효과를 알게 된다. 이러한 역반응은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결과다. 즉 유인은 유인 대상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람들을 목적과는 반대로 행동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채찍의 역반응을 살펴보면 어린이집들이 부모가 늦게 올 경우 벌금을 부과했을 때 오히려 부모들은 늦게 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효과적인 방법은 부모가 늦게 올 때마다 어린이집에서 가장 가난한 교사가 그 지각한 부모에게 돈을 주는 경우다. 왜냐하면 이러한 유인체계는 부모들에게 불공정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어떤 결과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말한다. 약속을 거부하기에는 너무 좋은 당근이면 되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나쁜 채찍이면 된다. 그러나 때로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한편 약속 실천 계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음다잡기, 규칙적인 자기 감시, 자신에게 가장 현실적인 목표, 성공했다는 착각, 최적의 탄력성이 중요하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목표를 잘게 쪼개야 한다. 이른바 비둘기 프로젝트(Pigeon Project)로 불리는 스키너의 단계적 접근법은 ‘결국’(Eventually)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즉 동물들이 원하는 복잡한 행동을 ‘결국’할 때까지 기다리는 대신 고개를 까닥거리는 간단한 동작을 할 때까지만 기다리고 점점 원하는 동작과 연결시키는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약속 실천 계약의 문제점을 보완하고 있다. 약속 실천 계약의 문제점은 바로 자제력이다. 자제력이란 무한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준이나 한도를 넘어서면 고갈되고 만다. 순진한 계약자들은 프랭클린이 말했듯이 “하나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하다 다른 잘못을 저지르는” 결과를 초래한다. 가령,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줄이려다가 인터넷에 빠지는 경우다. 이는 ‘중독 전이’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제력 고갈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자율 규제 능력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이 책은 기존의 당근과 채찍에 대한 통념에서 벗어나 최선의 약속 실천 계약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주고 있다. 앞으로는 행동경제학에 있어 최선의 약속 실천 계약이 화두가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저자가 생각하는 가장 가치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변화시키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즉 당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갈등회피자가 아닌 ‘자기강박적 약속자’가 최고의 당근과 채찍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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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의 서 1 문학동네 청소년문학 원더북스 1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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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숨 쉬듯, 저 멀리 숨을 내뿜으며 땅도 숨 쉰다. (…) 땅이 인간처럼 숨 쉰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땅이 숨을 쉬듯이 괴테가 숨을 쉰다고 말해야 한다. 괴테는 땅이 충만한 대기(大氣)로 숨을 쉬듯이 폐를 힘껏 넓혀 숨 쉰다. 숨 쉬는 영광에 도달한 자는 우주적으로 숨 쉰다.
                                                                                    바슐라르,『몽상의 시학』 중에서

미야베 미유키의『영웅의 서』를 읽는 동안 괴테가 땅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는 책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숨을 쉬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책처럼 숨을 쉰다? 만약 책이 나처럼 숨을 쉬었다면 나의 까다로운 독서에 다가서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책처럼 숨을 쉬는 것이 즐겁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 온갖 글자들로 가득 찬 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곧 ‘있어야 할 이야기’라는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있어야 할 이야기는 ‘인간이 가는 걸음 뒤에서 따라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지나간 뒤에 길이 생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눈에 화려하게 보이는 이야기를 선택하고 그것을 모방하려고 한다. 작가는『영웅의 서』를 통해 인간의 마음이란 ‘이야기’라고 하면서 사뭇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기에서 말한 이야기는 글자들이 만들어낸 단순히 재미가 있다거나 없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보다는 이야기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때로는 정의, 때로는 승리, 때로는 성공이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 사람이 얼마나 부조리한 존재인지, 얼마나 사악해질 수 있는 존재인지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는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버젓이 일어나곤 한다. 작가는 그저 믿을 수 없는 사건들이 ‘이야기에 살려 한 죄’라는 강렬한 욕망을 한껏 뿜어낸다고 했다.

『영웅의 서』에서는 놀랍게도 반 친구 두 명을 칼로 찌르고 도망간 완벽했던 오빠 때문에 더 이상 학교에 갈 수 없는 어린 소녀 유리코가 나온다. 가족의 단란함이 하루아침에 산산이 부서져버려 가슴이 요동치던 유리코는 오빠의 방에서 책의 정령인 빨강 책, 아쥬로부터 오빠는 “너무나 빨리 그것에 씌고 말았어.”라는 비밀을 알게 되었다. 아쥬가 말한 그것은 ‘영웅’이었다. 그러나 영웅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회자되는 이야기였다. 더구나 오빠가 그렇게 무서운 것을 저지른 것은 영웅이 오빠에게 들러붙어 나쁜 짓을 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보통 영웅이라고 하면 나쁘지 않다. 그런데도 아쥬는 영웅이 나쁘다고 했다. 정말로 영웅이 무서운 존재라고 한다면 영웅에게 홀려버린 오빠에게 잘못은 없다는 게 유니코의 소녀다운 생각이었다. 유니코 말대로 오빠는 피해자이며 희생자다. 정말로 그럴까?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라는 말은 듣기에도 위험하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말을 꺼내놓을 수 있는지 아픔이 느껴졌다. 더구나『영웅의 서』에서 완벽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의 히로키마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다. 이를 계기로 한 순간 잃어버린 것들이 새삼스럽게 드러났다. 우리가 당연한 듯 누리고 있을 동안 알 수 없었던 것들이 터무니없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말이다. 행복은 얼마나 약하며 기쁨은 얼마나 쉽게 빼앗기는지, 그리고 사악한 힘은 얼마나 교묘하게 사람의 마음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히로키를 변화하게 만든 사악함의 정체가 ‘영웅’이라고 밝혀지면서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사건의 내막은 이랬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여자 친구 미치루를 위해 히로키는 영웅다운 행동을 했다. 하지만 그것이 히로키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이 되었다. 히로키의 영웅다운 행동은 다른 사람에게 복수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그들의 복수는 히로키에게 복수의 끝으로 되돌아 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영웅에 대한 갈망과 강박이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영웅의 정체는 뭘까? 소설에 따르면 영웅의 양면성이 문제였다. 이것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영웅의 씩씩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영웅의 초췌한 모습으로 여겨졌다. 모든 사물에는 앞과 뒤가 있듯 영웅에게도 빛과 그림자가 따라다녔다. 이러한 빛과 그림자는 따로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감한다는 것이다. 마치 다른 한쪽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열정으로 말이다. ‘빛이 강해지면 그림자도 짙어진다.’ 그래서 영웅의 빛이 정의라고 한다면 영웅의 그림자인 불의가 서로 경쟁하면서 어느 순간 사람의 혼을 빼앗아버린다. 겉만 봐서는 히로키의 복수의 끝은 정의롭다고 하겠지만 사실상 불의라는 것이 없이는 발현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슬픔이라고 할까.

그런데『영웅의 서』는 앞서 말한 대로 초등학교 5학년 유리코의 흥미로운 모험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다. 유리코는 행방불명된 오빠를 걱정하는 모습은 여느 아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유리코는 여자이지만 그렇다고 약하지는 않았다. 유리코에게는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같은 용기가 있었으며 ‘이름 없는 땅’에서 기이한 책과 싸웠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오직 오빠를 구하고자 하는 바람뿐이었다. 오빠는 영웅의 그림자라고 부르는 ‘황의(黃衣)를 입은 왕’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당하고 있다. 바로 영웅의 사본인『엘름의 서』의 주문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유리코는 오빠없는 세상은 불안하다고 하면서 ‘신비한 새로운 세계’(테두리)로 접어들었다. 이 테두리에서 유리코는 인간과 책이 싸우는 원인이 봉인된 영웅이 파옥(破獄)되었음을, 싸움을 멈추기 위해서는 다시 ‘죄업의 대륜’을 타고 영웅을 봉인해야함을, 하지만 무명승으로 부터 결코 영웅은 봉인될 수 없음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영웅이 봉인될 수 없다는 것은 유리코에게 커다란 아픔으로 아른거렸다. 오빠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황의를 입은 왕에게 매료된 ‘최후의 그릇’이기는 해도 유리코에게는 언제나 오빠였다.『엘름의 서』에 무슨 사연이 들어있는지 확실히 알 지 못했지만 오빠는 커다란 분노를 발산하고 싶었으며 이런 욕망이 영웅이라는 자신보다 더욱 큰 존재를 만나게 했다. 비록 테두리 영역에 사는 자들은 이름 없는 땅을 순환하는 이야기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더라도 결코 유리코가 절망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테두리에서 오빠는 없다. 오직 무명승 즉 ‘죄업을 진 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무명승에서도 미숙한 무명승인 오빠가 진짜 무명승이 되기 위해서 지금 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정화는 ‘맑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는 희망 같은 것이다.

누구나 히로키가 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성장과정에서 큰 상처를 당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순간『영웅의 서』에 나오듯 영웅의 어두운 황의를 입은 왕에게 이끌리게 된다. 무명승이 될 수 있겠다는 두려운 마음에 가슴 아래께가 묵직했다. 무명승은 ‘하나이자 만, 만이자 하나’였다. 다시 말하면 ‘아침에 한 아이가 아이를 죽이는 세계는, 저녁에 만 명의 군사가 살육을 하기 위해 내닫는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하나의 정의가 만 개의 불의이며 만개의 불의가 하나의 정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하나 히로키의 복수심이 운명의 장난인지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잘못인지 파문을 일으켰다. 일찍이 수잔 손택은『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질병은 두 가지 가설을 통해 확대된다고 했다. 첫 번째 가설은 모든 사회적 일탈 행위가 질병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가설은 모든 질병이 심리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잔 손택의 논리대로 한다면 히로키의 불행이 복수심을 낳았고 복수심이 영웅에게 홀려버린 것이다.

복수심이 질병이라고 한다면 우리들 상식으로는 치료해야만 한다. 혹은 선은 강하고 악은 약하다는 흑백논리로 영웅에 기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작가는 ‘기성세대의 판결’에 대해 『영웅의 서』로 기묘하게 저항했다. 기성세대의 판결을 따르자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좀 더 편한 해결이며 굳이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영웅의 서』는 대단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오빠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오빠를 용서할 수 있다.’는 것과 ‘울어도 되지만, 절망해선 안 돼.’라는 메시지를 책의 정령들의 입을 빌려 어린 소녀 유리코에게 타이르듯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작가에게 뭔가 새로운 해결책을 기대했던 사람들에게 용서와 절망해서 안 돼, 라는 것은 나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답 없는 세상에서도 우리들이 숨 쉬는 것은 다 아는 것들을 반복하며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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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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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싸움이 있겠지만 말싸움만큼 시비(是非)를 나누기가 어려운 것은 없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보면 시비가 또 다른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시비의 결과가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정의(justice)란 무엇인가? 를 되새기곤 한다. 정의는 불합리한 세상에 맞서는 쉽고 가벼운 방패다.

하지만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고자 한다면 단순한 방패만으로는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엇인가』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강의를 고스란히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저자는 정의에 대한 논쟁거리를 재미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면서 정의에 관한 주요 지식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가 말하는 정의는 ‘행복, 자유, 미덕’의 트라이앵글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행복에 있어 우리는 배고픈 돼지가 낫을까?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을까? 라는 오래된 질문을 만나게 된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만족하는 돼지보다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이,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만족하지 못하는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했다. 행복에 있어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말했다. 하지만 최대 다수의 이면에는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될 수 있다. 그래서 밀은 이러한 순응적인 삶을 반박했다. 그는 “욕구와 충동이 온전히 자기만의 것이 아닌 사람은 인격이 없는 사람이며, 그것은 증기기관차에 인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고 했다.

다음으로 자유에 있어 과연 우리 소유물은 우리 마음대로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은 그렇다고 한다. 가령, 부자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면 부자는 강요받는다. 이것은 부자가 자신의 소유물을 쓸 권리를 침해당한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에게 경제적 불평등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는 이를 반박했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이성적 존재이며 자율적 존재’다. 우리는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 칸트가 말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은 ‘주어진 목적에 걸맞는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를 선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의의 측면은 미덕(도덕)이다. 우리는 미덕을 통해 좀 더 깊이 왜 정의로운 사람이어야 하는가? 에 대한 방향과 대안을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행복, 자유와 달리 미덕은 심판을 기초로 하고 있다. 심판은 도덕적 추론을 어떻게 판단하는 문제다. 이 때 도덕적 딜레마는 도덕 원칙이 충돌하면서 생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정의로운 삶의 조건을 파악할 수 있다. 

아리스토델레스에 따르면 정의는 ‘텔로스(telos:목적)’이다.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가령, 플루트를 분배할 때 최고의 플루트는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에게 도덕은 ‘인간 그 자체를 목적으로 여기고 존중하는 것’이었다. 또한 칸트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를 ‘의무’에서 찾고 있다. 칸트가 말한 ‘의무 동기’란 올바른 이유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말하며 도덕의 최고의 원칙이지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존 롤스는 ‘도덕적 임의성 배제 논리’를 펼쳤다. 그는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면 그 경기는 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겉으로는 기회 균등이 긍정적으로 보장되는데도 불구하고 소득과 부가 불평등한 이유는 도덕적 임의의 현실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즉 능력에 상관없이 계층과 환경에 따라 기회가 전혀 균등하지 않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의 도덕적 임의성은 ‘도덕적 자격’에 대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즉 롤즈에 따르면 도덕적 자격은 노력의 결과가 아니며 따라서 게임의 규칙이 정해졌을 때 생기는 ‘합법적 권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마이클 샌덜은 존 롤즈의 한계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도덕적 개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에게 자유란 내가 자발적으로 존재한 의무만을 떠맡는 것이다. 즉 기존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목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 조상의 잘못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는 없다. 어디까지나 그들의 죄이지 내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공동체주의자들의 주장은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 부담을 감수하는 자아란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와 달리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의 도덕적 요구를 받아들인다.『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매킨타이어가 인간을 자발적 존재가 아닌 ‘서사적 존재(이야기하는 존재)’로 보는 궁극적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해야 하는 것인데 전체의 일부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공동체주의자라고 불리는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하고 있다. 행복, 자유 그리고 미덕이다. 이중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미덕이다. 정의의 실현이 곧 미덕이며 미덕은 곧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좋은 삶은 아리스토텔로스에 따르면 ‘최고의 삶’이며 저자에 따르면 ‘공동선(公同善)’이다. 따라서 저자는 우리가 공동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며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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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 2017-10-14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배고픈 돼지가 아니라 배부른돼지같아요
 
행복의 조건 - 하버드대학교. 인간성장보고서, 그들은 어떻게 오래도록 행복했을까?
조지 E. 베일런트 지음, 이덕남 옮김, 이시형 감수 / 프런티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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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은 사람은 정말로 행복할까? 행복하기 위해 돈을 버는데도 정작 돈과 행복은 아주 역설적이다. 남들보다 더 좋은 자동차나 집을 가지려는 경제적 부(富)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하지만 계속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경제적부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진다. 이로 인해 아무런 만족 없이 운전대를 잡고 있을 뿐이다. 이를 사회 심리학지인 도널드캠벨(Donald Cambell)은 ‘쾌락주의의 방아 찧기’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슈테판 클라인은『행복의 공식』에서 ‘삶에 대한 심리적 만족을 이루는 마법의 삼각형’을 흥미롭게 제시했다. 즉 시민의식, 사회적 균형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다. 이 세 가지의 만족감이 마법의 삼각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여 말하길 ‘행복한 삶은 운명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 무언가를 행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삶의 운명에 있어 젊음은 무언가를 하기 좋은 시기다. 반면에 노년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다반사다. 또한 젊음은 육체적으로 건강하지만 노년은 건강하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나 단순히 나이의 많고 적음으로 육체적으로 질병에 걸리지 않는 상태를 구분하는 것은 이분법적인 사고다. 세계보건기구(WHO) 창립자들은 ‘건강이란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행복한 상태’라고 말했다. 젊은 사람이 우울증에 걸린다거나 노년인데도 활력이 넘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하면건강하고 불행하면 병약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행복은 젊음 혹은 노년이라는 숫자상의 나이에 있지 않다. 그 보다는 ‘아름답게 나이 드는 것’이 매우 중요한 가치다. 조지 베일런트가『행복의 조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Ageing Well’이었다. 하버트대학교성인발달 연구소에서 ‘성공적인 노화’와 ‘인간의 행복’에 관한 통찰력에 선보인 조지 베일런트는『행복의 조건』에서 삶을 관통하는 또 다른 행복의 공식을 알려주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전향적 연구를 통해 ‘행복의 조건’을 두루 살펴보고 있다. 전향적 연구란 사람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을 청소년기부터 꾸준히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기억력에 의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 책의감수를 맡은 이시형은 저자의 연구에 깊이 공감하면서 ‘하루, 한 달, 일 년이 모여 이루는 인생이란 단순히 그 시간들의 합 이상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고 했다. 

저자는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세 개의 관문’이라는 조건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관문은 ‘긍정적 노화의정의’다. 긍정적 노화란 사랑하고 일하며 어제까지 알지 못했던 사실을 배우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남은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인의 여섯 가지 발달과업’을 수행해야만 한다. 즉,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며‘친밀감’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리고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적 안정’과  다음 세대를 배려하는‘생산성(generativity)’ 과업을 이뤄야 한다. 또한 과거의 전통을 물려주는 ‘의미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며 죽음 앞에서 ‘통합’ 해야 한다. 

다음 두 번째 관문은 ‘건강하게 나이 들기’다. 이는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신체적 건강만큼이나 개인이 느끼는 주관적 건강이 보다 중요하다.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 저자가 제시하는 7가지 요소는 비흡연 또는 젊은 시절에 담배를 끊음, 성숙한 방어기제, 알코올 중독 경험 없음, 알맞은 체중, 안정적인 결혼생활, 운동, 교육년수 등이다. 그러나 7가지요소뿐만 아니라, 삶을 즐기는 놀이와 창조성을 발휘해야 한다. 또한 지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마음의 평온함을 얻기 위해 종교가 아닌 ‘영성’에 대한 믿음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가 모방적이며 외부적이라고 한다면 영성은 나의 능력, 희망,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관문은 ‘품위 있게 나이 드는 것’이다. 첫째, 다른 사람을 소중하게 보살피는 것이다. 둘째,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몸이 아플 때면 의사를 찾았고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다. 셋째,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자율적으로 해결한다. 넷째, 유머감각을 지녔으며 삶을 즐길 줄 알았다. 다섯째, 과거를 되돌아볼 줄 알았고 다음 세대로부터 끊임없이 배우려고 노력한다. 여섯 째, 오랜 친구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일찍이 키케로는『노년에 관하여』에서 노년에 관한 최선의 무기는 학문을 닦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네. 미덕이란 인생의모든 시기를 통해 그것을 잘 가꾸게 되면 오랜 세월을 산 뒤에 놀라운 결실을 가져다준다네. 왜냐하면 미덕은 생의 마지막순간에도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 아니라, 훌륭하게 살았다는 의식과 훌륭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기억은 가장 즐거운 것이 되기 때문이네, 라고 했다. 그러면서 키케로는 노년의 한계는 정해져 있지 않다고 했다. 즉 누군가 맡은 바 임무를 능히 수행할 수 있고 죽음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는 노년에도 계속 해서 살 권리가 있다고 했다. 

정말로 노년에도 계속 살 권리가 있을까? 조지 베일런트는『행복의 조건』에서 긍정적으로 치유하고 있다. 인생 후반에 다다를수록 우리가 삶의 완성도를 높여야 하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이유인즉 아름답게 나이 든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만들고 그 힘으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의 삶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 가늠해보는 것도 행복을 회복하는 좋은 지혜다.

과거와 달리 우리는 100세 이상 살 수 있게 되었다. 오랜 산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나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50세 이전의 삶’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거듭 주장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50세 이전의 삶을 잘 활용하는 방법만 알고 있다면 세네카가 말한 것처럼 ‘노년은 온통 즐거움으로 가득한 새로운 세계’가 되지 않을까? 노년의 삶은 나약하고 벌거벗은 삶이 아니었다. 

이 책의 미덕은 부나 명예가 행복의 조건은 아니라는 것을 과학적인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라고 명쾌하게 깨닫게 해주고 있다. 삶에서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에 알맞은 생활 지침을 담고 있다. 행복이라는 크나큰 갈망을 더욱 사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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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할까, 어떤 여자가 횡단보도를 건너가고 있다. 숨 가쁘게 달리던 차들은 멈춘 체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녀 혼자만이 횡단보도를 만보객(萬步客)마냥 걷고 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도시인이 만보객으로 느릿느릿 걷는 것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니리라. 허공을 걷는 것이다. 혹은 「죄와 벌」에 나오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네바 강을 배회하는 혼란스러움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슬픔에 대해서는 정작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오직 그 만이 자신의 슬픔을 우울하게 위로할 뿐이다. 정말일까?

6년 만에 김영하는 신작 소설집『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를 가지고 돌아왔다. 6년동안 작가가 세상에서 보고자 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아마도 도시의 평범한 일상을 세밀하게 펼쳐놓고 싶었던 같았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 21세기 삶은 도시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책의 표지에 나와 있듯 정차(停車)된 것만큼이나 번잡하며 그 간격이 좁아지는 데 있다. 그럴수록 우리는 도시에서 버림받는 자들의 가혹한 운명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망은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런데 타락은 우리들의 진짜 삶일까? 도시인의 타락을 바라보는 김영하의 시선은 지극히 단순하다. 그러나 E. A. 포우 말대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치울 수 있는 장르인 단편소설들이라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만으로 이미 소름이 돋았을’거라는 박민규의 엄살은 아주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산문은 벼락같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따분하지 않다는 것이며 쿨하다. 굳이 우리 시대의 굴곡이 무엇인지 또박또박 따지지 않았다. 그의 날렵한 산문은 작가 말대로 ‘자연스럽고 막힘’이 없었다. 그래서 ‘내 마음에 조용히 깃든 이 내밀한 유쾌’함에 우리들 가슴이 몹시 흔들리게 된다.

세상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상실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감지할 수 있다. 그 어딘가에서는 분명 멈출 수 없는 붕괴가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세상이 갈수록 건조해지고 탁해지고 있다. 옛날 같으면 전혀 꿈꿀 수 없는 신비로움이었다.「로봇」에서 수경은 황사 때문에 모래폭풍이 부는 도시를 ‘멋진걸’이라고 고백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 때문에 모두가 함께 고통을 겪는 실로 공평한 재난’이라고 했다. 수경의 상실감은 돈을 받고 사장과 이상한 관계를 맺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수경에게 스스로를 로봇이라고 말하는 남자가 나타난다.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정말로 로봇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남자는 사랑하는 대상 즉 수경을 발견하는 순간 자신이 로봇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3원칙’을 들려주었다. 즉, 제1조. 인간을 헤쳐서는 안 된다, 제2조.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조.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로봇3원칙 딜레마에 빠질 때도 있는데 수경이 남자에게 사랑을 고백할 때 그랬다. 그러자 남자는 떠나고 만다. 죽도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수경의 말이 비수처럼 꽂혔다. 이것은 분명 로봇3원칙의 딜레마였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로봇」과 달리「밀회」에 나오는 남자는 스스로를 ‘해파리’라고 했다. 허파를 갈망했던 남자는 ‘공기의 그 허약한 물질성마저 그리워’ 했다. 그 남자는 공기의 힘으로 세상을 유영했다. 그래서 왜 하필이면 해파리일까, 궁금했는데 아마도 허파 때문이라는 것이 선명해졌다. 공기를 많이 마실수록 투명해지는 것이다. 그런데「밀회」에서 이 남자는 제목대로 ‘밀회’를 하고 있다. 해파리의 밀회라고 불러도 큰 무리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해파리가 마신 공기는 더 이상 윤리적이지 않았다. 사랑일까, 비극일까? 라는 진부한 혹은 경건함은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밀회」의 두 남녀에게 ‘정신적 정당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쩌면 이것은 밀회를 나누는 여자의 남편이 앓고 있는 ‘카푸그라 증후군’이라는 특이한 감정이 농후했다. ‘아주 가까운 사람을 낯선 사람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의 남편에게 여자는 가짜 아내에 불과했다. 가짜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밀회를 나눈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이혼할 필요가 없었다. 진짜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욕망의 이면에는 친밀감이 사라진 외로운 존재의 꿈이 담겨져 있었다. 즉 밀회는 단순한 바람이 났다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인간의 버팀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는 ‘친밀감에 대한 희구가 뒤섞인, 기인한 감정의 칵테일 같은 것’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런가 하면「악어」는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허약하고 별 볼일 없는 작은 소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만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키는 눈동자’였다. 그런데 변성기(變聲期)가 찾아오면서 그의 일생은 ‘날카롭고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의 노래는 ‘모두에게 자기 생애 가장 슬픈 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변성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나약함에 대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의 변성이 목소리로 끝나지 않고 변성(變性) 즉 악어(鰐魚)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악어의 정체는 뭘까?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변성기를 겪는 남자에게 악어(樂語)가 되는 것은 최고의 복수일 것이다. 비록 어느 순간 악어(惡語)로 나락하게 될지라도.

만약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악어(惡語)를 말한다면「퀴즈쇼」에 나오는 동국처럼 실패하고 말 것이다. 동국은 ‘퀴즈쇼’에서 마지막 답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동국의 경쟁자였던 은이의 담담한 얼굴과 마주치며 전혀 뜻밖의 오답을 말해버렸다. 은이는 동국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동국은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렇게 태연할 수 있는 것일까? 사이코패스의 희생자로 성장한다는 것은 저런 것일까? 그때의 불행으로 스물 살에 벌써 다 늙어버렸다는 그녀의 입에서 동국에게 ‘소양강 댐’이라는 시시한 말을 그냥 던진 것은 아니었다.

이 소설집에서 운명의 모호함에 대한 또 하나의 막막함은「조」였다. 작가는「조」를 ‘이것은 타락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하였다. 우리 모두 타락해 있으면서도 이것을 모른 채 서로 순수하게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을 증폭하고 있다. 그럴 때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조」에는 필리핀에서 양봉업을 하는 사람의 성공과 실패라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양봉업자에게 필리핀은 아마도 천국일 것이다.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그가 졸지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약삭빠른 벌들이 필리핀에 겨울이 없다는 걸’ 알아버렸다. 그래서 굳이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제살 갉아먹는 타락은 비극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하는 도시인들의 가짜 사랑, 타락, 성적 욕망이라는 내면의 고통을 영화처럼 찍어내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들이 영화같다고 하는 것은 바흐친의 따르면 ‘일상예찬론’이다. 그만큼 동시대적 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발터 벤야민에 따르면 ‘정지 상태의 변증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명예살인」에 나오는 ‘작은 뾰루지로 시작한 트러블’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집을 읽어보면「퀴즈쇼」에 나오는 ‘인간은 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단편소설들의 반전(反轉)에는 타인의 마음을 충분히 상상해보게 했다. 김영하가 말하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한 호기심은 뭐랄까, 아무도 모른다에 대한 찬란한 채찍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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