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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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라는 말이 연금술사처럼 쓰일 데가 있다. 공부벌레, 일벌레 등등 어떤 일에 미쳐야만 벌레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중에서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책벌레’라는 말은 반가우면서도 눈물겹다. 책과 동고동락한 세월은 곧 삶의 나침반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청나라 소설가 포송령(蒲松齡)은 ‘어떤 눈먼 승려가 종이 위의 글자 냄새만 맡으면 바로 그 글에 담긴 내용의 좋고 나쁨과 수준의 높고 낮음을 알 수 있었다.’ 고 했다. 책벌레가 말 그대로 동물일 경우는 책에 기생하면서 글자를 마구 헤치며 눅눅한 냄새를 풍기는 곰팡이를 먹는다. 하지만 책벌레가 사람일 경우는 다르다. 글자 냄새, 곧 서향(書香)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서향이 궁금하다면 정민의『책벌레와 메모광』은 좋은 길라잡이다. 지금까지 책벌레를 다룬 책들은 넘쳐났다. 삶에서 책을 빼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러나 단순히 책벌레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고자 한다면 무색무취할 뿐이다. 좁게는 글자 향기, 넓게는 책 향기를 제대로 음미해야만 우리는 책에 담긴 인생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된다. 저자가 지금 사람이 아닌 옛사람을 만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옛사람들이 남긴 고서(古書)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과 더불어 책벌레들의 사연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행간을 더듬다가『유양잡조 酉陽雜俎』에 나오는 진짜 책벌레 두어(蠹魚)에 대한 내용은 사뭇 의미심장했다. 즉, “두어, 즉 책벌레가 책 속에 있는 신선(神仙)이란 글자를 세 차례 이상 갉아먹으면 변화해서 맥망(脉望)이란 벌레가 된다네. 밤중에 하늘 별에다 이것을 꿰어 비추면 별이 그 즉시 내려와 환단약(還丹藥)을 구할 수 있게 되지. 이것을 물에 타서 먹으면 그 자리에서 환골탈태하여 하늘로 날아오르게 된다네.”는 것이다. 무릇 책을 열심히 읽으면 생각이 밝아진다는 것을 셀 수 없이 들었는데 이것이 아닌 몸을 바꿀 수 있는 명약이라는 것을 처음 들었음에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책을 눈으로만 읽는다고 해서 책벌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책만 보는 바보로 불리는 이덕무는 자신의 서재를 ‘구서재’(九書齋)라고 말했다. 구서재는 책과 관련된 아홉 가지 활동이 이루어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바로 독서(讀書), 간서(看書), 초서(鈔書), 교서(校書), 평서(評書), 저서(著書), 장서(藏書), 차서(借書), 포서(曝書)다. 온갖 미디어에 무방비로 노출된 세상에서 책을 읽는 것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소중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 그럼에도 뭔가 살아갈 의미를 되새겨 볼 때 저서(著書)의 가치를 대면하게 된다. 저서는 글쓰기다.


이런저런 글쓰기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방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공통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 중에 이 책의 제목에 나와 있듯 ‘메모광’도 좋은 방법으로 추천할 만하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아이디어가 필요한데 책속의 문장이나 인터넷의 검색으로 생각을 붙잡을 수 있다. 그러나 불현듯 떠오르다가 금방 사라지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메모를 해야만 한다. 만약 그때 메모로 남기지 않으면 그때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저서에 비해 메모는 단순한 열정인지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열정이 없다면 생각 관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러면 메모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기억의 한계에 대한 방어기제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깝다. 메모에 담겨 있는 온갖 경이로운 현상들은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다. 생각해보면 메모의 놀라운 진실들 하나하나 다시금 메모하게 한다. 스티븐 기즈는『습관의 재발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뭔가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그 뭔가를 다른 어떤 생각보다도 우선하게 만든다. 자신이 뭔가를 실행에 옮기는 걸 보는 것만큼 고무적이고 의욕을 유발하는 일은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책벌레와 메모광을 따라가다 보니 평소 같으면 메모가 생각보다 앞선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독서가 아무리 좋다고 권장하더라도 독서 인구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듣기 싫으면서도 가장 당연하게도 독서가 습관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서할 시간이 따로 없다는 것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는 “세끼 밥 먹듯 독서하는 습관"을 권한다. 세끼 밥 먹는 데 굳이 이유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뭐든지 세끼 밥 먹듯 해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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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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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법(法)을 수학으로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어려운 수학 문제라고 해도 숫자와 공식으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법도 충분히 그럴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세상 문제라고 해도 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곧 법의 올바른 정신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문으로 넘쳐난다. 법이 있음에도 오히려 무법천지 같다. 이유인즉 법전의 법과 현실 속의 법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법전의 법이 진실이라고 한다면 현실 속의 법은 진실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진실이어야만 하는 법이 ‘편한 진실’만을 추구한다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권석천의 칼럼을 담아낸『정의를 부탁해』를 읽으면서 편한 진실이 얼마나 허약한가를 알게 되었다. 저자 말대로 편한 진실이란 정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편한 진실은 어떤 사건에 대하여 합리적으로 의심하지 않는다. 대신에 추상적, 관념적으로 의심하여 사건의 진실을 불투명하거나 왜곡한다. 이러한 편한 진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억울하다고 하며 법의 심판자에게 양심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일 수밖에 상황에서 우리가 언제까지 양심에 호소해야만 하는 걸까?

 

 

그래서『정의를 부탁해』는 불편하다. 우리 사회의 굵직굵직한 사건에 대한 진실의 이면에는 정의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보수와 진보의 양대 산맥으로 분열된 싸움이 피곤할 정도로 반복될 뿐이다. 지금 이 시각 국정교과서에 대한 찬반 논쟁도 마찬가지다.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면 무조건 종북(從北)이 되고 마는 불평등하고 불합리적인 사회. 이렇게 진실이 민주화에 역행하거나 은폐되거나 사상 통제에 갇혀 버린 것을 볼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복잡해졌다. 무엇보다도 낙관적인 미래를 그리며 살 수 없다는 절망감을 더 이상 애기한다고 해서 좋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디 그뿐인가. 어느 누구도 정부의 공권력(公權力)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국가 일을 하는 정부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권선천의 시각은 다르다. 즉,

 

 

나는 공권력이란 말이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權限)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공(公)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私)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p75).

 

 

결코 공(公)이 민(民)을 아래에 두면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헌법 제1조 제2항에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했다. 이런 시대에 정부의 공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또한 일상적으로 사회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는 네트워크 사회에서 정부의 권위주의적인 발상은 삼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도 여전히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하여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믿을 만큼 우리는 더 이상 가만히 있지 못한다. 세상이 지랄 같다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숨길 수 없다. 그러면서 ‘정의를 부탁해’ 한다. 단지 우리가 바둑판의 미생(未生)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면 저자 말대로 ‘사춘기 불변의 법칙’ 때문이다. 정의를 부탁하는 사람들에게 굳이 나이만을 따져서 사춘기가 아니라고 말할 까닭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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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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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믐달, 그러니까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는 세계라고 할까? 달에 관한 우리의 생각의 단순하게도 해가 지고 나면 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믐은 정반대다. 시간의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역설. 잠깐 동안이라도 이 세계를 볼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아마도 영혼을 온전히 탕진했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둠을 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믐달을 보게 되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 순수하다 못해 불안하게 된다. 장강명의『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속도감 있게 읽다보면 이러한 불안함의 정체를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시간의 뒤틀림 때문이다.


사실 패턴이 없는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소설 속에서 남자.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동급생을 칼로 찌르고 평생을 전과자라는 패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비록 정당방위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때 보통 가해자를 치료하는 방법이 다름 아닌 패턴을 단순하게 하거나 느슨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달이 천천히 기울면 강물 또한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치료의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은 그렇게 패턴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패턴의 결과에 대한 흔적을 조금씩 아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


우리 모두가 이렇게 패턴으로 눈이 멀어 있을 때, 작가는 덧없이 흘러가는 패턴을 흔들면서 균열을 일으킨다. 가슴에 ‘우주 알’을 품고서 말이다. 우주 알은 정체가 모호할 정도로 환상적이다. 시간의 시작과 끝이 없는 하나의 덩어리. 그런데 놀랍게도 우주 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의 시간을 알게 된다. 지난 날 살인자에서 지금은 작가가 된 남자는 피해자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질긴 운명을 뚝뚝 끊어내지 못한다. 세상과 달리 어머니는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가 아님을 호소한다. 그럴수록 거짓말처럼 그것은 정당방위가 아니게 되는데…….


작가는 남자를 희생하면서 거짓말을 완성한다. 소설 곳곳에는 죄책감으로 인해 곧 폭발할 것 같지만 남자는 거짓말을 굳이 바꿀 마음도 없다. 서로를 온전히 알 수 없어 생긴 상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처는 계속되고 결국에는 또 다른 거짓말이 만들어지고 만다. 거짓말은 시간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아니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남자는 거짓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냥 마무리하려고 한다. 굳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


시간이 일직선으로 흐르면 시간은 뒤틀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는 그래서 고통을 멈추게 해주는 그믐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믐이 없는 삶이란 이미 굳어져버린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믐이 있다고 해서 과거를 예전처럼 되돌릴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만큼 되돌기보다는 새로운 모습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는 미처 몰랐으나 지금에야 밝혀지는 진실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같은 말들(148).


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거짓말이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정당방위가 아닌 삶을 새롭게 보여주고 있다. ‘제대로 순서’가 없이 페이지가 섞이면서 말이다. 시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그토록 남자가 거짓말이라는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그 어떤 두려움도 가지지 않았던 이유는 사랑이란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거짓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사람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는 진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잔인한 진실이 아니면 된다. 


도대체 이 무슨 사랑의 착시(錯視)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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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영향력 - 그들의 생각과 행동은 어떻게 나에게 스며드는가
마이클 본드 지음, 문희경 옮김 / 어크로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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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아름다워지고 싶은 사람들 때문에 보톡스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보톡스는 얼굴에 잔주름을 없애주는 효과가 있다. 얼굴에 표정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점은 잔주름이 뚜렷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잔주름을 의학적으로 동적 주름(dynamic wrinkles)이라고 한다. 보톡스의 효과는 동적 주름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그 근육을 펴지게 하면서 주름살을 없애는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보톡스가 피부 미용에 강력한 효과를 나타내는 만큼이나 독소를 품고 있어 건강에 해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이클 본드의『타인의 영향력』을 읽고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인간관계에 있어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상대방의 얼굴에 나타난 표정으로 그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게 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의 감정에 동조하면서 기쁨이나 슬픔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얼굴에 전혀 감정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하면 우리는 상대방과 어떤 말을 주고받아야 하는지 무척이나 어려워진다. 사람의 감정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모방하게 한다. 또한 감정은 전염되기 때문에 대중적으로 확산되는데 가장 솔직한 감정일수록 감정 전염도 높다. 사회적인 관계의 필연적인 결과다. 그러나 보톡스 때문에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될까? 상대방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 못지않게 호감을 덜 살 것이다.

 

우리가 감정 전염에 주목한 이유는 간단한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다. 그만큼 타인의 영향력에 따라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을 좀 더 유연하고 효과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우리는 친구가 많으면 행복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친구들이 얼마나 행복한지 여부에 딸려있다. 결론적으로 행복한 친구들과 관계할수록 행복하다는 얘기다. 이러한 감정 전염이 개인이 아닌 집단적인 현상으로 나타날 때 군중심리가 된다. 군중은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이다. 몰개성화이론에 따라 개인은 군중 속에서 익명의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난 같은 비상상태에서 군중은 이타적인 행동을 보인다. 이럴 때 군중은 ‘제4의 구조요원’이 된다. 충분히 ‘군중 속의 온기’를 느낄 만하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회심리학의 성과를 흥미로운 방식으로 담아낸 다양한 사례를 만날 수 있다. 카멜레온 효과, 감정 전염, 군중심리, 넛지 전략, 방관자 효과, 루시퍼 이펙트, 그리고 고독의 사회학까지 인간 행동에 관한 비밀을 담고 있다. 이러한 비밀은 기존의 주장을 반복하는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주장도 함께 펼치고 있다. 말콤 글래드웰에 비견되는 저자의 통찰은 타인의 영향력이 개인에게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색하며 어떤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회심리학이 없다면 우리가 진실로 서로를 이해하기기를 바랄 수 없다는 관계의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방관자 효과에 맞서는 방법은 이렇다. 방관자 효과란 출근길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을 때 사람들이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관자 효과에 대응하는 방법은 철학자 리처드 로티가 제안한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즉, “낯선 사람을 고통받는 동료로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 순간 우리는 영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웅이라고 하면 헤라클레스를 떠올린다. 헤라클레스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하지만 이런 영웅은 2%에 불과하다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이로 인해 우리는 영웅이 비교적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잠재적 영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듯 인간은 의식주만으로는 살 수 없다. 앞서 말했듯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날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다양한 이웃이나 친구 맺기가 가능하다. 하지만 관계가 친밀하지 않다면 이웃 혹은 친구수가 많아도 외로움을 견딜 수 없다.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대로 외로움은 혼자 있는 고통을 말하니까. 그래서 고독의 사회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고독은 사회적인 고립에 따른 소외감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은 혼자 있는 기쁨을 뜻한다.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혼자 지내야 할 때 고독은 우리 몸 속에 친구를 만들 방법을 생각하게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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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펌프, 생각을 열다 - 대니얼 데닛의 77가지 생각도구
대니얼 데닛 지음, 노승영 옮김, 장대익 해설 / 동아시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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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와 대장장이의 차이점은 뭘까? 둘 다 도구를 사용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목수가 자기가 쓸 톱과 망치를 만들지 않지만 대장장이는 여러 가지 재료를 가지고 자기가 쓸 톱과 망치를 만든다. 우리가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생각 도구를 만들어 내는 대장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최고의 지식인은 최고의 생각도구를 만든다. 대니얼 데닛의 『직관펌프, 생각을 열다』를 주목한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마빈 민스키 교수에 따르면 데닛은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과 지적 대결을 펼칠 사상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장대익 교수는 ‘지구 최고의 지식 요리사’라고 말하면서 이 책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이 책에서 다시 발견하게 되는 생각은 제목에 나와 있듯 ‘직관펌프’다. 저자에 따르면 직관펌프(intuition pump)란 직관을 불러일으키는 명제를 논파하며 “그래,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진심으로 무릎을 치게 하는 사소한 이야기들이다.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이라고 거듭 말한다. 하지만 직관펌프는 이솝 우화의 철학자 버전이라는 명제는 매우 ‘심오로워’라고 할 수 있다. 뻔한 거짓임에도 만일 사실이라면 놀랄 만하다. 한편으로는 참이라고 하면 별것 아닌 말이 되고 마는 것. 이렇게 직관펌프가 심오로워 되는 까닭은 바로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메타 수법 때문이다. 메타 수법이란 ‘생각에 대한 생각, 말에 대한 말, 추론에 대한 추론’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생각에 대한 생각만 한다고 해서 직관을 펌프질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복잡해야 한다. 이유인즉 철학에서 말하는 지향성(intentionality) 때문이다. 우리가 대상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 물리적 태도다. 손에서 돌멩이를 놓으면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둘, 설계적 태도다. 자명종이 설계된 대로 울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셋은 지향성 태도다. 어떤 대상의 행동을 해석할 때 그 대상이 스스로의 믿음과 욕구를 고려하여 선택과 행위를 제어하는 ‘합리적 행위자’인 것처럼 대하는 전략이다. 가령, 체스를 두는 컴퓨터를 생각하면 된다. 체스를 두는 컴퓨터는 합리적으로 최선의 수를 찾는다. 그래서 컴퓨터를 예측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합리적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이 책에는 77가지 생각도구가 있다. 12개의 일반적 생각도구에서부터 컴퓨터, 의미, 진화, 자유의지 그리고 철학자가 된다는 생각도구까지 다루고 있다. 77가지 생각도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거나, 알고는 있었지만 관심이 없었거나, 관심이 있었는데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어떤 참신한 생각도구를 발견하고자 했다면 우리는 실수를 하는 셈이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라도 어떻게 해석하는 데 따라 달라진다. 만일 해석하는 능력이 없다면 기존의 시스템이 해석해준 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데닛처럼 생각해보기는 우리를 ‘ㅅㅂㄸ(jootsing)’, 즉 시스템 밖으로 뛰쳐나오게 한다. 이것이 저자가 바라는 모든 이의 길을 밝혀줄 ‘좋은 실수’라는 것이다.

 

그러면 좋은 실수를 다윈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저자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라는 개념은 모든 전통적 관념을 무너뜨리고 전혀 새로운 관념이되었다. 다윈의 개념이 얼마나 강했으면 ‘만능산(酸)’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리고 진화를 이끄는 자연선택에 대한 독창적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자연선택은 자동으로 이유를 찾는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유를 ‘발견’하고 ‘승인’하고 ‘집중’시킨다. 따옴표에서 보듯 자연선택에는 마음이 없으며 그 자체로는 이유도 없지만, 설계를 다듬는 이 ‘작업’을 수행할 능력은 있다. 이것 자체가 이해 없는 능력의 예다(p290).

 

이 책을 통해 직관펌프가 자연선택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해 없는 능력이다. 77가지 생각도구들 하나하나에는 분명한 설계가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설계된 목적을 알 필요는 없다. 이해 없는 능력에 따라 우리가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셈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 없는 능력만큼 77가지 생각도구를 이해하는 것은 아주 효율적이며 뛰어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실수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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