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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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사랑이란 한숨으로 만들어진 연기인데

정화되면 연인 눈에 반짝이는 불길이고

성질내면 사랑의 눈물 먹고 자라는 바다야.

(………………………)

줄리엣: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예요.

거지들은 자기 값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진실된 내 사랑은 한없이 크게 자라

그 재산의 절반도 계산할 수 없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달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마세

누구나 한번 쯤 사랑의 맹세를 해봤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말보다 내용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밤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달에게 맹세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내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사랑의 관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처럼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하겠다면 품위 있는 자신에게 맹세해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무너무 성급하거나 무모 하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개 친다.”를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번개와 꼭 같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사랑의 새싹은 여름의 숨결로 자라나 다음 만날 땐 예쁜 꽃이 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그들의 가문이 오래 묵은 앙숙이었는데 그들이 숙명적인 몸에서 연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몬터규 집안의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그는 로잘린과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눈가리개 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슬픔이 짧아지지 못했습니다. 큐피트의 화살로는 로잘린의 과녁을 맞출 수 없게 되자 그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한편 캐풀렛 집안에서는 줄리엣의 신랑감으로 귀족 청년 파리스 백작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캐풀렛 부인은 캐풀렛 가문의 오랜 축제가 열리는 저녁에 줄리엣에게 파리스의 젊은 얼굴 , 그 책을 읽어보고 아름답게 적어 놓은 기쁨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그런데 그날 밤 축제에서 줄리엣에게 제본 안 된 사랑의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미오였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자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로미오가 값비싼 보석 같은 진정한 아름다운 줄리엣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조카 티볼트가 그만 격분했습니다. 티볼트가 몬터규 집안의 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작은 소동이 조용해지자 로미오는 줄리엣의 손을 잡고 성자상의 부드러운 키스로 침입 사건의 죄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줄리엣은 성사상의 입술은 기도에 써야 하면서도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로미오는 기도하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줄리엣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은 첫 키스를 하였지만 서로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들의 사랑은 가혹했습니다.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로미오는 줄리엣의창가 아래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줄리엣은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라고 안타깝게 말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름만이 그녀의 적일 뿐 이었습니다. 몬터규는 로미오의 손도 발도 아니고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다른 이름을 가져 그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장미가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줄리엣의 비밀을 듣고 있던 로미오는 만약 그녀가 자신을 애인이라 불러 준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로미오라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장식이 아니에요!

그들은 사랑하는 방향을 결혼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줄리엣이 마음의 연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혼인으로 축복해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젊은이의 사랑이 진실로 마음속이 아니라 눈 속에 있구나, 의심하였지만 로미오는 옛 짧은 애인 로잘린처럼 사랑에 혹 한 것이 아니라 줄리엣과는 호의를 주고받는 다고 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두 집안의 원한을 순수한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면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로미오가 기쁨에 넘쳐 줄리엣에게 상상 속의 행복을 드러내달라고 하자 그녀는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미오에게 불길한 앞날이 걸쳐 일어났습니다. 로미오가 시비 끝에 티볼트를 살해하여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 숨어 지냈지만 끝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그의 잘못은 사형인데도 죽음이 아니라 추방을 내린 것은 자비로운 일이라고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추방!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끔찍했습니다. 더구나 줄리엣이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하며 추방은 자비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역경의 달콤한 우유인 철학으로 위로하면서 로미오가 만투아로 건너가 사는 동안 사면을 요청하고 때를 봐서 그들의 결혼을 공표하겠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

이렇게 해서 줄리엣은 로미오와 헤어졌는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갑진 않으나 고맙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비탄에 잠긴 그녀는 로미오와 맺어 준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조언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로렌스 수사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자결할 의지력을 가진 그녀에게 죽음과 비슷한 치유책을 알려주었습니다. 즉, 지금의 치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파리스와 결혼에 동의하고 죽음의 축소판이 든 약을 먹게 되어 묘지에 누워 있으면 그와 로미오가 그녀가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 수사의 계획이 담긴 편지보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죽음을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사악한 마음이 재빨리 드는 걸까요? 로미오는 줄리엣과 함께 누워 있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약장수에게서 독약을 사고 나서 줄리엣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궁 앞에서 파리스 백작을 만나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음마저 아름다움을 정복하지 못한 줄리엣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 독약이었던 슬픔의 치료제를 마셨습니다. 줄리엣이 깨어나고 나서 꿈이 좌절된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로미오의 검을 들고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찌르며 죽었습니다.

 

무서운 아름다움

스무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위험이 줄리엣의 눈에 있다고 했던 로미오는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어떤가요? 사랑은 내게 힘을, 힘은 도움을 줄 거라고 했습니다. 최종철은 『로미오와 줄리엣』,「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줄리엣의 자결이 보여 주는 이 슬픔 속의 기쁨, 예이츠의 표현을 빌리면 이 ‘무서운 아름다움’(terrible beauty)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비극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주된 구성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사랑의 모순어법에서 나온다. 서로 미워하는 두 원 수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운명에 한편으로는 대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은 짓궂은 여름 바람 맞으며 한가로이 나부끼는 거미줄에 올라타도 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운명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줄리엣이 말한 것처럼 유일한 내 미움이 유일한 사랑을 낳을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은 꽃을 피웠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마침표이거나 물음표, 그리고 느낌표라고 한다면 장식에 불과하지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은 죽음표여야 합니다. 죽을 정도로 사랑한다면 아낌없는 마음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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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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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이니 영광이니 희생이니 하는 공허한 표현을 들으면 언제나 당혹스러웠다. 이따금 우리는 고함 소리만 겨우 들릴 뿐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빗속에서 그런 말을 들었다. 또 오랫동안 다른 포고문 위에 붙여 놓은 포고문에서도 그런 문구를 읽었다. 그러나 나는 신성한 것을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광스럽다고 부르는 것에서도 조금도 영광스러움을 느낄 수 없었다. 희생은 고깃덩어리를 땅속에 파묻는 것 말고는 달리 할 것이 없는 시카고의 도살장과 같았다. 차마 참고 듣기 힘든 말들이 너무도 많은 까닭에 나중에 지명만이 위엄을 갖게 되었다. 숫자나 날짜 같은 것들이 지명과 함께 우리가 말할 수 있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들이었다. 영광이니 명예니 용기니 신성이니 하는 추상적인 말들은 마을의 이름이나 도로의 번호, 강 이름, 연대의 번호나 날짜와 비교해 보면 오히려 외설스럽게 느껴졌다.

『무기여 잘 있어라』중에서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사람마다 존재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일찍이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어니시트 헤밍웨이의『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프레더릭은 “나는 생각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사람의 품위(品位)를 이성적으로 완성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생각이 아닌 “음식을 먹도록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또한 사랑하는 캐서린과 잠을 자도록 만들어졌다고 했습니다. 먹고 자고는 단순합니다. 단순함은 굳이 생각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끔은 우리는 영광이나 명예를 그 밖에 인간에 부여된 정의를 복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추상적인 말은 그에게 마치 빗속에서 듣는 것처럼 공허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외설스럽다고 적당한 착각을 했습니다.

미국인이었던 프레더릭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 이탈리아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이탈리아 군대 소속으로 앰뷸런스 부대의 장교로 참전했습니다. 전쟁이 이렇다 할 공방전 없이 잠시 안개마냥 가라않자 할 일이 없어 휴가를 가게 된 그는 군종신부와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날카롭고 투명한 쾌감으로 밤낮을 반복했습니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었지만 군종신부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다. 군종신부는 아가씨가 없이도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신부가 말한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되었는데 영국 야전 병원에서 일하는 스코틀랜드인 미스 바클리를 만나면서부터 점차 현실이 되었습니다. 약혼한 청년이 참전하자 그녀는 간호사가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청년은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이상한 삶을 살다

그들은 이상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청년이 전사하자 모든 게 끝난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탈리아 전선에서 그를 만나 사랑하게 되자 그녀는 만약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을 캐서린이라고 불러달라고 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사랑한다고 했지만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매일 저녁 장교 위안소에 가는 것보다 밤이 되어 그녀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뻔한 게임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카드 대신 말로 하는 브리지 게임 같은 것이었습니다. 당분간 그녀에게 친절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척 하는 것을 알았지만 이상하게도 그가 정말로 친절하며 소중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또한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만나러 왔다가 막상 만나지 못하면 기분이 여간 쓸쓸하고 공허한 게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공격이 개시되어 그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영국 야전 병원을 지날 때, 잠깐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조금이라도 그를 도와주기 위해 성(聖) 안토니오 상(로마 가톨릭의 기적의 수호성인)이 새겨진 목걸이를 주면서 꼭, 돌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운전병과 함께 참호 속에서 전쟁 이야기를 하다가 적의 박격포 공격을 받았지만 다행히도 다리에 부상을 당하는 정도였습니다. 그가 병동의 침대에 누워 있을 때 군종신부와는 전쟁 혐오증을 이야기 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은 진짜 장교가 아니라고 하면서 장교와 사병의 차이점을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장교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들(사병)에게 전쟁을 시킨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내 종교예요

그래서 군종신부는 전쟁이 끝나면 고향에 가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께 봉사하는 것이 커다란 행복이었습니다. 사랑을 하면 그 대상을 위해 뭔가 하고 싶어지고 희생하고 싶어지고 봉사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두려웠습니다. 군종신부말대로 한낱 정열과 육욕에 지나지 않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까지 그는 사랑과 별도로 행복했습니다. 군종신부는 자신의 행복은 그것과는 다르며 직접 느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군종신부가 말한 그것! 그는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행복을 느끼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물어봤지만 군종신부의 대답은 만족할 수 없었지만 견고했습니다.

그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밀라노에 있는 미군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정말 꿈만 같은 캐서린을 만났습니다.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리라고는 정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느님께 진심으로 사랑에 빠졌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녀는 그를 간호해주면서 그가 원하는 것만 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곧 그녀가 원하는 것이며 자신의 존재는 더 이상 없으며 오직 그가 원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는 아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나’라는 존재는 없으며 내가 바로 ‘당신’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행복하고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녀는 당신 곁을 떠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당신은 내 종교예요. 당신은 내가 가진 전부”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하지만 그들은 생리적인 덫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가 불안했던 이유는 바로 아기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걱정할까 봐 얘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 꼭 말해야만 했습니다.

“덫에 걸린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나요?”“약간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당신 때문은 아냐.”“나 때문이라곤 하지 않았어요. 바보같이 굴지 마세요. 어쨌든 덫에 걸린 기분이 드느냐는 거죠.”

“인간이라면 언제나 생리적으로 덫에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들지.”

그 순간, 그녀는 ‘언제나’라는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그녀는 그가 원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서로 사랑하면서 일부로 오해를 만들어서 다투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우리 두 사람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남이며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세상이 우리를 잡아먹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며 당신 같은 용감한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비겁한 자는 천 번 죽지만 용감한 자는 단 한 번 죽을 뿐’이라는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녀는 그 말을 누가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비겁한 사람에 대해선 잘 알지만 용감한 사람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용감한 사람이 영리하다면 아마 이천 번은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용감하다는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타율이 2할 3푼인 타자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야구에서 평범한 이류 타자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상에서 몸이 회복되자 그는 캐서린을 병원에 남겨둔 채 다시 전선으로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더 이상 전쟁에서 신성이니 희생이니 하는 말들이 무의미했습니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자신의 존재 가장 밑바닥에 있는 덫을 발견했습니다. 더구나 후퇴하는 과정에서 임무를 실패한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생사의 갈림길을 빠져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는 부대를 이탈한 죄로 야전 헌병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심문을 받는 장교들이 하나같이 총살을 당하자 그는 탈출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그는 아무런 의무도 없었습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는 캐서린이 스트레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녀의 동료가 그를 부끄러움도 모르고 명예도 모르고 비열한 사람이라고 하였지만 오히려 그녀는 기쁜 마음에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혼자 있고 싶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여서 세상 사람들에게 맞선 고독을 느낄 뿐, 결코 고독하지도 두렵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밤과 낮이 같지 않다는 것, 모든 것이 다르다는 것, 밤에 겪은 것은 낮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함께 있으면 밤이 더 유쾌하다는 것만 다를 뿐 낮과 거의 다를 게 없었습니다. 또한 혼자 있을 때는 할 일이 없는 범죄자 같았지만 그녀와 함께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러한 기쁨 덕분에 그는 할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 말대로 앞으로는 그가 체포되지 않을 곳에서 멋지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자네가 삶에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뭔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을까요?

 

인간은 죽는다

그들은 체포를 당할까 봐 국경을 넘었으며 마침내 스위스에 도착하자 지긋지긋한 곳을 빠져나온 것을 실감했습니다. 스위스는 멋진 나라, 훌륭한 나라였습니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출산을 기다리며 멋진 삶을 살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병원에서 출산하는 고통의 무게를 견디지 못 했습니다. 그녀가 이렇게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초산이라는 자연의 이치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그녀의 용기는 완전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녀 또한 전혀 죽을 까닭이 없었지만 머지않아 죽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사랑해서 얻게 되는 결과라고 하는 것이 거짓말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 덫의 끝, 즉 인간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더구나 그것에 배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마치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죽음과 사투를 벌이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이것을 비열한 장난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계의 종말을 그는 언젠가 캠프를 할 때 모닥불 위에 던져진 개미가 잔뜩 붙어 있는 통나무로 투영했습니다. 통나무에 불이 붙자, 개미들은 뜨겁지 않는 곳에 모여 있다가 결국에는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 그는 얼마든지 구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컵의 물을 통나무에 끼얹었던 것은 위스키를 마시려고 해서 그런 것이지 개미를 살려주기 위한 행동은 아니었습니다.

 

무엇(what)이 아니라 누구(who)여야 한다

그는 그녀가 끝내 사망하자 간호사를 내보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껐습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것이 마치 조상(彫像)에게 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사이토 준이치는『민주적 공공성』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누구(who)는 무엇(what)과는 다르게 공약(共約) 가능하지 않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는 것이고, 또 타인에게도 귀결시킬 수 없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은 내가 소유할 수 없는 것, 우리가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관심에 의해 성립된다. (…) 타자의 현상에 흥미를 갖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행위와 말을 보고 들으려고 하는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현상의 공간을 성립시키는 것은, 타자의 세계의 한 자락이 드러나는 것, 그러한 세계 개시에의 욕구이다. 현상의 공간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비대칭적인 위치에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는 그 사람 자신에 의해 보여질 수밖에 없다.

 

돌이켜 보면 그녀의 죽음은 생리적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녀의 얼굴이 조각품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에게 사랑이라는 종교적인 감정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마도 그는 우리와 다르게 생리적 덫의 비대칭적인 위치를 깨달았는지 모릅니다. 즉 사랑, 죽음이라는 무엇의 덫이 아니라 존재라는 누구의 덫에 걸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우리도 이천 번 죽을 용기가 있을 것입니다. 만약에 이런 용기가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타율이 2할 3푼 그 이상을 넘어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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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 -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그림을 통해 읽는 독서의 역사, 개정판
슈테판 볼만 지음, 조이한.김정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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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데 그 길을 걷는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오히려 가슴 속에 아로새겨지는 ‘나 자신의’ 길을 발견하는 것이 훨씬 멘토 같고 감동적이다. 사람이 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책은 얼마든지 하나의 무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카프카는『변신』, 「저자의 말」 중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우리 머리를 주먹으로 한 대 쳐서 우리를 잠에서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그 책을 읽는 거지? 책이란 무릇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버린 바다를 깨뜨려버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되는 거야.

 

‘책은 도끼다.’라는 섬뜩한 멘토 덕분에 책이 위험(?)해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어쩌면 위험의 강도가 높을수록 좋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진짜로 위험한 책이 있다.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의 추천사를 쓴 정혜윤은 무슨 책을 읽든지 그 내용과 전혀 아무 상관없는 책, 소일거리로 불과한 책, 새로운 자신을 만들 수 없는 책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아무런 사건도 없다는 것은 전혀 위험하지 않으며 오히려 인생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문제는 여자다. 독서의 역사를 살펴보면 처음부터 위험한 책을 읽기 때문에 여자가 위험한 것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여자가 책 읽는 그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백하자면 여자는 책을 읽어서는 안 되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남자는 성숙, 여자는 미성숙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독서란 지적 능력을 지닌 특정한 남자의 영역이며 여자는 계몽의 주체가 아니라 계몽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 그리고 교육 문명은 자연스럽게 독서 태도의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교양의 확대라는 결과라고 할까, 사르트가 말한 것처럼 ‘독서는 자유로운 꿈’이 되었다. 이제 책 읽는 여자는 구경꾼도 아니고 피해자도 아니다.

 

이러한 책 읽는 여자의 내밀한 욕망을 슈페판 볼만의『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에서 그림으로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13세기에서 21세기까지 책 읽는 여자들이 주인공이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여자에게는 절망적이었다. 진리는 오직 남자에게만 가능했다. 그래서 인류의 원죄가 이브의 호기심에서 생겼듯 여자에게 지적 호기심은 금기의 대상이었다. 더구나 세속적인 내용의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여자의 천성을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가령, 앙투안 보두앵은 <책 읽는 여자>에서 여자에게 독서의 나쁜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 이면에는 보두앵이 도덕성을 장난삼았다고 하더라도 여자에게 독서는 그만큼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소리 내는 독서’였다. 아우구스티누스의『고백록』을 보면 그는 아주 조용한 독서에 충격을 받았다. 그때만 해도 소리 내는 독서는 일종의 사회적인 통제였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문맹 퇴치로 독서의 장기적 성과로 소리 내지 않는 독서가 가능해지면서 ‘개인적 친밀함’이라는 새로운 종류의 행동 유형이 생겨났다. 특히 양육의 속박에서 벗어난 여자들에게 새로운 자유 영역이 보다 많이 주어졌다. 그래서 실제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자는 위험했다. 이전과는 다르게 책 읽는 여자는 자신만의 자유 공간에서 독립적인 자존심을 얻게 되었다. 가령, 피터 얀센스 엘링가는 <책 읽는 여인>에서 독서에 푹 빠진 하녀를 보여주고 있다. 하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라는 궁금증하나만으로도 이 그림은 전통적이지 않다. 그녀는 ‘전통적인 모습이나 남자의 세계상과 일치하는 자기 나름의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또 하나, 고전적인 의미에서 독서는 책의 소유가 곧 소유자의 신분이나 지적 능력을 나타내는 가치 척도의 기능을 했다. 하지만 책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광범위하게 확대되면서 여자는 책을 더 많이 읽었으며 책에서 삶의 중요한 질문을 찾게 되었다. 그것은 비토리오 마테오 코르코스의 <꿈>에 나오는 ‘책 읽는 여자가 머리를 힘차게, 거의 반항적으로 치켜든 모습’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알베르토 망구엘의『독서의 역사』 표지 그림으로 유명한 구스타프 아돌프 헤니히의 <독서하는 소녀>의 이미지는 무뚝뚝할 만큼 간결하다. 하지만 소녀의 분위기는 감수성이 예민한 내면성을 독특하게 발산하고 있다.

 

바야흐로 책 읽는 시대다. 어느 때보다 책의 황금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하지만 독서의 양과 질은 전혀 다른 양상이다. 문제는 책을 읽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가에 있다. 독서의 우둔함과 현명함은 오직 독자의 몫이다.『마담 보바리』에서 엠마가 책과 현실을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불행해졌다. 즉 ‘그녀는 연애소설 때문에 자신이 실제 생활에서 고통을 느낄 정도로 간결하게 원했던 것이 성취될 수 있을 것으로 믿게 되었다.’(249쪽) 이러한 불행의 그림자는 에드워드 호퍼의 <호텔 방>에서 우울한 여자로 표현되고 있다. 그림 속의 여자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 위협을 받는 존재다.

 

책은 여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책 읽기는 즐거움이 아니라 치열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혜윤이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녀가 말한 이미지는 ‘치마 한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신의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책을 읽는 밤마다 그 치마 속을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어 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 우리는 하나하나 책장을 넘기며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깨닫게 될 것이다. ‘위험한 세상과 싸우는 무기가 바로 위험한 독서’이며,  ‘책 읽는 여자는 자신의 독서가 그저 고상한 취향이 아니라 자신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대해 취하는 하나의 행동’(13쪽)이라는 것이다. 결국 책 읽는 여자는 '긍정적인 위험'이라는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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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0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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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즐긴다는 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을 배우는 것이고, 그것을 얻었을 때 얻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누구든지 돈을 지불한 값어치만큼은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은 무언가를 구입하기에 좋은 곳이다. 이건 아주 멋진 철학처럼 보인다. 그러나 앞으로 5년만 지나면 내가 일찍이 알고 있던 모든 훌륭한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이것 역시 어리석게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도 진실은 아닐지 모른다. 아마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배우는 것일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 나갈 것인가를 알아낸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자연히 알게 되리라.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중에서

 

삶을 철저하게 사는 것

삶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그래서 누구나 삶을 철저하게 살고자 합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에서 신문 일에 종사하고 있는 제이크는 투우사야말로 자신의 삶을 철저하게 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여름마다 스페인에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 로버트 콘은 투우사에게 흥미가 없었습니다. 로버트는 파리 생활의 답답함에서 벗어나 남아메리카에 여행가고 싶었습니다. 제이크는 로버트에게 다른 나라에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으며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닌다고 해서 자신한테서 달아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왜 파리에서 새로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지 않는지? 거듭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로버트는 남아메리카에 가면 어떻게든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며 파리가 싫다고 했습니다.

로버트에게는 유대인답게 완고하고 고집불통인 기질이 있었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무도 자신을 유대인이라고 느끼게 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다른 학생과 다르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학 시절에 유대인 취급을 받으며 느낀 열등감은 착하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뼈저리게 사무쳤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철저하게 권투를 배웠습니다. 누구든지 건방지게 굴면 때려눕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투로 울분을 달래던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결혼했지만 아내와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하여 매력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이혼하려고 벼르면서도 차마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내가 먼저 그의 곁을 떠난 것은 충격이었지만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이었습니다.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

그 후 로버트는 문인들과 어울리며 잡지를 창간하였는데 막대한 비용 때문에 폐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다른 그의 고민은 잡지를 발판으로 삼아 출세하려고 하는 프랜시스라는 여자한테 꽉 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가 성공할 가망이 없어 보이자 프랜시스는 그를 싫어하면서도 무엇이든 이용할 것이 남이 있는 동안 얻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하여 유럽에 가면 글을 쓸 수 있다고 끈질기게 졸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리에 머물렀습니다. 유럽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그도 미국에서 살았으면 좋았을 걸하고 생각할 때를 빼놓고는 꽤 행복한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로버트는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나서부터 세상을 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직도 누구를 사랑해 본 일은 없지만, 자기가 여자들에게 매력 있는 남자라는 사실과 또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고 함께 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단순히 기적 같은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프랜시스가 결혼하자고 하였지만 그는 울면서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굳이 반대하지 않는 대신에 영국에 가려고 했습니다. 영국에 가는 비용으로 그가 100파운드 밖에 주려고 하자 그녀는 오히려 그가 인심이 좋다고 하면서 200파운드를 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을 모욕적이었는데 그는 모욕적인 말을 들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말을 하면 금방 세계가 무너져 버릴 것 같은, 지금 바로 눈앞에서 파멸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것을 참고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문학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을 감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결혼하게 되면 로맨스가 끝장나기 때문일까요?

 

반어와 연민

하지만 로버트의 새로운 로맨스의 연인은 공교롭게도 제이크의 옛 애인이었던 브렛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부상한 당한 제이크를 브렛이 간호해 주었습니다. 어떤 부상이나 불구가 당사자에게는 정말로 심각한 문제지만 농담의 소재도 될 수 있었습니다. 제이크의 부상은 다름 아닌 성기(性器)에 상처를 입은 탓에 그런 꼴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제이크의 해묵은 우스꽝스러운 상처가 브렛에게는 지상에서 겪은 지옥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렛은 전쟁 중에 애슐리와 결혼했지만 애슐리가 이질에 걸려 죽자 돈 많은 마이크 캠벨과 결혼할 예정이었습니다. 제이크는 그녀를 좋아한 나머지 그녀와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고 하면서 자꾸 바보 같은 질문을 하는 로버트에게 모욕적으로 “지옥에나 가버려.”라고 말했습니다.

제이크는 미국에서 건너온 작가 빌 고턴과 함께 스페인에 가서 낚시를 하고 팜블로나 축제를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제이크의 친구들도 즉 로버트, 브렛 그리고 마이크도 축제에서 만나자고 하며 떠났습니다. 그들이 낚시하기 위해 머문 숙소에서 어느 날 아침, 제이크가 일찍 일어나 낚시 도구를 챙기자 빌은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반어와 연민’을 보여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빌은 “반어와 연민……. 기분이 내킬 때는. 아, 그들에게 반어를 안겨 주고 또 연민을 안겨 주라. 아, 반어를 그들에게 안겨 주라……. 기분이 내킬 때는. 약간의 반어를. 약간의 연민을…….”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제이크가 반어와 연민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자 빌은 그를 최악의 국적 상실자라고 했습니다. 즉 모든 시간을 일하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지껄이는 데 허비하는 국적 상실자라는 것입니다.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지

그들이 팜플로나에 도착하여 몬토야 호텔에 들어갔습니다. 제이크는 이 호텔의 단골 손님이이라 몬토야가 제이크의 친구들이 도착하여 투우장에 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몬토야는 제이크에게 빌이 ‘투우 아파시오나도’인지 물었습니다. ‘아파시온’이란 말은 스페인어로 열정을 말하며 아파시오나도는 투우에 열정에 보이는 사람을 말합니다. 제이크는 아파시오나도답게 빌에게 투우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황소들을 풀어놓은 울타리에 거세한 소들을 같이 넣는 이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황소들이 거세한 소들을 향해 덤벼들지만 거세한 소들은 아무 반항도 않으며 그저 친구가 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광경을 직접 본 로버트는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로버트가 브렛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마이크는 로버트가 마치 거세된 소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거세된 소처럼 아주 조용하게 살며 늘 붙어 다니는 로버트가 왜 불청객이 된 줄도 모르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비난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직접 본 로버트는 거세된 소가 되면 살맛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로버트가 브렛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을 못 마땅히 여긴 마이크는 로버트가 마치 거세된 소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고 했습니다. 거세된 소처럼 아주 조용하게 살며 늘 붙어 다니는 로버트가 왜 불청객이 된 줄도 모르는 것이 옳은 행동인지 비난했습니다. 마이크와 로버트 사이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지켜 본 제이크는 마이크가 로버트에게 그렇게 끔찍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마이크는 술버릇이 나빴으며 로버트는 결코 술에 취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마이크는 어느 정도 지나면 스스로 불쾌해졌는데 그것은 제이크가 살면서 배운 부도덕이라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대신 믿는 것

드디어 축제가 시작되고 호텔에서 제이크는 몬타야의 소개로 페드로 로메로라는 투우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이크는 이제까지 무척 초연하고 품위가 있는 로메로처럼 잘생긴 투우사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이크는 몹시 흥분했는데 로메로의 투우가 끝난 뒤 브렛은 그의 초록색 바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다음날 투우는 그야말로 로메로의 독무대였으며 브렛은 다른 투우사들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투우사들이 가짜 몸짓으로 불쾌감을 주었다면 로메로의 투우는 진실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더구나 로메로는 잘 생겼습니다. 젊은 투우사에게 마음을 빼앗긴 브렛 때문에 마이크는 화가 치밀어 올랐으며 로버트는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녔습니다.

그러자 브렛은 제이크에게 그들처럼 고약하게 굴지 않는다고 하며 그가 자신이 사귄 유일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브렛은 스스로를 성격 파탄자라고 했습니다. 로메로라는 청년을 좋아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망가진 기분 때문에 그것은 옳은 일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투우사와 함께 도망을 갔고 이러한 사실을 안 마이크는 로버트가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지옥으로나 꺼져 버려.”라고 말하면서 참아 왔던 분노를 폭발시켰습니다. 그렇게 축제는 끝났고 모두들 상처를 가슴에 아로 새기며 떠났습니다. 스페인에 혼자 남은 제이크는 해변에서 수영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브렛으로 부터 전보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곤궁에 빠져 있으니 찾아와 달라는 것입니다. 제이크를 다시 만난 브렛은 로메로가 떠났다고 했습니다. 이유는 로메로가 누구하고도 같이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로메로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그녀가 좀 더 여자다워진 다음에야 가능했습니다. 로메로가 그녀의 외모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흐느끼며 마이크한테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이크가 아주 지독한 데가 있어도 참 좋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제 더 이상 ‘화냥년’이 되지 않을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그녀의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녀 말대로 하느님 대신 믿는 것이었는데 그녀에게는 하느님이 별로 효험이 없었습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할까

제이크는 브렛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끈기 있게 둘러붙어 있기만 하면 참된 사랑이 모든 것을 정복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러셀은『행복의 정복』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근본적인 행복은 무엇보다 인간과 사물에 대한 따뜻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인간에 대한 따듯한 관심은 사랑의 일종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소유하기를 원하며 언제나 명확한 반응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는 전혀 다르다. 행복을 가져오는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하기를 좋아하고 개인들의 특성 속에서 기쁨을 느끼는 사랑이며 만나는 사람들을 지배하려 하거나 열광적인 찬사를 받아내려고 하는 대신 그들의 관심과 기쁨의 폭을 넓혀 주려고 하는 사랑이다.

제이크와 브렛은 예전처럼 잘 지낼 수 있을까요? 제이크는 ‘길 잃은 세대’(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방향 감각을 상실한 젊은 세대)와 달리 견고했습니다. 제이크는 삶을 즐겼습니다. 그것은 지불한 값어치만큼 얻어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삶의 절망보다는 소망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사랑의 정복, 혹은 행복의 정복은 태양이 다시 떠오른 것과 같았습니다. 이러한 견고한 믿음이야말로 자신에게 효험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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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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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노인과 바다』 중에서

 

라 마르

당신은 바다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노인과 바다』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하는 노인이었던 산티아고는 바다를 ‘라 마르’라고 부릅니다. 이는 이곳 사람들이 애정을 가지고 바다를 부를 때 사용하는 스페인 말입니다. 산티아고는 늘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으며, 큰 은혜를 베풀어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무엇이라고 말했습니다. 설령, 바다가 무섭게 굴거나 재앙을 끼치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달이 여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젊은 어부들은 가운데 몇몇은 바다를 ‘엘 마르’라고 남성형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고기를 팔아 번 큰돈으로 모터보터를 사들인 부류들로 바다를 두고 경쟁자, 일터, 심지어 적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노인은 84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습니다. 처음 40일 동안은 고기 잡는 법을 배우며 그를 무척이나 따랐던 마놀린 소년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40일이 지나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소년의 부모는 이제 노인이 살라오가 되었다고 하며 소년을 다른 배로 옮겨 타게 했습니다. 살라오는 스페인 말로 ‘가장 운이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배는 첫 주에 큼직한 고기를 세 마리나 잡았습니다. 노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소년은 아버지 말을 따라야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신념이라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노인에게 다시 고기잡이를 같이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만약 소년이 친아들이라면 노인은 소년을 데리고 멀리 나가는 모험을 한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사자들 꿈을 꾸다

노인에게 85는 재수 좋은 숫자였습니다. 내장을 빼고도 450킬로그램이 넘는 고기를 잡아 가지고 돌아올 신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에게는 부모가 있었고 지금 운 좋은 배를 타고 있어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기잡이만큼이나 야구에도 관심이 많은 노인에게 소년은 가장 훌륭한 감독에 견줘 가장 훌륭한 어부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고맙다고 하면서 너무 큰 고기가 걸려서 소년의 생각이 틀리다는 게 입증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을지 몰라도 요령을 많이 알고 있고 배짱도 있다고 노인은 거듭 말했습니다. 이제 노인의 꿈에는 폭풍우도, 여자도, 큰 사건도, 큰 고기도, 싸움도, 그리고 죽은 아내의 모습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직 여러 지역과 해안에 나타나는 사자들 꿈만 꿀 뿐입니다.

노인은 혼자 먼 바다까지 노를 저어나갔습니다. 그는 어떤 어부보다도 낚싯줄을 똑바로 드리울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야만 어두운 해류의 층마다 정확히 그가 바라는 수심에다 미끼를 놓고 그곳을 헤엄쳐가는 고기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물론 운이 따른다면 더 좋겠지만 그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로 여겨 오히려 빈틈없이 일을 해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운이 찾아올 때 그걸 받아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노인은 굉장히 큰 고기가 미끼를 입에 물고 도망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기한테 끌려가면서 낚싯줄을 어딘가에 단단히 잡아맬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몸이 밧줄 걸이가 되었습니다. 서로가 필사적인 상태에서 고기가 선택한 방법은 온갖 올가미나 덫이나 계책이 미치지 못하는 먼 바다의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겨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모든 사람이 다다르지 못하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고기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디마지오 못지않은 사람이 되어야지

노인은 고기를 형제 사이마냥 끔찍이도 좋아하고 존경하였지만 고기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왼손에 쥐가 났습니다. 쥐가 나는 건 딱 질색이었습니다. 그건 자신의 몸한테 배신을 당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 고기가 다이빙 선수처럼 온 몸을 물 위에 드러냈다가 유연하게 다시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배보다 60cm도 넘는 고기가 왜 뛰어올랐을까, 생각했습니다. 마치 자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이라도 하려고 솟아오른 것 같다고 생각한 노인은 고기한테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비록 고기가 자신보다 더 기품이 있고 힘이 세지만 다행스럽게도 고기는 자신보다는 똑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노인은 자신의 의지와 지혜로 고기와 맞서 싸웠습니다. 또, 얼마나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틀이 지나도록 결과를 모르는 상황에서 노인은 양키스의 디마지오를 생각하며 그에 못지않은 사람처럼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디마지오는 발뒤꿈치에 뼈돌기(발꿈치에 잘 생기는 돌기)가 박혀 있으면서도 그것을 참고 최후까지 멋지게 승부를 겨뤘습니다. 노인은 고통 같은 건 참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고기는 고통 때문에 미쳐 버릴지 모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노인은 머리를 맑게 하려고 했습니다. 머리를 맑게 해서 인간답게 고통을 견디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노인은 모든 고통과 마지막 남은 힘, 그리고 오래 전에 사라진 자부심을 총동원해 고기의 마지막 고통에 작살을 꽂았습니다. 그렇게 싸움은 끝났고 이제 노예처럼 뼈 빠지게 일해야만 했습니다.

 

인간은 파멸을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상어는 우연히 나타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피 냄새를 맡은 상어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자 노인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노인에게는 단호한 결의가 있었지만 희망은 별로 없었습니다. 상어가 공격해 오는 걸 막을 수 없더라도 혹시 해치울 수 있을지 몰랐습니다. 노인은 상어의 습격을 받아 몸뚱이가 30kg쯤 뜯겨져 나간 고기를 더 이상 바라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고기가 습격을 받을 때마다 마치 자신이 습격을 받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고기를 공격한 상어를 죽이고 나서 노인은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인간은 파멸을 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희망을 버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죄악이었습니다. 그런데 고기를 죽이는 건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상어에게 최악의 사태를 당하자 노인은 고기한테 정말 미안했습니다. 고기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 이렇게 멀리 나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고기를 죽인 것은 다만 먹고살기 위해서, 또는 식량으로 팔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어부라는 자존심 때문에 고기를 죽인 것입니다. 그는 고기가 살아 있을 때도 사랑했고 고기가 죽은 뒤에도 사랑했습니다. 고기를 죽인 건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 아닌 게 없었습니다.

 

백절불굴의 정신

바다에서 돌아와 침대에서 깊은 잠에서 깬 노인은 마놀린에게 자신이 고기한테 지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노인이 고기한테 진 건 아니라고 했습니다. 김욱동은『노인과 바다』「작품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언뜻 보면 ‘패배’와 ‘파멸’ 사이에 이렇다 할 차이가 없을지 모른다. 실제로 사전을 보아도 전자는 어떤 대상과 겨루어서 지는 것을 뜻하고. 후자는 파괴되어 없어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파멸’은 ‘패배’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헤밍웨이는 산티아고의 입을 빌려 물질적 승리와 정신적 승리를 엄밀히 구분 짓고 있다. 즉 ‘파멸’은 물질적 ․ 육체적 가치와 관련된 반면, ‘패배’는 어디까지나 정신적 가치와 관련되어 있다.

노인은 육체적으로 파멸을 당해도 정신적으로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운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운 때문만은 아닙니다. 노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자 꿈을 꿀 정도로 사자를 사랑했습니다. 사자 꿈! 그것은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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