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상을 받는 것은 시간을 얻는 걸 의미하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욕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읽혀지기 위해 어떤 반응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상을 받는 것은 그런 반응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이제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즐거움이 아니다.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 작품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설렘의 도가니가 된다. 남들처럼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한 고전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통을 좀 더 어떻게 표상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열광한다. 시공(時空)에 가로막혀 난해하고 현대적(現代的)이지 않겠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적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애정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목록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엮은『16인의 반란자들』은 이런 갈증을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하나, 시간이 나올 때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호텔 인터뷰가 아닌 점. 둘, 강렬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삶을 흑백 사진과 함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점.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반란자라고 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어떤 불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반란을 갈망해왔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집념과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정체성 즉, 반란자라는 기묘한 통증에 공감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방관할 수 없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블리문다’(타인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인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들의 흑백 사진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적인 본능으로 충만한 사소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흑백 사진을 한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라 그들의 반란이 부드러운 싸움이겠지, 혹은 좀 더 격하게 이데올로기적이겠지 한다면 반란자의 열정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반란자에게 현실의 귀환은 살아있는 생(生)의 과정이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퀘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였다. 돌이켜 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가면 같은 존재여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래서 연극인 다리오 포는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같은 맥락으로 반란자는 현실의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다. 노예제도의 모순을 바라보는 토니 모리슨은 자연적인 아닌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희생자 가오싱젠은 정치권력에 맞서 내적으로 공고한 존재를 역설하면서 "어떤 이즘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는 음모자였소.”라고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에 맞서는 V. S. 네이폴은 내세에 대하여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라고 말했다.

 

반란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는『양철북』의 귄터 그라스에서 보듯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역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돌아온다고 했던 귄터 그라스는 나치 친위대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인정하면서 민족의 양심이 고통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주의자라는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니라 “나에게 적은 관념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항변이었다. 이와는 달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운명 없는 인간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딴은 행복했다.’고 말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홀로코스트에서 오는 정체성이었다. 즉 ‘이는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살다 보면 그 이상은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로,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닫혀 있는 진실을 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저자는 수상자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굴절된 내적인 저항을 ‘반란자’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반란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진실’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만남,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쪽/저쪽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들의 실존적 진실은 ‘다른 쪽’을 보는 것이다. 다른 쪽은 도리스 레싱이 지적했듯 사상이 닫힌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아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라는 관찰자의 시각’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인 본능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소리 없는 고통에서 자극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히로시마 노트』에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말했는데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이스탄불』고 했다.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릭 월콧은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지 앞에 앉을 때마다, 누구든 과거를 비우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순간』에서 현재성 즉 살아 있는 ‘어떤 순간’을 표현했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있다고 말하면서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하였다.

 

『16인의 반란자들』이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대화한 내용인 탓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대화는 앞서 말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로 중첩된다. 그러면 앞으로 반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문학의 운명과 같은 수레바퀴다. 문학이 죽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문학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정도의 시각으로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텅 빈 실체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학은 위대한 삶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위대한 것은 결코 환영(幻影)이 아니다. 시인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즉 반란자들은 앞으로도 영혼을 잃어버린 삶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가오싱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 주는 도구’를 가지고 삶에 대한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반란자들에게서 달(月)을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밝은 상상력이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달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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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 - 절망의 한복판에서 부르는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
차동엽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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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맨 먼저 만나는 것은 뭘까요? 윌리엄 윌리워즈는 <무지개>라는 시에서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셀레느니.’라고 노래했지요. 이렇듯 삶을 위로해주는 것들은 일곱 색깔처럼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행을, 어떤 사람은 책을, 어떤 사람은 가족이나 연인을, 또 어떤 사람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극복해 나갑니다. 그러나 아팠던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보다 더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답을 찾으려는 ‘질문’(question)이지 않을까요?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인지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솔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잊혀진 질문』은 무지개(舞之開) 작가로 널리 알려진 차동엽 신부의 ‘생의 찬가’입니다. 이러한 질문은 이병철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를 나름대로 엮은 것입니다. 질문들은 하나같이 유한한 인간, 즉 3차원적 인간의 문제를 오직 3차원적으로 몇 번이고 해결하는 것이라면 앞서 말한 절실함은 허울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질문들은 사실 단숨에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3차원적인 우리가 무한한 존재인 신(神)에 대해 뭔가 알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종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믿음’ 혹은 ‘체험’으로 우리의 정신을 깨닫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잊혀진 질문’은 우리가 그동안 잃어버린 것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만날 수 있는 아주 절실한 문제가 되는 셈입니다.

 

차동엽 신부는 인생에서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두 가지 질문, 즉 ‘Big Q'와 'Rael Q’를 던지면서 이 책의 부제에 나와 있듯 ‘가슴을 뛰게’ 합니다. 저자에 따르면 Big Q는 오랜 시간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입니다. 그다음 Rael Q는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입니다. 저자의 질문은 고통, 기도, 신의 유무, 창조와 진화, 과학, 악인과 선인, 용서, 천국과 지옥, 지구의 종말, 꿈 등등 여러 가지 입니다. 이러한 물음의 이면에는 신앙심이 깊은 저자의 고백이 바탕을 이루고 있지만 굳이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거부감이거나 어려움이 없어 보입니다. 저자는 질문의 근본을 성찰하기 위한 근거로 성경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특유의 ‘난문쾌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가령, 우리는 종종 사람의 탈을 쓴 짐승 같은 악인(惡人)들을 보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고통의 무게도 만만치 않지만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을까?”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저자는 이 세상에 악인은 없다고 하며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합니다. 악인이란 생각과 행동이 100% 악으로만 구성된 사람인만큼 가끔은 선(善)을 행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선’과 ‘악’ 을 선택하는 인간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상식과는 다르게 ‘악인 히틀러’는 ‘인간 히틀러’가 됩니다. 인간이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인간에게 악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바로 ‘자유의지’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에 따라 어떤 사람의 운명이 선과 악으로 결정되며 혹은 바꿀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마주대할 때마다 어느 순간 일명 ‘얌체기도’를 하게 되는데 이것이 과연 참된 기도일까? 라고 고민해봤을 것입니다. 겉만 봐서는 ‘나쁜 기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문제에 대해 저자는 ‘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위로이며 보상’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가르침을 『닥터 지바고』에서 다음과 같이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리라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리도, 교회의 전례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면의 음악이 필요했다. 인간은 이러한 음악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작곡할 수 없다. 리라는 삶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러한 음악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생각을 통해 고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통의 참된 의미를 혼동한 채 무조건적인 긍정은 오히려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행복하면 성공할 것이다.”라는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은 말 그대로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라든가 긍정적인 희망으로도 좌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것으로 모든 것이 고통으로 끝나는 것일까요? 저자의 답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유인즉 ‘사랑’이라는 뜻 깊은 기쁨 덕분입니다. 온갖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해답은 “Do you love me?(당신은 나를 사랑하오?)”를 거듭 되묻는 것입니다.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말은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치유호르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꿈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유기농법’내지 ‘태평농법’을 권하고 있습니다. 꿈을 이루는 가장 큰 과제는 포기하지 않는 것이며 이것은 ‘버티기’와 관련된 것으로 ‘계획농법’이 아닌 ‘drift’(표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나요? 우리의 영혼에서 '하늘 냄새'가 나고 있나요? 잊혀진 질문에서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은 괴테의『파우스트』에서 죽음을 앞에 둔 파우스트가 하나의 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된 영혼을 깨달은 후 파우스트는 ‘무지개는 인간의 노력을 비춰주는 거울’과 다르지 않다고 생의 의지를 토닥거렸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저자 말대로 "나는 영혼이다."를 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면 사람 냄새는 물론 하늘 냄새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영혼이라고 해서 저 멀리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곧 '하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영혼의 힘으로 인해 우리의 칠흙같은 마음은 무지개로 찬란하고 기쁘게 빛나면서 삶의 용기와 위로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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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인의 반란자들 -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
사비 아옌 지음, 정창 옮김, 킴 만레사 사진 / 스테이지팩토리(테이스트팩토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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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2008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는 “상을 받는 것은 시간을 얻는 걸 의미하며,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욕망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읽혀지기 위해 어떤 반응을 얻기 위해 글을 쓴다. 상을 받는 것은 그런 반응 중 하나”라고 말했다. 작가들에게 노벨문학상은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길이다. 예전에는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이제 모든 길은 돈으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돈의 즐거움이 아니다. 르 클레지오가 말했듯 작품에 대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얻는 것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깊은 성찰을 하면서 열정적으로 작업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공감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될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두려움과 설렘의 도가니가 된다. 남들처럼 하루 24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들은 어떻게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여기서 말한 고전은 단순히 오랜 시간을 기준으로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실존적 고통을 좀 더 어떻게 표상하는 것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생소한 작가들뿐만 아니라 생소한 작품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삶과 작품을 보면서 열광한다. 시공(時空)에 가로막혀 난해하고 현대적(現代的)이지 않겠지만 이런 불편함에도 적어도 한번쯤은 읽어봐야 한다. 하지만 마음에 새겨둘 수 있는 애정과는 달리 습관적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의 목록을 올릴 뿐이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대화를 엮은『16인의 반란자들』은 이런 갈증을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인식의 폭을 넓혀 주고 있다. 하나, 시간이 나올 때마다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호텔 인터뷰가 아닌 점. 둘, 강렬한 소설을 쓰는 작가들의 삶을 흑백 사진과 함께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이 아닌 다른 어떤 이유로 사회에 참여하고 있다는 공통감각이 놀랍게도 반란이라는 점. 노벨문학상 작가들을 반란자라고 해서 그런지 이 책에는 어떤 불온함이 느껴졌다. 어쩌면 노벨문학상이 반란을 갈망해왔는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문학에 대한 집념과 글을 계속 쓰고자 하는 내밀한 욕망이 촘촘하게 스며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노벨문학상 작가들의 정체성 즉, 반란자라는 기묘한 통증에 공감하게 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다루는 작가에게는 방관할 수 없는 문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작가로서의 자존심이 큰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주제 사라마구의『수도원의 비망록』에 나오는 ‘블리문다’(타인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능력을 지닌 인물)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뇌의 흔적이 아무런 여과 없이 드러난 그들의 흑백 사진에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문학적인 본능으로 충만한 사소한 표정이 담겨져 있었다. 그래서 흑백 사진을 한순간 보는 것만으로도 내 영혼의 빈자리를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었다.

 

 

노벨문학상 작가들이라 그들의 반란이 부드러운 싸움이겠지, 혹은 좀 더 격하게 이데올로기적이겠지 한다면 반란자의 열정이 희석되고 말 것이다. 반란자에게 현실의 귀환은 살아있는 생(生)의 과정이다. 이것은 주제 사라마구가 말한 것처럼 “삼라만상에는 거의 자라지 않는 나무도 있는데, 그건 그 나무가 이질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고. 아, 그렇다고 해서 ‘세퀘이아’가 ‘올리브나무’보다 낫다는 건 아니오. 그 반대도 아니고.”였다. 돌이켜 보면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우리는 가면 같은 존재여서 가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그래서 연극인 다리오 포는 “풍자는 권력에 대항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하면서 대중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웃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같은 맥락으로 반란자는 현실의 빈틈을 파고드는 존재다. 노예제도의 모순을 바라보는 토니 모리슨은 자연적인 아닌 이익을 구하는 자들에 의해 형성된 인종주의에 반대한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희생자 가오싱젠은 정치권력에 맞서 내적으로 공고한 존재를 역설하면서 "어떤 이즘이 없이 산다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저항의 형태이다.”라고 말했다. 콜롬비아의 평화를 위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나는 항상 서명자보다는 음모자였소.”라고 하면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종교적 통합주의에 맞서는 V. S. 네이폴은 내세에 대하여 “나는 종교인이 아니오. 내 삶은 글을 쓸 뿐, 그게 다요. 쓰는 게 종교요. 그게 존재할 수 있는 종교들 중에서 가장 높은 종교요.”라고 말했다.

 

 

반란자들이 지속적으로 문제 삼고 있는 것 중에는『양철북』의 귄터 그라스에서 보듯 ‘치명적인 트라우마’의 역설을 빼 놓을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되돌아온다고 했던 귄터 그라스는 나치 친위대라는 수치스러운 과거를 인정하면서 민족의 양심이 고통을 당했다. 그의 고백은 자신이 반파시스트주의자라는 침묵을 깨트리는 것은 아니라 “나에게 적은 관념적인 이데아에 불과하다.”는 항변이었다. 이와는 달리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임레 케르테스는『운명 없는 인간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딴은 행복했다.’고 말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홀로코스트에서 오는 정체성이었다. 즉 ‘이는 고통을 세세하게 묘사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지요. 살다 보면 그 이상은 위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순간들로, 그럴 때에 나오는 모든 긍정적인 자극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오히려 거대한 평온함과 안도감이 들게 만들기’ 때문이었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은 닫혀 있는 진실을 열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을 근거로 하여 저자는 수상자들의 삶과 작품 세계에 굴절된 내적인 저항을 ‘반란자’라고 결정했다고 했다. 반란자는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진실’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노벨문학상 작가들과의 만남, 어느 것 하나 값지지 않은 게 없었다.’고 느꼈다. 그들에게 이쪽/저쪽의 경계는 무의미했다. 그들의 실존적 진실은 ‘다른 쪽’을 보는 것이다. 다른 쪽은 도리스 레싱이 지적했듯 사상이 닫힌 시스템이 마음에 안 들어서 지속적으로 나의 이데아들을 새롭게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아에서 우리는 고통에 대한 체념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무섭도록 솔직한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수상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작가라는 관찰자의 시각’을 알게 되었다. 바로 문학적인 본능이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의 소리 없는 고통에서 자극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는『히로시마 노트』에서 ‘존재에 대한 도덕적 의미’를 말했는데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오르한 파묵은『이스탄불』고 했다. 문학에는 인종적인 순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데릭 월콧은 “아무것도 쓰여 지지 않은 백지 앞에 앉을 때마다, 누구든 과거를 비우고 제로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라고 말했다.『순간』에서 현재성 즉 살아 있는 ‘어떤 순간’을 표현했던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모든 사물은 적어도 여섯 개의 시각, 다시 말해 네 방향과 위아래 두 방향에서 볼 수”있다고 말하면서 ‘세세한 것들에 주목하라.’고 하였다.

 

 

『16인의 반란자들』이 노벨문학상 작가들과 대화한 내용인 탓에 그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들의 대화는 앞서 말한 ‘반란자’라는 이미지로 중첩된다. 그러면 앞으로 반란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이것은 문학의 운명과 같은 수레바퀴다. 문학이 죽었다고 걱정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지만 지금까지 문학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문학에 대한 정도의 시각으로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텅 빈 실체에 불과하다. 오히려 문학은 위대한 삶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이 위대한 것은 결코 환영(幻影)이 아니다. 시인 페소아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잘난 체하거나 배척하지 않는 것임을

넌 알아야 해.

알면 알수록 그건 아주 사소한 것임을

넌 알아야 해.

달은 세상의 모든 호수를 비춘다는 것을

그래서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들, 즉 반란자들은 앞으로도 영혼을 잃어버린 삶을 비출 것이다. 그들은 가오싱젠이 말한 것처럼 ‘문학은 인간이 의미하는 것을 심오하게 일깨워 주는 도구’를 가지고 삶에 대한 고통을 휴머니즘으로 뒤바꿔놓는다. 이 책을 읽으며 반란자들에게서 달(月)을 보게 되는 것은 가장 밝은 상상력이 아닐까? 정말로 우리는 달이 높은 곳에 위치한다는 것을, 그래서 더욱 위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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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문학 멘토링 - 문학의 비밀을 푸는 18개의 놀라운 열쇠
정여울 지음 / 이순(웅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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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문학 멘토링! 왠지 낯설다. 자기 계발에 관한 이런 저런 멘토에 귀가 닳은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 문학에서 실용성을 찾기 힘들다는 편견 때문일까? 그럼에도 저자는 명성에 걸맞게 낯설다는 장벽을 아주 가볍게 넘어서고 있다. 저자는『정여울의 문학 멘토링』에서 문학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풀고 있다. 어렵지 않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고 읽기가 수월하다는 것이다. 저자 말대로 이 책은 문학 참고서도 아니며 문학 이론서도 아니다. 오히려 문학 참고서와 문학 이론서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 위치에서 문학과 친구가 되는 법을 유려한 필치로 멘토링하고 있다.

 

저자에게 문학이 영혼의 피난처가 된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의 힘’ 이 거부할 수 없는 매혹 덩어리이며 삶을 보다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돌이켜 보면 무한경쟁의 시대에 문학은 살아남기 위한 스킬, 스펙도 아니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 흑백(黑白)이 분명해야 한다. 흑백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예/ 아니오’를 요구한다. 이러한 흑백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정답’(正答)이 바람직한 기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행복은 흑백이라는 단색(單色)이 아니다. 행복은 자유라는 다채로움에 있다. 문학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비밀 일기가 되는 것은 그만큼 삶의 진실을 잘 보여주는 덕분이다.

 

우리는 문학과 동행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문학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문학 작품을 읽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것은 문학과 ‘1대 1’의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문학 작품은 우리가 영혼의 성장을 위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정신적 비타민’이다. 그래서 만남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문학 속에 숨겨진 각종 ‘코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문학이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며 멋진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문학의 기법이나 내용에 관한 것을 아는 것은 친구가 되기 좋은 방법이다.

 

가령, 문학의 기법에 있어 패러디를 ‘모방’이라는 ‘보수적 충동’과 ‘차이’라는 ‘변화의 충동’으로 접근하고 있다. 모든 창조에는 원칙적으로 모방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즉 창작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으로부터 아직 없는 것’을 발견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 기법으로서의 패러디가 예술 작품의 창조적 원동력이 되기 위해서는 단순히 ‘패러디를 위한 패러디’가 아니라 ‘패러디를 통해 무엇을 창조하는가.’에 있다는 것이 궁극적이다.

 

또한, 시점의 문제에 있어 창작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해석’의 문제라는 것, 창조의 도구에 있어 은유가 ‘언어의 비료’라고 한다면 상징은 ‘문학의 보물 창고’라는 것, 반어법(verbal irony), 즉 아이러니는 단지 말 꾸밈이나 기교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로 태어나 무한한 이상을 추구하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것, 은밀한 풍자 혹은 우화라고 하는 알레고리는 말할 수 있는 것을 통해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문학의 마술적 에너지라는 것이다.

 

문학의 내용에 있어서는 확연히 분리된 두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을 하는 캐릭터인 트릭스터(trickster)는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신비로운 생의 가치가 존재함을 일깨우는 존재라는 것, 문학 작품에서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 착한 주인공)을 방해하는 안타고니스트(antagonist: 악한 주인공)은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한계를 실험하는 리트머스지라는 것, 기억은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한 자기 정체성의 표현 도구를 넘어,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윤리적 이정표라는 것, 인간의 생명과 생존 그 자체의 강력한 은유인 음식은 우리에게 사랑이자 사람, 그리고 삶 그 자체라는 것, 외부세계에서는 허구지만 마음속에는 진실인 환상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며, ‘얼마나 재미있는 환상을 창조할 것인가’ 보다는 그 환상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트라우마(trauma)는 어떤가?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지만 아름다운 문학 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다는 것, 통과의례를 겪어 낸 영웅의 제 1요건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는 것,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는 모험은 ‘~하지 마라'(Don't)가 아니라 ‘한 번 해보자'(Let' do it!)라는 것, 오만한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징벌쯤으로 여기는 대재앙이 사실은 현재의 소중함,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의 소중함이라는 것, 문학의 영원한 테마인 사랑은 희망이나 보답을 향한 열정이 아니라, 이 세상에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부신 기적을 느낄 줄 아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문학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문학을 오랫동안 짝사랑해 온 저자의 섬세한 통찰력을 깨닫게 된다. 문학은 아이러니하게도 단순히 문학 작품을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학의 또 다른 얼굴은 세상의 모든 생물, 세상의 모든 사물과 교감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백과사전으로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 떠나는 끝없는 여행을 하는 것이다. 문학이 이 정도로 비밀을 가지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문학의 힘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문학은 최고의 멘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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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와 줄리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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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미오: 사랑이란 한숨으로 만들어진 연기인데

정화되면 연인 눈에 반짝이는 불길이고

성질내면 사랑의 눈물 먹고 자라는 바다야.

(………………………)

줄리엣: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예요.

거지들은 자기 값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진실된 내 사랑은 한없이 크게 자라

그 재산의 절반도 계산할 수 없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중에서

 

달에게 사랑을 맹세하지 마세

누구나 한번 쯤 사랑의 맹세를 해봤을 것입니다. 사랑한다면 성실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말보다 내용으로 가득차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의 밤을 은빛으로 물들이는 달에게 맹세하는 것은 어떨까요? 세익스피어의『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둥근 궤도 안에서 한 달 내내 변하는 지조 없는 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맹세는 사랑의 관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처럼 사랑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하겠다면 품위 있는 자신에게 맹세해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너무너무 성급하거나 무모 하는 것에도 반대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번개 친다.”를 말하기도 전에 사라지는 번개와 꼭 같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사랑의 새싹은 여름의 숨결로 자라나 다음 만날 땐 예쁜 꽃이 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불행은 그들의 가문이 오래 묵은 앙숙이었는데 그들이 숙명적인 몸에서 연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몬터규 집안의 로미오가 줄리엣을 만나기 전에 그는 로잘린과 연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눈가리개 하고 있는 사랑 때문에 슬픔이 짧아지지 못했습니다. 큐피트의 화살로는 로잘린의 과녁을 맞출 수 없게 되자 그는 비탄에 잠겼습니다. 한편 캐풀렛 집안에서는 줄리엣의 신랑감으로 귀족 청년 파리스 백작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캐풀렛 부인은 캐풀렛 가문의 오랜 축제가 열리는 저녁에 줄리엣에게 파리스의 젊은 얼굴 , 그 책을 읽어보고 아름답게 적어 놓은 기쁨을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

그런데 그날 밤 축제에서 줄리엣에게 제본 안 된 사랑의 책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로미오였습니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보자 횃불보다 더 밝게 빛나는 아가씨라고 했습니다. 로미오가 값비싼 보석 같은 진정한 아름다운 줄리엣을 지켜보는 동안 그녀의 조카 티볼트가 그만 격분했습니다. 티볼트가 몬터규 집안의 적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한바탕 작은 소동이 조용해지자 로미오는 줄리엣의 손을 잡고 성자상의 부드러운 키스로 침입 사건의 죄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가 키스를 하려고 하자 줄리엣은 성사상의 입술은 기도에 써야 하면서도 성자상은 기도는 허락하나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로미오는 기도하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고 하면서 줄리엣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그들은 첫 키스를 하였지만 서로의 이름을 몰랐습니다. 하지만 서로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들의 사랑은 가혹했습니다. 과연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느 날 로미오는 줄리엣의창가 아래에서 그녀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줄리엣은 “로미오, 왜 그대는 로미오인가요?”라고 안타깝게 말하면서 그의 이름을 거부했습니다. 그의 이름만이 그녀의 적일 뿐 이었습니다. 몬터규는 로미오의 손도 발도 아니고 얼굴이나 사람 몸 가운데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줄리엣은 로미오가 다른 이름을 가져 그 이름에서 벗어나 자신을 다 가지라고 했습니다. 장미가 어떤 말로도 같은 향기가 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줄리엣의 비밀을 듣고 있던 로미오는 만약 그녀가 자신을 애인이라 불러 준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로미오라고 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사랑은 장식이 아니에요!

그들은 사랑하는 방향을 결혼으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로미오는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줄리엣이 마음의 연인이라고 고백하면서 혼인으로 축복해주시길 부탁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젊은이의 사랑이 진실로 마음속이 아니라 눈 속에 있구나, 의심하였지만 로미오는 옛 짧은 애인 로잘린처럼 사랑에 혹 한 것이 아니라 줄리엣과는 호의를 주고받는 다고 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어쩌면 그들의 사랑이 두 집안의 원한을 순수한 사랑으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을 바라면서 그들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로미오가 기쁨에 넘쳐 줄리엣에게 상상 속의 행복을 드러내달라고 하자 그녀는 “말보다는 내용으로 가득한 상상력은 장식이 아니라 본질을 뽐내는 법”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미오에게 불길한 앞날이 걸쳐 일어났습니다. 로미오가 시비 끝에 티볼트를 살해하여 로렌스 수사의 암자에 숨어 지냈지만 끝내 추방당하게 되었습니다. 로렌스 수사는 그의 잘못은 사형인데도 죽음이 아니라 추방을 내린 것은 자비로운 일이라고 위로했습니다. 하지만 추방! 그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끔찍했습니다. 더구나 줄리엣이 사는 곳이 천국이라고 말하며 추방은 자비가 아니라 고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역경의 달콤한 우유인 철학으로 위로하면서 로미오가 만투아로 건너가 사는 동안 사면을 요청하고 때를 봐서 그들의 결혼을 공표하겠다고 했습니다.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

이렇게 해서 줄리엣은 로미오와 헤어졌는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리스 백작과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반갑진 않으나 고맙긴 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혼을 반대했습니다. 비탄에 잠긴 그녀는 로미오와 맺어 준 로렌스 수사를 찾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을 조언해주기를 바랐습니다. 만약 로렌스 수사의 지혜를 얻을 수 없다면 그녀는 죽음으로 심판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로렌스 수사는 자결할 의지력을 가진 그녀에게 죽음과 비슷한 치유책을 알려주었습니다. 즉, 지금의 치욕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파리스와 결혼에 동의하고 죽음의 축소판이 든 약을 먹게 되어 묘지에 누워 있으면 그와 로미오가 그녀가 깨는 것을 지켜보다가 구해내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렌스 수사의 계획이 담긴 편지보다 로미오는 줄리엣의 죽음을 먼저 알게 되었습니다. 절망한 사람에게 사악한 마음이 재빨리 드는 걸까요? 로미오는 줄리엣과 함께 누워 있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약장수에게서 독약을 사고 나서 줄리엣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자궁 앞에서 파리스 백작을 만나 그를 죽였습니다. 그리고는 죽음마저 아름다움을 정복하지 못한 줄리엣에게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고 독약이었던 슬픔의 치료제를 마셨습니다. 줄리엣이 깨어나고 나서 꿈이 좌절된 것을 알게 되자 그녀는 로미오의 검을 들고 “행복한 단검아, 이게 네 칼집이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을 찌르며 죽었습니다.

 

무서운 아름다움

스무 자루 칼보다도 더 큰 위험이 줄리엣의 눈에 있다고 했던 로미오는 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사랑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줄리엣은 어떤가요? 사랑은 내게 힘을, 힘은 도움을 줄 거라고 했습니다. 최종철은 『로미오와 줄리엣』,「작품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렇다면 줄리엣의 자결이 보여 주는 이 슬픔 속의 기쁨, 예이츠의 표현을 빌리면 이 ‘무서운 아름다움’(terrible beauty)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 비극의 주제일 뿐만 아니라 주된 구성 원리로 작동하고 있는 사랑의 모순어법에서 나온다. 서로 미워하는 두 원 수 집안의 자식으로 태어나 서로를 사랑하게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운명에 한편으로는 대항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이며, 결국에는 살아 있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이룬다.

사랑하는 사람은 짓궂은 여름 바람 맞으며 한가로이 나부끼는 거미줄에 올라타도 안 떨어진다고 합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운명 앞에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줄리엣이 말한 것처럼 유일한 내 미움이 유일한 사랑을 낳을 정도로 순수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죽은 꽃을 피웠습니다. 만약에 사랑이 마침표이거나 물음표, 그리고 느낌표라고 한다면 장식에 불과하지 모릅니다. 때로는 사랑은 죽음표여야 합니다. 죽을 정도로 사랑한다면 아낌없는 마음이 더 많이 줄수록 더 많이 생겨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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