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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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반복할 수 있을까요? 시간이 흘러가는 물이라고 한다면 잡을 수 없을 것입니다. 두 손으로 잡으려고 애쓴다고 해도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진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지금 있는 그대로 사는 현실에서 과거를 반복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삶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못다한 사랑을 지금에 와서는 얼마든지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이게 과연 진실일까요? 진실이라고 한다면 남들이 보면 고통이겠지만 자신만은 즐거운 고통이라고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피츠 제럴드의『위대한 개츠비』에 나오는 개츠비가 이런 사람입니다. 그는 남들과는 다른 민감한 개성을 가졌습니다. 개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성공적인 몸짓이거나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성은 ‘창조적 기질’이라는 것에 불과한 맥빠진 감수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소설에서 개츠비가 위대한 개츠비로 불린 까닭은 그의 ‘낭만적인 인간성’에 있습니다. 작가는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일찍이 발견된 적이 없고 앞으로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개츠비는 아름답고 부유한 데이지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장래가 아무리 찬란하다고 해도 그는 무일푼의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가진 것이 없었던 그는 거짓 맹세를 하더라도 데이지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있지도 않는 수백만 달러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닙니다. 그 보다는 자신이 얼마든지 그녀를 충분히 보살펴 줄 수 있다는 안도감을 불어넣어 주어습니다. 차라리 그녀가 그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렇게까지 사랑의 고통에 시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富)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에 감싸인 덕분에 그녀가 은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결국 그녀는 사랑이 아닌 돈 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톰과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5년을 악착같이 일을 한 후 개츠비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사는 호화로운 주택에서 주말마다 파티를 열었습니다. 억울했던 자신의 젊은 슬픔에서 벗어나고자 그는 낯선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밤마다 자신의 집에서 ‘초록색 불빛’을 쳐다봤습니다. 그가 초록색 불빛이 보이는 곳으로 이사를 온 것은 아주 우연 같았지만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바라보는 초록색 불빛은 자신이 사랑했던 데이지가 사는 집에서 나오는 연민의 불빛이었습니다. 그는 데이지에게 부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집에서 데이지와 재회했습니다. 5년 만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환상에 사로잡혔습니다. 행복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었습니다. 즉, 그 환상의 힘은 그녀를 초월하였으며 모든 것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창조적인 열정으로 직접 그 환상에 뛰어들어 그 환상이 끊임없이 부풀어 오르게 했으며 자신의 길 앞에 떠도는 모든 빛나는 깃털로 그 환상을 장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정열이나 순수함도 한 인간이 유령 같은 마음 속 깊숙이 품은 것은 어찌할 수 없게 마련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환상은 데이지가 톰에게 “난 결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자유로운 몸이 되면 5년 전으로 되돌아가서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과거를 반복할 수 없다고요?’라고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큰 목소리로 말했던 절박함이 묻어났습니다. 하지만 데이지는 “지금 난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그걸로 충분하지 않은가요? 과거는 어쩔 수 없잖아요. 저 사람(톰)을 한 번쯤은 사랑했단 말이에요…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요”라고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사랑 때문에 아팠던 사람들이라면 개츠비가 바라봤던 ‘초록색 불빛’이 아릿할 것입니다. 과거를 반복할 수 있다는, 그래서 사랑을 반복할 수 있다는 개츠비의 낭만은 반짝이는 별과 같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은 놀랐습니다. 삶이 아무리 힘들고 지치게 하여도 사랑은 고통보다 더 큰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경이로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하나의 희망이라고 한다면 그 희망을 향해 머나먼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그 희망이 때로는 저 너머로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말입니다. 이렇게 사랑을 반복하고 싶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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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08-30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극적으로 보일지 모르는 개츠비의 사랑은 오우아님은 낭만적인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네요^^ 열린책들 카페에 올렸던 베르테르 리뷰도 잘 읽었는데 개츠비 리뷰도 잘
읽었습니다~ 이벤트에 꼭 당첨되기를 바래요^^ㅋ
 
테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5
토머스 하디 지음, 정종화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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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우리가 싱싱한 별(星)에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테스』에서 별은 사과나무에 열리는 사과였습니다. 대부분의 사과는 멋있고 싱싱한 반면에 진딧물이 벌레 먹은 병든 사과도 있습니다. 새벽 2시 술에 취한 아버지를 대신하여 남동생과 함께 벌통을 마차로 운반하던 테스는 ‘이번 길을 못 떠날 만큼 취하지도 않았겠지’라고 했습니다. 모든 생명들이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시간에 마차를 끌어야 하는 불쌍한 말 프린스와 처지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테스의 집 안은 진딧물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과거 그녀의 집안은 싱싱한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몰락한 집안을 한탄했으며 어디까지나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조상의 혈통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녀는 뜻밖에 가난한 운명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던 사이에 우편 마차와 충돌했습니다. 이로 인해 집안의 유일한 재산이었던 프린스가 죽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과 못지않게 엄마와 아빠는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는 자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불행한 일은 집안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서 사는 집안보다 그 충격이 오히려 덜 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불편하다는 것이 다행입니다. 전자(前者)에게 나타나는 파멸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테스는 집안의 파멸을 막기 위해 어머니의 바람대로 돈 많은 친척 더버빌 가를 찾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친적은 가짜였습니다. 자신들의 이름에 가문의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더구나 알렉 더버빌을 만나면서 그녀의 운명은 불행해졌습니다. 테스는 순결을 잃었으며 그의 아이를 갖게 되었습니다.

테스가 알렉을 사랑한다고 하면 최고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알렉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알렉이 고백했듯 그는 ‘나쁜 놈’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테스는 그의 나쁜 면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너무 순진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보는 것이 곧 행복한 일로 이어지는 순간에 자연이 “보라!”고 인간에게 말하고 인간이 “어디?”라고 외쳤을 때 “여기”라고 답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일까요? 만약 첫 만남에서 이러한 불행을 예측했다면 그녀의 운명은 나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그녀는 과거는 과거일 뿐 그 과거가 어떤 것이든 이제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여겼습니다. 결과가 어떤 것이든 시간이 잘못을 덮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인생에는 모든 일에 균형을 맞추는 평형과 보상의 법칙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녀는 새출발을 하기 위해 고향을 떠났습니다. 고향은 부끄러운 과거가 날카롭게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한 번 잃고 나면 그 다음에는 영원히 잃는다는 사실이 순결에 있어서도 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지나간 일을 덮어 버릴 수만 있다면 그것이 거짓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유기체에 스며든 회복력이 처녀성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웨더베리 목장에서 젖 짜는 일을 하면 ‘모더니즘의 아픔’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비록 젖 짜는 여자에 지나지 않았고 미모 덕분에 다른 여자들의 질투의 대상이 되었지만 목사의 아들 에인절 클레어에게는 운명적인 여인이었습니다. 에인절 말대로 그녀는 시(詩)로 넘쳐났습니다. 시인이 종이에 쓰는 시를 그녀는 실제 생활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부모와 사회적인 편견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청혼했습니다. 사랑이란 외부적인 변화에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경험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만큼 감수성이 민감한 사람이 신경이 둔한 사람보다는 더 극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훌륭한 가문과 자신의 몰락한 가문은 어울리지 않다고 변명을 하였지만 그 보다는 자신의 과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결혼하고자 한다면 자신의 허물이 무엇이든지 간에 나 없이 살 수 없을 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혼하기 전 자신의 허물을 편지로 고백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테스는 양심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테스의 바람과 어긋나게 그는 악마 같은 웃음을 지어보였습니다. 그녀가 이 모든 것을 “사랑의 이름으로 용서해 달라”고 입이 마르게 애원했지만 그는 “어떻게 괴상망측한 속임수에 용서란 말이 해당될 수 있는가”라며 달갑지 않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길 내가 사랑한 여자는 테스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테스 모습을 한 다른 여자라고 했습니다. 순간 테스는 그가 자신을 순수한 사람의 탈을 쓴 죄인으로 보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내가 너무 나쁜 여자인가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녀가 잘못을 시인하고 어떠한 벌도 받겠다고 하였지만 그는 오히려 현재의 자기 희생 정신과 과거의 자기 보호 본능 사이에 조화가 빠져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계급이 다르면 풍습이 다른 법이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해 그녀는 “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농사꾼 여자이지 천성 때문에는 아니에요”라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테스는 그를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녀의 과거가 용서받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는 뜻밖의 혼란한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한편 그와 어쩔 수없이 떨어져 지내야 했던 그녀에게 아주 우연히 알렉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알렉은 사제관으로 개종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난 이후 배교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해야 할 사람한테서 버림받은 그녀를 보호한다는 그럴듯한 명분 때문이었습니다. 알렉의 집요한 유혹에 맞서 그녀는 에인절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을 위협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에인젤은 고국을 떠나 여행하면서 인생의 가치가 아름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연민 속에 있는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을 뿐입니다.

에인절이 테스를 구해주지 못하는 사이에 알렉은 그녀의 어려운 살림을 매우 친절하게 돌봐주었습니다. 더구나 알렉이 돌아오지 절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회유하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바보라고 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알렉이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고 하였지만 육체적 의미에서는 점점 남편같았다고 했습니다. 뒤늦게 여행에서 돌아온 후 그는 테스를 찾았지만 이미 그녀는 알렉 더버벌 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쉰 목소리로 “자기를 두고 떠난 나를 용서할 수 있겠어요? 나에게로 가까이 올 수 없어요?”라고 애원했습니다. 또한 “내가 자기를 바로 보지 못했어요. 자기를 있는 대로 보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너무 늦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 테스는 알렉에게 당신 때문에 또 한 번 더, 영원히 에인절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랑의 이름으로 알렉을 죽였습니다. 오직 자신의 과거를 용서받으며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기 위해서….

테스가 갈망했던 대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용서할 수 있나요? 사랑의 방해자를 죽이면서 사랑을 되찾으려는 테스는 순결한 사람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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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 때와 죽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6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지음,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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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도 같은 수년간의 혹독한 시련 이후 술은 더 이상 술이 아니고, 은은 더 이상 음악이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엘리자베스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으며, 저 다른 삶의 상징이었다. 죽음도 파괴도 없는 삶, 이미 신화가 되어 버려 하나의 바랄 수 없는 꿈이 되어 버린 삶 그 자체를 위한 상징이었다(…) 각자 자신의 운명을 지고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을 때는 판단을 내리고 용감해지는 것이 쉽다. 그러나 무언가를 가지게 되면 세상을 달라 보인다. 더 쉬워질 수도 더 어려워질 수도 있으며 때로는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용감해지는 것은 언제든 가능했지만, 이제 그것은 다른 모습이고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나타며 또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중에서

 

 

 

사람에게 전쟁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구더기에게는 천국입니다.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닙니다. 점잖게 말하면 시체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구더기의 고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구더기는 만찬을 마련해준 전쟁의 당사자들은 마음씨 좋은 신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이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기를 낳고 싶다고 한다면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요? 당신의 아기가 태어날 세상이 얼마나 지옥 같고 비참할 지 생각한다면 망설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런데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엘리자베스는 아이를 낳고자 했습니다. 2년 만에 전선에서 휴가를 나온 그녀의 남편 그래버가 평화로운 시대에 가능하겠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희망에 불과하다고 반대했습니다. 전후방이 따로 없는 악몽 속에서 가족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는 것은 전선에서 총을 들고 싸우는 것보다 세 곱 내지 열 곱으로 버거운 전쟁이라고 그는 절망했습니다. 사는 것과 죽는 것이 완전한 흑백의 세계였지만 그녀는 ‘만일 현재와 같은 시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모두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야만스러운 사람들만 아이를 낳게 된다면 어찌 되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누가 이 세상에서 정의를 다시 실현할 수 있겠어요?’라고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버가 엘리자베스를 사랑할 때 그녀가 말했던 ‘정의’는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사치’에 가까웠습니다. 전선에서 2년 동안 반합으로 음식을 먹으면서도 무사히 먹을 수 있을까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휴가 나온 그가 술을 마시기 위해 크리스털잔과 백포도주 잔을 고르는 것은 사치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전선에서 탈출하고자 하려는 그의 사치는 ‘사치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평화이고 안전이고 기쁨이고 축제’였습니다. 그가 엘리자베스에게 키스하면서 기뻐했던 것은 그녀가 곧 그의 ‘제 2의 자신’이라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즉 한계도 없고 과거도 없고, 어떠한 죄의 그림자도 없는 완전한 현재이고 생명이었습니다.

휴가를 나온 그는 죄의 그림자 때문에 잿빛 고독에 빠졌습니다. 전쟁 중인 조국을 내버려 둘 수 없다면서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변명에 불과했습니다. 더 나쁜 일을 방지하기 위해 함께 싸운 다는 변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잿빛 고독이 소리도 색깔도 없이 스며들면서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처참한 배신이었습니다. 그의 싸움은 살인과 거짓과 불의와 폭력과 한 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전의 선생님이었던 폴만에게 기만당한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면서 진실을 알고자 했습니다. 이미 패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무의미하게 계속하려고 하는 것은 전쟁의 당사자들이 권력을 연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로 인해 많은 불행이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 노예 제도와 살인, 집단 수용소, 대량 학살과 비인도적 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전쟁에 패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불합리한 상황에서 그가 전선으로 다시 돌아가야 전투에 가담한다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공범자가 되는 것입니까? 라고 털어놓았습니다. 만약 그가 전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한다면 교수형이나 총살을 당할 것입니다. 또한 자기 목숨뿐만 아니라 자신의 부모에게도 보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선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정작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는다면 자살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폴먼은 그가 공범자라는 굴레에 대해 ‘죄악’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죄악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도 끝나는지 아무도 몰라. 죄악은 어디서든 시작되지만 어디서든 끝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거야. 아니면 정확히 정반대일 수도 있고. 그러나 공범 관계라는 것,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오직 하느님이 알 뿐이지,라고 했습니다. 하느님에 대해 폴만은 네, 이웃을 사랑하라, 살인하지 마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카이저의 것은 카이저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라는 말도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영혼의 함석장이는 어떤 물건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을 읽으면서 그래버가 고민했던 양심의 문제는 반성이 지나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전선이라는 엄중한 현실에서 과거를 회상하면서 무기력하다는 것은 용기가 없어 보였습니다. 용기는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때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에서 공범자, 더 나이가 살인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이에나 같은 동물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에나는 언제나 하이에나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다양한 변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다양한 변모에 대해 ‘탄력적인 양심’이라고 말했습니다. 탄력적인 양심에 따라 그는 낮 동안에는 병사이더라도 밤에는 병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에는 그렇게 되어 버린 존재가 아니라, 원래 그래야 하는 존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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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3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 민음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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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몸짓을 불멸에 대한 욕망의 몸짓이라 명명하자. 큰 불멸을 갈망하는 베티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현재와 더불어, 현재의 온갖 근심과 더불어 사라지길 거부한다. 나는 나 자신을 초극하여 역사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역사는 영원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작은 불멸을 희망할 뿐이지만, 로라 역시 같은 것을 원한다. 자기 자신을 초극하고 자신이 겪은 불행한 순간을 초극하여, 자신을 알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기 위해 뭔가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사랑이란 매우 매우 매우 큰 감정이다. 거짓 사랑은 작은 감정이며, 진정한 사랑은 매우 큰 감정이다. 하지만 절대라는 관점에서 모든 사랑이 다 작지 않은가? 물론이다. 바로 그래서 사랑은 자신의 진실을 입증하기 위해 합리성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어떤 절제도 무시하려고 하며, 사실성에서 벗어나 ‘열정의 생동하는 광란으로’ 자신을 변모시키고자 한다. 달리 말하면 광적이 되고자 한다.
- 밀란 쿤데라의『불멸』중에서

 


  
 
사랑을 3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사랑의 1단계는 사랑이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이런저런 간섭으로 사랑이 불안해지는 것이 사랑의 2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대한 전망이 더 이상 없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이 사랑의 3단계입니다. 만약 사랑 때문에 7킬로그램을 잃어버린다면 아마도 사랑의 2단계에 놓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랑의 3단계에서는 덧없이 흩어지거나 혹은 자유롭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밀란 쿤데라는『불멸』에서 이런 사랑의 2단계 혹은 3단계를 ‘사랑 저 너머’라고 불렀습니다. 사랑 저 너머는 곧 사랑의 다른 쪽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중요시하는 것은 사랑하는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가 잘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누군가를 싫어하면 그는 못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의 1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은 그냥 사랑일 뿐이야.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에 있었습니다. 마치 ‘새장 속 새 인양 나의 가슴 속에서 파닥거리는 날개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 있다면 밀란 쿤데라는 사랑이 소멸한다고 했습니다. 사랑보다 삶을 선택해서 그렇습니다. 반대로 사랑을 선택한다고 한다면 즉 사랑 저 너머에 있지 않다면 이런 사랑은 불멸한다고 했습니다. 불멸! 이 소설에서 작가는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세 가지 불멸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작은 불멸입니다.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큰 불멸입니다.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스꽝스런 불멸입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요약하는 한 우화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작가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을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해 괴테와 베티나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물 여섯 살의 베티나가 예순 살의 괴테를 사랑하는 것은 모호했습니다. 작가 말대로 사랑이 모호하면 모호할수록 흥분이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녀가 그의 무릎 위에 앉으면서 희열을 느낄 때 괴테 또한 그녀를 어린 아이와 같은 자연스러운 솔직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 둘이 만나적은 불과 서너 번 정도였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베티나는 어느 편지에서 “나에겐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리라는 굳고 견고한 의지가 있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베티나는 괴테를 사랑했을까요? 우리가 알고 있는 괴테는 역사 속 인간 이었습니다. 괴테는 유럽의 한 가운데 있는, 기막힌 중심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양 극단을 두려워하여 우물쭈물 하는 소심한 중점이 아니었습니다. 그 보다는 양 극단을 유럽이 다시 경험하지 못할 기막힌 균형 상태로 유지하는 견고한 중점이었습니다. 베티나가 괴테를 사랑했던 것은 견고한 중점에 어울리는 견고한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사랑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불멸이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사랑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불멸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비록 그녀가 괴테로부터 ‘쇠파리’라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괴테의 젊은 여인이라는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베티나의 불멸의 몸짓은 두 명의 여자 즉 아녜스와 로라에게 되살아났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아녜스와 로라의 몸짓은 베티나에 대한 불가사의한 향수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자아의 유일성을 가꾸는 데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덧셈 법과 뺄셈 법입니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냈습니다. 이는 뺄셈이며 자아가 0이 되어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반면에 로라의 그 반대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습니다.

가령, 사랑에 있어 아녜스는 ‘보답으로서의 사랑’이었습니다. 모방할 수 없고 교환할 수 없는 그 사랑은 사랑을 심은 자, 즉 사랑의 대상을 향한 것이기에 변신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녜스의 사랑을 달리 ‘관계-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라는 ‘진정한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사랑을 위해서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습니다. 어떤 천상의 손길이 인간의 영혼에 피우는 불꽃, 사랑하는 이가 손에 들고 온갖 것으로 변신하면서 애인을 찾는 횃불 같은 것이었습니다. 로라의 사랑을 달리 ‘감정-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멸』을 읽으면서우스꽝스런 불멸을 생각해봤습니다. 우스꽝스럽다는 것은  사랑이 '사랑 저 너머'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삶을 운명적으로 바꾸는 뭔가 본질적이라고 한다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에피소드와 같습니다. 인과적 잠재성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괴테에게 베티나와의 만남은 양적으로 미미했지만 개념의 상대성에 있어서는 결국에는 베티나는 괴테의 삶의 일부로 통합되어 승리했습니다. 어쩌면 사랑 저 너머에 있는 사랑은 침상의 보물이 아니라 사랑의 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불멸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1단계 즉 '사랑은 사랑일 뿐이야' 라고 여겨야 가능했습니다. 사랑의 개념에 있어서 사랑은 '사랑 저 너머'에 있으면 불멸할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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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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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학생은 그동안 단 한 차례도 강의에 출석한 적이 없습니다. 그게 제가 두 학생에게 대해 아는 전부입니다. 전 spooks이란 단어를 그 단어가 지닌 통례적이고 본래적인 의인 유령 혹은 귀신이라는 뜻으로 썼던 겁니다. 저는 spooks이란 단어가 이따금씩 흑인들에게 적용되는 불쾌한 용어라는 사실을 어쩌면 한 오십 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학생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는 말에 극도로 조심하는 제가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그 단어가 사용된 문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 학생들이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요. 아니면 유령들인가요? 인종차별을 했다는 고발은 비논리적입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중에서




“전기는 불입니까?”
어느 날 천재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유대교인 두 명의 율법학도로부터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자 유대교 율법에서는 토요일(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못한다고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화학적인 현상인 전기와 불은 서로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일으키는 스파크 현상이 얼마든지 불처럼 보일 수도 있는데 단순히 전기는 불이다, 아니다? 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파인만은 “전기는 불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그들은 기분 좋게 떠났습니다.

필립 로스는『휴먼 스테인』에서 “SPOOKS"가 일으키는 아찔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수롭지 않았을 spooks라는 말이 당사자의 마음과 삐끗 어긋났습니다. 전혀 그러한 마음이 없었는데 뜻밖의 말실수가 되었습니다. 무방비상태에서 뒤통수를 한 대 맞는 것 같아 난처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어디 놀람뿐이겠습니까? 살다보면 내가 세상에서 바라는 것과 세상이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삶을 순탄하게 살고자 한다면 나보다는 세상의 흐름에 맞추면 혼란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 말대로 ‘관습을 거스르는 대담함’을 가진 ‘개별적인 존재’도 있습니다. 개별적인 존재는 ‘단독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하기 위한 열정적 투쟁, 독립적 개체로서 존재하는 동물 변화하는 모든 것과의 관계. 정지된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단독성이란 우리(we)가 아니라 나(i)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콜먼은 보통 이상의 남성입니다. 보통 이상이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런 속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아테나대학에서 고전문학을 강의했습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한 지 5주가 지나도록 출석하지 않는 2명의 학생에 대해 유령들(spooks)"이라고 한 마디 던졌습니다. 불쾌지수가 높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평범하게 툭 던진 한 마디였습니다. 그러나 두 명의 학생이 오히려 얼굴을 붉혔습니다. 정체불명의 두 명의 학생이 놀랍게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흑인이었습니다. 그래서 SPOOKS의 또 다른 의미인 검둥이가 ‘더러운 것, 나쁜 것’을 불러 일으켰으며 사람들은 그를 ‘인종차별자’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콜먼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델핀 루 학장은 충분히 그럴 만했습니다. 델핀 루는 콜먼과 서로 다른 스타일의 학장이었습니다. 전임 학장이었던 콜먼은 대학의 품질혁명을 독단적으로 밀어 부쳤습니다. 이로 인해 후임 학장 델핀 루를 비롯한 교수들은 콜먼을 불신하는 반작용마저 생겨났습니다. 그러던 중 운 좋게 콜먼이 거미줄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들은SPOOKS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한 꺼풀 벗겨냈습니다. 그리고는 인종차별자라는 불명예를 덮었습니다. 말하자면 추한 성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콜먼은 자신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의 화자(話者)인 주커먼에게 책을 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콜먼에게 주커먼은 남의 잘못을 처벌하지 못해 안달인 ‘볼썽사나운 인간’이 아니라 구원자였습니다. 주커먼은 콜먼의 얼굴을 보면서 ‘백인으로 착각하는 피부색이 옅은 흑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약간의 모호한 분위기를 풍기는 조금 누르스름한 피부색의 심한 곱슬머리 유태인 가운데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이러한 주커먼의 예감은 아이러니하게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작가말대로 콜먼은 치명적인 비밀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호한 분위기 탓에 콜먼은 오랜 세월을 거짓 백인으로 살아왔습니다. 콜먼이 자신의 운명을 백인으로 결정한 것은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닌 흑인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조건의 인생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콜먼의 수수께끼 같은 비밀에는 자신이 흑인이라는 노예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삶의 고단함이 덕지덕지 묻어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한 자신의 인생과 마주하길 피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어려움을 겪게 된 것입니다.

살다보면 인생의 구멍이 한순간 뻥 터질 때가 있습니다. 노년의 교수 콜먼에게 불어 닥친 시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콜먼이 어쩌다 저렇게 되었는지, 무엇이 그를 힘들게 하는지, 어떻게 삶의 탈진현상(burnout)을 극복해나가는지 은근슬쩍 우리의 내면을 건드렸습니다. 삶의 의욕도 에너지도 없는 콜먼에게 다가가 위로하고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위선과 편견은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병이며 그만큼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불안 상태를 잊기 위해 작가는 위험한 과거를 지닌 여자인 포니아를 등장시켜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삼십사 년을 사는 동안 하도 놀랄 일을 많이 당한 서른넷의 포니아는 남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의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일흔 살의 콜먼과 사랑을 나누며 그들만의 공백을 채웠습니다. 그러자 또다시 콜먼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습니다. 즉 ‘모두가 알고 있다. 당신이 당신 나이의 절반밖에 안 되는 학대받고 문맹인 여자를 성적으로 이용해먹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을 만큼 위험하지도 않았으며 허리가 아플 정도로 격렬하지도 않았습니다. 남들 다하는 사랑의 실수 즉 섹스라는 가속페달을 밟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단순한 기쁨이었습니다. 남의 이목보다는 자신들의 만족과 당당함을 위해 그들은 사랑했습니다. 아니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한다면 스릴을 느꼈습니다. 어떠한 책임감이나 의무감도 아니었습니다. 돈도 아니었고 거창한 토론도 아니었습니다. 콜먼이 고백하듯 스릴같은 사랑은 예상치 않았던 친밀함에서 생겨났습니다.

누구나 삶의 변화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 작가는 인생에서 정말 난해한 변화가 생길 때는 누군가에게 ‘난 당신을 몰라’라고 말할 때라고 했습니다. 일찍이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너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 무엇을 가지지 않는다. 아니,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관계에 들어서 있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날 과도한 사회에서 불행한 이유는 유럽 문학이 불화에서 시작되는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관계를 맺지 못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휴먼 스테인』을 읽으면서 인간의 오점은 무엇일까? 궁금했습니다. 한 개인의 문제는 아닌 듯 했습니다. 모든 존재의 고민이었습니다. 남들 하는 만큼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도 고독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성실하고 텅 빈, 완전히 텅 빈 세대’의 모순이라고 여겼습니다. 무엇보다도 텅 빈 감정은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야만적 농담이라는 생각……이것이 필립 로스가 던지는 또 하나의 오점이었습니다. 과거는 과거를 파묻고 침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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