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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상상력과 동화 - 유영진평론집
유영진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1월
평점 :
어린이문학 잡지를 보면 한 호에 한꼭지 정도 평론이 실리곤 한다. 그렇게 읽은 것을 제외하고 어린이문학 평론집으로 따로 나온 책은 이책 이전에 두어권 더 읽은 것 같다. 그래도 어린이문학에 대한 궁금증 몇가지는 늘 남기 마련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며 대부분의 궁금증이 말끔히 풀렸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평론집이라고 하면 어려운 단어, 문체, 이해하기 어려운 이론의 향연이 펼쳐질 걸 예상하는데 전혀 그렇지도 않으면서 날카로운 지적과 발견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어서 감탄하며 읽었다.
저자가 말하는 평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찾아보았다.
어른문학 평론과 마찬가지로 어린이문학 평론 역시 텍스트가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한계를 날카로운 시각으로 포착하여 텍스트의 의미를 풍부하게 한다. (17쪽)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일이라. 잘못된 곳을 포착한다는 말보다 좋다. 이런 자세면 더 좋을 것 같다. 평론은 작품에 등급 매기기가 목적이 아니며 더구나 어린이문학의 경우 학부모로 하여금 책 골라주기라는 부모의 욕망과 결합될 위험도 있다.
아이들은 세상을 몸으로 익혀가는 존재, 몸으로 부딪히고 몸을 통해 깨닫고 몸으로 쓰는 존재가 아이들이어서, 살아있는 아이들은 어른들이 그려놓은 선을 따라 움직이다가도 어느 순간 몸에 내재된 원초적 생명력으로 도식을 훌쩍 뒤어넘기도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21쪽). 따라서 책 제목 속의 '몸'이란, 어린이문학을 쓰는 어른들은 어른의 눈과 잣대가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 속에 살아있는 아이들의 몸과 몸의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써나가야 함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무엇을 주의하여야 하는지 쉽게 이해가 된다.
현실의 아이들이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닌, 어른이 듣고 싶고 말하고 싶은 이야기가 마치 아이들 삶의 전부인 양 그려진다. 작품 속 아이는 살아 있는 아이가 아니라 교화와 교육의 대상으로 연출된 종이 인형일 뿐이다. (29쪽)
이 속에 혹시 우리가 '동화'라고 하며 연상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은지. 그것이 바로 '동화'를 쓰는 사람들이 경계해야할 사항인 것이다.
어떤 동화가 좋은 동화인가에 대해 말하는 장에서 저자는 왜 신화 모티프가 중요한가를 말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어린이문학 작품들이 신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이때 건국 신화가 신화의 원형은 아니며 그 이전의 더 원초적인 신화가 있다는 것을 말한 대목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단군 신화나 주몽 신화는 신화가 처음 만들어 질 때의 모습, 즉 원형적 모습이 아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신화들은 대부분 국가가 형성된 뒤 체제의 정당성과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해 창조된 것들이다. 국가, 즉 지배와 종속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었던 초기 채취 수렵민들에게 건국 신화 따위는 필요도 없고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60쪽)
지배권력은 하늘에서 난 것이라는 이념을 보여주는 건국신화와 달리 국가 형성 이전의 원형적 신화는 이렇게 인간과 자연 간의 소박하지만 평등하고 깊이 있는 생태적 철학을 보여준다. (61쪽)
좋은 작품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고 신화와 민담은 이런 타자의 관점이 생생히 담겨 있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 박물관에는 시대적 한계나 지배이념의 먼지를 털어내야만 속살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전시품들도 많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덧붙인다. (79쪽) 우리 나라 작가 중 '임정자' 작가의 작품들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그녀의 작품에서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건 동화라기 보다 '소설'이네."
이런 말을 종종 들으며 궁금했었다. 동화와 소설의 차이가 무엇일까. 누군가 대답을 해주었겠지만 시원하게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나중에 책에서 그것에 대해 말해놓은 부분을 읽기도 했지만 역시 시원하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고 통일된 기준이 없음만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더 이상 혼동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에는 동화와 소설을 구분하는 여러 사람의 방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첫번째, 이원수 작가는 동화는 '공상성'을 특징으로 하며 추상적 공상적 줄거리에 치중하는 반면 정경, 심리등의 디테일 묘사가 없다고 보았다. 반면 아동 생활에서 취재하여 현실 상황을 리얼하게 그린 작품이라면 이름을 동화라고 붙인다 해도 그건 단편 소설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실제로 동화라고 하면 '환상적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고, 여기서 출발하여 동화는 아이들이 읽는 모든 서사물이라는 의미가 덧붙여지면서 그 개념이 많은 혼란을 빚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원수의 뒤를 이어 이오덕은 아예 '소설'이란 말을 쓰지 않았으며 대신 공상동화와 생활동화로, 혹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유아동화, 유년동화, 소년동화로 나누었다.
2000년대 이르러 동화의 현실 외면 또는 도피적 성격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동화의 개념도 논쟁의 대상이 된다. 이중 원종찬은 독자 연령과 창작 방법을 축으로 하여 구분하였다. 이재복은 동화와 아동소설로 선명하게 구분하지 않는 대신 '소설정신'이란 말과 '동화정신'이란 말을 즐겨 사용한다. 김상욱은 그 어느것도 아닌 리얼리즘과 판타지로 구분한다.
저자는 이 장의 끝머리에 안델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예로 들어 동화적 결말과 소설적 결말의 예시를 보여주었다.
제일 마음에 것은 저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소설이지만 동화적 세계관에 사로잡힌 작품이 있고 동화지만 소설적 세계관이 승한 작품이 있다.
동화와 소설 사이에 얼마나 먼 거리가 있을까? 그 사이에 흐르는 강은 얼마나 깊고 넓을까? 내가 보고 있는 이 강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할까? (110쪽)
임정자의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에 대한 평 속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이렇게 어린 시절은 어른이 되기 위해 '지나가는' 기간이 아니라 기억을 '축적하는' 기간이다. 어른이 되어가며 부딪힐 수밖에 없는 여러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그 위기와는 아무 상관없는 유년기 기억일지라도 그 속에서 꿈과 희망을 찾아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유년기 특징 중의 하나는 아무 걱정 없이 '놀기 위해 논다'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어린이일지라도, 잠시의 여유가 주어지면 아주 짧은 순간일지라도 아무 걱정 없이 즐겁게 놀 수 있다. 마치 내일이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이. 하지만 어른은 결코 어린이처럼 놀지 못한다. 어른들의 놀이는 그저 삶의 무게를 잠시라도 잊기 위한 도피일 뿐이다. 놀기 위해 노는 것이 아니라 어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혹은 내일 닥쳐올 걱정거리들을 잠시 잊기 위해 '노는 척'할 뿐이다. (130쪽)
아이들이 무엇보다도 잘 놀아야 하는 이유이다. 어른이 되어서는 결코 아이들처럼 놀지 못한다는 사실. 아이답게 놀 수 있을 때 놀게 하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자 권리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세상을 잘 버텨나갈 수 있게 하는.
아이들이 책 속에서 이야기 자체 보다도 그 속의 인물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을 <몽실언니>를 예로들어 설명한다. 동화 공부를 시작하며 저자가 품었던 궁금증 중 하나가, 아이들은 <몽실언니>의 감동을 과연 어른이 느끼는 것 처럼 느끼는가 하는 것이었다는데, 아이들은 몽실이라는 '아름다운 인물'에 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은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 하며 주인공이 겪는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해나간다고. 그리하여 우리 슬픈 근현대사에 대한 지식과 경험 없이도 어린이들은 몽실이의 희생적이고 꿋꿋한 삶에 감동받아 어른들과는 좀 다르게 작품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만든다고 한다. 어린이 책을 쓸때 인물에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이다.
안미란의 <씨앗을 지키는 사람들>은 우리 어린이문학사에서 보기드문 SF 장르의 작품이라서 동화를 공부해본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념비 적인 작품이기도 한데 저자는 이 작품의 아쉬운 점으로서, 유전자 조작으로 인해 농산물이 독점이 생기고 식량 식민지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을 하기보다 유전자가 조작되거나 오염된 농산물을 먹고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얘기하고 있는데 공감한다. 사회적, 역사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항들을 아이들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 방법으로 새겨둘만 하다.
그저 손 가는 대로, 느낀 대로 작품을 쓰겠다고 하는 건 영원히 아마추어리즘에 갇혀 살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아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당기고, 눈을 뗄 수 없게 하면서 작가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전달되기 위해서 우리는 몇 가지 전략들을 탐색해야만 한다. (179쪽)
나보다 어린 사람들이라고 해서, 우리가 다 경험해온 시기라고 해서, 혹시 동화 쓰기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일깨워주는 구절이다. 단순히 자기 어렸을 때의 경험을 풀어놓는다거나 (아마 어린 독자들이 어디선가 한번 다 들었을만한 내용이기 쉽다) 단편을 뻥 튀겨놓은 듯한 장편, 단편 단편을 조각조각 이어붙인 듯한 장편은 피해야 한다. 경험의 왜소화라는 장벽에 갇혀 있는 신인 작가들이 특히 명심해야할 점 이다. 사건을 던져줌으로써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어린이 스스로 묻게 하고 다양한 인물과 사건의 계열화를 통해 작품을 짜임새 있게 만들어가도록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179쪽)
어린이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을 전개했다가 마무리에 와서 고심 끝에 어쩔 수 없이 뻔한 미화로 정리하거나, 다른 작품 속 인용문 하나로 봉합 정리하는 것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다. (경험해본 사람은 알리라.)
현직 초등학교 교사이며 저자 역시 초등학생 학부모의 입장에서 요즘 아이들의 책읽기에 대한 의견도 들어볼만 하다. 정말 인상 깊은 책은 쉽게 몇줄의 독후감으로 정리하기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면서 금방 교훈이 떠오르는 책은 오히려 문학적 깊이가 얕은 책일수 있다는 점을 안다면 아이들로 하여금 느낌과 감동을 억지로 말로 표현하고 글로 남기라고 강요하지 말라고 한다. 책을 많이 읽는게 능사는 아니라는 말은 우리 어른들도 생각해볼 말이 아닌지.
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놀이이고 자연이고 자연 속 놀이라는 것이다. 문학적 감동이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라도 아이들이 몸으로 어울려 노는 놀이가 더욱 중요하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책도 하나의 놀이처럼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다가갈 때 그 작품이 갖고 있는 문학적 힘이 제대로 발휘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329쪽)
우리 모두 어린이 시기를 거쳐 왔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들의 생각과 행동과 그들이 읽는 책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직도 우리 마음 속 어딘가엔 끝나지 않은 그 순수함과 감동이 남아있기 때문 아닐까. 그 마음을 잃지 않고 싶고, 지금의 어린이들과 소통하고 싶고, 그들과의 끈을 놓지 않고 싶어 오늘도 어린이들 책을 읽고 또 가끔은 써보고 싶은 욕망도 느낀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 모두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어린이책에 대한 글로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중 최고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동화에 대해 평소에 갖고 있던 궁금증을 많이 풀 수 있어서 다 읽고나서 느끼는 후련함도 어디에 비길바 못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