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안토리오 솔레르 지음, 김현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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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키스하는 연인의 에로틱(?)한 모습을 띠지로 두른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를 처음 봤을 때 당연히 연인들의 사랑, ‘베아트리체’란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의 삶을 다룬 책이려니 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어이없게도 ‘베아트리체’란 이름에서부터 어긋났다. ‘베아트리체’란 단테의 생애를 통해  사랑과 시혼(詩魂)의 원천이 되었던 여성으로 그 존재 여부에 대해 이상설(理想說), 상징설 같은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데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지 않았으니 알 수가 있나...그것도 모르고 난 ‘주인공의 등장이 왜 이렇게 늦는거야’라고 투덜댔으니...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다. 이래서 고전은 꼭 읽어야 하나보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그 해 여름이 있었다’고 시작한 소설은 1970년대 바다가 보이는 스페인의 소도시를 배경으로 화자인 ‘나’가 당시 십대 후반이었던 주변 친구들의 일상과 우정, 사랑, 더 나아가 그들의 청춘을 돌아보고 추억하는 내용이다. 표지엔 단 네 명의 소년(?)이 그려져 있지만 책 속엔 훨씬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가장 중요한 인물이자 이야기의 중심축인 미겔리토는 신장 수술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다가 옆 침대에 있던 환자가 죽고 난 후 그의 가족에게서 단테의 <신곡>을 건네받는다. 죽어간 남자에게 있어 그 책은 버팀목이었고 구원이었다. 미겔리토 역시 죽을 힘을 다해 그 책의 몇 구절을 외우고선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운명처럼 자신의 연인, 베아트리체 룰리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룰리가 유혹에 흔들리면서 그들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마치 아름다운 불꽃이 화르륵 타오르는 순간 끝이 예고되어 있는 것처럼.




바람벽 파코는 머리숱이 적은데다 내세울만한 외모도 아니다. 다만 집이 부유하여 그의 아버지는 자동차에 늘 젊은 여자들을 잔뜩 태우고 다니면서 사랑을 나누는데 파코 일행은 그 자동차 안을 여기저기 뒤져서 나오는 여자들의 음모를 수집한다. 멧돼지란 별명으로 불리는 아마데오 눈니에겐 빼어난 미모의 고모가 있다. 섹시한 미국 여배우 ‘라나 터너’가 되길 꿈꾸는 그녀는 동네 사내 아이들에게 만인의 연인으로 군림한다. 그리고 부모에게 물려받은 온몸에 뒤덮힌 털이 고민거리인 아벨리노 모리타야와 카르타고 투구 아가씨, 라피, 뚱땡이, 살덩이...그들이 서로 만나 어울리면서 성에 눈떠가고 고민하고 상처받으며 조금씩 성장해간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화자인 ‘나’의 시점을 따라 진행된다는 점이 다른 소설에 비해 특이했다. 1인칭 시점의 소설임에도 ‘나’의 존재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 독특한 전개방식. 그래서 초반엔 스토리의 흐름을 잡아내기가 힘들었지만 조금 지나자 그들이 몇 명씩 무리지어 다니며 여러 일을 벌이는 행동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앞뒤의 내용을 서로 이어붙이고 연결지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우리의 삶 한가운데 그 해 여름이 있었다...11쪽.




여름과 성장...이 둘은 정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청소년의 우정과 상처, 성장을 다룬 책을 보면 ‘여름’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다시피 한다. 계절적 배경이 여름이거나 제목에 ‘여름’이 들어가는 경우...상황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언뜻 생각나는 소설 중에 <열 네 살의 여름> <여름이 준 선물> <우리들의 여름>이 있다. 그 소설 속에서 아이들은 사춘기를 지나는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렇듯 자신의 외모에 불평을 늘어놓기도 하고 ‘삶’이나 ‘인생이 무엇인지' 고민하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에서 수시로 변하는 생생한 자연의 모습에 감탄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어땠을까 생각해보니 특별한 게 없다. 언니들처럼 거리에서 만나는 잘생긴 남학생 때문에 가슴을 두근대지도 않았고 학교의 총각선생님이 무작정 좋아서 꽃이나 선물을 한 적도 없고 좋아하는 연예인 따라 콘서트에 가거나 연예인 사진 같은 걸 사서 모으는 취미도 없었다. 친구와 늘 붙어 다녔거나 지금까지 연락이 자주 오가는 친구도 딱히 없다. 그나마 있던 친구들도 결혼하면서 먼 지방이나 외국으로 가버린 탓도 있지만...한마디로 밍숭밍숭 재미없는 아이였다.




스페인의 영국인 거리를 배경으로 사내 아이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소설 <춤추는 나의 베아트리체>. 거리상으로는 거의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할 정도로 거리가 먼 곳에서 벌어진 일인데도 왠지 그다지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고 겨울, 봄이 차례로 오듯이 아이도 어른이 되기 마련이라는 아주 당연한 삶의 법칙, 순리를 이 책을 읽으며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우리는 평생 수많은 사진을 찍어왔다. 그 사진들 중 어떤 것이 우리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마지막 사진 한 장이 우리가 진정 누구였는지 밝혀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안다. 미겔 다빌라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그 해 여름이 우리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사진이라는 것을. -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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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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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조용한 집안에 전화벨이 울린다. 아이가 자고 있어서 얼른 수화기를 들어야 하는데도 왠지 받기 싫어질 때가 있다. 왜?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날 알지도 못하면서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전화...“안녕하세요. 사모님, 여기 부동산투자 회산데요. 좋은 투자정보 알려드리려고...” 둘째, 내 이름 석 자만 아는 경우, “안녕하세요. @@@님. 저희 &&&를 이용해주셔서 감사드리구요. 회원님 같은 우수회원님들에게 감사의 마음 전하기 위해 이번에 특별히 ##를...” 솔직히 이 두 전화는 별 거 아니다. 무시하고 끊어버리면 되니까. 문제는 세 번째 경우다. ‘한동안 뜸~했었지. 웬일일까 궁금했었지~’ 이 노래가 생각날 정도로 오~랜만에 전화한 친구. 썩 친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앞의 경우처럼 싹 무시할 수도 없다. 근데 그 친구가 대뜸 집에 오겠단다. 오겠다는 사람 막을 수 없을뿐더러 오랜만에 친구들 얘기 좀 들어볼까...하는 마음에 초대를 한다. 하지만 결국엔 후회를 한다. 내가 왜 오라고 했던고...ㅠㅠ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가까이 만난 적 없던 그들은 친구와 실컷 수다를 떨고 싶은, 내 소망을 아주 가뿐히 넘긴다. “그래, 그냥 집에 있는거야? 아무 일도 안하고? 남편이 뭐라 안해?” “요즘 세상에 집에서 살림만 하는 주부가 어딨니? 이런 저런 사정이야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게 다 무능력하다는 증거야” 그리곤 자신의 방문목적을 드러낸다. ‘이거 써보면 정말 좋다’는 판매에서부터 ‘나랑 같이 일하자’는 다단계사업, ‘이것 하나는 준비를 해두라’는 보험에 이르기까지...난데없이 등장해선 평화(?)로이 살고 있는 날 휘저어놓기 일쑤다. 그래서 내게 한동안 뜸...했던 친구의 전화는 경계대상 1순위다.




<패싱>의 주인공 아이린은 자신 앞으로 온 편지를 받고 한참 망설인다. 발신인은 없지만 누구인지 짐작이 가는데다 내용 역시 어떨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읽어보기 싫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편지를 읽고 만다. 두려움을 느끼며 아주 천천히 봉투를 자르고 접힌 편지를 꺼낸다.




‘패싱’. 백인 행세하기란 설명이 작은 글씨로 쓰인 이 책은 아이린이 옛 동창생이었던 클레어의 편지를 받고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을 떠올리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짧은 부분에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와 사건들이 숨어있는 듯하다.




그건 네 잘못이야, 아이린. 적어도 어느 정도는. 왜냐하면 내가 그때 시카고에서 너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난 지금 이 끔찍하고 황당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을 테니까. - 18쪽.




팔월, 태양이 무자비하게 이글거리던 날, 방문차 시카고에 있던 아이린은 시원한 바람을 찾아 호텔 옥상 카페를 찾는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친구였던 클레어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흑인의 출입이 금지된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여성. 백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그녀들은 백인처럼 보일뿐 흑인의 피가 흐르는 흑백혼혈이다. 12년만에 만난 둘은 백인 행세, 패싱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클레어의 남편이 ‘내 가족에 검둥이는 절대 안된다’는 백인우월주의자라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아이린 자신은 물론 클레어 역시 흑백혼혈이란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




그리고 2년 후, 클레어가 뉴욕으로 찾아오면서 아이린과 클레어는 다시 만나게 된다. 아이린은 클레어의 화려하고 매력적인 외모와 밝고 쾌활한 성격을 부러워하는 반면에 그녀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생활방식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리는 건 않을까 막연히 불안해하는데...




“내가 전혀 너와 같지 않다는 걸 넌 못 알아차렸니? 그래,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 난 어떤 일도 하고 누구든지 상처 입히고 어떤 것도 던져버려. 정말이야 르네, 난 위험해” -152쪽.




이 소설의 화자는 아이린이다. 하지만 또 한명의 주인공인 클레어가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와 결혼했지만 자신의 본질을 숨겨야했던 클레어.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아이린과의 만남을 계기로 그동안 자신이 외면해왔던 흑인들의 세계에서 마음의 위안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지만...




아이린과 클레어, 서로를 동경하고 질투하다 결국 치명적인 결말을 맞는 그들의 얘기를 담은 이 소설은 무척 빨리 읽혀진다. 200쪽을 조금 넘긴 소설의 길이 때문일수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저자의 탁월한 심리묘사가 독자로 하여금 책에 몰입하게 만드는 듯하다. 특히 후반에 클레어를 질투하면서도 그녀의 비밀을 차마 밝히지 못하는 아이린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 든다,




192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흑백혼혈인의 자기 정체성과 그들간의 갈등,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다룬 소설 <패싱>. 저자인 넬라 라슨은 그녀의 두 번째 작품이자 대표작인 이 작품으로 뛰어난 업적을 이룬 흑인들에게 수여하는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다른 작품을 읽어보고 싶지만 집필활동을 접었다고 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라이브의 여왕으로 불리는 어느 흑인혼혈 여가수의 얘기가 생각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고 아이를 임신한 그녀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까지 빌고 또 빌었다고 한다. “제발, 제발....아기가 절 닮지 않게 해주세요.”하고. 자신의 몸에 깃든 또 하나의 생명, 그 아기가 자신을 행여 닮을까봐 매일 불안에 떨었다는 얘기를 무심코 흘렸었는데...이제야 이해가 된다. 그녀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이린과 클레어, 그녀들의 이야기가 더 이상 먼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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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버지니아 펠로스 지음, 정탄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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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없다> 제목이 정말 자극적이다. 누가 봐도 이 책의 주인공임이 분명한 ‘셰익스피어’보다 ‘없다’란 글자를 더 크고 눈에 띄게 써놓았다. 무슨 의도에서일까. 단순히 셰익스피어가 없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정확히 언젠지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실존인물이 아니다’란 소문이  있었다. ‘셰익스피어’란 이름만 안다면 누구라도 귀가 솔깃해질 얘기였다. 셰익스피어가 가공인물이면 진짜는 누군데? 엘리자베스 여왕이라더라. 잉? 정말? 엘리자베스 여왕이랑 셰익스피어의 초상화를 자세히 비교해보면 완전히 똑같다는데, 수염만 빼면....뭐시라고라고라? 하지만 추측만 난무할 뿐 이렇다할 증거도 없는 주장이 으레 그렇듯 그 소문도 한동안 주변을 맴돌다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2007년 12월. 셰익스피어는 다시 논란의 대상이 됐다. 영국의 위대한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최고의 극작가로 불리는 그를 엘리자베스 여왕은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는데...그런 셰익스피어가 정말 없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 버지니아 펠로스는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없다”고. 더 정확하게 말하면 셰익스피어의 이름으로 발표된 수많은 작품을 쓴 사람은  따로 존재하며 그의 이름은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정치가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이라고. 베이컨이 누구인가. 경험과 귀납적 실험에 의한 지식 습득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편견을 4가지 우상으로 비유한 것을 고등학교 윤리수업 시간에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바로 그 베이컨이 셰익스피어라니...도무지 연결되지 않는 그 주장의 근거는 무엇일까.




셰익스피어 작품의 진짜 원작자를 둘러싼 의혹과 논쟁은 18세기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의 희곡 중에서 배경이 엘리자베스 시대와 흡사한 작품이 많다고 여겨지면서 의혹이 불거졌다. 또 유난히 반복되는 구절이 많고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불필요하게 이탤릭체로 쓰거나 대문자가 잘못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들을 따로 모아 베이컨의 암호관련 책과 비교분석하고 해독해보니 믿기 어려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스페인의 무적 함대를 격파해서 영국을 일류 해양국으로 만들었으며 평생 결혼하지 않고 처녀로 늙어 죽어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명언을 남긴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그녀가 레스터 경과 몰래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첫째가 바로 프랜시스 베이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처녀 여왕’이란 신비한 이미지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던 여왕은 아들의 출생을  비밀로 했고 베이컨은 그 여왕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못했다. 유럽의 군주 중 가장 강력한 왕실의 ‘왕자’임에도 그것을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출간한 책에 여러 종류의 암호로 메시지를 숨겨놓았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의 결혼을 비롯한 살인과 음모, 고위 권력층의 부패와 비밀, 스캔들, 더 나아가 프랜시스 베이컨 자신의 삶을....




표지를 펼쳐 책장을 불과 두어장 넘기면서부터 끝까지 책에서 말하는 것들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다. 엘리자베스와 베이컨의 관계도 그렇지만 역사상 가장 완벽한 영어로 지금까지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매력적인 희곡을 썼다고 알려진 이의 교육 수준이 실제론 형편없다니...그렇다면 그를 일컬어 '인도와도 바꿀 수 없는 영국의 보배'라 했던 여왕의 말은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처음 이 책을 읽을 땐 셰익스피어의 존재를 둘러싼 숱한 의혹을 밝혀내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는데 아니었다.




한마디로 이 책에서는 복잡한 암호에서 밝혀진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결합함으로써 지금까지 알려진 적 없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업적과 일생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책 속의 내용을 100% 사실이라 믿을 수도 없고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과 추리가 빚어낸 소설이라고 단정지을 수도 없다. 왜냐면 너무나 유명한 세 명의 역사적 인물 엘리자베스, 베이컨, 셰익스피어가 모두 같은 시대를 살았기 때문에 어찌 보면 그들의 생활이나 생애가 서로 조금씩 겹쳐지는 게 당연하고 그게 지금과 같은 의혹을 불러온 건 아닐까. 다만 고전경험론을 창시했던 철학자인 베이컨이라면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인식의 폭을 설명하기가 좀 더 쉬워지겠구나...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읽었던 책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의문을 떠안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셰익스피어’를 겁색했다. 그랬더니...자그마치 총 12,880건의 자료가 쭈루룩 펼쳐졌다. 혹 떼려다 혹 하나 더 붙인 셈이다.




혼란한 마음을 접듯 책을 덮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표지의 사진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모자이크처럼 작은 조각을 이어붙인 사진, 누군지 알 수 없는 인물...꽉 다문 입술에 살짝 비친 미소가 왠지 비밀을 담고 있는 듯하다. 그에게 묻는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셰익스피어는 진짜 누구입니까.



친구여, 부디 여기 담긴 흙먼지를 파내지 마시게!

이 묘석 돌들을 그냥 두는 자는 복을 받고,

내 뼈를 움직이는 자는 저주를 받을 지다...


<셰익스피어가 남긴 자신의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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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엔젤 - 스탈린의 비밀노트,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조영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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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빚쟁이다. 방과 거실의 책장을 빼곡하게 메운 책들을 볼 때마다 난 내가 빚쟁이란 걸 실감한다. 저 많은 책들을 언제 다 읽을꼬...하는 고민도 빛깔 좋고 탐스런 신간이 나오기가 무섭게 금세 잊혀진다.




작년에 로버트 해리스의 <폼페이>를 몇 번을 망설인 끝에 구입했다. 뿌듯해하며 책장에 꽂아뒀는데 미처 읽기도 전에 그의 새 작품이 나왔다. 이름하여 <아크엔젤>...‘스탈린의 비밀 노트’란 부제 옆에 구소련기의 상징이 붉게 그려져있다. 게다가 책의 크기나 두께가....상당하다. 이쯤되면 살짝 기가 죽는다. 스탈린?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이럴수가...없다!! 낭패다.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마지막 부분이었는데 스탈린의 사망소식에 구소련의 국민들이 울부짖으며 그의 주검을 보기 위해 몰려들기 시작하고 그 엄청난 인파 속에 주인공이 이리저리 밀려다니던 모습이 제목도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작년에 읽었던 조정래의 <오 하느님>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우리 쏘련 사람들은 두가지 죄를 졌어요. 포로가 된 것만도 조국의 배신자가 된 것인데...소련에 가면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몰라요. 스탈린은 아주 무시무시하고 용서가 없는 사람이오.”




그나마 기억하는 것조차 정반대의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는 스탈린! 그의 어떤 점이 저자로 하여금 20세기 역사에 있어 히틀러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라고 주장하게 했을까. 궁금하다. 알고 싶다. 그의 비밀노트가 답을 알려줄까?




“아주 오래전 일이었어...”하고 모스크바의 한 호텔방에서 노인이 얘기를 시작한다. 자신의 이름은 파푸 라파바, 구소련 공산당 정치국 소속 고위관리의 경비병이었는데 스탈린이 죽기 직전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사학자 플루크 켈소에게 털어놓는다. 문제의 ‘이오시프 스탈린의 검은색 유포지 노트’를 스탈린의 금고에서 빼돌려 어딘가에 파묻었다고. 그리고는 갑자기 사라진다. 그때부터 켈소는 어딘가에 숨겨진 스탈린의 비밀 노트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우여곡절 끝에 라파바의 숙소를 찾아간다. 하지만 그가 끔찍하게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면서 켈소는 비밀경찰과 구소련 비밀 조직에 쫓기게 된다. 결국 라파바가 딸에게 남긴 편지 속의 단서를 계기로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찾게 되는데...




구소련, 러시아.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의 땅에서 스탈린의 비밀노트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음모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마치 엄청난 제작비를 투자한 블록버스터 첩보영화를 보는 듯했다고 할까.




물론 러시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초반엔 애를 먹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스키’로 끝나는 러시아 특유의 긴 이름이 어찌나 헛갈리는지 몇 번이나 앞부분을 이리저리 뒤적였다. 하지만 3/1정도 지나면서부터 눈에 익으면서 이야기의 흐름을 비롯한 여러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구소련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자본주의가 러시아 곳곳을 잠식해가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사람들의 생활이 얼마나 극도로 궁핍해졌는지, 그로 인해 차라리 스탈린이 살아있을 때가 나았다고 그리워하는 이도 있다는 걸 저자 로버트 해리스는 철저하게 피폐해진 모스크바의 분위기와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다.




“새로운 러시아죠. 원하는 건 뭐든지 살 수 있어요.” “돈을 벌고 싶으면 위험을 무릅써라. 하룻밤에 3백, 일주일에 3일만 해도 9백 달러입니다...평균 연봉의 일곱 배인가요?” - 오브라이언. 153, 155쪽.




“20세기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은 히틀러가 아닌 스탈린입니다....히틀러와 달리, 스탈린은 아직 죽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탈린이 히틀러와 달리 일회용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튀어나올 수 있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플루크 켈소. 192~193쪽.




계산은 모두 달러로 했다. 신용카드는 너무 많은 흔적을 남기므로...게다가 은행을 믿지도 않았다. 연금술을 부리는 도둑놈들, 소중한 달러를 빼앗아 루블로 만들고, 금을 비금속으로 만들어버리는 몹쓸 놈들이다. - 지나이다. 292쪽.




요즘 역사적 사실과 인물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 많이 출간되고 있는데, 그런 책을 읽고 나면 항상 궁금했다. ‘과연 여기서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이번에 공산혁명의 완성자이자 공포정치의 대명사, 스탈린과 그의 부활을 꿈꾸는 음모에 대한 이야기 <아크엔젤>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인지, 어딘가에서 제 2의 스탈린이 부활하고 있는건 아닐까,.저자는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하는 의문이 남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바로 로버트 해리스를 만났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배경인 소설이라 막연히 삭막하고 냉혹한데다 잔뜩 경직된 사람들의 얘기가 아닐까 했는데, 순전히 억측이었다. 다소 억지스런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 구성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힘이 대단했다. 500페이지의 두꺼운 책이 그야말로 술술 넘어갔다. 왠지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상황과 비슷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책장에 꽂혀있는 <폼페이>를 비롯한 그의 다른 작품도 만나고 싶다. 대박이다.




“한 국가에 역사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어. 역사란 사회를 지탱해주는 토양이란 말이야. 우리 역사는 이미 도난당해서, 불명예스럽게도 적들에 의해 난도질되고 더렵혀졌지. 이젠 민족혼까지 빼앗기고 만 셈이지만.” 블라디미르 마만도프. 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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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밀화로 만나는 동물지식백과 2 - 신기한 동물의 생활
파멜라 히크만 외 지음, 이재훈 옮김, 팻 스티븐스 그림, 권오길 감수 / 청림아이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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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심리는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 분명히 야단맞을 행동인 줄 뻔히 알면서도 무턱대고 사고치고 무서워하면서도 관심을 보인다. 큰아이는 어릴 때 개에게 손을 물린 이후로 지금까지도 개를 무서워한다. 놀러간 이웃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보고선 “귀엽다”...하면서도 막상 강아지가 자기 곁에 다가오면 질겁을 하고 도망가버리곤 한다. 무서우면 아예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될텐데...그러면서도 한번씩 강아지 키우자고 조르니...참, 희한하다. 아이들에게 있어 동물은 가까이 하고 싶은 일종의 동경의 대상...같은 그 무언가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세밀화로 만나는 동물지식백과>는 ‘신기한 동물의 생활’이란 소제목처럼 지구상에 있는 수많은 동물들의 생활에 대해 알려주고 있다. 먹이는 어떻게 구하고 어디서 사는지, 짝짓기 철을 맞은 수컷들이 짝을 찾기 위해 화려하게 치장하거나 큰소리로 울고 때로 목숨을 건 싸움까지도 불사한다는 것, 알이나 새끼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동물들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노력을 하는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동물들의 이동거리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와 같은 그야말로 아침에 해가 떠서 오후에 질 때까지 동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 구어체의 문장으로 쉽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다.




처음 알게 된 것들도 많다. 몇 가지 꼽자면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에 사는 물총새는 알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벌집 안에 알을 낳는다는 것이나 거미가 거미줄에 달라붙지 않는 이유는 바퀴살처럼 뻗어 있는 끈끈하지 않은 부분을 지나다니기 때문이라는 것, 암컷 돌고래 중에 어미가 새끼를 낳는 것을 도와주는 산파 돌고래가 있다는 것...등 동물의 세계는 정말 알면 알수록 매력적이고 신기하다.




아이들이 동물의 생활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한 ‘작은 실험실’이란 코너도 돋보였다. 벌집의 방이 왜 원이나 오각형 혹은 사각형이 아닌 육각형인 이유, 거품벌레는 알집을 거품 속에 넣어두는데 그 거품이 잘 터지지 않는 이유를 간단한 도구를 이용해 알아볼 수 있도록 했는데 실험과정이 쉬워서 아이가 무척 재밌어했다.




반면에 둥지를 틀거나 알을 낳을 한적한 바닷가를 찾기 못해 캐나다의 노래물떼새와 바다거북이 지금 사라지기 직전이라는 부분은 너무 안타까웠다.




하지만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세밀화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동물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책인데 실사, 사진이 최고지 세밀화가 뭐가 좋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나도 첨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진과 세밀화의 차이는 아주 크다. 사진은 대상의 순간을 포착하기엔 좋지만 시간과 장소, 밝고 어두움에 따라 강조되거나 부각되는 부위가 달라진다. 그에 비해 세밀화는 한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관찰한 것들을 모두 모아 한 장의 그림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래서 사진으로 가려져서 보기 힘든 나비나 토끼의 보송보송한 털이라든지 주름진 피부, 표정들이 더 잘 나타나기 때문에 왠지 따뜻한 느낌이 든다. 또 사진을 볼 때 어른들은 동물과 뒷배경을 구분할 수 있는데 비해 그림이나 사진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아이들은 어렵다고 한다. 즉, 실제 형체를 가진 동물인지 어떤 것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배경인지 분간을 못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동물에 관한 지식을 늘어놓은 책에서 아이들은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 속에서 만난 동물은 아이에게 공부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아이가 지금보다 더 많이 동물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어른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생각해봐야겠다.




우리 어린이들이 동물 친구들과 더 친해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건 상대를 속속들이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리라 믿습니다....관심은 곧 사랑으로 이어지니까요. - 추천의 말 중에서.




참, 한가지 빠뜨린 게 있다. 이 책이 세밀화로 동물들의 털 한 올까지 세심하게 표현한 것만큼 아이들을 위해 세심하게 배려한 것이 돋보인다. 바로 책표지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한 것. 간혹 아이가 두꺼운 표지의 모서리에 손이나 발, 얼굴에 상처가 나곤 했는데...이 책은 안심이다. 처음 받아들면서부터 마음을 푹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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